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1 글 수정 






 나는 황량하게 빈 아이오와에서 흙먼지 냄새를 풍기며 자랐다. 프랭크가 그 스스로 적적한 삶을 원해서 이곳에 살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히 술에 취하면 흔히 보이는 그 주정에 마을 사람들이 질려 옥수수와 맥주만 먹고 살라며 그를 쫓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위장을 알코올로 채우는 것에만 흥이 돋는 그와는 다르게 근처 인가가 10km는 꼬박 떨어져 있는 그곳에서 어린 꼬마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프랭크와 주사를 나눌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나는 샘이 떠나고 난 뒤 먼지 쌓여가는 그의 방에서 때가 탄 상자 안에 있던 조지 커크의 훈장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훈장을 보고 만지는 횟수가 백 번을 넘어가면서 눈을 감고도 그것의 형태를 그대로 그려낼 수 있게 되자 퍽 싫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침대 밑에 상자를 쑤셔 놓고 문을 단단히 잠근 나는 형과 삼촌이 없는 집 안을 할 일 없이 귀신처럼 돌아다녔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을 채운 죽음같은 적막을 쉬이 견딜 수가 없어 집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바깥이야 다를 바 없었지만 적어도 키 보다 높게 솟은 옥수숫대를 분지를 때마다 / 한 생물의 죽음치곤 보잘것없는 미약한 소음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떤 날은 배경음 삼아 물릴 대로 물린 홀로그램 교육 영상을 틀어놓았고, 또 어떤 날은 즐거운 이야기꾼이 있는 마냥 공중에 말을 던지며 혼잣말을 할 때도 있었으며, 여느 때처럼 여물지 않은 옥수수를 망가트리기도 하면서, 뻥 뚤린 터전에 비해 숨이 턱턱 막히는 곳에 간간이 공기를 불어놓고 살았을 때였다.




 바깥에서 평소보다 낮은 먹구름이 우중충하게 깔린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보며 하루를 보내던 날이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번쩍하는 빛이 땅에 꽂히더니 요란한 폭발음이 대지를 찢어발긴 그 순간이란! 무료하게 살아가기만 하던 꼬마 제임스의 몸과 정신에 강렬한 충격을 선사해 준 찰나였다.


 천지를 뒤흔드는 그것에 그대로 뒤로 나자빠진 몸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이내 쏴아 소리를 내며 물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누워 얼굴을 적시는 빗물을 느끼며 몽롱한 정신에 힘이 겨운 눈 깜빡임을 한 번 했다.


 몇 초, 몇 분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몸을 두드리던 미적지근한 비가 곧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 냉기에 조금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킨 나는 공중에 잠시 떠올랐던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이내 습한 냄새를 풍기는 공기를 잔뜩 들이켜곤 푸슬푸슬 웃음을 내다가 이내 곧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굉음으로 멍멍해진 고막에 깔깔하는 웃음소리가 점점이 들려오자,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뒤 옥수수 잎이 빗방울과 함께 춤을 추는 소리를 배경 삼아 또다시 그 줏대 없는 웃음을 실실 흘려댔다. 나는 한참을 웃느라 숨이 모자라면서도 낄낄거리는 것을 그치지 않은 채 소리 좀 더 키워봐! 하고 공중에 대고 고함을 쳤다. 


 하늘은 대답을 해주듯 우르릉 쾅! 하고 또다시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자연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흥이 나서 몸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간 저를 괴롭히던 그 적막을 아주 간단하고 강렬하게 파괴해버린 저 울림이 무척이나 통쾌해서 일 것이다. 나는 나에게 크나큰 기쁨을 선사해준 천둥을 따라하고자 입으로 쿠콰아앙! 소리를 터트리며 바닥에 고이기 시작한 물웅덩이를 발로 굴러 산산이 부서트렸다. 


