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물 소재, 에프터 묘사 약간씩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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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말랐다. 스노우는 사고가 느릿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점검하는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게 느껴졌다.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침음하다 공평하게 두드려맞은 것처럼 아픈 온몸을 누운채로 꾸물대며 움직이다 눈을 떴다. 옆에 누가 있는 것 같은 감각 탓이었다.

오늘 스노우의 곁에는 아무도 없어야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비서에게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미리 지시를 내려놓았는데 일이 잘 못 되어 누구를 달고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스노우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몇 가지 예상 상황과 그에 대한 가장 매끄러운 대처 방법을 떠올리며 옆을 보았고 드물게도 멍청하게 굳고 말았다. 거기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

"깼어?"

"당신이 왜 여기에……."

목소리가 갈라지다 못해 목구멍이 다 아팠다. 스노우는 입을 다물었다. 제헌이 여우처럼 빙긋빙긋 웃으며 스노우를 보고 있었다. 스노우는 멀거니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생각을 다시 굴렸다. 엄청나게 느리게 굴러간 생각들은 이곳이 준비해놓았던 다른 호텔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머물던 호텔이며,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은 제헌이 아니라 스노우 자신이라는 조잡한 결론을 주워왔다. 기억은 부르심을 기다린 것처럼 두통과 함께 조금씩 돌아왔다. 난잡한 기억들 사이로 전날 밤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 실수를 했다. 순간 스노우는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스노우는 몸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육신은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런다고 해서 두통이 어디 사라지는 건 아니겠으나 스노우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대로 눈까지 덮었다. 좀 나아진 것도 같았다. 눈이 엄청 뻑뻑했다. 제헌에게 어디까지 추궁 당했고 자신이 어디까지 말했는지 천천히 되짚던 스노우는 몇 가지 뼈 아픈 실책이 있긴 했으나 자신의 모든 비밀이 흘러나가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안도감이 들었다. 

정보의 격차는 힘의 격차였다. 스노우의 손을 떠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발목을 묶은 사슬이 삭았다는 걸 제헌이 모르는한 스노우에겐 기회가 있었다. 도망을 가도 헤어져도 다시 되찾으면 된다. 그러면 괜찮았다. 괜찮을 것이다. 스노우는 옛날에 했던 결심을 떠올렸다. 아직도 선명히 떠오르는 그날의 일들도.

목까지 꼭 덮고 있던 이불이 휙 걷어진 것도 그때였다. 스노우가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제헌이 스노우가 덮고 있던 이불을 홱 걷어내고는 스노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냥 사랑스럽게 보기에는 음흉하다 못해 패악한 기질이 넘쳐나는 이라는 걸 모르지 않음에도 스노우는 그게 조금 귀여운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제헌이 뭘 하는 건지 알아차린 건 이미 그가 살갗에 코를 파묻고 실컷 킁킁거린 후였다. 스노우의 머릿속에 막아야겠다는 타성과 이미 늦었다는 자포자기가 느릿하게 뒤엉켰다. 이불에 폭 싸여 있었기에 뜨끈한 가슴과 목덜미에 장난스레 꾹 꾹 누르는 보드라운 감촉과 소리 없이 웃는 게 분명한 날숨이 살갗을 간질였다. 

"만족했어요?"

"아니."

낮고 거친 목소리에 제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헌의 입술이 가상의 징검다리라도 건너는 것처럼 스노우의 목을 타고 올라가 턱에 닿았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격언에 아주 충실하게도 제헌은 입술로 물고 이를 슬쩍 세워 장난치듯 꾹꾹 물기도 하면서 아주 대놓고 즐기고 있었다. 제헌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간 해온 노력들이 스노우의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탈색되며 멀어져 갔다. 제헌이 히히덕거리며 손끝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쓰는 것을 스노우가 손으로 감싸쥐어 막았다.

"너도 수염 나는구나. 밝은 색이라 잘 안 보이긴 하네."

스노우는 조금 울적한 낯이 되었다. 곧바로 제헌이 입술을 들이대는 통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틀어 피하면서는 좀 원망스런 얼굴이 되었다. 

"욕심쟁이."

"그걸 이제 알았냐?"

"아닐걸요."

