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완벽한 죽음. 브루스는 씩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그 어떤 때보다도 괜찮았다. 창백하지도, 다크서클이 길게 내리지도 않았고 수염도 깔끔하게 민 상태였다. 운동을 해서 근육도 조금 있었고 스코틀랜드에서의 상처들은 거진 아물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다시 한 번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죽음. 그래서 어쩌면 죽음은 더욱 완전해질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건강하고 혈색을 되찾아갈수록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것을 위한 덧없는 발걸음일 뿐이었다. 오래전부터, 스코틀랜드를 떠나 빌어먹을 뉴욕의 도심 한복판으로 부유하듯 정착했을 때부터. 안녕, 안녕. 브루스는 요즘 잠잠해진 제 안의 또다른 누군가에게 말했다.


잘 있어.

사실 잘 있을 필요도 없지, 빌어먹을 것들아.


그리고 브루스는 그때처럼 다시 한 번 의자의 등받이를 힘껏 걷어찼다. 턱 아래가 조이며 기도가 막히는 게 느껴졌다. 브루스는 눈을 감았다. 푸른 그의 눈동자에서 빛이 가라앉는 것이 그에게도 느껴졌다. 그의 동거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는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킬킬거렸다. 그리고 끝이었다.





 

“또 이런 짓을 했다간,”


퍽, 하는 기세 좋은 소리와 함께 브루스의 얼굴이 돌아간다. 막 그가 생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선고를 내린 의사는 그 무시무시한 소리에 눈을 치켜떴지만 서슬 퍼런 얼굴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광대가 시큰거렸다. 골이 다 울리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브루스가 꼭 그전처럼 키들거렸다. 그 웃음소리에 완전히 골이 난 듯, 남자가 이를 빠득 갈았다. 브루스는 이제 완전히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으흐흐, 흐흐흐, 푸하하하. 커지는 웃음소리가 병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심지어 일인실이네, 돈도 많아.


“이럴 돈으로 내 장례식이나 거하게 치러주지 그래, 브랜든.”

“미스터 설리반입니다, 미스터 로버트슨.”

“제법 잘 나가는 회사에 다닌다더니…”

 

엉거주춤하게 엎드린 자세를 고쳐 누운 브루스가 편한 얼굴로 브랜든을 올려보았다. 브랜든은 있는 대로 화를 내리누르고 있는지 관자놀이까지 힘줄이 섰다. 씨근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이다. 물론 그 얼굴을 보려고 목을 맨 건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브루스는 정말로 죽고 싶었다. 피식거리며 웃던 브루스가 순간 표정을 싹 지우고 브랜든을 노려보았다. 브랜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았다. 브루스의 푸른 눈동자와 브랜든의 녹회색 눈동자가 부딪친다. 눈 색이 뉴욕을 닮았네요. 그쪽은 그러면 스코틀랜드를 닮은 건가요. 처음 만났을 땐 그런 낯간지럽고 어색한 인사도 나누긴 했었다.

 

“그 남아도는 돈으로 목도리나 좀 바꿔. 맨날 똑같은 회색-”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브루스의 얼굴로 강하게 뭔가가 날아든다. 회색의 조금 바랜, 뉴욕의 냄새가 밴 목도리. 그것을 쥐고 얼굴에 묻은 채 브루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브랜든의 향이 남아 있었고, 그리고 또.


“이젠 안 바꾸고 싶어도 바꿀 겁니다. 당신이 이걸로, 빌어먹을, 목을 맸으니까!”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는 브루스의, 회색 목도리에 가려진 얼굴. 브랜든은 뭔가 더 쏘아붙이려다가 입술을 꽉 깨문다. 당장에라도 침대를 엎고 이 남자가 정말로 원하는 죽음, 그래 엿 같은 죽음을 제 손으로 선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브랜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혀끝을 타고 맴도는 말을 결국 꿀꺽 삼킨 브랜든이 얼굴을 감싸고 길게 숨을 내쉰다. 브루넷의 머리카락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보조 의자에 앉아 몸을 굽히고 화를 삭이려 노력하는 브랜든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바라본 브랜든이 묻는다.


“이봐, 나한테 관심 있어?”

“헛소리 집어치워요.”

“물론 내가 스코틀랜드에서 제일 핫한 형사였던 것도 맞고 맘만 먹으면 한번 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닌데.”