 물론 별 볼 일 없는 물장구에 불과했지만 나는 기온이 뚝 떨어져 몸이 발발 떨릴 때까지 밖에서 꽥꽥 소리를 질러대며 발작하듯 집 앞마당을 뛰어댔다. 안타깝게도 그날 밤, 그 몇 시간의 발작으로 얻은 고열로 인해 사흘을 침대에서 꼼짝도 못 하고 앓아누워있어야 했지만 말이었다.






 하지만 몸이 반쪽이 날 정도로 심한 감기에 걸린 것 치고는 비 오는 날에는 밖에서 지랄발광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깨닫지는 못한 듯했다. 비가 올 때마다, 아니 비가 오지 않더라도 낡은 나무집을 갉아먹는 흰개미의 사각거리는 주둥아리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날일 때마다, 바깥으로 뛰쳐나가 짐승같은 소리를 질러대며 옥수수밭을 내달리곤 했다. 목젖을 찢고 나오는 고함소리와 고막을 뚫고 나올정도로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빳빳한 옥수수 이파리들에 여린 살갗 죄다 베어도 잔뜩 흥분해선 얼굴색을 벌겋게 붉히곤 했다. 그렇게 목이 잔뜩 쉬고 진이 잔뜩 빠지고 나서야 집에 들어오면 전신이 시뻘건 색으로 물든 채 색색거리는 나를 보며 프랭크는 한심하단 어투로 혀를 차댔다. 그래도 전과는 달리 비속어가 섞인 질책이 쏘아지지 않는 것은 광증에 걸린 것 마냥 기이한 열락으로 번들거리는 시퍼런 눈동자를 감히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라.


 그렇게 내 어린 시절 동안 괴랄한 울부짖음이 내 목소리가 되었고, 붉은 핏방울들이 모여 내 살이 되었으며,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흥분이 내 혈관이 되어 온 몸을 감싸안았다. 그 이후 적당히 어른인 체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하루를 쉬지 않고 클럽에 가 몸을 둥둥 울리는 음악 소리에 묻혀 몸을 흔들었고, 내 엉덩이를 노리는 놈들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기어코 피를 보았으며, 술과 담배 그리고 가끔은 마약을 동원하여 핏줄을 타고 뇌를 어지럽히는 환각 속에서 한참을 해매었었다. 나중에 이르러서야 담배와 마약은 몸을 축내는 데에 일등공신이라 끊기는 했지만 적당한 고양감을 불러일으키는 알코올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프랭크가 이래서 알코올 중독이 되었을까. 기억 사이로 술배가 잔뜩 튀어나온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나잇을 하는 이의 집에서 하루살이처럼 전전하는 동안 그의 얼굴을 못 본 지 몇 년이 되었음에도 그의 외향을 쉽게 그릴 수 있었다. 


 좀 추하네. 하는 감상이 잠시 일었다가 사그라졌다. 그때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스웠다. 암. 청춘이 왜 청춘이겠어? 짧고 화려하게 살다가 죽는 거지 뭐. 번개처럼 말이야! 응응. 멋진 모토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이름조차 외우지 못한 여성이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다가 내 고간을 쓸어내리며 야살스럽게 속삭여 왔다. 제임스, 자살하고 싶으면 나랑 섹스 한 번만 하고 해. 


 자살을 방조하겠다는 무관심 보다는 유혹적인 손길이 더 맘에 들었기에 그것을 거부할 마음조차 머금지 않고 바로 그녀의 몸에 덮쳐들었다. 이런, 한 번이라니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나 아직 창창하다고? 라는 실없는 소리와 함께 말이다.


