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다시 한참을 눈 맞췄다.

“…술 한 잔 할까?”



4.

 종현은 조심스러운 제안을 별말 없이 수긍했다. 그래, 서로 어색해하기만 하다 헤어진다면 분명 기분만 찝찝해질 테니까. 알코올로 미묘한 관계를 정리해버리면 그만이라고 종현은 생각했다. 어차피 3달 후에는 학원을 그만 둘 작정이었고, 그 동안만이라도 편히 지내고 싶었다. 정말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지금처럼 불편하게 서로를 피하고 이것저것 재는 일은 싫었다. 민현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둘은 학원 주변 선술집에 들어갔다. 의논해서 튀김 조금도 시켰다.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너는?”

“나도. 하루 종일 수업하다보니 목 다 나가겠더라.”

“그으래. 생각보다 힘들지.”

“엄청.”



종현은 제 소매를 자꾸 괴롭힌다.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둘만 차분하니 이질적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스물여섯의 민현은 낯선 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게 됐는지, 다른 취미가 생기기라도 했는지, 술은 어느 정도 마실 수 있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 지속되는 침묵에 종현은 이야깃거리를 쥐어짜냈다.



“난 네가 학교에서 일할 줄 알았어.”

“아, 임용 안 쳤어. 포기했거든. 붙는다는 보장도 없지만.” 

“어…….”



 말실수했다.

 어떻게 보면 정해진 대답이었다. 민현이 학원가에 취직했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종현은 눈을 굴린다. 질문 끝이 날카로워 민현을 찌른 건 아닐지 걱정했다. 어색함은 여러모로 피곤하다. 자꾸 내뱉은 말을 검열하고, 또 검열하다 자책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 않은 말도 혹여나 상대방에게 거슬렸을까 두려워진다. 민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술을 몇 모금 마시고는 입에 묻은 거품을 티슈로 닦아냈다. 실제로 그에게 종현의 질문은 그저 그랬다. 무덤덤함은 자책하는 종현을 위로한다.



“내 적성은 영 아닌 것 같더라고.”

“너랑 잘 맞다고 생각했었는데.”

“처음에는 나도 그랬지. 애들이 떠들거나 말 안 들을 거 각오하고 갔는데 진짜 복병은 따로 있더라. 내 수업을 아예 안 들어주니 뭔 수를 쓸 수가 없어.”

“으응.”

“사실 진짜 문제는 나였어. 수업 들어주는 애들이 고마워서 걔들한테만 괜히 더 잘해주고 싶더라고. 내가 자꾸 싫어져서. 그냥. ……넌 어때?”

“음, 뭐. 나는 그냥저냥. 잘 지냈어.”

“수학과였지?”

“응.”



 종현은 민현의 말을 유심히 듣는다. 덤덤한 말투로 유리잔을 매만지는 그에 종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너무 깊은 이야기를 해버린 탓에 민현은 머쓱한 웃음을 보였다. 곧바로 일본풍 식기에 튀김이 담겨 나온다. 감사합니다. 둘은 종업원에게 가벼운 인사를 전했다.



“지금 하는 건 그럼….”

“그냥 알바.”

“알바지만 그래도 선생님이잖아.”

“아니야. 보조 강사랄 것도 없어. 채점이나 타이핑 알바 같은 거거든. 애들 풀이 도와주기는 하는데 뭐 그것도 조금이니까. …내가 너처럼 누굴 잘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황민현 선생님 설명 잘한다고 애들이 그러더라.”

“너도 만만찮아. 매번 나 가르쳐줬잖아. 김종현 선생님 실력 제가 다 알거든요.”

“매번은 무슨 매번이래.”

“우리 고등학교 때.”



민현은 하던 말을 잠시 멈춘다. 학창시절의 이야기는 조심스러운 부분이니만큼 함부로 언급하면 안 된단 생각을 해서이다. 둘이 연애하던 시절이고, 지금은 헤어진 지 오래된 전애인 사이니까. 둘에게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다.