패배의 슬픔 탓인지 목소리가 참담하게 갈라졌다. 제헌이 해가 두 개 떴다고 해도 믿어볼까 싶을 정도로 즐겁고 환한 얼굴로 한 컵 가득 차가운 물을 가져다 주었다. 스노우는 마다 않고 받아들었다. 심지어 제헌이 베개를 하나 더 받혀서 편하게 기대 앉도록 해주기까지 했다. 스노우는 이 일시적인 호의가 가슴 뭉클하도록 기쁘면서도 참담했다. 

스노우가 단번에 물을 바닥내자 제헌이 컵을 빼앗듯이 가져가 침대 옆 보조테이블에 대충 놔두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스노우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은 연인같은 몸짓에 마음 따뜻해지기에는 제헌의 미소가 너무 밝고 음흉했다. 맨살이 엉겨드는 감촉에 스노우는 다만 어젯밤에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스노우는 제헌이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다짐은 제헌이 굳이 넓은 침대 다 놔두고 한 사람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베개를 자기도 같이 쓰고야 말겠다며 우격다짐으로 들러붙어 비비적거릴 때까지는 지켜졌으나, 제헌의 손이 이불 아래를 파고들더니 엄청나게 끈적한 손길로 이리저리 만져대는 것에는 평정이 깨지고 말았다. 손길도 손길이지만 스노우의 가슴 위에 반쯤 올라탄 채 내려보고 있는 눈빛이 너무 흉악한 탓이었다.

"왁싱이지? 어디서 했어?"

놀리고 있다는 걸 숨기려는 척도 하지 않는 말투였다. 스노우는 그동안 자신이 열심히 쌓아온 것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져 무너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참혹함을 둔중히 느끼며 두통이 언제쯤 없어질지 걱정했다. 

"전 이만 씻으러 갈게요."

"똑바로 대답하면."

마치 안 보낼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말하는 뻔뻔함이 참으로 대단했다. 스노우는 그답지 않게 음울한 눈빛으로 제헌의 득의만만한 얼굴을 보았다. 머리 굴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씻고 와서 입으로 하게 해주면 그럴게요."

"나 출근해야 되는데."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제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방 씻고 나온다는 얘기에요."

제헌이 스노우의 가슴팍을 아프게 때렸다. 그리고 그 위에 뺨을 대었다. 스노우는 그런 제헌이 정말 얄미웠다. 본인에 대해서는 온갖 의뭉과 예민을 다 떨면서 남 얘기가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까발리려고 드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감추려고 할 수록 더 신이 나서 파고드는 기질은 정말이지 그답기 그지없는데다가 한 번 파고들었다 싶으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점까지 당하는 쪽에선 골치 아픈 습성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스노우라면 대놓고 놀리거나 골려먹지 못해 안달을 냈다. 스노우는 어지간해선 그런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제헌이 하는 건 가끔 그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비극적이게도 그런 모든 악랄함과 비겁함은 제헌에 대한 감정들을 식게 만들기 보다는 더 뜨겁고 열정적이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제헌은 스노우에게 짠맛 같았다. 스노우의 수용체는 기형이었고 제헌에 대한 모든 감정을 과다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엔 긍정이나 부정의 구분이 없었다. 

"답은?"

"전문적인 도움이 있었다고 해둘게요."

"너는 있는 쪽이 취향인줄 알았는데. 그럼 그 전문가 나도 소개시켜줄래? 누군진 몰라도 솜씨가 비범한데."

진심이라기엔 어조가 너무 얄미웠다. 스노우는 불어오는 강풍에 정면으로 맞서 돛을 찢어먹을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에 역풍을 타고 나아가는 술책을 부리기로 했다. 그래서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해드릴 수 있어요."

"전문가의 손길이라고 하지 않았어? 응? 스노우씨, 네가 언제부터 왁싱 전문가도 됐냐?"

"당신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아요."

제헌이 픽 웃었다. 입바람이 스노우의 가슴을 간질였다. 어쩌면 스노우는 제헌이 좀 미워지려고 했다. 어쩌면 좀 원망스럽기도 했다. 스노우의 속이 어떻든 제헌은 스노우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적대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내로남불 쩌네. 얼른 씻고 오기나 해. 늦으면 버리고 그냥 출근할 테니까."

제헌은 침대 헤드를 붙잡고 기듯이 몸을 끌어올려 스노우의 눈꺼풀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화장 번졌어."

