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홍차 시럽


그가 어떻게 내게 유의미한 객체가 되었는가를 설명하려면 그 망할 홍차 시럽 이야기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 일단 입을 떼긴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나는 한참동안 말을 아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H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함장님. 이렇게라면 이야기하겠다고 하신 건 함장님이에요. 아시잖아요. 계속 이렇게 끌면….”

“짐이야.”

“…….”

“이제 함장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익숙해져야지. 짐이라고 불러 줘.”

어깨를 으쓱하며 짐짓 태연하게 말하자 H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그의 이마와 눈에 익숙한 그늘이 스쳤다. 이 사무실에 발을 디딘 이래 자주 목격한 것이다. 저 그늘이 뭘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H는 한숨을 쉬었다.

“…짐. 알죠.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 나빠져요.”

“…….”

나는 대답 대신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의자에 앉았을 때는 창가에만 머무르던 빛이 이제 사무실 안을 타고 들어와 발등에 닿았다. 열을 느끼고 내려다보자 눈에 들어오는 건 밝은 빛 속에서 불타는 것처럼 보이는 흰 슬리퍼다. 발광하는 것처럼 새하얗게 보이고 실제로도 열을 느끼고 있으니 차가울 리가 없는데. 빛 속에서 타고 있는 흰 슬리퍼가 너무나 차가워 보여 저도 모르게 발을 빼 그늘로 옮겼다. 회색 그림자 속으로 자리를 옮긴 발에서는 더 이상 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 가지 사물에 긍정적인 인상과 부정적인 인상이 함께 남아서 대상을 좋아하면서도 격렬히 싫어하게 되는 증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가 있나?”

H는 다시 한숨을 쉰다.

“아시잖아요. 전 정신과 의사가 아니에요. 그런 질문을 하고 싶으시면….”

“제대로 된 의사한테 가라 이거지. 미안. 정말 궁금해서가 아니라….”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물린다. 어깨와 허리를 바싹 밀착해 몸을 숙이며 습관처럼 왼손 새끼손가락을 매만졌다. 더 정확히는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매만진다. 반지는 흰색에 가까운 은색이다. 오래 끼고 다녀 자잘한 흠집 탓에 색이 바랬다. 크기가 맞지 않아 며칠이고 둘째 마디에만 끼우고 다니다가 잃어버릴까 무서워 엊그제 금속 세공사를 찾아 크기를 늘렸다. 이제 손가락에는 들어가지만 주문할 때의 실수로 크기가 더 늘어난 탓에 손가락을 헛돈다. 반지가 빠질까봐 내내 주먹을 쥐고 다니는 걸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손이 비면 반지를 만지작대는 습관이 들었다. 멋대로 크기를 늘린 걸로도 모자라 틈만 나면 만지작대는 통에 흠집이 늘었다. 원 주인이 알면 화를 내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기 없으니까. 말을 잇기 전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폐 끝까지 숨을 채우지 않으면 차마 나오지 않을 말이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 기껏 몸을 웅크려 구겼는데 아까운 일이지만.

“…지금부터 말하려는 게 그런 거라. 아무한테도 해본 적 없는 얘기거든. 아주… 각별한 추억이지만 동시에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기도 해서.”

아무리 몸을 작게 접어도 이 자리에서 당장 사라져버릴 수는 없다는 걸 이제 안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신다. 폐 끝까지. 몸통을 온통 부풀릴 기세로.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게 채워 들이마셔도 숨에 실어 뱉을 수 있는 건 고작 한 문장뿐이다.


* * *


그 이야기를 하려면 맨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시에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돌아보면 전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나는 그날의 오후에 깨달았다. 의도 없는 다정함은 독보다 나쁘다는 사실을.

