*


120
저기요.


121
손님은 아무렇지도 않다. 기민한 백현의 심장만 걷잡을 수 없게 뛴다. 평소보다 손이 굼떠진다. 주문이 밀리는데도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 웬만한 신경이 애먼 데로 쏠려있다. 백현 입장에선 그리 애먼 구석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 요즈음 백현을 제일 긴장하게 하는 것. 닳도록 들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러나 싶다. 좋아하는 노래의 전주만 듣고도 제목을 맞추는 사람 같다. 스스로의 유별함이 놀라워 자꾸만 생각이 샌다.


122
그는 서울의 회사원. 이 거리를 한번쯤 지나갔을수도 있지. 그의 흔적이 세계 어딘가에 부스러기처럼 남아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123
그래도.


124
백현은 못 참고 탕비실로 뛰어갔다. 어른처럼 굴어야 한단 걸 알면서도 맘이 급했다. 감정을 매번 숨겨야만 하는 게 어른이라면 지금만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애처럼 말하고 싶었다. 있잖아요.


125
지금 통화 돼요?


126
경수는 여전히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었다. 방금 전 알바생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그것이었다. 봄은 봄인가 보았다. 얼굴 몇 번 마주한 걸로 뭔가가 시작되는 계절. 미세먼지의 방해에도 그런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상기된 뺨. 한 박자씩 느려지는 반응. 경수는 괜히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말고 컵 홀더를 바라봤다. 혹 핸드폰 번호같은 것이라도 적혀있을까봐 살펴 보았는데 다행히 아무 것도 없었다. 다행인가? 반문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알바생에게 일어난 일이지 경수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다. 그렇게 분리해두지 않으면 생각이 길어졌다.


127
역시 사랑에 빠진 얼굴은 귀여운 데가 있다고, 경수는 생각한다.


128
경수에겐 경수의 일이 있다. 핸드폰이 발광한다.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어제의 통화 이후로 부쩍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상대방도 서로의 목소리에 간밤을 설친 모양이다. 다짜고짜 통화가 되냐는 물음에 경수는 잠깐 망설였다. 통화 한다고 해봤자 나눌 대화라곤 오늘 뭐했는지, 지금 뭐하는지, 앞으론 뭐할건지 하는, 거래처 직원과 나누는 대화보다도 건조한 말 밖에 없는데도 괜히 주변 눈치를 봤다. 사랑에 빠진 얼굴이 귀엽듯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몸짓은 조금 다정한데가 있다.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한마디를 뱉더라도 발음이 순했다. 알아서 겁이 났다.


129
미세한 찰나로 심장의 손을 들어주는 경수다. 일하는 중이라면 머리가 이겼겠지만 지금은 쉬는 시간이니까. 봄보단 겨울의 끝자락 같은 날씨에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춥고, 통화는 따뜻할테니까.


130
응, 돼.


131
여보세요?
응.
전화 못 할줄 알았는데.
못 할줄 알았는데 물어본거야?
어.
그렇구나.
응.

132
경수는 왜냐고 묻지 않았지만, 백현은 어쩐지 대답하고 싶었다. 두드리지 않아도 문이 열렸다.

133
목소리 듣고 싶어서
아.

134
백현은 말하고 나서 탕비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탕비실은 한낮에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깜깜했다. 시각을 차단하자 목소리가 더 뚜렸해졌다. 노린 건 아니었다. 사방에서 먼지 냄새가 났다. 퀘퀘하고 텁텁한 기운. 백현은 평소에 탕비실에 가는 걸 꺼려하는 편이었다. 코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했다. 그런데도 탕비실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예민한 것보다 더 예민해지는 것. 먼지를 계속 들이마셔도 개의치 않은 것. 좋아하는 건 기어코 싫어하는 일까지 견디게 만들었다.


135
지금 뭐해?
알바해.
그렇구나. 나는 쉬는시간.
아, 쉬는시간이야?
응.
그렇게 말하니까 고등학생 같다. 쉬는시간.
....
귀여워요.

