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모두의 백합에서 판매했던 <중년여여> 참여작 원고입니다. 







각도를 재거나 거리도 확인하지 않은 채 눈대중으로만 어림잡아 꽂아 넣은 드릴이 작동하고, 완벽하게 자리 잡은 못이 흐뭇하게 번쩍인다. 사실 흐뭇한 건 못이 아니라 들여다보며 웃는 눈이지만 그런 것쯤 대충 넘어가도록 하자.

오래되어 길이 잘 든 청바지의 밑단이 둘둘 접혀 드러난 검은 양말이 까딱까딱 즐겁게 움직이고 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발의 주인은 얼굴에 튄 것들을 닦아내었다. 아수라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도 그림자처럼 녹아든 것을 보면, 사실 이 공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땀과 함께 묻어나는 액체는 허리춤에 미리 묶어둔 작업용 수건에 닦아내고, 다시 작업을 이어간다. 이건 단순한 못질이 아니다. 하나의 예술인 것이다.......

“최미경. 너 또 생각이 밖으로 새잖아.”

“…언니.”

“왜. 최미경이 아니라 실버 울프예요, 라고?”

“아우, 정말! 이래서 언니랑 안 오려고 한 건데.”

실버 울프, 아니. 미경은 하얗게 새어가는 영역이 분명한 짤따란 머리칼을 잔뜩 헝클인다.

하여간 멋도 맛도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그것만 빼놓곤 완벽하게 궁합이 잘 맞는 저 사람은 또 웃으며 빙글빙글 댄다. 짜증나. 몇 살이나 많은지 나이를 세어보는 건 오래전에 그만뒀기에 언니라 부르는 준희가 보안경을 벗어 재꼈다. 얄밉도록 근사한 제스쳐를 보자니 슬그머니 입안이 말랐다.

“물 줄까?”

“눈치는 빠르면서 매번 흥을 깨고 그래, 진짜.”

체모의 색소가 원체 엷은 빛을 띠는 탓에 귀 바로 아래까지 오는 머리칼이 하얘져 가는 것도 꼭 빛이 내려앉은 듯이 근사했다. 건네주는 물병을 받으며 새삼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생각해본다. 실버 울프라는 자기소개에도 꿋꿋하게 미경아, 하고 부르던 그 시절. 전동 드릴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쓰곤 했던 때. 그때나, 지금이나 장난기 어린 눈은 여전하다. 일부러 흥을 깨는 악취미도.

“작업 다 했지.”

“네. 청소반 부를게요.”

“이럴 때만 존댓말 쓰니, 너는.”

“버릇이야.”

“그 버릇을 조금만 더 나눠줄 생각은 없니?”

“능글거리면서 말한다고 넘어갈 줄 알아.”

“넘어오지. 내일 쉬면서.”

하여간 능구렁이. 미경은 입꼬리가 마음대로 움찔거리는 걸 애써 가리며 물을 싹 비워냈다. 청소반이 머지않아 곧 올 것이고, 그로써 현장은 완벽하게 마무리된다. 누군지는 몰라도 험하게도 처리한 탓에 청소반도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뻐근한 몸을 두둑두둑 풀어내는데 전화가 울린다. 청소반이 도착했으니 현장에서 나가도 좋다는 말에 미경과 준희는 언제나처럼 옥상으로 올라가 옆 건물로 넘어갔다.

“현장이 점점 험해지네.”

“유행은 돌고 돈다잖아.”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어. 요 몇 달 새, 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현장 보고 나니 피가 끓나 봐, 우리 실버 울-프 씨가.”

소각용 쓰레기를 한데 모아 챙기고, 벗은 옷가지는 공구함에 넣은 준희가 씨익 웃었다. 언니도 참. 그걸 말이라고 해. 대꾸하지 않았지만 속마음 따위 훤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었다. 누가 보아도 전문 수리공 같은 차림새로 바뀐 그들이 옥상에서 입구까지 내려가는 동안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다. 바로 옆 오피스텔 22층에서 일어난 살해 현장에 투입된 베테랑 처리반이라는 것을.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때론 죽이기도 한다. 미경이 소속된 회사는 그 과정에 도움을 주거나, 대신해주어 의뢰인 보호에 힘쓴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세상 위에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 아닐까. 그게 여태 일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남자 따위 죽든 말든 상관이 없기도 했고.


작업이 끝난 후 정확히 이틀 뒤 전용계좌로 입금된 금액을 헤아려 보는 미경의 뒷머리에 입술이 닿았다. 매번 짧게 미는 둔덕을 쓰다듬는 손길도 입술만큼 보드라웠다.

“뭘 그렇게 세고 있어. 항상 똑같은걸.”

“그럴수록 제대로 봐야지. 전산오류라도 날 수 있잖아.”

“하여간 꼼꼼해.”

