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는 남몰래 연애하는 아이돌들의 성지로, 낮과 저녁에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잘 알려진 압구정 근처의 모 영화관. 역사적인 첫 정식 데이트의 스타트를 끊은 것은 이곳에서의 영화 관람이었다. 오 분 정도 늦게 도착한 지민은 영화관 앞에 서 있는 태형을 향해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지각에도 개의치 않는 당당한 낯빛이 인상적이었다. 반면 태형은 긴장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손끝까지 힘이 빳빳하게 들어간 그의 팔 움직임은 군인들의 그것과 비스무리했다.

솔직히 지민은 오늘 하루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온 척, 이 시대의 쿨남인 척하고 싶었다. 기껏 새침하게 굴고 나서 멋 잔뜩 부리고 나오면 상대가 너무 만만하게 볼 것 같단 말이지. 그래도 오랜만의 강남 나들이에 힘을 안 줄 수도 없는 법이었다. 한참 이 옷 저 옷을 대 보며 고민하던 지민은 결국 깔끔한 하늘색 셔츠에 청바지를 선택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적당히 러블리하고 상큼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정하고 평범한 차림새였다.


반면 태형은 무척 긴장하고 나온 상태였다. 수능 당일 아침과 오늘 아침의 긴장도를 그래프로 나타내어 비교한다면 후자가 압승이었다. 아메카지부터 프레피룩까지, 밤을 새우며 스타일을 고심한 태형은 결국 클래식을 선택했다. 나름대로 모던한 감성이라고 빼입고 나온 차림새였으나, 당장 회사 면접을 보러 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각을 맞춰 입고 나온 탓에 지민은 기분이 별로였다. 무슨 데이트에 정장을 쫙 걸치고 오냐. 다림질을 열심히 한 듯 각이 잡힌 정장 옷깃만큼 얼굴 근육도 굳어있었다. 잘생긴 얼굴 아니었으면 벌써 저기 골목 어디서 몰래 보고 집에 돌아갔지. 지민은 태형의 입가에 걸린 애처로운 각도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둘은 영화 티켓 발권을 마치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지민이 대충 아무 곳이나 찍어 결정된 행선지였다. 아, 좀 대충 하지! 십 분 전, 지민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면전에 휴대폰 액정이 가까이 다가왔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태형이 구글 지도 어플에 은하수처럼 잔뜩 찍어 놓은 주변 카페를 하나하나 누르며 대표 메뉴며 인테리어 컨셉 등을 조근조근 설명해 주었다. 그냥 아메리카노 마시고 싶다는 말 한 마디일 뿐이었는데…. 아무튼 마음에 쏙 드는 카페에 들어선 지민은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기꺼이 태형과 마주 보고 앉아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뭐, 여기까진 무난하고 평범했다. 문제는 김태형이었다.


태형은 자꾸만 떨리는 손을 감추느라 양손을 맞잡고 앉아 있었다. 남몰래 짝사랑하던 지미니짱이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꿈만 같고, 또 너무 떨렸다. 걷는 스텝 하나,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리는 제스쳐 하나 전부 완벽하게 뚝딱거렸다. 아, 난 짝사랑 재질은 아닌가 봐.... 주문 이후 몇 분의 침묵이 지나고, 시킨 음료가 나온 이후에는 재빠르게 트레이를 가지고 와서 컵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눈을 들면 청량한 비주얼이 안면을 강타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숙인 얼굴 안에 모여 있을 이목구비의 조합이 궁금했다. 아, 대체 뭐 하자는 거지. 정말 이 남자, 말은 한마디도 안 하고 주구장창 커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단한 커피 감별사 납신 줄 착각할 만큼 오늘 이 카페 커피를 죄다 마실 기세였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뭐 하세요? 김태형 씨."

"아, 저 커피 마셔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호호 불며 마신다. 미친놈이 분명하다. 그리고 누가 몰라서 묻냐? 지민은 팔짱을 꼈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티를 안 내려 노력 중이었다.


"아니, 우리 대화 안 해요? 저한테 할 말 없어요?"

"네?"