아이오와의 소도시 시가지나 샌프란시스코의 근사한 대리석 교정이나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인간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에 알았다. 파이크의 말을 따라 스타플릿에 입학하면서 내가 바랐던 건 하나였다.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것. 누군가 내 이야기를 할 때 나를 불쌍해하거나 아버지의 이름과 묶어서 이야기하는 일이 없기를 원했다. 스타플릿은 거대한 집단이니 그 무수한 천재들 사이에 내 존재 따윈 가볍게 묻힐 거라고 생각했다. 내 바람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테지. 아이오와에서 조지 커크는 그냥 죽은 사람이었지만 스타플릿에서 조지 커크는 영웅이었다. 죽은 영웅은 금세 잊히지만 그에게 목숨을 빚진 사람의 가족과 친지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장소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날짜를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고, 바로 그날 태어난 영웅의 유복자가 걸어 다니고 있는 장소라면 더더욱.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래 두 번째 맞는 생일에 나는 방에 불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차광과 차음을 최대한으로 올려둔 상태였다.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그들은 가까운 누군가를 잃는 경험을 한 사람이 평생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다. 가족을 잃은 사람도 코미디 프로를 보며 박장대소하기도 하고 애인 혹은 친구를 잃은 이도 이따금 자신이 누군가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삶의 기쁨에 잠긴다. 상실이 인생 자체가 되기에는 인간이라는 우주가 너무 크다. 무엇을 잃더라도 삶은 지속된다. 그것도 삶이다. 결여된, 부족한, 비어있는,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그냥 다른 형태의 삶. 그리고 이 빌어먹을 천재들이 잔뜩 모였다던 아카데미에는 그 사실을 모르는 놈이 너무 많았다. 생일 아침부터 온몸에 부딪쳐오는 그 어색한 공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붙들어 세우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는 연방의 영웅이셨다는 인사를 건네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어 화를 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 얼굴을 나는 그들과 똑같은 경로로 봤다. 교과서와 홀로그램 사진에서.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를 내가 대체 무슨 수로 알 수 있을까. 그는 나에게도 완전한 타인일 뿐이었다. 미움도 사랑도 관계 위에 쌓이는 감정이다. 나는 그 남자와 어떤 접점도 가진 적 없었다. 그는 내가 궤도 위에 올라탄 순간 그 바깥으로 사라졌다. 나는 살아 있던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가 나를 영원히 모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짐?”

문이 열리며 복도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용수철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이 어두워 표정이 보이지 않는 룸메이트가 서 있었다.

“뭐야… 너 여기 있었냐? 불은 왜 다 꺼놓고 있어? 컴퓨터―.”

“불 켜지 마!”

아주 잠깐 동안 나는 그가 이유를 묻거나 어설프게 위로하려 시도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열려 있던 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나자 복도에서 들어오던 빛이 끊겼다. 방은 처음처럼 어두워졌다. 검은 형체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러고 있을 거면 환기라도 좀 시키지 그랬냐. 공기가 영 텁텁한데.”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패드를 켜 발밑을 밝히며 걸어 들어왔다. 패드에서 나오는 빛이 닿는 범위는 넓지 않았지만 그의 독특한 입술을 비추기엔 충분했다. 맥코이는 책상에 패드와 노트, 책 몇 권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말했다.

“계속 이러고 있었으면 보나마나 하루 종일 굶었을 거고… 저녁 먹으러 안 갈거냐? 배 안 고파?”

“신경 꺼, 본즈.”

“그럼 샌드위치라도 받아다 줄까?”

나는 그에게 화를 냈다.

“너 무슨 병 있냐? 신경 끄라고! 내버려 두라잖아! 지금 밖에서 가져온 거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으니까 내버려 두라고!”

악에 받혀 내지른 고함에도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소리를 지른 내가 외려 찔끔해 눈치를 보는 동안 그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으로 턱을 긁적거리다가 태평하게 한 마디 했다.

“밖에서 받아온 음식은 싫다 이거지… 너 혹시 유당불내증 있냐?”

나의 본즈는 다정한 남자였다. 항상 그랬다. 그 다정함에 의도가 없다는 부분이 아마 가장 사람을 미치게 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의 다정함에 상처 입은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얼마나 안도했던지.


* * *


…이게 뭐냐고? 시럽이야. 홍차를 넣어서…… 아, 왜 갖고 있냐니? 내가 만들었으니까 가지고 있지. 개인 물품 반입 금지 규정? 웃기려고 한 소리냐? 장담하는데 규정 가지고 헛소리 할 거면 네 침대 밑에 있는 박스부터 먼저 끄집어내게 될 거다. …어떻게 알았냐고? 설마 그간 감추려고 노력했던 거냐? 몰라봐서 미안하게 됐네. 너도 뭐 감추지는 못하겠다……아, 주절주절 정말 말 많네. 그냥 좀 닥치고 주둥이에 부어 넣으면 안 되겠냐? 이거? 우리 어머니 특제 레시피. 영광으로 알아. 네가 처음으로 맛본 사내자식이니까…….

…남이야 취미로 뭘 만들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이건 그냥 내 취미야. 재조합기? 되겠냐, 이런 게. 말했지. 우리 어머니 특제 레시피라고. ……그래. 꼭 술 같지. 브랜디를 좀 넣었거든… 기분은 내고 싶은데 술은 마시면 안 될 때 딱 맞지. 언제 만들었긴. 입학하기 전이지. 아, 안 상했다고! 절반이 설탕이라 괜찮다니까. 탈나면 고쳐줄 테니까 안심하고 마셔.

뭐? 먼저 마셔보라고? 이게 아주 오냐오냐해주니까 사람을 실험쥐 취급하는구만. 미안하지만 난 우유 못 마셔. ……글쎄다. 시도해보진 않았지만 원액으로 마시기는 좀 무리 아닐까.

