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경수


도경수. 도경수. 나는 카톡창을 내려다보며 그 이름을 몇 번 입 속으로 읊어보다가 다리를 왼쪽으로 꼬았다. 입안이 조금 텁텁한 것도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3시간 전에 온 카톡. [형이 미안해 세훈아. 얼른 끝내고 전화할게] 사실 미안할 일이... 아닌 것 같았지만 성심성의껏 사과하는 그 모습이 좋았다.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지. 세상에 이렇게 예쁘고 섹시하고 귀여운 애인을 두고 선을 보러가는 남자가 어디있어. 됴 존나 나빠. 나는 소파 위로 핸드폰을 던졌다. 밤새도록 혹사당한 허리가 아팠다.






2. 왜 선보러 가?


사실 세훈은 알고 있었다. 내 사랑 됴의 집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까다로운지. 얼마나 빡세게 교육을 받았던지 섹스하러 옷을 벗으면서도 옷을 개놓으려고 들더라니까. 혀를 차며 그 옷을 던져버리긴 했지만 대충 감이왔다. 그래도, 야 근데 진짜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지... 요즘 누가 서른도 안된 아들을 벌써 선을 보게하려 한단 말인가. 고조선이야 뭐야.

그저께 제 손을 잡아오며 세훈아 형이 정말 미안한데, 집안에 이런 일이 있어서 형이 선을 보고 와야 할 것 같다. 했던 말에 구둣발을 쾅쾅 구르며 화를 냈던 게 생각이 났다. 됴 진짜 너무해! 어떻게 그래! 사실 됴가 그렇게 말한 이상 선을 보러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갑자기 경수가 지어보였던 그 난처한 표정과 지금 텅 빈 집이 겹쳐졌다. 아. 쫌 후회되네. 열어놓은 창문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쏟아져들어온다.


"그래두, 이렇게 예쁜 애인 있으면서 이러는거는 아니지."


맞지 됴. 대답해봐. 내가 너무 나빴던 건 아니지? 씨... 나도 스테이크 먹고싶었는데. 됴가 해주는거 먹고싶었는데! 또 가만히 누워있다보니 화가났다. 으익! 억! 악! 허공에 발을 뻥뻥 차대며 아 됴 너무해애애애 소리를 질러도 그 분은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었냐면, 됴보다 더! 완전! 작고 갈색 긴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피부도 내가 더 하얗고 솔직히 내가 더 잘생긴 것 같다고. 됴가 넘어갈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일이라는 건 혹시 모르니까. 난지 안난지도 모르는 바람이 불안해서 전화통을 붙잡았다. 한참을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했다. 지금 걸었다가 그 고매한 집안에서 내 사랑하는 됴가 죽살나게 까일 일을 만드는 게 아닐까? 난 됴 사랑하니까... 그럼 안되는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쿨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보다고 생각하며 어렵사리 폰을 내려놓았다. 아, 연애는 정말 어렵다.






3. 됴의 사정


어제 세훈이와 잠자리를 가질 때 내던져 금이 간 핸드폰이 손 안에 계속 들어있었다. 선자리라. 사실 부담스럽다기보단 귀찮은 마음이 더 컸고, 세훈이가 서운해 할 걸 뻔히 알고 있었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얼른 끝내고 전화하겠다는 카톡 뒤로 아무 연락도 없는 카톡창, 그리고 잠잠한 통화내역. 아. 이쯤되면 전화올 때가 됐는데. 평소 성격을 알기에 최대한 자리를 빨리 파하려 했으나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오늘따라 식당에는 사람이 많고, 음식은 늦게 나오며 앞에 앉은 여자가 천천히 먹는다. 연락이 안된지 3시간정도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핸드폰을 보는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혹시 뭐, 기다리는 연락 있으세요?"

"아, 죄송합니다. 동생이 몸이 안좋은데 연락이 안돼서... 잠깐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요."


어린 애인이 내가 선 보는 걸 알고 화가나서 연락 두절이 됐는데 어떻게 해. 책잡힐만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자리를 잠시 떴다. 일번을 꾹 누르면 하트로 범벅이 된 세훈이의 이름이 뜨고, 무미건조한 신호음이 간다. 몇 번만에 끊겨드는 신호음.



-왜? 형 끝났어?

"어, 세훈아. 뭐하고있었어?"

-나 그냥...소파.

"답장 없어서, 뭔 일 난 줄 알고..."

-무슨 일?

"도망간다던가, 그런 거 있잖아."



히히. 아까전까지는 분명 불만이 있는 눈치였는데 또 금새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작게 툴툴거리는 목소리. 형 솔직히 서운해. 소올직히 서운해애, 정도로 들리는 발음에 슬쩍 웃으면서 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너 서운한 건 알았는데, 응. 미안해. 그래. 나 아직 덜 끝나서, 끝나자마자 바로 전화할게. 응. 고마워 세훈아.






4. 그래도 너무해


간질하고 애타는 통화 후, 경수가 돌아온 시각은 거의 열두시가 다되어가는 늦은 밤이었다. 워낙 제 집안과 친한 집이었다. 아는 동생이 지금 아프다고 해서 집을 가야겠다고 했더니 다 안다는 표정으로 조금만 있다 가시라고 했다. 아시잖아요, 저희 어머니 아버지 말 많으신 거... 여기 나가면 제가 바로 픽업되어서 집 들어가는거라 아마 더 계셨다 가시는 게 뒷 말 안 나올 거에요. 솔직히 경수씨 저한테 마음 없으신 건 알지만 그건 저도 마찬가지니까, 조금만 더 계셨다 가세요. 그 말에 내 애인이 기다리고 있다면서 자리를 파할 수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세훈은 기다리다 지쳐 잠을 자다가 깼다. 진짜 늦네, 너무 늦네... 도경수 너무하네... 그리고 들어온 경수의 몸에는 향수 냄새가 배어있었고 얼굴은 아주 피곤해보였다. 측은하고 화가 나는 광경. 컵에 물을 따르다 맞닿았던 시선은 세훈에 의해서 곧 떨어진다.


"세훈아."

"됴 왜."

"미안해."

"..."

"너한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정말 안됐어. 서운했지. 미안해."


맞아 서운했어. 됴 너무 나빴구 진짜 나 완전 서운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어떻게 선을 보러갔는데 이렇게 늦게 오구, 이렇게 향수냄새, 아 진짜 너무해 도경수... 줄줄이 말을 뱉어내려다가 잠깐 멈칫한다.


"세훈아."

"됴.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해.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계속 안돼가지구..."


아 몰라. 됴 아무말도 하지마. 빨리 나 안아줘. 잇새로 바람소리를 내며 씩씩거리던 세훈이 무턱대고 경수를 껴안는다. 질투나서 죽는 줄 알았어. 나랑도 스테이크 먹고 나랑도 산책해. 나랑도 선보는 것 처럼 해. 알겠지. 으름장을 놓는 말에 경수가 슬쩍 웃는다. 알겠어. 들어갈까? 여느때와 같은 음성이었다. 세훈이가 질투도 해주고 좋다. 어느새 갈색 머리의 여자가 머릿속에서 사라진 뒤였다.

@_tex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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