종현은 대답할 말을 고른다. 민현이 거슬리지 않을 법한 말을 찾아 헤맸다. 그 잠깐의 공백 동안 민현은 자책한다. 고르고 자책하고, 또 고르고 자책하고. 



“……매번은 아니었대도. 오히려 네가 날 더 많이 도와줬지.”



 긴장 어렸던 민현의 눈이 풀어진다. 하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김종현 국어 잘 못했었지. 종현은 눈을 크게 뜬다. 야아. 너 나한테 왜 그래?



“응?”

“됐어. 얄미워.”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종현은 예쁘게 접어지는 민현의 눈 꼬리에 시선을 두었다. 전부터 저렇게 웃곤 했다. 너무 정석적으로 웃는 탓에 억지웃음처럼 보이기도 하는 민현의 웃음. 한 때는 참 좋아했던 부분이었는데. 종현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비운다. 하나를 기억해내면 두 개가 기억나고, 두 개가 기억나면 서너 기억이 줄지어 따라온다. 괜히 추억팔이 하지 말자. 

 종현의 잔이 바닥을 보인다. 그에 비해 민현의 것은 절반 가량 비워져있다. 민현은 용케 그걸 캐치해냈다.



“더 마실래?”

“어, 나?”

“그럼 너지 누구야.”

“상관없는데……. 너는?”

“난 됐어.”

“그럼 나도 그만 마실게.”

“응, 그래. 그럼.”



민현은 마지막 남은 튀김을 종현의 앞 접시에 덜어주었다. 이거 너 먹어. 엉, 고마워. 오늘 계산은 내가 할게. 됐어, 그냥 더치 해. 나 잘 봐달라고 사주는 거야, 종현이 네가 직장 선배인 셈이잖아. 알바한테 선배는 무슨 선배야…. 




5.

결국 민현이 계산을 했다. 미안한 마음에 종현은 다음번에 꼭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다시 함께 술을 마실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기약 없는 약속이다.

둘은 조금 떨어져 걸었다. 공기는 추운데 다행스럽게도 바람은 불지 않아 걷기에 편했다. 종현은 전애인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가, 에 대해 고민해본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열여덟을 다시 상기했다. 민현을 어쩌다가 좋아하게 되었을까? 어쩌다 사귀게 됐었지. 우울하고 추잡했던 끝은 항상 기억에 남아있는데, 좋았던 것들은 이상하게도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좋았던 것들을 잊지 않은 채 계속 담고 살다보면 미련이란 게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그는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좋은 추억들을 다시 묻어두며 그렇게 합리화했다. 

 종현은 관계라는 걸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의 유대는 분명 따뜻한 것이었지만, 타인과의 유대에서부터 얻은 위로의 무게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책임이 따르는 관계는 성인이 된 종현에게 짐과 같은 것이었다. 동요하지 않는다는 듯이 굴었지만 인연이 끝맺음 될 때마다 종현은 깊은 수렁에 빠져 몇 날 며칠을 허우적댔다. 우울함의 늪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그렇게 고여 있다가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고, 헤어지고. 반복적인 일들이 서너 번 생기니 지쳐버린 것이다. 

 황민현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까?



“안 추워? 너무 얇게 입었어.”

“후회하는 중. 그래도 어제보단 나은 것 같아.”



민현은 목폴라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가운 공기에 오래 닿은 탓인지, 술기운 탓인지 뺨이 붉었다. 종현은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황민현 너 술 약하지.”

“…어떻게 알았어?”

“아니, 너 얼굴 보니까. 추워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구. 그냥 찔러봤어.”

“그럼 너는. 잘 마셔?”

“그럭저럭.”



그럭저러억. 늘인 말 틈으로 새어나오는 자신감에 민현은 의외라는 생각을 한다. 고등학교 때 서로 주량 맞춰보면서 놀고 그랬는데. 황민현은 술 엄청 세서 애들 택시 잡아주는 담당일 것 같아. 종현이 너는 한 잔만 마셔도 갈 것 같애. 샤프로 책상에다 낙서를 하며 나누었던 대화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우리 추리 완벽히 틀렸었구나. 민현은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응?”