"할 말이 없으면 오늘 볼 영화 얘기라든가, 오늘 일정 얘기라든가. 그런 거 할 수 있잖아요."

"아, 네. 음. 어… 저, 오늘 보는 영화는 지민 씨가 인스타그램에 보고 싶다고 올리셨던… 흡."


아, 이거 비밀이었는데. 순간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지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턱을 고쳐 괴었다.


"아이디, 'jiminizzangforever' 맞으시죠?"

"헐. 어떻게…? 저 티 안 났을 건데…."

"제 게시물에 전체 다 좋아요 누르셨잖아요. 유튜브 댓글은 항상 1등이시고."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졌다. 온몸의 피가 평소의 두 배는 더 빨리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내 심장. 펌프질은 조금 덜 요란해도 괜찮은데. 아무튼, 들킨 것 자체도 문제지만, 쪽팔린 것도 큰 문제였다. 유튜브 영상이 올라올 때마다 0순위를 선점하고 '선생님 덕분에 제 거북목이 펴졌습니다', '선생님의 귀여움에 벽을 치다 옆집 아저씨와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등의 주접 댓글을 평균 다섯 줄씩 썼기 때문이었다. 안방 1열 팬으로 온갖 주접을 다 떨던 나의 은밀한 모습이 당사자 입에서 흘러나올 때의 그 심정이란…. 태형은 수치스러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한 줄만 덜 쓸걸. 멋진 멘트만 남길걸. 예를 들면 '오늘은 당신을 닮은 철쭉이 피었네요' 같은 거….


"아무튼, 계속 얘기해요. 커피만 마시는 것보다 나으니까."


지구 내핵까지 파고들 것처럼 죽상을 하고 앉은 태형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지민은 이제야 비로소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크리에이터의 입장으로서 매번 댓글을 발견할 때마다 귀여운 팬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이렇게까지(약간 좀 과격하고 과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네? 누굴까? 하며 흐흐 웃던 순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 팬이 이렇게 훤칠하게 잘생긴, 맞춤 취향 선물 세트 같은 이십 대 성인 남성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넵. 그리고 영화 내용은요. 댄서를 꿈꾸던 학생이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꿈을 이루는 내용으로…."

"아니. 잠깐만. 영화 내용은 됐고, 다른 말 좀 해요."

"아. 저 그러니까."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뭘까, 정말. 그날 새벽 호텔에서 만났던, 섹텐 흘러넘치던 그 남자는 대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냔 말이다. 가까이서 보고 말이나 하자. 지민이 의자를 당겨 테이블 가까이 붙었다. 사이가 훅 좁혀지자 당황한 태형이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다. 얼떨결에 맡게 된 지민의 오렌지 블로썸 향이 은은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지난번과는 다른 향수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지민 역시도 오늘을 위해 신경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했다. 태형의 우심방 좌심방이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며 브레이크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김태형 씨, 연애 많이 해 봤어요?"

"네?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바람둥이처럼 보여요? 아닌데….


"근데 그날은 왜 그랬대?"

"뭐가요?"

"키스요."

"헐."

"처음 해 본 실력은 아니던데?"


나오는 것을 그대로 뱉어 두었더니 조금 낯간지러웠다. 머쓱해진 지민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부리다, 옆에서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고 있는 태형을 주시했다. 어쩐지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 그러고 보니 이 자식… 그날 그 일 분명히 다 기억하고 있었잖아. 한 가지가 확실해지자 또 다른 궁금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김태형의 어리벙벙하고 순진한 모습은 과연 컨셉인 걸까. 여간 갑갑하지 않은 그 남자의 속을 알 리 없는 지민은 식은땀을 바가지로 흘리는 시퍼레진 얼굴을 자비 한 점 없는 눈길로 노려볼 뿐이었다.


영화 시작 시각을 삼 분 남기고 착석했다. 온갖 추궁이 이어질 것 같던 둘의 대화 또한 자리를 옮기며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광고가 몇 개 지나가고, 서정적인 BGM과 함께 제작사 및 배급사의 이름이 차례로 스크린 위에 떠올랐다. 둘 다 곧게 앉아 앞을 보고 있었으나 동상이몽이라 했던가.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의 태형과는 달리, 지민은 스크린에 집중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지금이 속마음을 떠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가 과연 전문 사기꾼인지, 순정파 멜로남인지.

