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에 갇힌 기분이었다. 사방이 하얗게 물들었는데 유독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만이 나를 훑어본다. 나만 바라본다. 나를 꿰뚫는다. 나는... 그저 이 곳을 벗어나고 싶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규칙적인 기계음, 피부를 뚫고 공급되는 액체, 약간의 말소리와 흐릿한 시야. 아, 또 쓰러졌구나. 역시 아직 세상 밖에 나오기엔 역부족이었나보다. 다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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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되감기 된다. 놀랍게도 좋은 기억은 쏙 빼두고 트라우마들만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래, 내 인생은 이때 즈음,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즘이다. 내 인생은 분명히 이때 즈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마음대로 짓밟고 욕해도 되는, 그래서 망가져 버린 내 인생은 그들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들의 신발 밑에서 몸을 웅크리기 바빴고 얼굴을 가린 손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은 그들의 눈빛이었다.

그때부터 남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남은 고등학교 생활은 안 봐도 뻔했다. 발표를 하다가 퓨즈가 끊긴 듯 쓰러진다거나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서워 고개를 들지 못한다거나. 이후론 어떻게 졸업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에서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트라우마를 극복했다고 느끼게 해줄 만큼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도 소설 쓰는 일에서 원하던 성과를 얻어냈다. 내 소설인 <기로> 가 베스트셀러에 놓여있는 모습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책으로 인터뷰도 여러 번, 내 인생이 가장 만개했을 때였다. 그러나 인생은 즐길 틈도 없이 이제 질 차례였다. 내가 다시 숨을 쉴 수 없는 나날에 빠지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로 한 방송에 나가게 된 날이었다.

"자, 세인 씨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지인들하고 이야기 한다는 느낌으로 하시면 돼요."

"네. 조금 떨리네요."

온라인에서 진행되는 실시간 강연이었다. 나는 그저 이 자리가 감격스러웠고 트라우마에 대한 건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잠시 후, 카메라가 돌아가고 진행자의 멘트가 시작됐다.

"본격적인 강연에 들어가기 앞서 오늘의 특별 게스트! 요즘 대세 아이돌 러브의 리더, 정보담 씨 모셨습니다!"

정보담.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정보담이 출연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돌아본 곳에는 정말로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여기서 내 인생을 가져간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인 씨? 세인 씨?"

"...네?"

진행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라고 말했다.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저는... 그게..."

다들, 나를 바라본다. 시선을 피하려 눈을 돌리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숨이 막혔다.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잊고 살았다. 나는 그런 마음이 들 때면 병원에서 눈을 뜨곤 한다.

다시 악몽의 나날이었다. 생방송을 망쳤다면서 내게 책임을 묻는 지인과 피디, 정보담과의 관계를 추리하는 기사들, 그 밑에 달린 정보담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쓰러진 것이 의도적이고 기분 나쁘다는 댓글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날 죽이고 있었다.

방송에 나갔던 8월부터 다시 현재, 여름까지 단 한발짝도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다시 망가진 삶을 살고 있다. 종일 벙쪄있다가 갑자기 터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아침마다 술병들의 한 가운데서 눈을 뜨곤 했다. 지나간 봄에는 바람이 부는 게 싫었다. 꽃잎이 떨어지는 게 마치 내 모습 같았다. 행복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누군가에게 밟히는, 상처받는 사람으로 돌아간 내 모습 같아서. 그래서 봄에는 더 많이 울었다.

하루는 벽에 박힌 못에 달력을 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력을 걸긴 커녕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작은 일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게 한심했다. 펜을 들어도 우울함에 시달리다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밖에 쓸 수 없었다. 그런 날의 연속이다 보니 내 눈물은 심한 가뭄에도 마를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올해 여름도 그저 끝나가고 있다.