“그냥, 옛날 생각나서.”

“…그으래.”



 입이 주책이지. 속으로 민현은 또 자책했다. 왜 자꾸 고등학교 때 얘기를 꺼내려고 하니, 너는. 종현이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좋아할 리 없단 걸 알면서도 자꾸 세심하지 못하게 구는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불가항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민현은 자꾸만 실수를 했다. 종현을 볼 때마다 열여덟의 그가 떠올랐다. 옆에 서있는 제 모습마저도 그려진다. 스물여섯의 종현에게서 열여덟의 종현을 찾아낸다. 종현의 말투에서, 걸음걸이에서, 눈빛에서부터 앳되었던 열여덟을 그렸다. 그럴 때마다 민현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꼭 열여덟이 된 듯 했다. 야자가 끝난 밤, 아파트 벤치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 종현을 데려다주곤 했던 그때 같았다. 정말 좋았었지.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공부에 지쳐있었음에도 참 좋았었는데. 민현은 순간 그때의 그 감정과 느낌들이 그리워졌다.

…김종현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까? 한참을 조용히 걷는데 종현이 입을 연다.



“학원에서 처음 봤을 때 사실 좀 놀랐어. 바뀐 게 하나도 없었거든. 아니, 바뀐 게 없다는 게 아니라. 내가 상상했던 스물여섯의 황민현이랑 네가 똑같은 거 있지.”

“그랬어?”

“그런데 얘기 해보니까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종현은 앞을 응시하고 있다. 빨개진 코를 훌쩍인다. 황민현과 김종현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우리 못 본 시간이 꽤 길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와. 6년만이다, 6년.”

“대단한 것 같아. 벌써 대학도 다 졸업하고.”

“그러게.”

“민현이 너는 되게 멋있어졌어.”

“…….”

“멋있더라. 아까 네가 그랬잖아. 차별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다고.” 

“응.”

“……학생들에게 참 좋은 선생님이 되겠구나 싶었어. 학교 뿐만이 아니라 학원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민현은 종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는다. 이젠 덤덤해져버린 고민들이 종현에 의해 다시 수면 밖으로 떠올라 보듬어진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겨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걸까 나는. 아니면 아직 채 아물지 못 했던 걸까. 가슴 한켠이 욱신거린다. 

 둘은 친구로 지낼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친구로서 할 수 없는 더 깊은 것들을 겪었다. 그 숨 막힐 듯 좋았던 감정을 덮어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열여덟의 종현은 아직도 열여덟의 민현을 사랑했다. 고등학생 때를 아무렇지 않게 추억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시절에 무덤덤해질 자신이 없다. 민현과 함께 있다 보면 저절로 그 때를 회상할 터였다. 술을 마셨을 때, 길을 걸었을 때 묻어두었던 추억들이 종현을 괴롭힌 것처럼 민현과 함께라면 분명 종현은 열여덟의 그 시절에게 잠식당할 것이다. 물들어버릴 게 뻔했다. 추억에 취해서 민현을 사랑한다는 착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남에게 정을 주는 것 또한 두려웠다. 민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종현은 예상했다. 분명 보다 이성적이고 냉철하다고 생각해왔으니까. 열여덟의 민현에게 관계란 그러했다. 깊은 관계는 민현에게 있어서 민감한 영역이었다. 친절함은 민현의 원만한 교우관계를 도왔지만 딱 그뿐이었다. 남들에게 부드러웠지만 제 것을 공유해줄 마음은 없었다. 열여덟의 민현은 스물여섯의 종현이었다. 그러니, 종현은 민현이 골치 아팠던 학창 시절의 사랑 놀음 따위에 연장선을 긋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그러나 지금의 민현은 달랐다. 추억들이 종현을 괴롭힐 때, 민현은 추억들로 인해 작게나마 웃음 지었다. 종현이 열여덟의 그들에 물들까봐 두려워 할 때, 민현은 열여덟의 그들에게 물들고 싶어했다.

스물여섯의 황민현은 스물여섯의 김종현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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