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오지니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 한줄기로만 유지되고 있는 어두운 공간 속에, 소주병 하나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 굴렀다. 소파 앞에 앉아 핸드폰을 소중히 부여잡은 지민이 취기에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다 픽-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석진아, 석진아, 석진아. 몸은 온전치 않은데 정신은 멀쩡한지 지민은 남의 이름을 자꾸만 중얼댔다. 화면이 깜빡깜빡할 일을 못 찾는 손에 쥔 핸드폰의 열기가,


"석진이 형..."


몹시 뜨거웠다.


띠띡- 띡-


지민의 잠긴 목소리만 작게 들리던 조용한 집안에 기계음이 크게 울렸다. 현관문에서 나는 끊김 없는 소리가 꽤 익숙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누워서 한참 이름을 중얼대던 지민은 현관 키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누구지, 석진인가. 아까부터 머릿속에 찬 석진의 생각 때문에 그 누구든 지민은 석진이길 바랐다. 또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거 보면 석진일지도 모른다.


"석진ㅇ,"

"야 박지민."

"... ..."


혹시 모를 일이지만, 기대를 해본 지민은 문이 열리자마자 하루 종일 입에 담은 석진을 불렀다. 그러나 정말 정말로 혹시 모르는 일이었을까, 잠깐의 상상과 다르게 집에 들어오는 인물은 석진이 아니었다. 양손에 잔뜩 뭘 사 가지고 들어오는 인물은 다름 아닌 지민의 친구 태형이었고, 벅찬 마음에 미소부터 지은 지민의 표정은 태형의 얼굴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굳었다.


'지민아~ 나 왔어!'

"너 뭐 하냐. 불도 안 키고."

"... 아 시발."


지민의 상상대로라면 밝은 얼굴을 한 석진이 들어왔어야 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조그마한 입술로 쉴 새 없이 예쁘게 조잘대어야 했다. 믿기 싫은 현실에 지민이 부정하던 중, 귀에서 들리는 석진의 목소리가 아닌 정확한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은 작게 욕을 곱씹었다. 김 태형 저 새끼, 정말 개싫다.


"아 네가 왜 와 미친놈아."

"야. 적어도 친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아야 되지 않겠냐? 이렇게 오는 게 싫으면 전화를 좀 받던가~"

"별 개소리를."


태형의 시끄러운 잔소리에 안 그래도 예민해졌던 지민은 더욱 예민해져 태형에게 손가락 욕을 날리고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누웠다. 예전에는 전화를 하고라도 왔지, 요새는 전화도 잘 안 하는 게 꼭 친구 어쩌고 하며 핑계를 댄다. 몰려오는 두통에 눈을 감은 지민은 다시 석진의 목소리를 찾았다. 지민아, 하고 불러주던 고운 목소리. 언제나 활짝 웃어주던 예쁜 얼굴이.



'박.. 지민...'

"... ..."


지민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러니까 병신아. 내가 석진이 형한테 좀 잘하라고 했잖아. 미친놈이 술 처먹고 딴 여자 이름 부르니까 석진이 형이 떠나지."

".. 너 안 닥칠래?"


보고 싶은 석진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지민은 귀에 꽂히는 날카로운 말에 순간 머릿속을 지우고 태형을 쳐다봤다. 옆에서 계속 팩트로 찌르는 말들이 지민의 반박을 막았다. 지민은 태형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지민과 석진 사이의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 태형이기에 지민은 절대 뭐라고 하지 못 했다. 그저 소심하게 대응할 뿐. 석진이 지민에게서 떠난 지 3개월이 다 되어 갔다.


"이렇게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 좀 나가."

"뭣 하러."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용서라도 구하든가."

"그러니까 안 될걸 뭐 하러 하냐고."


지민이 태형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헤어진 지 3개월이고, 연락 안 한지 3개월이다. 지금까지 석진에게서 연락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제야 용서를 구한다는 건 의미 없는 짓이었다. 지민은 매일을 후회하면서 홀로 밤을 지새웠다. 그게 지민에게는 벌이고, 고문이었다. 더 이상 태형과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지민은 태형에게 나가라며 손을 저었다. 계속 이야기만 듣고 있자니 머리도 아팠다. 꼭 이런 식으로 태형이 옛이야기만 꺼낼 때면 짜증만 솟구쳤다.


"어휴, 모지리. 요 앞 카페에 석진이 형 있더라. 너 예뻐서 말해주는 거 아니고 불쌍해ㅅ,"

"야 넌 왜 그걸 지금 말해!"


지민의 손짓에 혀를 찬 태형이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시야에 들어오는 굴러다니는 술병들이 태형은 못마땅했다. 이런다고 달라질 게 없는 거 아는데. 눈을 감고 누워있는 지민을 안쓰럽게 바라본 태형이 집안에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들을 치우며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지민의 집에 오기 전, 카페에 앉아 웃고 있는 석진을 봤는데 그리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지민과 연애했을 때의 모습과 차원이 달랐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을 하고 있었다.