영화는 느리게 고조되고 있었다. 콩쿠르에 나가지 못하게 된 주인공이 부모님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집 근처 담벼락에 기대어 씨근덕거리는 장면이었다. 온 힘을 다한 주인공의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다. 관객의 집중도 또한 그에 따라 최고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곁눈질로 옆을 보니, 태형의 시선은 스크린을 향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평론가보다 더 지독하게 이 영화를 평가할 것 같았다. 좋아, 기회다.

지민이 가만히 손을 뻗었다. 당황하는 모습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보다 한술 더 뜨면 선수라 치고 즐기면 되고. 어느덧 가까워진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치려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무언가가 다가왔다.


"으음?"


여전히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태형이 반대편 손으로 지민에게 팝콘을 내밀었다. 카라멜과 어니언 향기가 달콤하게 솔솔 풍겼다. 이게... 뭐지? 팝콘 달라는 줄 알았나? 얼른 손을 내밀어 받지 않고 미적거리자, 이번에는 팔걸이에 걸쳐 두었던 콜라를 꺼내 내밀었다. 자판기야, 뭐야. 지민은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김태형, 이 또라이 같은 새끼.


'나를 상대로 연기를 하시겠다?'


이 자식 보게. 지금 밀당을 시전하겠다, 이거지. 곧은 시선을 견디기 버거운 듯, 태형이 고개를 돌려 지민을 응시했다. 일부러 눈을 흔들림 없이 맞췄다. 태형은 속도 없이 씩 웃어 주었다. 철벽 아닌 철벽에, 그리고 세상 혼자 사는 듯 잘생긴 외모에 잠시 아찔해졌지만, 불굴의 사나이 박지민이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민은 다소 무표정한 낯으로 태형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태형이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걸려라, 걸려라. 좀….


"지민 씨…."


낮은 목소리에 전율이 일었다. 마침 대사가 몇 개 훅훅 지나가고 침묵이 깔린 타이밍이었다. 지민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태형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지민은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그래, 그래. 백 퍼다. 이 자식 연기한 거야. 연기다! 좋아하는 사람이 타이밍 각 재고 있다고 힌트까지 주고 있는데, 이거 그냥 두면 등신 아니냐고.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감에 취하려는 찰나였다. 태형이 지민의 귓가에 대고 감미롭게 속삭였다.


"화장실 가고 싶으세요?"
























*







영화의 내용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심각하게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 스크린에서는 인간들이 울고 웃고 환호하고 슬퍼하더니만 THE END가 떴다. 주인공이 무언가 해낸 것 같기는 한데…. 우는 사람이 몇 보이는 것을 보니 중간에 엄청난 고난이 있었거나 새드 엔딩이었던 것 같았다. 관객들이 재잘거리며 반 이상 자리를 비울 때까지 지민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엔딩 크레딧의 수많은 이름이 화면을 스쳐가는 동안, 오천만 가지의 생각이 흘렀다. 그리고 배가 고팠다. 집에도 좀 가고 싶은 거 같고…. 화장실? 씨발.


둘은 1층으로 내려오는 내내 침묵했다. 회전문을 제끼고 나와 보니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어둑했다. 어둠 사이로 굵은 빗방울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 몇몇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다니던 게 그제야 생각이 났다. 저녁까지는 먹고 헤어지려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영 뭐가 안 따르는 날인 것 같았다. 비에 젖기도 싫었고, 기분도 영 그저 그랬다. 저녁은 다음에 먹죠. 지민은 태형 쪽으로 돌아서며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태형은 허탈함에 입을 벌렸다가 다시 합, 다물었다. 하마터면 안 돼…! 를 외칠 뻔했다. 머릿속에선 벌써 열 번도 넘게 달달 외웠던 완벽한 데이트 코스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네이버 블로그에 '청담동 존맛탱'을 몇 번이나 서치했었던가. 그러나 코스가 어그러졌을 때 사용할 대비책은 미처 강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태형은 급히 플랜 B를 위해 머리를 굴렸다. 마침 빨간 불을 켠 택시가 신호를 받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일단, 일단 지민 씨네 집으로 가시죠. 데려다 드릴게요."