우유도 못 마시면서 왜 가져왔냐고?


글쎄. 인생이라는 게 쓸 수 있는 물건만 준비해 두는 거던가? 내 경험으론 아니던데.


* * *


H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조합기 음식이 아니라 직접 요리한 음식을 맛볼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죠. 저도 기억해요. 그 특이한 향… 렌… 아니, 맥코이 실장님이 만든 거였군요. 어쩐지… 조합기 음료 메뉴판을 수십 번은 넘겨봐도 없더라고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질 않아서 저는 두 가지 이상을 조합해서 섞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눈가를 문질렀다. H의 목소리에 복합적인 감정이 묻어난다. 슬픔, 씁쓸함, 희미한 기쁨과 체념. 그리고 짙은 피로.

“정말 의외네요. 요리하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야 간혹 있지만… 저는 단 한 번도 맥코이 실장님이 요리에 취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본인 입으로 들은 것도 아닌데 제가 왜 그랬을까요.”

“본즈는 요리를 할 줄 몰랐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 시럽이 본즈가 만들 줄 알던 유일한 음식이었어. 그 분야에는 영 재능이 없었지.”

목소리가 최대한 가볍게 들리길 기대하며 입을 열었지만 결과는 정 반대다. 내 목소리는 무겁다 못해 어둡고 침울해져 H의 흰 사무실 바닥에 스며들 것만 같다. 그게 가라앉으면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떠오를 것이다. H가 펜을 움직였다. 패드의 표면을 갉작이는 소리가 귓가에 사각거린다. 나는 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H가 입을 열었다.

“요리는 잘 모르지만 시럽이라는 거 꽤 공을 들여야 만들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설탕물은 잘못 끓이면 굳거나 탈 수도 있잖아요. 꽤 손이 가는 일이었을 텐데… 그건 만들 수 있는데 요리는 못 한다니 특이하네요……하긴 원래 독특한 분이시긴 했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다. H의 말대로다. 그 망할 시럽을 만들려면 꽤 공을 들여야 했다. 시럽을 만드는 걸 옆에서 본 적이 있어 안다. 나는 그가 매번 병이 빌 때마다 조리실이나 탕비실을 빌려 냄비를 잡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H에게 말해줄 마음은 없다. 여태 몰랐듯 그는 앞으로도 모르고 살아갈 것이다. 알량한 질투나 치졸한 독점욕 때문이 아니다. 나는 H가 내가 겪은 고통을 겪지 않길 바랐다.


누군가가 재능도 없고 열의도 없는 일에 전념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재채기처럼, 질병처럼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이 튀어나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곤 하는 그 빌어먹을 감정.

나의 친애하는 본즈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애정 때문에 매번 그 병을 채웠다.


* * *


그가 건넨 흰색 머그컵 안의 내용물이 처음으로 혀끝에 닿던 순간의 감상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막이 오르고 무대 위의 평범한 공간이 요정의 숲이 되며 감각과 지각이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끌려들어갔던 순간의 경험. 우유와 시럽이 섞인 액체는 연한 갈색이었다. 컵을 기울이자 브랜디 향이 훅 끼쳤다. 우유보다 알콜 쪽이 기꺼웠기에 컵을 기울여 입에 문 액체는 혀가 문드러질 만큼 단 맛이 났다. 예상치 못한 맛에 채 삼키지도 못하고 굳어있자 맥코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하다. 방을 밝히고 있던 조명은 분명 최소한으로 낮춰둔 상태였음에도. 비강과 목구멍을 꽉 채우던 브랜디와 홍차의 향. 폭력적으로 미뢰를 두드리던 달고도 씁쓸한 맛. 맥코이의 왼손에 들려 있던 병 안에서 출렁이던 짙은 밤색의 액체. 가장자리를 따라 빛이 반사된 부분이 금테처럼 반짝이던 짧은 순간.

그 순간에 알아차렸어야만 했던 것들.


* * *


나는 다음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입을 다문다. H는 조용히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 빛이 비추는 파란 눈동자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로 많이 닮았다고.

H와 내가 닮았다는 이야기를 했던 건 본즈였다. 나는 그 대화가 오갔던 장소를 기억한다. 언제인지도 기억하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나는 내 주변인들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언제고 찾아오고야 만다. 하지 않던 말을 하고, 해본 적 없는 짓을 하며,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게 되는 순간이. 좋은 쪽이든 더 나쁜 쪽이든 피할 수는 없다. 그건 갑작스런 파도처럼 저항할 도리 없이 몰려와 이전에 당연했던 것을 송두리째 휩쓸어 가버린다. 일단 한 번 그 파도를 뒤집어쓰고 나면, 당신은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예전으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내가 바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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