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막커튼이 채 닿지 않은 곳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새어나오며 웅의 시야로 흩뿌려졌다. 꾹 닫힌 눈꺼풀 사이로 스미는 밝은 빛에 눈가를 찌푸린 그가 천천히 눈을 뜬다. 오른쪽 팔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저릿했지만,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낸 그의 입매가 어쩐지 느슨해진다. 


"아주 맘놓고 자네."


목이 잠겨 갈라진 목소리를 했으면서도 그는 기분좋은 얼굴이다. 가무잡잡한 피부를 한 박우진의 동글동글한 머리통이 오른팔을 짓누른 채 저를 꾹 안고 있는 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가이딩이 되는 인간 옆에 자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라 붙어 자는 것이겠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저에게 그 어떤 마음도 없으면서 이렇게 사람 마음 복잡하게 구는 행동이 얄미워 약간의 심술을 부려볼까했지만 그런 마음도 아주 잠시다. 웅은 새어들어오는 햇살에 끄응, 대는 소리를 내는 우진을 위해 조심스레 팔을 뻗어 커튼을 쳐보았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에 다시 어둠이 내렸고 박우진은 다시 새근대는 소리를 내며 한잠에 든 얼굴을 했다. 제 침대에 누워, 저를 안고 자는 박우진에게는 저와 같은 샴푸냄새가 났다. 그것이 퍽 좋으면서도, 의미부여를 해서는 안되는 공통점에 웅은 다시 입안이 쓰게 느껴진다.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일은, 늘 이렇게 저를 갉아먹곤 했다. 


"전 실장님."

"어."

"아, 저,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진짜 별거 아닌데."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저가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은 자꾸 고개를 들고 의도치 않은 확인사살에 다시 누그러진다. 그러길 반복해 지칠대로 지친 마음이건만, 자꾸만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거다. 웅은 샤워를 마친 후 셔츠를 고르던 손을 거두고 그대로 우진의 제법 마른 손목을 쥐어 시선을 마주한다. 같은 침대에 한이불 덮고 잔게 얼마인데 이깟걸로 얼굴을 붉히니까, 자꾸만 사람이 포기를 할 수가 없어지는 거다. 


"으응, 잠깐만요."

"뭐가 잠깐만이야."


아마 밥을 차리고 있던 모양인지 앞치마를 두른 박우진의 허리를 감싼 웅이 그대로 입술을 부딪쳐 혀를 밀어넣는다. 그닥 친절하진 않은 키스에 더운 숨을 할딱댄 그가 저를 밀어내려다 꼭 잡힌 손목에단단한 팔을 그러쥔다. 제법 자라 미쳐 자르지 못한 손톱이 하얀 피부 아래에 박혀들자 놀란건 되레 박우진이라 퍼득댄 그가 주먹을 꾸욱 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난 웅이 잠시 입술을 떼어 그를 바라보자 생각보다 긴 속눈썹이 잘게 떨리고 번들대는 입술이 달싹인다. 그 모습에 괜히 온몸에 열이 훅 끼친 웅이 입술을 가까이 해 윗입술을 살살 빨고는 천천히 멀어진다. 더는 선을 넘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제가 그어놓은 박우진과의 적정한 선이니까. 웅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차 고개를 숙인 박우진을 빤히 바라보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다. 더운 숨결이 여전히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왜 말을 하려다 말아."

"진짜 별거 아닌데."

"그게 뭐냐니까."

"라면에 계란 넣을거냐고. 그거 물어보려고 온건데."


낮게 웅얼댄 박우진의 귓가가 여전히 붉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안으려던 손을 멈칫한 웅이 알아서 하라며 대꾸하곤 그를 밖으로 내보낸다. 


"알아서 하라니까 안나가고 뭐해."

"지난번에는 안넣었다고 뭐라 했잖아요."

"나 벗은거 더 보고 싶어서 그러지?"

"아씨, 아니거든요!"


귀엽긴. 웅은 발끈하며 뒤를 돌아 나가는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러다 시야에서 사라진 박우진에 다시 입안이 쓰다. 키스하는 걸 부끄러워하고 익숙해하지도 않으면서, 박우진은 이제 그 이유도 묻지 않는다. 어쩐지 벽에 대고 소리를 치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되돌아오지 않을 마음이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기대하다 괜히 서운해진다. 