지민의 오피스텔은 대로변에서 조금 거리가 있었다. 택시는 차를 돌리기가 어렵다며, 1층 유리문이 열려 있는 빌딩 앞에 둘을 내려주었다. 비는 아직도 한창 내리고 있었다. 적어도 아침까지는 그치지 않을 기세였다. 한층 더 쌀쌀해진 공기에 지민이 입을 불퉁하니 내밀고 팔뚝을 쓸어내렸다. 아우, 추워. 뭐 이렇게 추워…. 옆에서 가만히 무엇인가 검색하던 태형이 입으로 중얼중얼 무언가 외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호주머니에 휴대폰을 쑤셔 넣었다. 이어 정장 웃옷을 벗어 지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지민 씨, 잠시만 기다려요."


말릴 새도 없이 빗속으로 뛰어드는 통에 어딜 가냐고 묻지도 못했다. 태형은 하얀 셔츠의 어깨 부분이 비에 눅진하게 젖어 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길 건너 편의점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가 우산을 구입했다. 다시 길을 건너 돌아왔을 때는 바지 밑단과 머리카락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얘는 뭐 이렇게 1분 1초가 다 열정적이냐. 지민은 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급하게 아무거나 사서 온 터라, 우산은 성인 남성 두 명을 다 커버해 주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중학생 한 명이 쏙 들어갈 사이즈의 아담한 우산 밑에서 둘은 나란히 걸었다. 우산은 지민 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덕분에 한 명은 뽀송뽀송했고, 한 명은 어깻죽지를 빗물로 잔뜩 적셨다.

오래 걷지 않아 지민의 오피스텔이 보였다. 들어가는 입구 앞에 도착했을 때, 지민은 옅은 미소를 걸고 몸을 빙글 돌려 앞의 남자를 마주했다. 그래, 뭐 첫 데이트인 것 치고 무난… 은 아니고 거지 같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조심히 가세요. 똑부러지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 순간, 태형이 다급하게 지민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왜요. 안 가세요? 하실 말씀이라도?"

"저, 지민 씨. 호, 혹시 집에 간장 있으세요?"

"네? 갑자기 무슨 간장…?"

"없으면 사서 오려고요."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그러나 의심 가득한 눈으로 보는 행위가 스스로 용납되지 않을 정도로 진심이 그득그득한 눈이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웬 간장…. 집에 간장이 없다고 하면 부산 양조장 명가까지 가서 사서 올 것만 같았다. 이런 신뢰감 넘치는 사람.


"그러니까 갑자기 간장은 왜요."

"그럼 저 지민 씨 집에 들어갈 명분이 생길 것 같아서요."


지민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개졌다. 마음속 사이렌이 요란하게 경고를 보냈다. 이 새끼 선수 맞네, 선수 맞아. 너무 멋져, 남자가 봐도 잘생겼어. 이게 바로 퍼펙트, 이게 바로 인생의 진리지. 너는 중대 연영과 시험 오늘 루틴으로 봤으면 수석으로 붙었다. 그래서 내 대답은.


"일단 들어와요."

"헐, 진짜요?"

"간장이, 아니… 비가,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하는 수 없이 등을 돌리고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지민이 먼저 들어서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작은 등 뒤, 태형은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걸고 있었다. 어제 인터넷 뒤지다 발견한 연애 백서에서 나온 꿀팁이었다.


[썸녀 혹은 썸남의 집에 들어가고 싶을 때! 상대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면 간장 스킬을 써 보세요. 간장 대신 버터, 생수, 마요네즈 등 다양한 편의점 메뉴와 바꾸어 쓸 수 있어 유용하답니다. 방법은….]


예습을 철저하게 하길 잘했다. 이 정도면 연애 초보인 거 절대로 들킬 일 없겠지? 태형의 마음이 뿌듯하게 부풀었다.

