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돗포는 신관이 되기 전부터 그 끔찍한 날이 되풀이되는 악몽을 꾸준히 꾼 적이 있었다. 지금은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 고친 덕분에 더 꿈을 꾸지 않게 되었지만 그 일이 있었던 직후부터 돗포는 다시 꿈속에서 히후미에게 시달리기 시작했다. 밤마다 그것이 돗포의 침실에 나타나 그를 덮치는 아주 이상한 꿈을 말이다.

어느 순간 인기척을 느껴 눈을 뜨면 자신의 유카타를 풀어헤치며 이곳저곳 애무해대는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 빠져나가려고 해도 억센 손길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돗포는 나의 친구잖아, 그렇지?'


더운 숨이 섞여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귓바퀴를 잘근 씹어 대고 맨몸에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손길 하나하나가 소름 끼쳐 돗포는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눈을 번쩍 뜨면 그것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온 몸이 땀으로 젖어 힘 없이 누워있는 돗포만 방 안에 홀로 누워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잡아 끌어내린 것처럼 흘러내린 유카타 사이로 드러난 둥근 어깨와 허벅지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아 다시 한번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한 가지 꿈을 반복적으로 꾸었지만 이제는 어디 까지가 꿈이고 어디 까지가 현실인지 점점 분간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하아... 하아.."


돗포는 손을 들어 땀범벅이 된 이마를 훔쳤다. 와중에도 꿈속에서 보았던 그것의 표정이 선명히 떠올라 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신관님, 오늘따라 많이 피곤해 보이네~ 밤에 잠을 못 잤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슬그머니 노려보자 히후미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목구멍 아래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했다.


"별일 없습니다. 잠을 깊게 자지 못해 피곤한 것뿐입니다."

"그래? 누가 우리 신관님을 힘들게 한담! 아주 나쁜 사람이네! 이 몸이 옴팡지게 혼내줘야겠어!"


예이 예이, 그렇고 말고요. 무려 수백 년이나 사람들을 괴롭힌 전적도 있으신데, 이런 인간 하나 괴롭히는 건 일도 아니겠죠. 눈을 부릅뜨며 호령하는 모습이 무섭기는 커녕 어처구니가 없어서 돗포는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뭐야 뭐야, 엄청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그 눈빛은! 이렇게 수호신을 상처 줘도 되는 거야?!"

"... 정말 제 수호신이 맞기는 해요? 당신을 섬긴 이후로 기가 더 빨리는 거 같은데요."

"당연하지~ 비록 본체는 이곳에 묶여 있어서 여기로 와야만 보호받을 수 있겠지만? 역시 우리 신관님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 인간들은 너무 약해서 밥을 꼭꼭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듣고 있어?"


히후미가 균형 잡힌 식습관에 대해 일장 설교를 늘어놓는 동안 돗포는 이미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신과 대면하는 도중에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자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따뜻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 때문에 급속도로 졸음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신관님 많이 피곤하구나?"

"... 네? 아..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하느라...!"


아까 보다 확 깔린 목소리에 돗포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으나 그 손목을 잡아챈 히후미의 눈이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 신 앞에서 다른 생각을 했단 말이야? 더 괘씸한데?"

"..!! 아 아닙니다..! 그게.."

"똑바로 이야기해봐, 거짓말하지 말고"


아까보다 주변의 기온이 서늘해진 기분도 들어 돗포는

마른침을 삼키며 슬슬 히후미의 눈치를 살폈다. 이럴 때 일수록 현명하게 대처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신중을 가했다.


"... 사실 피곤해서 잠깐 졸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것봐, 졸려서 그런 거 맞잖아. 그런 걸로 미안해할 필요 없다니까,"


다시 누그러진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갑자기 잡아 끄는 팔 힘에 중심을 잃고 그의 품 안에 넘어졌다.


"인간들은 잠을 자야 하니까 이해해, 그런 걸로 화 안 내니까 피곤하면 여기서 한숨 자고 가"

"....? 잠을 자라고요? 여기서요?"

"딱 좋잖아? 따뜻하고 편하고~ 원하면 날씨도 조절해 줄 수 있어."

"하지만...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자신의 무릎 위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몸부림치는 돗포의 머리를 붙잡은 히후미가 긴 소맷자락으로 그의 눈을 덮었다.


"쉿, 자는 것에 집중해야지? 좋은 꿈 꿔. 신관님"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을 끝으로 돗포는 까무룩 한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것도 저 악귀의 소행 같아 분했지만 이것도 빈틈을 먼저 보인 자신의 탓도 있었기에 금세 체념하고 말았다.



"헤- 신관님 자는 모습 너무 천사 같잖아."


돗포의 고른 숨소리에 맞춰 꼬리가 살랑 흔들렸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루하기는 커녕 계속 보고 싶어서 흘러가는 시간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신관님은~ 비 오는 날 좋아해?"


히후미의 손이 조용히 수의의 갈라진 틈새로 들어가 쇄골과 연결된 어깨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러면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고 싶다는 욕망을 잡아 누르고 있었다.