오늘은 집을 나가보았다. 아무리 유명했어도 사회는 빠르게 변하니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내 이름에 조금 안심했다. 그래서 집 밖을 나가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래. 세상은 괜찮았다. 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가게 벽에 붙은 보담의 포스터나 가게 유리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은 아니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리고 자작나무 숲에 떨어졌다. 그렇게 다시 현재,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단언컨대 괴로웠던 기억을 좋은 경험이었다고 소개할 수 있는 건 시간이 흘러흘러 기억이 닳고 헤져 거의 남지 않았을 때 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땐 아마 늙어 죽기 직전이겠지. 병원 침대에 누우면 들리는 규칙적인 기계음을 원망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들의 관심은 날 자작나무숲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날 기다리는 건 오직 커다란 눈동자 뿐이었다.

아. 피곤해. 이제 그만하고 싶다. 이런 인생, 맘에 들지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극복했고 이제 그런 거쯤은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는데, 전부, 전부 착각이었던 거야. 글을 쓰는 일에도 손을 대지 못한지 10개월, 아무런 의지도 희망도 삶의 이유조차도 찾을 수 없다. 그런 생각 속에 팔로 두 눈을 가린 채 남몰래 병원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퇴원 후 집에 돌아오니 텅 빈 집이 유난히 서럽게 느껴졌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쫓겨나듯 독립했지만 오늘따라 이 좁은 방 안이 미친 듯이 커 보인다. 광활한 우주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러자 벽에 박힌 못이 눈에 띄었다. 그리곤 곧바로 줄을 찾아 헤매었다.

책상 서랍에서 여분의 운동화 끈을 발견했다. 유서 몇 마디 끄적일 여유도 없이 곧바로 못에 줄을 매었다. 이제, 이 우울도, 무기력함도,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하물며 내 존재 조차도 없던 일이 될 것이다.

내 책이 눈에 띄었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날들의 흔적. 역겹다. 지독한 희망고문이었다. 나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 잊고 웃으면서, 행복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날도 있었다. 이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지금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 결국은 죽음을 택하겠지.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숨이 막힌다. 목을 단단하게 조여오는 줄 때문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에 못 견디고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현실이, 세상의 과도한 관심이 싫어 스스로 죽음을 택했지만 마지막까지 세상의 관심을 받게 될 걸 나도 알고 있다는 게 답답하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두 다리로 허공을 휘젓는 일 뿐이었다.

추하다. 죽고 싶어서 목을 매달았는데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꼴이라니. 이렇게 추한 죽음일 바에야 그래,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아.

그때 숨이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 못, 조금 헐렁하게 박혀있었던가. 나는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속으로 끝없이 '살았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살았다. 그 사실 자체가 괴롭고 행복해서 눈물이 흘렀다.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에 숨이 막혔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 내 울었다.

-

천천히 내 인생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분명 아직은 마주하기조차 힘든 기억이지만 사경을 헤매다 돌아온 이승은 생각보다 잠잠했다. 나는 그 이후 삶이란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삶이란 시험의 연속이라 끊임없이 좌절하겠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일 거라고. 내 인생이 해피엔딩을 향한 거대한 시험이라면 기꺼이 이겨내어 주겠다고. 내 인생인데 내가 못 이길까. 끝까지 버텨내 주겠다고, 악착같이 살아남겠다고.

그로부터 6개월 뒤, 나는 신작을 발표했다. 희망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내 인생, 증오하는 내 인생, 그러니까 버텨내야 하는 내 인생의 무게를 담은 소설이었다.

***

-희망이요. 저는 희망이 없었어요. 잘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순식간에 사라졌었거든요. 그런데 그 끝에서 새 삶을 얻었어요. 이번엔 잘 살 수 있을 거란 기대 대신 이겨내겠다는,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이 솟더라고요. 이젠 희망이 날 살게 만들어요. 희망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어요. 그게 날 다시 일어서게 해요. 이 희망이 좌절될 때 나는 다시 죽음을 떠올리겠지만 언젠가 또 희망은 찾아오겠죠. 그래서 일어설 수 있어요. 그래서 살아갈 수 있어요. 희망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희망때문에 나는 오늘도 걸을 수 있어요.

인생사 새옹지마라잖아요?

***

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에 갇힌 기분이었다. 사방이 하얗게 물들었는데 유독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빽빽한 자작나무 틈에서 이제야 다시 만났다. 오래도록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 인생은 결국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거울 앞이었다. 세상 밖에 나오기에 역부족이었던 나는, 이제 환히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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