말을 마치며 제헌은 스노우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한번 더 때리며 물러났다. 낄낄대는 제헌의 입술에 반짝이가 묻어나온 게 보였다. 스노우는 그게 좀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깨진 유리가 가득한 곳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걸어도 맨발이 피투성이가 되지 않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스노우는 조금 느리게 눈꺼풀을 닿았다가 다시 열었다. 이어져 나온 목소리는 아주 의뭉스러워서 되려 예사롭게 느껴졌다.

"같이 씻을래요?"

스노우의 의도대로, 제헌은 그를 아주 얄궂게 쳐다보긴 했어도 그뿐이었다.

"회사 아예 안 보내려고? 난 이미 씻었어. 구린내 심각하니까 얼른 꺼지기나 해라. 너는 본인 입냄새가 어느 정돈지 모르겠지? 지금 내 코엔 변기 먹은 늑대가 술독에 빠져죽은 냄새를 10미터 밖에서 맡고 있는 것 같다."

스노우는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몸에 말며 낄낄대는 제헌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욕실로 향했다. 이를 닦고 두 종류나 되는 가글을 전투적으로 사용한 뒤 다음 생애까지 따라붙을 것 같은 글리터를 닦아내려 노력하던 스노우가 문득 자신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발가락 사이를 확인했다. 거기엔 아주 작은 자국이 있었다. 스노우는 몇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과일과 술잔이 놓인 테이블 아래에서 스노우를 올려다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언제 보아도 탁하고 잔혹한 눈이었다. 결과론을 따르자면 어제 유난히 지분거리긴 했었다고 회고할 수도 있었으나 냉정히 평가할 때 통상적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마이어의 핵심 사업은 남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그자가 스노우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는 늘 훌륭한 인맥 내지 남으로 말했다. 비록 사적인 공간에서는 벌써 몇 번 바뀐 손녀뻘에 가까운 그의 애인과 동침을 권하며 꼭 그걸 지켜보게 해달라는 제안을 끈질기게 하고 있더라도, 남들 앞에선 사업상의 친구인 이었으니까.

다만 흑심에 눈이 멀었는지 노인네의 인내심이 짧아진 걸 잡아내지 못한 게 작은 실책이었다. 스노우는 그의 손이 맨발등을 쓸던 손길을 기억해 냈다. 그가 벗겨낸 구두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끈적한 손놀림과 필요 이상으로 구석구석 매만지던 광기에 가까운 기쁨으로 작게 반짝이던 눈을 떠올렸다. 핥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집요하게 만지던 발가락 사이에 조심스레 바늘이 찔러 들어올 때 스노우는 일부러 고개를 젖히며 눈꺼풀을 살짝 내려 가늘게 떨었다. 

그 모든 기억은 스노우에게 별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스노우가 기획한 일을 모두 끝내고 리무진에 탄 기억까지는 있으니 음험한 노인의 계획은 가까스로 빠져나간 것은 분명했다. 이 정도 일로 오랜 사업 파트너인 마이어와 척을 질 건 없었다. 합리적인 사고였으나 마음에 걸리는 게 없지는 않았다. 마이어는 남부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서도 지극히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줄다리기하듯 그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선을 넘지는 않는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해오지 않았나. 마이어가 이렇게 갑자기 일을 벌이는 건 이상했다.

스노우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맞추어 너무 손질한 흔적이 나지 않도록 손으로 머리 모양을 자연스럽게 정리했다. 

중요한 건 주도권이었다. 지난 몇 년을 한순간도 고삐를 놓아 그들로 하여금 강탈과 통제의 만족감을 쥐여주지 않고 주인 없는 보주이자 잡을 손이 필요한 배후조종자로 스노우의 이름을 쌓아왔다. 타인의 욕구를 실처럼 당기고 밀며 스노우가 원하는 바대로 움직이는 건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거대하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 존재인지와는 관계없는 논리였다. 

애먼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치명적이진 않았다. 마스트는 굳건하고 스노우는 조종간을 다시 잡았다. 바다는 잔혹하지만 변덕이 호재일 때도 있었다. 물살을 읽고 바람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걸 위해선 좀 더 정보가 필요했다.

간단하게 씻고 나오니 스노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출근 준비를 깔끔하게 마친 제헌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디올라인으로 차려입고 광택 있는 구두에 머리 손질까지 끝낸 모습이었다. 제헌이 보란 듯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5분만 늦었어도 난 여기 없었을 거야."

"5분이면 충분해요."

스노우가 냉큼 무릎을 꿇자 제헌이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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