 이러니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도 나에겐 술과 섹스 그리고 200km/h를 훌쩍 넘는 속도를 낼 수 있는 엔틱 오토바이와 심심할 때마다 듣는 클래식 락밖에 없었다. 사실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아 굳이 찾지도 않은 거였지만. 그래도 뭐, 그 나이까지 되고서도 칠렐레 팔렐레 하고만 있으니 커크라는 성에 조그마한 기대를 갖던 이들도 이내 심드렁하니 저 망나니 또 왔네 하고 취급하는 점에서는 내 인생을 좀 더 편하게 허비하며 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도 그런 생각을 품는 다수의 어른들이 알지 못 한 것은 있었다. 바로 스타플릿 입학시험을 치뤘던 일 말이다. 물론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숭고한 정신이 깃든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그저 지저분한 술 내기에 엮인 탓에 조약한 머리를 굴려 펜슬을 까닥인 행위였을 뿐이었다. 애초에 시험은 통과했더라고 면접은 반드시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고 의미없이 치른 것이었다. 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는 저 우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앞으로 성대와 고막이 퇴화하게 될까요? 하는 이상한 대답한 중얼거리는 자신이 훤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들어도 아주 미련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은 그 몽상의 질의응답이 못내 우스워 평소처럼 위장을 알코올로 가득 채우며 오늘은 누구 집에서 자 볼까 하고 눈에 막 잡힌 여성에게 헤픈 눈웃음을 샐쭉거렸다.


 그게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입학할 생도였다면 꿈에도 접근하지 않았을 거였지만. 망할 알코올 같으니라고.


 그래도 우후라라는 이름을 알아내니 묘한 자존심 때문에라도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고상하게 발음하는 저속한 비꼼을 들으니 오기 또한 치솟기도 했고. 내가 그래도 동물들이랑 그렇고 그런 짓은 하지 않았거든? 콧대를 움찔대며 입학 시험을 치르느라 외웠던 짤막한 것들을 능숙하게 읊으니 다행히 그녀의 눈이 흥미로움으로 반짝였다. 역시 제임스 커크. 머리는 좀 똑똑하단 말이지. 대다수의 여성들이 홀딱 넘어오는 그 미소를 끌어올리며 술을 삼키니 예기치 않은 방해물이 찾아왔다. 실책이라면 실책일까. 그녀와 말문을 트기 전에 이미 스트레잇으로 로뮬런 에일을 다섯 잔이나 넘겼다는 걸 다시 떠올린 것은 쌍코피를 한 바가지 흘리고 난 뒤였다.

   

 볼품없는 휴짓 조각으로 콧구멍을 틀어막으며 정면에 앉아있는 크리스토퍼 파이크라는 함장을 쳐다보았다. 진중한 표정을 한 채 아버지의 일을 꺼내는데 벌써부터 질리는 기분이라 대충 넘기고 빨리 피곤한 몸을 누이고 싶을 뿐이었다. 스타플릿에 지원하라는 헛소리를 더 늘어놓기도 전에 말을 끊어놓으니 그는 몇 마디의 말을 던지고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조금 멍한 기분으로 그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함선 모형을 집어 들고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았다.


 이것도 그때의 천둥 번개와 같을까. 그날과는 달리 비가 아닌 독한 알코올만이 나무 바닥을 적시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처럼 기이한 박동이 심장 내벽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내 인생에 둘도 없는 전환점일 것이다. 


 새까만 구름과 메마른 대지가 팽팽한 신경줄만 당기고만 있을 때, 시퍼런 번개가 땅을 불태우는 것을 시작으로 낡은 창고를 곧장 무너트리고 물길을 정 반대로 바꾸고도 남을 폭우를 쏟아내 지대를 완전히 바꾸는 것처럼. 