알려주기라도 하자 싶어 얘기를 한 태형의 목소리는 그 뒷말을 잇지 못 하고 끊겼다. 가만히 누워있던 지민이 벌떡 일어나 태형의 멱살을 잡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태형은 당황 한 눈으로 지민을 쳐다봤다. 태형의 옷을 쥔 지민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도 지금 있는지는 몰라 인마. 네 집 올 때 본 거라."

"카페? 카페에 있다고?"

"어. 창가 쪽에 앉아 있었, 야! 어디 가!"


태형에게서 정보를 얻은 지민은 바닥에 있는 점퍼를 대충 걸치고 바로 집을 나섰다. 뒤에서 들려오는 태형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원하는 목적지로 향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용서는 구하지 못 해도 얼굴은 보고 싶었다. 매일 그리워서 술로 대신한 석진의 얼굴을 볼 생각에 지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면 인사 정도는 하고 싶다. 보고 싶었다고 말은 할 수는 없어도


"석진아.. 석진이 형."


지민의 간절함이 가까이 전해졌다.





'지민아. 너 스메랄도 꽃이라고 알아?'

'그 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꽃이래. 꽃말은 전하지 못한 진심인데, 진짜 예쁜 것 같아. 그치!'

.

.

.

.


"어서 오세요."


카페에 가기 전, 지민은 가까운 꽃집에 들렀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예전에 석진이 한 말을 기억 한 지민은 자연스레 꽃집을 찾았다. 유독 꽃을 좋아했던 석진은 새로운 꽃이라면 열심히 찾아보곤 했다. 어떤 뜻이라도 꽃말에 담긴 내용들이 예뻐서 어느 순간 꽃을 좋아하게 됐다고 했었다. 그중에, '스메랄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비하다며 석진이 매일 자랑하고는 했는데, 어찌 보면 지금 상황에서 지민에게 잘 어울리는 꽃이었다. 꽃집에 들어온 지민은 점원의 인사에도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스메랄도, 스메랄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형.'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찾으시는 꽃 있으세요?"

"스메랄도 꽃이요. 있나요?"

"아, 그 꽃은..."


한참 두리번대는 지민에게 다가 간 점원이 물었다. 원하는 꽃을 찾기가 어려운지 머리만 긁적이는 게 안쓰러워 보였다. 조심스레 묻자, 바로 대답하는 지민의 말에 점원이 놀란 듯 반응했다. 스메랄도. 그 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꽃이다. 몇 년 전쯤, 인터넷에 올라온 누군가 만들어 낸 얘기로 유명하게 번지고는 했는데 그 꽃의 모습이 아름다워 일부 사람들이 실제 있는지 찾아 보겠다고 나서기도 했던 꽃이었다. 점원은 지민의 떨리는 동공을 보고는 반대편으로 가 스메랄도 꽃과 비슷하게 생긴 꽃을 가지고 왔다. 누가 봐도 간절해 보이는 태도가, 시간이 여유치 못 해 보였다.


"애인을 위한 건가 봐요. 꽃말도 참 예쁜데."

".. 네."

"돈은 받지 않을게요. 애인분에게 꼭 전하길 빌어요."

"감사합니다."


꽃 몇 송이를 다발로 묶어 건네는 점원에게서 꽃을 받은 지민이 다급한 듯 인사를 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지금 가지 않으면 석진을 보지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뛰어서 거리를 좁혀 나간 지민은 드디어 보이는 카페에 걸음을 천천히 했다. 오면서 꽃이 흐트러질까 품에 꼭 안은 꽃이 다행히 멀쩡했다.


"... ..."


카페에 가까워질수록 창을 통해 석진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늦지 않았나 보다. 지민은 괜히 코 끝이 시려 와 코를 찡긋거렸다. 환하게 웃고 있는 석진이 예쁘다. 오랜만에 보니 더 예뻐 보였다.


".. 아,"


설렘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카페로 향해 걸어가던 지민의 발걸음이 멈췄다. 앞에 보이는 모습에 지민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요 앞 카페에 석진이 형 있더라'. 태형의 말이 귀에서 오버랩 됐다. 근데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줬어야지. 지민의 얼굴이 쓸쓸함으로 그늘졌다.




"... ..."


손에 쥐어 품에 안고 있던 꽃이 결국 품에서 벗어났다. 지민은 멀리서 석진을 지켜봐야 했다. 석진의 웃음이 예뻐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지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있는 석진의 모습이라서. 그래서 그랬나 보다.

스메랄도를 가장한 꽃의 꽃잎들이 바닥을 향해 흩어졌다. 스메랄도의 꽃말은, '전하지 못한 진심'. 지민의 오랜 진심도 석진에게 전해지지 못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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