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는 허탈한 심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하아.”

진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꿈에도 다시 만날 줄 몰랐던 태준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분명히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왜 이렇게 반가운지….

문득 신입생 시절이 떠올랐다. 태준은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로 단연 눈에 띄었다. 한결이 꽃미남에 가깝다면 태준은 선이 굵고 강해서 남자다운 느낌이 강했다. 한결이 불같은 성질이라면 태준은 차가운 얼음에 가까웠다. 다들 동경은 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아우라가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 눈빛을 한 번이라도 마주치면 그대로 굳어버렸다. 유하 역시 태준에 호감을 가졌지만 자신과는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가까이할 생각조차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학기 초에 친해졌는지 긴가민가했다. 동훈과 먼저 친했는지 유하와 먼저 친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유하가 태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건 이미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도 그때였던 것 같다. 감기 몸살 기운이 있어서 아파서 걷기조차 힘든 날이었다. 얼굴에 땀을 연신 흘리며 커다란 캔버스를 들고 휘청휘청 걷고 있었다. 중요 과제라서 반드시 그날 제출해야만 했다. 동훈에게 연락했지만 수업중인지 받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혼자서 힘겹게 캔버스랑 씨름을 하고 있었다. 강의실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어 보일 수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 캔버스를 덥석 잡아 들었다.

놀란 유하가 동훈인 줄 알고 좋아서 바라보니 태준이 눈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때 눈빛이 얼마나 다정했는지 몰랐다. 태준은 유하의 캔버스를 들고 강의실까지 같이 가 주었다.

그날부터

유하는 심장이 묘하게 뛰는 걸 느꼈다.

두근 두근….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평범한 사랑을 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가난한 형편에 사랑도 사치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에게 그런 감정을 품은 자신이 변태인 것 같았다. 게다가 태준에게는 이미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가능성 1도 없는 사랑에…. 처음부터 포기했다. 

태준은 유하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지 몰라도 친근하게 다가왔고 동훈과도 잘 맞았다. 차가운 외모와 달리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그 반전 매력에 유하는 더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비겁했지만 피했다. 태준은 멀어져가는 유하를 보며 섭섭한 듯 했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이고 다른 친구를 사귀었다.

유하는 자신의 이런 성향을 태준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 지금도 다른 사람이 알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틈 날 때마다 말했다. 

어휴…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건 싫어. 나만 숨기면 괜찮을 거야.

“하아….”

유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좀 전에 옆에서 바보처럼 웃던 한결의 얼굴이 생각났다. 한결도 여자 친구가 있다. 자신을 많이 좋아하는 건 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정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눈빛만 보면 야릇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진무구한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면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해!  

유하는 마음속으로 단단히 결심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


“선배, 오늘 카페 알바하러 가는 날이죠?”

“어. 그래.”

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은 소파에 앉아서 손목을 계속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너 또 격투 게임 연습했냐? 어떻게 미대생이 그림은 안 그리고 그러고 있냐? 미친놈아! 게다가 가능성도 없는데. 쯧쯧.”

“쓰읍. 선배…. 이건 말이죠. 사나이 자존심이 걸린 거라고요.”한결이 능글맞게 웃으며 유하를 쳐다보았다.

“너 요즘 카페 안 오더라.”

“오랜만에 같이 가 줄까요? 보호자로 갈까요?”

한결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그냥.”

유하는 한결이 여유롭게 웃는 걸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페에는 한결의 짝사랑 상대가 있다고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회사원을 사귀면서 그 짝사랑 상대에 대한 마음을 식었구나 싶었다.

결국…. 한결이도 그 짝사랑 상대랑은 잘 안 됐구나. 불쌍한 녀석. 나랑 같네. 

유하는 동병상련을 느끼며 한결을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저 얼굴로도 못 꼬시는 여자가 있다니 그 여자 취향 한번 대단하네. 

“엇. 왜 그런 눈빛으로 봐요. 이상해요. 마치 비를 맞고 돌아다니는 불쌍한 유기견을 보는 눈빛이잖아요!”