 아이오와에서 썩어가고 있는 나에게 이 조그마한 모형이 내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든 바꾸어 놓을 것임을 은연중에라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이 이어지던 와중 단순한 플라스틱 조각이 갑자기 쇳덩이가 된 것마냥 묵직하게 손가락을 눌러왔다. 나는 그 무게를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작은 것은 테이블에 떨어지면서 귓가에서 벼락이 터지는 듯한 거대한 소리를 내었다. 환청일게 분명했지만 고막이 실제로 얼얼한듯한 그 굉음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기겁을 해서인지 벌렁벌렁 대는 심장이 갈비뼈 너머까지 느껴졌다. 가슴팍에 손을 올려 그것을 진정시킨 나는 그 환상의 번개가 발뒤꿈치를 태운 것 마냥 오토바이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혈관에 알코올이 흐르고 얼굴과 복부에 다량의 타박상을 입은 상태에서 새벽바람을 맞으며 도로를 질주하는 것은 정말이지 즐겁게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심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몸은 파업하고자 했기에 그 상태로 셔틀의 빈 자리에 앉자마자 그대로 몸이 푹 퍼져버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반쯤 가물거리는 눈를 꿈뻑거리고 있으니 한 노숙자 차림의 남자가 요란하게 등장해왔다. 억양이 들쭉날쭉한 목소리가 엄한 표정을 한 감독관과 만담을 나누는 코미디에 조금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가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 그 짧은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생도복을 입지 않은 유일한 남정네 둘이 각각 술 냄새를 풀풀 풍겨대니 각자 혼자 있는 것보다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니 말이었다. 정확히는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면서. 


 그것은 남자가 우주를 질색하는 말을 끊임없이 투덜대자 그의 옆자리에 앉은 한 생도가 질색을 하며 반대쪽으로 엉덩이를 옮기는 모습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시선따윈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남자는 이젠 묻지도 않은 이혼 사실을 혼자 주절주절 털어놓고 있었다. 조금 많이 귀찮은 사람이 걸렸다는 생각에 샌프란시스코에 빨리 도착하길 바라며 그의 말에 대충 말대꾸를 해주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플라스크 병이 건네져 왔다.  떼가 타지 않은 그것에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오래되지 않아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안에 찰랑이는 것을 곧바로 입안에 전부 털어 넣었다. 어차피 몇 모금 양 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밤새 내내 목이 탔던 갈증을 빨리 해소 하고 싶었다. 비록.., 아니, 어쩌면 당연히 예상되었을 독한 알코올의 정체를 식도를 태우는 감각에 뒤늦게 확인하면서 인상을 있는데로 찌푸리긴 했지만.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잠깐 눈을 감았다 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팔뚝을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붙잡아왔다.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면서 머리를 벌떡 세우자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눈물을 찔끔 날 정도의 통증에 머리를 부여 잡고 끙끙대고 있자 옆에서 험악한 어투치곤 발음이 영 어눌한 고함이 쏟아졌다. 애밍! 대미! 



 아마도 댐잇! 을 말하고 싶은 듯했다. 입을 틀어막으며 낑낑대고 있던 옆자리의 그 노숙자는 깜빡 잠이 들었다 깬 나를 보자마자 반대쪽 손을 들어 거세게 등을 후려쳤다. 감히 판단하건대 그것은 분명히 손자국 그대로 멍이 들었다고 확신할 정도의 엄청난 타격였다. 절로 튀어나오는 으억 소리와 함께 등을 확 젖히며 눈살을 확 찌푸리자 그 남자는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더니 퉷 하고 침을 뱉어냈다. 이 무슨 건방진-? 하던 생각은 발치에 툭 낙하한 피거품을 보고 그대로 뭉그트려졌다. 얼떨떨한 기분에 멍청하게 시선을 돌리자 남자는 그 눈매 모양 그대로의 부리부리한 눈빛을 쏘아대며 손가락으로 내 머리통을 그다음으로 본인의 입가를 가리켰다.