"맑게 개어 있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맡을 수 있는 따스한 햇살 냄새와 산뜻한 비 냄새가 섞인 냄새를 좋아하거든. 그날은 어김없이 경사가 생기는 날이기도 해서 축복의 비라고도 불러. "


히후미는 옷 속을 배회하던 손길을 거둔 뒤 다시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신관님도 그날 함께해줄 거지?"






돗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방에 누워있었다. 분명 히후미의 무릎 위에 누운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자 당황스러운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그를 빼 닮은 소년이 들어왔다.


"인제야 일어나셨네, 얼마나 잠을 안 잤으면 반나절을 뻗어 있냐?"

"... 뭐? 한나절을...? 내가?"

"나오질 않아서 들어가니까 문 앞에서 아주 제대로 뻗어서 자고 있던데? 업고 여기까지 오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소년이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며 툴툴 내뱉는 말에 돗포는 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없었어, 내가 문 근처에 가도 잠잠하더라. 형이 있어서 그런 거 같긴 한데- 아무튼 정신 좀 차리고 다녀, 형 요즘 넋이 나가 있는 거 알아? 그러다가 그 요괴 놈에게 해코지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못마땅한 표정으로 힐난하는 동생의 말에 돗포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로 집안사람들은 더욱 그것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잠시 그것에게 무방비한 태도를 보였다는 자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최근에 수면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쓰러졌던 거 같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할게."

"..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지만 어른들에게 한마디 들을 각오는 해야 할 거야. 여튼, 일어났으면 옷도 제대로 갈아입어. 형이 다시 악몽을 꾸는 거 같아서 의원님 불렀거든."

"의원님... 이라면..?"

"알잖아, 떠돌아다니는 그분. 금방 오실 거야."


의원님이라는 말에 돗포는 더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후다닥 일어났다. 이 고립된 산속을 찾아올 수 있는 의원이라면 한 명 밖에 없었다.


"오랜만이군, 못 본 사이에 훨씬 성숙해져서 보기 좋네. 늦게 나마 신관이 된 것을 축하하네."

"아니... 의원님에게 그런 말씀 듣기엔 너무 부끄러운 걸요...! 쟈쿠라이 의원님이 여기 오시게 된 것도 제가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탓이니까요..."

"어른이 된다고 모든 일을 완벽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덕분에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으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게."


장발의 남자가 두 손으로 찻잔을 집어 들고 웃었다. 그는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고 가며 떠도는 의원으로, 칸논자카 집안과는 오랫동안 긴 인연을 맺고 있었다. 돗포는 어릴 때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거인이라고 생각해 무서워했다. 성인 남성의 평균 키를 훌쩍 웃도는 신장을 가졌으니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 인자하고 올곧은 성품을 지닌 쟈쿠라이를 정신적 지주로 따르게 되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많은 도움을 받아 돗포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의원님이야 말로 여전히 정정하신 거 같아 다행입니다.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요?"

"가지고 다니던 약재들이 다 떨어져서 잠시 내 집에 머물고 있었다네. 그 덕분에 돗포군의 소식을 듣고 빨리 이곳에 올 수 있었지. 듣기로는 다시 악몽을 꾸고 있다고 하던데..."

"예... 그게 ..말이죠."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 돗포는 눈을 연달아 깜빡이며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꿈의 내용을 전부 털어놓기에는 민망해져 은근슬쩍 그의 시선을 피해 버리기까지 했다.


"음... 말하기 힘든 일이면 하지 않아도 된 다네,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힘들게 꺼내지 않아도 아니까"

"아.. 아니요..! 다행이게도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니, 이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자네가 모시는 신과 관련된 일인가?"


돗포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리해졌다. 기다란 손끝이 찻잔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만이 공간을 조용히 울렸다.


"... 예... 맞습니다.. 역시 눈치채셨군요."

"신관인 자네의 근심거리라 함은 아무래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일전에 악몽을 꾸던 전적도 있었고 말이지. 그 신이 꿈에서 자네를 해코지 한 겐가?"

"..해코지 ..는... 아니에요.. 저를 자신의 친구라고 반복하는 말만 계속되다 끝났거든요."

"친구...? 친구라... 보통은 신이 신관을 친구라고 칭하진 않으니 참 이상하군."

"예.. 그렇죠.... 의원님 앞이니 솔직히 말씀드리는 거지만... 평소에도 저에게 신과 신관 이상의 관계를 원하는 거 같아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요...."

"뭐, 워낙 그 신이 유독 변덕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군. 한때 영악한 여우였으니 만일을 대비해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해선 안될 거 같군."


말을 마친 쟈쿠라이가 들고 온 가방을 뒤져 무명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약재 주머니를 꺼냈다. 단순히 건강상의 문제는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라면 돗포가 위험해질 수 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우선 오늘은 이 약재를 달여 먹고 잠을 자게, 그리고 당분간은 내가 이곳에 머물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렴."

"네..! 감사합니다!"


옅게 미소를 띄워주던 쟈쿠라이의 얼굴이 금세 다시 어두워졌다. 이지나미 히후미는 그에게 있어 아주 기나긴 질린 악연으로 묶여 있는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식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건가, 히후미군.'


오늘 밤 돗포는 악몽을 꾸지 않을 것이다. 그와 끝내지 못한 대화를 마저 해야 할 상대는 따로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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