박우진은 임영민이 궁금하면서도 저에게 처음 기대듯 울음을 토해낸 그날 이후 통 입을 열지 않는다. 차라리 입을 맞추는 저를 밀어내면서 죽어서 돌아올지도 모르는 임영민을 기다린다는, 구시대 유물같은 궁상스러운 말을 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어쩌면 그 말을 비웃고 그대로 박우진을 꺾어내렸을지도 모른다. 박우진은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 임영민은 정말 죽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차라리 임영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구는 박우진은 꼭 견뎌내는 것 같아 어쩌면 더 절망스럽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일이 없어도, 임영민 그 인간이 지금 어떤 상황이건 당신의 손을 잡을 일은 없을 거라 단호하게 말하는 것 같아서. 

온몸으로 박우진의 거절아닌 거절을 받아낸 주제에 지칠 줄 모르고 입술을 부딪치는 이유는 임영민을 그가 몰랐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그전부터 이렇게 했으니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냥 가이딩을 핑계삼아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그냥 궁상스러운 핑계일 뿐이다. 그냥 저는 이렇게라도 박우진과 닿고 싶은거다. 가이딩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저 인간이, 저 미련스러운 뒤통수를 한 저 박우진에게 손을 뻗고 싶은거다. 


"아, 나 뭐 묻었어요?"

"......"


이러면 안되는데. 욕심을 자꾸 내어서는 안되는데 자꾸만 만지고 안고 보듬고 입을 맞추고 싶다. 저도 모르게 박우진에게 손을 뻗다 마주한 시선에 당황한 웅이 멈칫하며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다. 


"어."

"뭐요?"

"못생김, 찌질함."

"...와."


와는 뭐가 와야. 속타는 제 마음도 모르는 게 얄미워 웅은 불퉁하게 대꾸하고는 뒤를 돌아선다. 이럴땐 얼굴 안보는게 상책이다. 웅은 어디가냐며 묻는 박우진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아무리 가이드라인이 정부에서 버리다시피한 도시라고는 하지만 아예 관련이 없진 않아 전쟁이 시작되면 클럽일이 한가해지기 마련이다. 해서, 딱히 바쁠 것도 없어 한가해진 웅은 뒷문을 통해 담배를 물고서 괜히 감상에 젖는다. 쓸데없는 생각은 할수록 골만 아파지는데, 이상하게 박우진은 머릿속까지 따라와 저를 괴롭힌다. 


"나비야."


알러지가 있어 고양이를 좋아하면서도 가까이가지 못해 오늘도 저만치 떨어진 고양이를 부른 웅이 쭈그려 앉아 손을 내민다. 워낙에 영특한 녀석이라 저가 늘 멀리서 밥을 챙겨준다는 걸 알고부터는 의식적으로 저에게 가까이오지 않는 녀석이 오늘따라 괜히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박우진같이 까매서는 하는 짓도 박우진이다. 아니, 차라리 박우진도 털같은거 달려있어서 이렇게 가까이라도 못하면 좋으련만, 옆에 끼고 있으면서도 닿을 수가 없는 기분이라 더욱 애가 탄다. 훌쩍 달아나버리기라도 했으면 차라리 났지. 아니 옆에서 임영민 타령만 해도 그나마 방어선이라도 쳐지는 기분인데 아무런 티도 안내는게 생각할수록 짜증이 난다. 뭘 굳이 참고 있어. 


"아, 여기서 뭐해요."

"왜."

"남은 바빠죽겠는데, 여기서 놀아요?"

"바쁘긴 뭐가 바빠."

"언제는 나 혼자 여기 못맡긴다고 해놓고."


이래서 박우진이 나쁘다. 혼자 마음 좀 가라앉힐라치면 어느새 졸졸 따라와 저를 자꾸만 흔들어놓는다. 제가 얼마나 참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불퉁하게 대꾸하면서도 웅은 우진에게 연기가 갈까, 담배를 비벼끄고는 어느새 달아난 고양이가 사라진 골목 끝을 한번 바라보았다.


"너한테 내가 어떻게 맡겨. 무슨 일인데."

"왜 나 자꾸 혼자 사무실에 둬요."

"애냐, 혼자 못있어?"

"자꾸 실장님이 나한테 거리두니까 조금 서운해서 그러죠."

"지랄한다."

"아, 실장님."

"왜."