136
별게 다 귀여워서 어떡해. 백현의 손발이 어둠속에서 파닥거린다. 경수는 아메리카노를 집다가 놓쳤다.

137
경수는 늘 귀여움의 영역에 속했다. 회사에 들어와서야 그런 대접에서 벗어났다. 동창들은 경수가 얼굴을 찡그려도 귀엽다고 했다. 화난 펭귄같다는 말에 화를 내면 진짜로 화난 펭귄같다며 놀려댔다. 늘 <화난 펭귄>과 <진짜로 화난 펭귄>을 오갔는데 어찌되었든 펭귄이어서 귀여움의 족쇄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언젠가 본 남극 다큐멘터리에선 펭귄 무리가 취재진을 신기해하며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왜 유독 경수의 주변엔 과하게 성장해버린 녀석들이 많았는지. 키만 멀대같이 큰 녀석들이 경수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경수를 펭귄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펭귄 행세는 저들끼리 한 셈이다. 신체적 펭귄과 정신적 펭귄이 모여서 이래저래 즐거운 생활이었다. <귀엽다>는 말은 진작에 금지해두었다. 친구들은 대체어를 찾아 다녔다. 너 막, 꼬마김밥같아. 경수 오늘 진짜, 진짜다. 흘긋 째려보면 다들 꼬리를 내렸다. 그러니 늘 귀여움의 대상이었어도 그 말 자체는 오랜만인 경수였다. 이상했다. 귀엽다고 하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138
왜 말이 없어요?
...
귀엽다는 말 싫구나.
아니야, 안 싫어.
그럼 좋아요?
...
좋아?

139
경수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뜨거웠다.

140
너 귀여운 거 좋아해? 경수가 다시 되물었다. 탕비실의 백현은 숨을 참았다.

141
귀여운 걸 어떻게 싫어해요.

142
경수는 일을 핑계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삼단논법같은 걸 생각해냈다. 귀여운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귀엽다고 했다. 고로 나를 싫어할 순 없다.


143
싫어할 수 없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말보다 심했다. 어제까지 같은 이불을 덮고 자다가도 다음날 이면 갈라서는 것이 사람이었다. 경수의 부모도 그랬다. 경수의 가까운 가족들도 비슷했다. 경수는 사람을 쉽게 미워해본적이 많았다. 지구를 차지한 생물치고 사람은 너무도 모자랐다. 쓸모없는 근육처럼 모난 구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피붙이라도 얄짤 없었다. 경수는 아버지의 허세를 미워했고 어머니의 애정결핍을 부담스러워했다. 가족에게도 그럴진대 남에게 관대할 리 없었다. 경수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러니 백현의 단정조에 가까운, ‘어떻게 싫어하느냐는’말은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경수는 누구도 그렇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싫지만 사랑스러워서 만났고 또 만날 사람들 뿐이었다.


144
퇴근 때가 되어서야 사장이 가게에 왔다. 그때까지도 백현은 오후의 통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백현의 외양은 누가봐도 스무살이었지만 일 하는 솜씨며 센스는 스무살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능숙했다. (사장은 언젠가 백현에게 정말 첫 알바가 맞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실수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빠르게 인정했고 괜히 티날 거짓말을 해서 일을 키우는 법도 없었다. 쓸 만한 알바생이었다. 외모까지 훌륭하니 사장의 입장에선 아낄만도 했다. 아까부터 백현의 핀트가 묘하게 나가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사장의 눈가가 좁아졌다. 어라?

145
백현이 먼저 선수쳤다.

146
사장님.
왜.
밀당을 꼭 해야할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짜식아.

147
백현은 진지했다. 무슨 정신으로 일을 한 건지. 경수가 전화를 끊겠다고 했을 때 바로 묻고 싶었다. 형. 지금도 이른 것 같아요?


