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디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벤치의 왼쪽 끝에 앉았다. 밀러는 오른쪽 끝에 앉았다. 등 뒤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관광객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디는 제가 꿈에서 마주했을 사람들의 웃음을 떠올렸다. 어지럽게 얽힌 시장통의 사람들, 그 골목을 뛰노는 아이들, 그들의 웃음, 그들의 삶. 그 위를 덮는 밝은 주홍색의 화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것을 빨갛게 밀어버린 자리에는-

그거 안 드실 거예요?

하디는 고개를 돌려 밀러를 바라봤다. 밀러는 손가락으로 알렉의 손을 가리켰다. 하얗게 녹은 아이스크림이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용암이 폼페이를 뒤덮듯, 천천히 흘러내려서는. 하디는 어깨를 으쓱하고서는 아이스크림이 옷에 떨어지지 않게 손을 어정쩡하게 들었다. 밀러는 벌써 아이스크림을 절반가량 먹어치운 뒤였다. 하디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밀러가 아이스크림의 콘을 와삭댈 쯤 입을 열었다.

내가 폼페이에 있었어.

폼페이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밀러의 눈썹이 말끝과 함께 올라갔다. 하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 폭발하던 날에.

아, 저번에 말한 꿈 어쩌고예요?

밀러는 콘 주위를 빙그르르 돌아가며 과자를 먹었다. 입가에 초콜릿이 조금 묻었는데. 하디는 밀러에게 말을 해주려다 말고 질문에 고개만 끄덕였다. 밀러가 알아서 하겠지.

아직도 그 꿈을 꿔요? 신기하네. 보통은 한두 번 이어서 꾸고 말지 않나요?

그러게. 멈췄으면 좋겠군.

언제는 재밌다면서요?

이제는 아니야.

흠.

밀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잠시 생각하더니, 남은 아이스크림 콘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하디는 자기도 아이스크림을 먹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죽을 담고 있는 눅눅한 과자뿐이었다. 나머지 아이스크림은 그의 발치에 둥그런 웅덩이를 만든 뒤였다. 

어떤 내용인데요?

밀러는 하디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꽤나 진지하게 들어주는 듯해서 하디는 아이스크림에 쏟던 신경의 방향을 오전 내내 하던 고민으로 돌렸다.

알다시피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서 도시 전체가 재에 묻혔잖아. 수많은 사람들이, 산채로.

그렇죠. 거기서 도망치고, 살아남고, 그런 꿈을 꾸는 거예요?

아니, 그보다 끔찍한 거야. 내가... 내가 그걸 일으켰어, 밀러.

밀러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디는 밀러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깨고 보니 저도 제가 꿈속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건만, 밀러라고 다르겠는가. 그래도 그는 밀러의 혼란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무슨 외계인을 막으려고 전혀 폭발할 조짐이 없던 산을 폭발시켰어.

외계인이라고요? 우주선 타고 날아오는, 외계인?

밀러는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하디는 골똘히 생각했다. 우주선이 있었던가? 꿈의 세부적인 사항은 화산재처럼 흩날려 사라진 뒤였다. 오직 레버를 당기기 직전의 감정만이 생생할 뿐. 그는 최선을 다해 멀어지는 기억을 붙잡았다.

우주선은 없었지만 이상한 외계 기술은 있었어. 병처럼 퍼져서 사람에게 기생하는 류였던 것 같은데-

별의별 게 다 있네요. 듣도 보도 못한 종류인데. 경위님이 SF를 좋아하셨던가요?

하디는 말이 끊기자 부루퉁한 표정으로 밀러를 봤다. 미안해요. 밀러는 입 꼬리를 일자로 편평하게 당기며 사과했다.

그래서, 내가 화산을 터트렸어.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이십만 명의 사람들을... 내가 죽인 거야, 밀러. 아니, 죽였을지도 몰라.

죽인 거예요, 살린 거예요, 아니면 죽였는데 그렇게 믿기 싫은 거예요?

아무것도 몰라. 레버를 당기기 직전에 깼어. 내가 레버를 당겼는지, 말았는지...

하디는 밀러의 반응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저를 한심하게 보는 첫 번째 밀러와, 제발 현실 감각을 가지라고 질책하는 밀러와, 저를 안쓰럽게 보며 상담을 권유하는 밀러와, 다른 수많은 밀러들을.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많은 밀러들이 떠올랐고, 그 밀러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하디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의 밀러가 그랬다.

매번 그래요?

응?

하디는 상상 속의 밀러를 모두 돌려보내고 제 옆의 사람에게 집중했다. 밀러는 혀를 내서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남김없이 핥았다.

꿈에서 말이에요. 매번 그러다가 깨냐구요.

비슷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누구를 구하고, 누구를 놔두고, 누군가를 죽이고...

신 놀음인가요?

그거랑은 달라.

제가 보기엔 비슷한데. 그러면 영웅 놀이라고 해요. 경위님, 구원자 콤플렉스라도 있어요?

...그런가?

그럴지도요.