한결이 손으로 턱을 짚으며 눈을 가늘게 뜨며 유하를 보았다.

“아니야. 그냥. 별생각 없었어.”

유하가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강한결. 요즘같이 산 지 좀 됐다고 이제 내 심리를 금방 읽는구나. 조심해야겠다. 

바보인 줄 알았는데 진화를 거듭하고 있어.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지내는 애한테 그 짝사랑 얘기 꺼내서 우울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유하는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카페 가는 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알 수 없는 일이….


*


유하는 카페에 들어갔다 평소처럼 일을 시작하려고 앞치마를 매고 고소한 커피향을 맡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난 프로야. 그림도 좋지만 갈수록 커피도 좋아지네. 이쪽으로 구미가 땡기네. 카페인 너무 좋앙.

유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진하게 한 잔 타서 쭉 들이켰다.

그때 예상치 못한 사람이 눈앞에 불쑥 나타나서 입 안에 머금은 커피를 바로 뿜었다.

“웁!”

어…어떻게 된 일야. 내가 잘 못 본 건가. 아니면 내가 잘 못 온 거야. 

유하는 커피를 흘린 채로 멍하니 눈앞에 상대를 보았다.

“야… 인사치고는 좀 그렇다.”

태준이 옷에 묻은 커피를 휴지로 닦았다. 멍하니 있는 유하에게도 휴지를 건넸다.

“뭐해. 빨리 닦어. 다행히 앞치마를 하고 있어서 옷에 거의 안 묻었네.”

유하는 떨리는 손으로 태준이 주는 휴지를 받았다. 혼이 나간 듯 앞치마를 휴지로 대충 닦았다.

“너무 대충 닦네. 그렇게 닦으면 안 돼.”

태준이 유하의 앞치마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커피를 휴지로 꾹꾹 눌러서 야무지게 닦아주었다.

두근 두근. 안 돼!

유하는 얼굴을 붉히며 정신이 들었다.

“내가…내가 할게.”

“어.”

태준이 유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너 여기 커피 마시러 왔어?”

유하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너 눈을 어디 달고 다니는 거야?”

태준이 자신의 앞치마를 손으로 가리켰다.

유하는 태준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세히 보니 카페 앞치마였다. 얘는 뭔데 손님이 앞치마를 하고 있는 거지?

“나 여기서 알바 해. 한 지 며칠 됐는데 너 주말 알바라서 몰랐나 보다. 크큭.”

“뭐어! 여기서! 왜? 하필 여기서 일을 해!”

유하가 놀라서 언성을 높였다.

자…잘 못 들었겠지. 그럴 리가 없어. 하고 많은 알바 자리 중에서 왜 하필 여긴 데.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가 별짓을 다했다.

태준이 유하의 부정적인 반응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냥…. 마음이 심란해서 몸이라도 바쁘면 좋겠다 싶어서 말이야.”

“뭐?”

유하는 태준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아뿔싸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나 자신만 생각했네. 태준이는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잖아. 게다가 재벌까지는 아니더라도 태준의 집도 꽤 잘 사는데 이런 알바 할 필요 없을 텐데 일부러 그랬구나. 어휴….

유하는 자신의 짧은 생각에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잘 부탁할 게.”

태준이 유하의 어깨를 치며 싱긋 웃었다.

“어…. 그래.”

유하는 시무룩하게 답했다.

태준이 무슨 잘못이야. 잘못이 있다면 내가 잘못이지. 어휴…. 그냥 우연일 뿐이야. 자꾸만 우연이 겹치니깐. 이게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 아니야. 미친. 그런 게 아니고.

유하는 혼자 머릿속이 복잡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미친 듯이 꾹꾹 눌렀다.

태준은 어느새 매장으로 나가서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주말에 원래 손님이 많았지만 날이 유난히 더운데다가 태준이 들어오고 나서 여자 손님들이 더 많이 늘었다. 유하는 쏟아지는 주문에 정신없이 음료를 만들었다.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도 꽤 되었다. 손님들의 짜증이 전해져와서 불안하고 초조했다.