근사한 시티뷰를 가진 높은 층의 자택은 본부에서 보장했던 수많은 복지 중 하나다. 작업반에서 은퇴한 직원을 위해 구축된 시스템이 썩 쏠쏠했기에, 미경은 드넓은 FA시장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와 달리 준희는 일찍 작업반에서 처리반으로 이동한 후 가장 실력 좋은 직원이 된 케이스였다.

현장에서 만난 후 벌써 15년이 넘는 세월이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니 둘이 함께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 듯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둘이 집을 합친 건 어디까지나 서로에게 좋은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연애’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긴밀한 소통으로 교류하는 파트너이니 어떤 선택을 했건 서로를 존중했을 것이다.

테이블에 앉아 사람 죽여 번 돈으로 채운 가계부 정리를 완전히 끝내고 나니, 파트너의 뒷모습이 그제야 들어왔다. 서류 작업할 때나 끼는 안경을 벗자 더욱더 또렷해지는 시야에 준희가 저녁놀과 함께 거실을 채운다. 가벼운 옷차림 덕분에 흉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깨부터 등 중앙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자국은 언제 보아도 여자다웠다. 그 후로 현장에 나가지 못한 건 여전히 아쉬웠지만 그게 그의 선택이었다.

“미경아.”

“응.”

“너 나랑 일하는 거, 어땠어?”

무슨 뜻인지 헤아리는 동안 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왜 묻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되묻기도 전에 몸을 돌려 시선까지 맞춘 그가 짐짓 심각해 보여 더욱 그랬다.

“좋지. 손발도 맞고. 우리는 이 구역, 저 구역 나누지 않아도 서로 알아서 잘하잖아.”

태연한 척 떠보듯 답을 내놓자 낙낙한 팬티차림의 그가 다가와 섰다.

“슬슬 그만하고 싶다.”

“…이유는?”

“경력 인정받고, 이만큼 페이까지 넉넉히 받는 천직이 어디에 있겠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뒤치다꺼리 하는 것 같아서.”

작업반으로 데뷔한 사람이 처리반으로 와서 느끼는 괴리감 비슷한 묘한 감정을 모르지 않는다. 지금도 ‘내가 현장에 나서면 이것보다 더 잘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하지만 준희는 아니었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현장 뛰고 싶어?”

여전히 등 뒤의 상처만큼이나 크게 남은 기억을 이고 가는 사람이 왜 저런 생각을 한 걸까. 그 뒤론 요리도 못하게 됐으면서.

“글쎄. 그건 모르겠다. 그냥, 그 감각이 그리워.”

“알지. 그거야 나도 아는데.”

“지금 와서 에이전트 찾으러 나가겠다는 말은 아니야. 이제야 FA 해서 무슨 이점이 있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바닥에서 언니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다들 모셔 가려 난리 나지.”

“그런 말 실버 울프한테 들으니까 기분은 좋네.”

어느새 다가와 포개어진 몸뚱이가 꼭 맞는 퍼즐처럼 안기고 감겨 소파에 늘어졌다. 턱 끝에 닿은 정수리 위로 잔 키스를 새기자, 질세라 잡고 있던 손등에 수도 없이 입술이 비벼진다. 우습고 유치하고, 다정한 순간. 하지만 마음에 들어찬 헛헛한 바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대로 순식간에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까 봐, 그게 무서워.”

“절대 아니야. 대체 누가.”

“인생이라는 게 그렇잖니. 특히나 우리처럼 손에 피 묻혀가며 일하는 사람은 더더욱 그런 거고.”

“언제 이렇게 약해지셨어.”

“나도 나이가 들긴 했나 봐. 자꾸 먼저 보낸 사람들 생각도 나고. 이러다 죽어버리면 무슨 재미인가, 싶어.”

“…사람 죽이는 일을 그렇게 수도 없이 해왔는데도 죽는 게 무서워?”

“응, 무서워.”

몸을 일으킨 그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도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 곳곳에 자리 잡은 세월의 흔적이 깊게 음영을 이루고, 미경은 순식간에 울고 싶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동료라고 말할 수 있을 그 누가 죽었든 흔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가깝고 어떤 교류를 했든 간에 울지 않던 사람이었다. 어설픈 복수를 시행하려 하지도 않았지. 그 덕에 오해도 샀더랬다. 그래. 이 사람은 늘 진심이었다. 그 어느 순간에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살았다.

“울지 마.”

“안 울어.”

피를 뒤집어쓴 채로도 잘 웃던 그였다. 바로 방금 으깨버린 어느 남자의 얼굴 위에 앉아 점심 메뉴를 고르던 걸 보면서 흠뻑 반했던 게 선명한데. 여전히 삶은 짧고, 죽음은 턱없이도 가까워서 언제든 아쉽지 않던 미경보다 몇 걸음 먼저 세월을 맞더니 어느새, 두려움까지 먼저 만난 모양이었다. 미경은 울지 않았다. 다만 그를 깊이 껴안고 토닥였다. 무슨 말을 꺼낼 수도, 생각도 나지 않아 그저 오래도록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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