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카구로 중국 황실의 애지중지 막내딸인 카구라와 중국에 서신을 전달하러 온 오키타 소고 사신 보고 싶다.

며칠 머무르는 동안 할 일이 없어 심심했던 소고는 산책을 하던 중,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함. 물론 그건 카구라(10살쯤)였고 그녀가 공주인 사실은 전혀 모름. 왜냐하면 부모가 너무 아끼는 바람에 행여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바깥에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 그러니 사신인 소고도 이 정보를 알 턱이 없었음. 멍하니 연못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위험해 보여서 곁에 다가가는데 소고의 인기척에 카구라는 놀라서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지만 그가 잡아준 덕에 다행히 물에 빠지지는 않음. 

"위험하게... 어린애는 이런 곳에서 노는 거 아니야."

"여기, 여기― 이거..."

소고의 품에 안겨 있는 꼴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연못을 가리키는 카구라.

"왜?"

"먹고 싶어."

"하아―?"하는 표정의 소고지만 어린아이인데 어쩌겠음. 여기 있는 물고기는 먹는 게 아니라며 달래주듯 알려줬고 몇 살인지, 어디에서 머무는지 묻겠지. 이 넓은 궁에서 길을 잃은 것이 뻔할 테니. 그런데 그녀의 입에선 의외의 대답이 나왔음. 다름 아닌 황실 직속의 왕자 혹은 공주들만 머무는 장소의 이름을 댔기 때문. 소고는 생각함. '왕자 한 명만 있는 것 아니었나, 왜 이 꼬마가...? 뭐야, 대체.'

"나 데려다줄 거야?"

"...원한다면."

카구라를 바닥에 내려주자 그녀는 소고의 손가락 끝을 꼬옥 잡더니 길을 잘 안다는 듯 그를 끌고 감. 자신보다 열 살은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센 악력을 가졌으며 발걸음은 또 어찌 그리 빠르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카구라가 머무는 침소였고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쏙 들어가 버림. 약간은 허무한 표정을 짓던 소고는 왜인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듦. 이후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지만 그 꼬마는 볼 수 없었음. 제 나라로 돌아간 소고는 다시 할 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고 중국으로 몇 번을 오갔으나 그녀는 역시 보지 못함. 그리고 기억에서 차츰 잊어 갈 때는 많은 시간이 흘렀겠지.

총 15년. 적은 나이도 많은 나이도 아닌 그는 사신의 자리에서 물러나 자주 갔던 중국으로 감. 몇 달을 홀로 지내다 중국의 큰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거리로 나갔고 선대의 죽음 이후 황제가 된 카무이의 행렬이 있었음. 소고는 '저 녀석이 왕이 되었으니 미래가 어찌 될지 궁금하네.'라고 생각하던 찰나, 카무이의 뒤에 있던 꽃가마를 멍하니 보던 소고는 작은 창 너머로 몇 년 전 봤던 그 소녀를 발견했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임. 그녀가 숨겨둔 공주 카구라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선대가 그녀를 왜 숨겼는지, 카무이의 표정 뒤에 숨겨진 의도는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왜인지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듦.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꼬맹이, 너는 그대로 자랐구나. 그런데 해맑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어찌 그리 슬픈 얼굴인지―.

긴 행렬이 끝났지만 소고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음. 고작 한번 본 게 다라서 당연히 잊었다 생각했건만, 15년 만에 우연히 보게 된 그녀가 자신의 눈에, 뇌리에, 가슴에 깊이 박혀 버림.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지금의 소고는 한 나라의 사신도 아니었고 그저 다른 나라에 눌러앉아 한량의 시간을 보내는 외국인밖에 되지 못함. 몰라보게 성장한 그녀의 어린 시절이 어땠을지, 지금은 왜 그리 슬픈 표정을 짓는지 궁금했지만 궁에 들어갈 명분과 이유가 충분하지 못해서 속상한 마음뿐. 그래, 언젠가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를 하고 소고는 집으로 돌아감. 그러던 어느 날, 궁 근처의 주막에서 한가로이 술잔을 하고 있던 소고는 바로 옆에서 큰 소리가 나자 신경질 가득한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봄. 주막의 주인은 도둑이야 하면서 어떤 사람을 쫓는데 놀랍게도 카구라였음. 그녀는 종종 궁 밖으로 몰래 나오곤 했는데 이유는 단순했음. 궁의 음식이 싫어서. 소고는 순간 벙찜. 그는 주모를 불러 세우더니 돈을 쥐여주며 그녀의 뒤를 쫓음. 빠르기도 참 빠르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오른쪽 골목에서 숨을 고르는 그녀를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감.

“저기.”

낯선 사내가 자신을 부르자 흠칫하더니 머리에 뒤집어쓴 천쪼가리로 얼굴을 가리는 카구라. 소고는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 시절의 그것이라 웃음을 터뜨림. 그러다 그녀를 바라보며 “그대로네.”라면서 나지막이 말함. 카구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자기를 아느냐고 물어보겠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너를 기억한다는 소고. 카구라는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아무래도 좋았음. 그저 카구라가 제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조용한 그들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었고 카구라는 왠지 모르게 그리워진 어린 시절을 떠올렸지만 이제 돌아가야 한다며 자리를 뜨려 함. 그때 소고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말을 건넴.

“지금 있는 그곳, 행복해?”

카구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음. 정곡을 찔러버린 질문은 심장을 세게 움켜쥐는 통에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아서. 그녀는 망설이다 대답했음.

“...응, 행복해.”

잡힌 손목을 빼내며 돌아서는 카구라에게 소고는 “아까 그 주막 근처에서 몇 걸음만 더 떼면 빨간 지붕의 작은 집이 있어. 언제가 돼도 좋으니 와도 돼.”하고 함. 카구라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다시 궁으로 돌아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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