148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끊긴 전화도 끊긴 전화였지만 그 순간에 생각난 것은 백현을 스쳐지나갔던 사람들이었다. 늘 백현을 좋아하는 사람이 백현이 좋아하는 사람보다 많았다. 못된 심산이었지만 백현은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며 에너지 같은 걸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쏟아 부었다. 넓고 튼튼한 울타리를 치듯 그 사람의 주변을 모두 옭아매려고 했다. 사람이 살기엔 너무 좁은 울타리였다. 쉽게 떠나갔다. 백현은 붙잡으려고 했다. 싸늘한 얼굴이 백현을 밀어냈다. <넌 나 좋아해서 곧 죽을 애 같아. 그래서 버거워>


149
저에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좋게 말하면 방관하고 나쁘게 말하면 방치하는 바람에 받은 벌 같기도 했다. 백현은 그 날 이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덜 좋아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런 장난질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덜 좋아하려고 노력하면 정말로 그렇게 됐다. 마음은 정직했다. 좋아해서 미칠 것 같으면 그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들었다. 상대방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에 어그러진다는 원리가, 백현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150
그건 다 겁쟁이들의 변명이다. (사장은 명언을 말하듯 목소리를 깔았다.)
그렇죠?
그럼. 네 나이때 그런 거 따지면 비겁한 어른된다.
저 어른 맞아요.
어쭈.
어른이면 애보다 용감해야지. 안 그래요?
...(괜히 찔리는 사장이었다.)


151
형. 우리 만나자.


152
백현이 카톡창을 계속해서 들락날락 거린다. 한 문장이면 되는데. 아니지. 한 문장도 아니고 한 단어. 아니아니 한 단어도 아니고 한…


153
그래.


154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모르네.
그러게.
이름 뭐예요?
아, 내 이름.

155
신입사원 면접때보다 더 떨렸다. 새학기의 자기 소개 시간보다 더욱.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갔던 새내기때의 과팅에는 비할 것도 없이. 경수는 천천히 키패드를 눌렀다.

156
도경스야.
이름이 경스예요?

157
아니아니. 도경수, 수.
아, 도경수수?
도경수.


158
넌?

 
159
백현은 맥락 상 충분히 <도경수>인 걸 알았는데도 경수를 놀렸다. 아, 도경수수?를 치는 입이 헤벌쭉했다. 사람이 텍스트만으로 이렇게 귀여울 수 있나? 놀라웠다. 귀엽다, 귀엽다 하고 생각하니 너무도 귀여웠다. 경수라는 이름에 ‘도’가 붙은 경우는 또 처음 보았다. 김경수나 박경수만 만난 세월이었다. 성씨 하나 때문에 이름의 인상이 바뀌었다.


160
백현은 제 이름에 자부심이 있었다. 살면서 비슷한 이름조차 만나지 못했다. 이름으로 종족을 나눈다면 누구도 저와 묶일 수 없었다. 오직 형과 아버지의 이름만이 제 것을 연상시켰다. 아무도 헷갈리지 않는 이름. 너 또한 마찬가지겠지. 처음엔 이름이 예쁘다는 생각을 할테고, 계속해서 곱씹어 볼테고, 나중엔 ‘변’만 봐도 나를 떠올리게 될거야. 변으로 시작하는 단어중 가장 그럴싸한 것이었다고 기억하게 될 테지.

161
변백현.


162
이름 예쁘다.
형 이름도요.
내 이름이 뭘, 평범하지.
제 이름은 음, 평범하진 않네요.
그럼 다들 백현아-하고 불렀겠네.
절 좋아하는 애들이 주로 그렇게 불렀죠.


162
형도 그렇게 부르게 될 거예요.


163
경기 어디 살아?
아, 말을 안했구나.
뭘?
저 경기도 안 살아요.
그럼?
서울살아요.
근데 왜 경기라고 해놨어?


164
근데 왜 스물다섯이라고 해놨어?