인기척이 부산스러웠으나 기저에 깔린 어색함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지민은 괜히 냉장고를 열어 뒤적거리며 집에 TV를 들이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책망했다. 냉장고를 닫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보니, 소파 구석을 차지하고 앉은 채 오피스텔의 인테리어며 소품 등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는 태형의 옷은 아직도 푹 젖은 그대로였다. 지민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빨간 맥주캔을 두 개 집었다. 그 상태로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지민은 냉장고의 경고음에 놀라 화들짝 팔을 빼냈다. 잠시 냉기 속에 머물러 있던 손등이 벌써 차가워져 있었다. 아, 저 사람 술 못 마시는데… 한 캔 정도는. 그건 괜찮겠지.


"저기요, 이거."


얼굴 옆으로 불쑥 무언가가 디밀어졌다. 보니 흰 수건 한 장과 맥주 한 캔이 하얀 손에 들려 있었다. 아, 아야. 내 팔 떨어지겠다.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던 태형은 지민의 핀잔 섞인 말을 듣고서야 허둥지둥 그것을 받아들었다. 젖은 머리며 옷이 형편없어 보일 거라는 건 그제야 알아차렸다. 태형은 멋쩍게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먼저 식탁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지민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아, 오늘도 빛이 났다.

안주 한 접시 없는 휑한 식탁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잔뜩 퍼지는 기분이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실내는 쓸데없이 열심히 가져다 꾸몄던 조명 때문에 나른했다. 분위기에, 술에 취해 둘은 침묵을 유지했다. 태형은 긴장한 탓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꾸만 목이 말랐다. 겨우 십오 분도 되지 않아 동이 난 캔을 식탁에 내려놓자 통 하고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그것을 캐치한 지민이 잽싸게 치고 들어왔다. 다 마셨어요?


"이제 진짜 가야 하지 않아요?"

"제가 왜요?"

"…? 네?"


슬슬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근본 무시한 용기 게이지도 함께. 지민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가만히 태형을 응시했다.


"왜 자꾸 저 보내세요? 수상하게."

"뭐, 뭘. 뭐가 수상해요."

"저 보내고 나면 누구 와요?

"진짜 뭐라는 거야."


지민은 괜히 민망해졌다. 낮에나 이렇게 굴었으면 좀 좋냐구…. 멍석을 깐 건 따지고 보면 지민이었으나, 막상 그 위로 올라와 뭐 좀 하라고 하나 여간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 슬쩍 정리를 시도했다. 옆면이 살짝 찌그러진 맥주캔을 치우려고 손을 뻗은 순간.


"뭐… 예요?"


태형이 잠시 느지막이 몸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별안간 몸을 일으켜 식탁을 빙 돌아 다가왔다. 뭐야, 진짜 취한 거야? 식탁 의자에 애처롭게 올라앉은 지민을 양 팔 사이로 가둔 태형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늘 뿌리고 나오는 향수 냄새에 약간의 알콜향이 가미되어 어지럽게 느껴졌다. 지민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싶었다. 완전히 품에 갇힌 꼴이었다.


"…김태형 씨?"

"진짜 누구 안 오죠?"

"취했어요? 설마 한 캔 마시고?"

"빨리 내 말에 대답."


아니, 이 새끼는 왜 취하면 내 스타일이 되지? 지민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낮져밤이가 절대 좋은 게 아니라니까. 태형은 얼굴을 찌푸린 지민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홧홧했다.


"안 와요. 안 온다고. 그니까 빨리 가요."

"저 그럼 자고 갈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기어코 짜증 섞인 소리를 지른 순간이었다. 지민의 얼굴을 빠르게 감싼 태형이 불과 오 센치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얼빠 근성, 빨리 뿌리쳐야 되는데…. 지민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아직 승패도 가늠하지 못한 그 짧은 순간을 태형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집요하게 입술을 찾아 물고 키스했다. 질척하게 감고 감기는 소리가 공기 속에 퍼졌다. 곧이어 바닥에 떨어진 맥주캔이 아무렇게나 뒹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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