으악! 무슨 손님이 이렇게 많아. 태준이 얼굴 보려고 온 건가. 태준아, 그냥 그만두면 안 되냐. 미치겠어.

카운터는 비상이었다. 유하뿐만 아니라 다른 알바생들도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땀을 흘리며 주문을 처리하고 있었다.

유하는 너무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손목이 덜덜 떨렸다. 

하아… 집중. 집중.

“으악!”

유하는 기다리는 손님 눈치를 보느라 결국은 실수로 뜨거운 물에 손목을 데였다. 태준이 유하가 다친 걸 알고 서둘러 가까이 다가왔다.

“으윽.”

붉은 유하의 손목을 잡고 급히 싱크대로 가서 찬물을 틀어 식혔다. 붉은 기운이 어느 정도 빠지자 태준이 유하의 손목을 놔주었다.

“조심해야지. 많이 안 데여서 다행이다.”

“괜찮아. 늘 당하는 일인데.”

“가서 약 바르자. 그냥 놔두면 흉터 생길지도 몰라.”

태준은 유하에게 연고를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유하는 다정한 태준의 모습에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전히 착하고 따뜻하네. 나한테 잘해주지 말란 말이야. 저리 가.

“고…고마워.”

유하는 태준과 시선을 못 마주치고 서둘러 주방에서 나왔다. 화장실로 가서 잠시 숨을 골랐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게…. 

그게 되냐고! 아우! 씨발!

유하는 머리를 화장실 벽에 마구 퍽퍽 박았다. 일단 육체에 고통을 가하니 제정신이 돌아왔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카운터로 나왔다. 이제 마칠 시간이 다 되었기에 손님들이 다 빠지고 한산해졌다. 태준은 매장에서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딸랑.

현관문이 열리고 여자 알바생들이 환호에 가까운 시선을 보냈다.

유하는 뭐지 싶어서 자동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오늘 안 안 온다고 했잖아. 

한결은 당당하게 알바생들에게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유하를 보자 바보처럼 헤벌쭉 웃었다.

“선배!”

은근슬쩍 애교를 부리며 손을 마구 흔들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신나서 깡충깡충 달려오는 것 같았다.

유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결을 보았다.

“선배, 요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선배랑 같이 갈려고 왔어요. 저 잘했죠?”

“어? 그래. 나야 차 태워주면 고맙지.”

유하가 눈알을 마구 굴리면서 말했다. 

태준이 두 사람을 보며 다가왔다.

안 돼. 강한결은 위험해. 만나면 안 돼.

유하는 본능적으로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요즘 한결의 질투가 뜸하긴 해도. 그래도 위험했다. 한결은 태준을 보자마자 바로 스캔에 들어갔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유하야, 누구?”

“어…. 얘는 강한결이야. 미대 1학년. 후배.”

유하가 억지로 웃으며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소개시켰다.

에잇,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학교에서 볼 거 아니야.

“한결아, 서태준. 미대 2학년 선배야. 유학 갔다가 돌아왔어.”태준이 유하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한결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결은 태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힘을 꽉 주며 힘 싸움을 했다. 눈싸움도 동시에 하는 듯 눈이 시뻘겠다.

둘 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손을 마구 붕붕 흔들었다.

유하는 그 모습에 애가 탔다. 

뭐야, 둘 다 갑자기 웬 힘 자랑이야. 동네 꼬맹이도 아니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얼굴이 빨개진 채 동시에 손을 놓았다.

“큭. 힘 세네.”

“조각하시나 봐요. 손도 거칠고 악력도 장난 아니네요. 태준 선배.”

한결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태준은 매니저의 눈총에 다시 서둘러 청소를 하러 갔다.

한결은 진지한 표정으로 유하를 째려보았다. 좀 전에 힘 자랑하느라 얼굴이 바보처럼 시뻘게져 있었다. 유하는 바짝 긴장했다. 마른침을 삼켰다.

한결은 유하에게 상체를 바짝 숙여서 태준의 눈치를 살피며 유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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