165
백현이 주춤했다. 이름도 까고 지역도 깠는데 나이는 이상하게 망설여졌다. 나이를 듣자마자 경수가 나갈 것 같았다. 몇 주간 지켜본 결과가 그랬다. 경수가 몇 번이고 강조한 것은 하나 뿐이었다. 어린 사람이 싫다. 백현은 어떻게든 경수와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었다. 경수의 말을 멋대로 해석했다. 어린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야 뻔했다. 생각이 어리니까. 마음이 덜 자랐으니까. 그런 걸 경수는 피곤해하니까. 그렇지만 나이만 많다고 모두 어른은 아니었다. 백현은 경수가 싫어할 만한 ‘어린 짓’을 저지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나이를 까는 일은 조금 더 미뤄졌다. 한낱 대화로는 그걸 증명하기 힘들었기에.


166
그냥, 뭐. 별 뜻은 없었어요.
그래. 나도 어차피 서울이니까.
어디서 일해요?
...
아 그건 말하기 좀 그렇겠구나.

167
그럼 어디서 만날래?

168
주말에 약속을 잡았다. 경수는 혹시나 하는 아웃팅에 대비해 회사에서 다섯 정거장 정도 떨어진 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백현에게도 무리 없는 거리였다. 백현은 할아버지의 팔순잔치라며 핑계를 대고 알바를 뺐다. 겨우 친해지기 시작한 동기 녀석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169
야, 박찬열.
??왜??
너 저번주에 과팅했댔지.
어? 어.
너 뭐입고 나갔어.
뭐 입긴. 그냥 무스탕에 청바지 입고 나갔는데?
그래서. 여자애들이 좋아했고?
여자애들이 날 어떻게 싫어해.
그럼 남자애들은?
질문이 왜그래.
같이 간 남자애들도 니 옷차림에 환호했냐고.
그게 중요해?
중요하니까 좀 말해봐.
남자애들은 나 질투했겠지.
...내가 괜히 물었지.

170
결국 고심 끝에 백현이 고른 것은 형이 새로 산 블레이저 자켓이었다. (무난하게 남방을 입을까 하다가 너무 어려보이나 싶어 제쳤다.) 자켓을 결정해두고도 난관의 연속이었다. 자켓에 어울리는 티며 바지를 고르느라 적잖이 애를 먹었다. 모자를 몇 번이나 썼다 벗었다. 몰래 아버지의 고급 시계를 차보다가 너무 노티가 날까 싶어 내려두었다. 신발도 겨우 골랐다. 운동화를 골랐다가 로퍼를 골랐다가 하며 집안을 어지럽혔다. 같은 시간 경수도 상황은 비슷했다. 경수는 옷을 고르는 일을 제일 어려워했다. 평소처럼 검은색으로 위아래를 통일해 입으려다가 너무 성의가 없어보일까 싶은 걱정이 들었다. 세련돼 보였던 검정색이 오늘따라 유난히 칙칙해 보였다. 그렇다고 없는 옷장을 털어 밝은 것을 골라 입자니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데이트가 처음도 아닌데. 그동안 했던 데이트엔 대체 무슨 옷을 입고 나갔던건지. 옷이 많은 백현도 옷이 적은 경수도 고민으로 매일 밤을 끙끙 앓았다. 결정이 끝난 듯 싶다가도 돌아보면 영 별로인 것 같아 갈아치우기도 했다. 모든 일상이 만나기로 한 날짜를 위해 굴러가고 있었다. 맛있는 걸 먹으면 그날 뭘 먹으면 좋을지 생각했고 재밌는 걸 하면 처음 만난 둘이서 하기에도 괜찮은지 따져보았다.

171
어디?
다 와가.
나 창가쪽 앉아 있어요.

172
경수는 조금 늦었고 백현은 기다리고 있었다. 멋대로 얼굴이며 눈 같은 걸 상상해보다가, 카페에서 봤던 회사원을 떠올리기도 하다가, 손에 땀이 차서 바지에 문질렀다.

173
문이 열릴 때 마다 혹시, 하는 마음. 살면서 이렇게 카페 입구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있을까.