하디는 바닥에 떨어진 웅덩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밀러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밀러는 하디가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보는 동안 침착하게 기다렸다. 괜히 손가락에 묻은 부스러기를 탁탁 터는 밀러가 하디의 시선 끝에 잡혔다.

한심하지?

하디는 정적을 메꾸려 어색한 질문을 던졌다. 이제 생각에 빠진 쪽은 밀러였다. 으음... 밀러는 소리를 길게 늘이며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방에서 티슈 두어 장을 꺼내 하디에게 건넸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그래요. 그냥 꿈이잖아요, 하디. 다 살렸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외계인은 가능하구요?

하디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티슈를 받으며 손을 닦았다. 그렇게 하면 이 대화에서 도망갈 수 있기라도 한 듯. 밀러는 허, 숨을 내뱉고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하디를 설득했다.

꿈은 원래 말도 안 되는 일로 가득 차있어요. 이번에도 그렇다고 해요. 다 살았어요. 그렇게 믿고, 현실에 집중하라구요.

하디는 끈적하니 젖어버린 냅킨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의 조언은 단순했고, 또 그만큼 어려웠다. 하디는 밀러가 해준 또 다른 조언을 떠올렸다. 티켓을 찢어버리라던 거침없는 조언. 하디는 결국 그 말을 따르기는 했지만, 한동안 마음이 불편하기는 했었다.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걸까. 하디는 고개를 돌려 밀러를 바라봤다.

미안해.

허, 살다살다 경위님이 사과하는 것도 다 들어보네요. 알겠으면 꿈에서 좀 깨요. 우리한텐 집중해야 할 사건이 있다구요.

그래, 알겠어.

* * *

닥터는 요동치는 타디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양 손과 발을 모두 동원했다. 아무리 발을 뻗고 팔을 당겨도 한 사람으로는 안정된 항해를 하기에 부족했다. 그는 혼자였다. 로즈, 재키 마사, 도나, 미키, 잭, 모두 없었다. 그는 홀로 남겨졌다. 아니지, 그는 도망쳤다. 한 남자가 샌드브룩에서 도망쳤듯이. 샌드브룩? 하디는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는 새빨갛고 큰 버튼이 놓여 있었다.

빨간 버튼. 하디의 속 어느 부분은 그 버튼을 누르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절반은 호기심으로, 절반은 그래야만 세상을 살릴 수 있다는 속삭임으로. 하디는 그 속삭임을 들었다. 이 버튼을 누르면 눈앞의 행성이 파괴된다. 하지만 누르지 않으면 은하 전체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질 것이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나 생명이 치고 들어올 틈은 남긴다. 하지만 이 바이러스는 그 틈조차 주지 않았다. 약았군. 그래, 약았지. 

그러니 어서, 

목소리는 속삭였다. 

버튼을 눌러.

거대한 트롤리 문제. 행성 하나 가득한 사람들-엄밀히 따지면 베스피폼이고, 그 수는... 글쎄. 80억?-과 은하 가득한 생명들. 한 명의 사람과 다섯 명의 사람들. 그들의 운명을 쥐고 있는 건 레버를 쥔 사람, 버튼을 누를 자신. 하디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왁스칠이 된 빳빳한 머리칼이 손에 가득 담겼다. 닥터. 그는 저도 모르게 이름을 속삭였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닥터가 아니었다. 이런 선택을 내릴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뭐 해요?

이전까지 꿈에서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 하디는 옆을 돌아봤다. 오렌지색. 그는 편안함을 느꼈다. 밀러는 품이 넉넉한 바람막이를 입고 팔짱을 낀 채 하디를 쳐다봤다. 지끈거리던 머리가 가벼워졌다.

밀러.

그거 누르기는 할 거예요?

밀러는 성큼성큼 하디의 옆으로 걸어오더니 그가 말릴 새도 없이 버튼을 꾹 눌렀다. 발 아래가 크게 흔들렸다. 하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밀러를 바라봤다. 충격파에 안경이 코를 따라 흘러내려 시야를 반쯤 가렸다. 까만 뿔테안경.

뭐 하는 거야 밀러.

하디는 떨리는 목소리로 밀러를 불렀다. 밀러는 어깨를 으쓱하며 하디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뭐 하긴요. 다 살렸죠.

하지만 그 버튼은-

하디.

하디는 말을 멈췄다. 꿈에서 저를 하디라고 부르는 이는 없었다. 난 닥터야. 목소리가 볼멘소리를 했다. 밀러는 하디의 갈색 줄무늬 정장을 붙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다 살았어요. 모두가, 다.

하디는 밀러의 눈을 보며 그 말을 믿어도 될까 고민했다. 가슴 속 목소리도 그를 의심하는 투였다. 하지만 밀러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안 죽었어요. 오늘은.

아무도?

아무도. 그러니까 그만 일어나요.

밀러는 하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토닥임이 네 번째가 되자, 하디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밀러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런 짐을 질 사람은 당신이 아니에요.

그리고 하디는 잠에서 깼다.


그 날, 우주의 한 구석에서는 기적적으로 아무도 죽지 않았다. 어쩌면 꿈으로 치부될,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이것저것 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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