"나한테 서운한거 있어요?"


미치겠네. 지난번 머리꼭지가 돌아서 한입에 삼켜버릴 뻔 한걸, 엉엉 울길래 정신 차리고 멈춰주었건만 박우진은 자꾸만 저가 가진 낡아빠진 브레이크를 잡아 저어멀리 던져머린다. 


"없어, 그런거."

"근데 왜 맨날 나한테 거리둬요."

"내가 뭘. 그리고 우리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키스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좀 전처럼 대해주면 안되는 거에요?"

"야, 박우진."


그래, 그러고보니 임영민과는 다시 못만난다고 엉엉 울고 난 이후부터 묘하게 선을 긋기 시작했다. 선을 긋기보다는 참았다고 해야하나. 솔직히 다시 못만날 가능성이야 충분하니까 그때부터 박우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게 맞는데 이상하게 전웅은 그날 이후로 박우진과 거리를 두려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우진은 제가 그를 다시 안본다 했을때 그렇게 울어주지는 않을 거 같아서. 그걸 잘 알아서 가망성이 없는 마음은 가지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이미 한번 그 어딘지 모르게 말랑말랑한 감정에 배신 비슷한 걸 당한 전적이 있으니까. 그 마음을 다시 단단하게 만들기까지 꽤나 힘들었으니까, 그 힘든 시간들 보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데 그걸 자꾸만 박우진이 훼방을 놓는다. 웅은 옷깃을 쥐고 저를 바라보는 우진의 손목을 아래로 잡아내리고는 느릿하게 입안을 혀로 훑는다. 자꾸만 몸에 열이 올라 입안이 바싹말라온다.


"키스같은거 말고, 더 한거 하고 싶은거 참는거니까 그냥 좀 있어."

"......"

"너 내가, 얼마나-"


씨발. 무슨 말 좀 하려고 하면 타이밍이 이 지랄이야. 웅은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소리에 미간을 좁히고는 조금 구겨진 옷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 몸을 홱 돌린다. 박우진과 조금 떨어져 통화를 마친 그의 표정 위로 짜증이 묻어났다.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다. 아주 사방천지에서 박우진에게 가까이하지 말라고 저를 뜯어말리는구나 싶었다.


"너 10분만 있다가 들어와."

"혼자 갈거에요?"

"어. 너는 여기 있어."


저를 뒤따르려는 우진에게 불퉁히 대꾸한 웅이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한다. 진짜, 가지가지한다 싶었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직원들의 얼굴에 웅이 어깨를 두드리고는 냉기가 가득한 표정을 한 김동현 앞에 우뚝 걸음을 멈춘다.


"박우진 없는데."

"...있는거 다 알아."

"없어."

"어렵게 가지 말자, 우리."


우리라니. 웅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입매가 비틀려올라간다. 우리라는 말이 어색해진도 오래인데, 그 단어를 쓰는 그가 괘씸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사람 마음 끝까지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센트럴시티에 사는 새끼들이 가진 재주다 싶었다.


"이제 필요없다며."

"필요해."

"......"

"...필요해. 그래서 온거야."


목적어가 빠진 대화에 웅의 마음이 다시 어지럽다. 입술을 꼭 다문채 있어도 조금은 위태로워보이는 김동현에 마음이 조금 물렁해지는 스스로가 우스워지면서도 또 박우진을 보내선 안된다는 생각에 웅은 다시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어 자세를 고쳐 잡아본다. 


"가."

"...아니, 못가."


이마 위로 닿는 서늘한 총구에 입안에 침이 고여든다. 뒷문이 열리는 둔탁한 소리가 열린다. 씨발, 10분 있다가 오라니까 이제 겨우 5분도 안지났을 텐데 그걸 못참고 들어오는 박우진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완벽한 존재는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S타입이니까 본능적으로 느끼고 들어온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리 버둥거리면서 박우진을 놓지 않으려해도 결국은 놓을 수 밖에 없는,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해도 결국은 김동현을 마주하게 되는 모든 상황에 어쩐지 울고만 싶어진다. 땀으로 축축해진 손으로 김동현의 서늘하다못해 차가운 손목을 쥐어 총을 내린 그가 바람빠진 웃음을 짓고 만다. 김동현은 결국 저를 쏠 수 없을 거고, 박우진은 결국 임영민에게로 갈 터였다.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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