174
경수가 전철에서 내렸다. 옷차림을 점검했다. 조금만 더 걸으면 그 사람이 있었다. 어플로 만나는게 처음이 아닌데도 유난히 떨렸다. 날씨는 봄이라기엔 아직 쌀쌀했다. 길거리엔 패딩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얇은 카디건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그야말로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였다. 고민 끝에 경수는 흰색 니트에 네이비색 자켓을 걸쳤다. 바지만큼은 검은색을 고수했다. 역에 거울이 있을 때마다 멈춰 섰다. 평소라면 다 지나쳤을 것이었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걸음을 멈췄다. 지금 나 괜찮겠지. 조금 후에도 괜찮겠지?

175
문이 열릴 때 마다 혹시, 하는 마음.

176
문이 열리고서, 설마 하는 마음.

177
너 뭐입었어?
그냥 자켓인데. 형은요.
나는 파란색 자켓에 흰 니트 입었어.

178
너는?

179
와.
 

180
경수가 핸드폰에 코를 박고 제 인상착의를 낱낱이 고하던 때, 백현은 뚫어져라 경수를 보고 있었다. 설마하는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파란색 자켓에 흰 니트란다. 눈 앞의 경수가 그랬다. 입이 달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글자 한 글자, 나를 알아봐달라고 적고 있는 눈 앞의 머리통.

181
설마는 부정적인 추측을 할 때 쓰는 말이야.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할 때 쓰는 거라고.

182
백현은 학창 시절 도서부 회장까지 한꺼번에 역임하던 반장의 말을 기억해낸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건, 일어날리 없었단 말야. 바란적도 없었어. 바라면 그게 미친놈이지.

183
바란 적도 없는 행운이 들이닥쳤다. 저렇게 생겼으면 했더니 이미 저렇게 생겨 있었다. 저 얼굴을 보며 셈해본 것들이 많았다. 빌려다 쓴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이건 책으로만 보던 세계를 영화로 만나는 일과는 달랐다. 벅차다는 말 보다 센 거 없나? 두근거린다는 말 보다 강력한 건 없나?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영문을 모르는 경수를 두고 백현은 몇 번이고 천국에 다녀왔다. 꼴사납게 입을 틀어막을 것만 같은 것을 참았다.

도경수가 이 얼굴로 나타나면 반칙아닌가.

184
난데.
뭐가요?
내 이름,

185
변백현.

186
경수는 눈 앞의 백현을 바라봤다. 늘 알바생 차림으로만 봤던지라 깔끔하게 꾸민 백현이 낯설었다. 사랑에 빠져 귀여워 보인다고만 생각했던 얼굴.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얼굴 속엔 경수가 있었다. 백현의 올곧았던 방향을 생각하자 귀가 달아올랐다.

187
와, 나 안 믿겨.

188
대뜸 백현이 거리를 좁힌다. 아담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공기가 더웠다.  

189
나 인거 알았어?
알았겠어요.
거기서 일한지 꽤 됐잖아.
꽤 됐죠. 형이 뭐 좋아하는지도 아는데.
....
걱정돼서 그래요?

뭘?
너무 가까운 곳에 있잖아, 나.
그런 거 아냐. 너 그럴 사람 아닌 것 같아.
그럴 사람이 아니면 뭔데요?
대화해보면 알아.
형 되게 사람 쉽게 믿는구나.
아니야, 나 잘 안 믿어.

190
그럼 나라서 쉽게 믿는 거예요?

191
경수는 후에 누군가 그 날에 대해 물으면 한 번 숨을 참는다. 그리곤 한 글자 한 글자를 뱉을 때 벌어지던 입술에 대해서 오랫동안 설명한다. 변이고 백이고 현인데 다 모여서 변백현인, 근사한 이름을 가진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도 말한다. 유난히 화창했던것만 같은 날씨에 대해서도, 군중 속의 단 둘이 된 경험에 대해서도 정성들여 말한다. 경수는 묻지 않는 것에 대해선 잘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경수가 백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일은 귀한 것이다. 툭 치면 무너지는 성처럼, 와르르.

192
늘 자랑하고 싶은, 마법같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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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좋자고 쓰는 걸 남들도 함께 좋아해 주는 일은 정말로 설레는 일이에요.

가끔 그런 외침이 저에게 닿을때면 엄청나게 두근거리기도 하구요. 

그 기분에 지금껏 연성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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