 이 정도면 눈치가 없어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금세 파악이 될 것이다. 나는 멍청하게 잠들어버린 나와 지친 나에게 술을 건네준 상대방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라, 셔틀이 착륙하자마자 눈치를 살살 보며 그와 함께 아카데미에 있는 의료 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 쪽이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는 굳이 어색한 정적을 흐려놓고자 그처럼 궁상맞게 과거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털어놓을 생각은 없는지라 우리는 의료센터 응급실에 고요한 공기를 그대로 담고 나란히 도착하게 되었다. 물론 대화 한 점 없는 두 명의 지저분한 남정네들을 보곤 그곳에 있던 의사는 이렇게 쌈박질을 하면 졸업을 하기도 전에 생도 생활을 끝마치게 될 수 있다며 엄하게 경고를 해왔다. 달랑거리는 혀를 재생시키는 중이라 여전히 말을 할 수 없던 남자는 뾰족하게 눈썹을 세우며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나는 그 짜증섞인 눈빛에 터진 입술이 재생되면서 올라오는 간질거림을 참지 못해 키득키득 웃으며 익살맞게 대꾸했다.


 저 양반 뼈가 단단하기가 보통이 아니던걸요? 제 머리통 좀 봐줘요, 의사 선생님. 피나는 거 아니예요? 나는 진작에 피딱지가 영근 주먹뼈를 만지는 것을 멈추고 과장되게 머리통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의사는 짜증스러움을 얼굴에서 감추지 않고 조금 거친 손놀림으로 머리통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트라이코더를 잠시 흔들었다가 아무런 울림이 울리지 않는 그것에 기숙사에 갈 때 제공받는 패드에서 생도 규칙을 꼼꼼히 확인해 보라는 말만 대충 한 뒤 뒤늦게 확인한 손등 상처에 시선을 돌렸다. 반응없는 의사에 재미를 찾지 못한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덕에 순식간에 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얼굴에 남아있는 피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내며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래도 나름 예의를 차려 남자의 혀 치료가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의사가 기록에 남겨야 겠다며 이름을 묻는 탓에 잡친 기분을 조용히 삭여야 했다. 커크라는 성을 듣자, 지금까지 심드렁하게 있던 의사의 표정이 바로 확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지 말 걸 그랬어. 짜증나네. 그 반응은 이곳에 온 순간부터 예상했던 바였지만 나란히 기숙사 안내 센터로 가는 길에 내 가라앉은 표정을 보고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는 남자의 눈치가 더해져 더 염증이 일었다. 좆같은 커크 같으니라고.


 그래서 성질을 숨기지 않고 커크라는 성이 여기서 자알 통해, 아저씨. 라며 비꼬듯 말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모음 하나하나에 강세를 주며 대답해왔다. 아-저-씨? 맥코이라는 이름은 얻다 팔아먹었냐, 꼬-맹-아? 내 성에 대한 것보다 호칭에 대한 꼬투리를 잡는 것에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니 뭐, 왜, 할 말 있냐? 하는 남자의 표정이 대답으로 날아왔다. 


 크흐흐, 크흡. 그 당당한 모름새에 당연히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장렬한 산화와 목숨을 구제받은 800명의 삶에 대해 과장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던 혀는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에 파르르 떨어댔다. 완전히 치료받은 입가가 다시 찢어졌지 않나 혀로 날름 핥으며 숨을 고른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너 좀 맘에 든다, 본즈?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이 괴상하게 변했다. 본즈? 응, 본즈. 내 뒤통수에 혹을 만들 정도인 강력한 턱뼈의 소유자라는 의미야. 어때 맘에 들어? 허, 참. 무슨 헛소리람. 남자, 아니 이제 본즈가 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앞서서 걸어가 버렸다. 나는 교정을 지나가는 붉은 무리가 다 고개를 돌릴만큼 다시금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하지만 본즈는 이런 내가 부끄러운 듯 저 인간은 절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는 얼굴 근육을 열심히 움직여댔다. 


 30분 뒤, 본즈의 소박한 행운 보따리는 셔틀에 떨어트리고 왔는지 그의 희망이 가뿐히 무시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끄러운 발음으로 젠장. 하고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와 킬킬대는 내 산뜻한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같은 기숙사 방에 들어선 우리는 불퉁스러운 표정과 히죽히죽 웃는 표정을 나누며 생도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지저분한 옷을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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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쓰려 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

본즈커크라고 쓴 거 같은데 뭔 이야기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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