“닥쳐요.”

“그런 게 아니면 이상하잖아. 한두 번도 아니고, 목맬 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내 자살을 실패로 만들어 버리니. 내가 이 땅을 뜨면 왜, 무서워서 혼자 잠이 안 올 거 같아?”


브루스의 농담 아닌 농담에 브랜든은 무시하려는 태도로 입을 다문 채 대답이 없다. 브루스는 길게 숨을 내쉬며 똑바로 누웠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약하게 웃는 브루스의 얼굴을 브랜든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입이 거칠고 버릇이 나빴지만 몇 달 전에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한 동거인은 수려한 외모와-수염을 깎으니 훨씬 어려 보였다-제법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스코틀랜드에서 꽤 괜찮은 자리를 꿰차고 있었던 듯했으나, 경질되어 출장 아닌 출장을 왔다고 했다. 자세한 상황은 묻지도, 듣지도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고. 씨시를 보내고 이사를 하면서 반쯤은 충동적으로 동거인을 구한 거였다. 구하는 글을 올렸다가 세 시간 만에 후회하고 다시 내리러 간 사이트에서 본 게 그의 이름이었다. 브루스 로버트슨. 충동이었고, 지금은 그것을 후회하고 있지만, 브랜든은 어쨌든 브루스를 집으로 들였다. 그때까지도 그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이 입이 걸쭉하고 허세 많은-그만큼 능력도 있지만-형사의 취미가 자살하는 것이라고는.


브랜든의 시선을 느낀 브루스가 슬쩍 얼굴을 돌려 시선을 맞춘다. 네 눈, 좁아터진 뉴욕의 지하철이 생각나. 맨 처음 목을 맨 브루스를 구하고 그가 깨어나 처음 브랜든에게 던진 말이었다. 그 이후로 쭉 브루스는 브랜든에게 말을 놓았다. 영혼의 반쯤은 여전히 그의 몸이 아닌 스코틀랜드 어딘가를 부유하는 멍한 얼굴로, 브루스는 숨을 헐떡이는 브랜든에게 그랬었다. 우울한 녹색, 회색, 마구 뒤엉켜서. 철컹, 철컹. 입술을 모아 지하철 소리를 흉내 내는 브루스를 보며 브랜든은 말을 잊었다.

 

“그냥 죽게 놔둬도 되잖아. 정 불안하면 유서에 써 놓을게. ‘브랜든 설리반은 내 자살을 방조하지 않으려 일곱 번이나 노력했고, 그의 실패는 그의 잘못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이렇게.”

“나불대는 걸 보니 살만한가 보군요, 이제. 난 회사로 돌아갑니다. 저녁에 집에서 봐요.”


몸을 돌리는 브랜든을 향해 브루스가 툭 말을 던진다.


“다음번에는 목 매는 거 말고 손목이라도 그을까봐. 피 냄새가 진동하는 욕실, 훨씬 후각적이겠지? 시각적이기도 하겠…”

 

그 순간 브랜든이 브루스를 돌아봤고, 브루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브랜든의 싸늘한 표정은 오간 데 없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표정 위로, 아주 기묘한 느낌으로 눈물이 뚝뚝 타고 흐르고 있었다. 맺힌 것도 아니고 아주 주룩주룩. 뺨을 타고 내려와 턱끝에 맺혔다가 툭툭 떨어지는 그 눈물에 말을 잃은 브루스가 더듬거리며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았다. 브랜든은 숨을 짧게 삼켰다. 어깨가 떨렸고 그의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눈물로 젖어 번들거리는 광경은 마치 기억 속의 아주 희미한 여우비 같았다. 브루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저기, 하고 입을 뗐다. 그러나 그 말을 두지 않고 브랜든이 먼저 말을 탁 꺼낸다.

 

“그거 아주 좋은 방법이군요.”

 

담담하고 싸늘한 어조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린다. 브루스가 멍하니 브랜든을 바라본다. 그의 발 아래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브랜든은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쓸며 눈물을 훔쳐냈다. 얇은 살결이 부어오르는 것이 마치 클로즈업된 것처럼 브루스의 눈에 들어왔다.

 

“일 년 전에 내가 목도한 여동생의 자살과 똑같은 방법이니까.”

“브랜든-”

“미스터 설리반입니다, 미스터 로버트슨.”

 

브랜든이 다시 한 번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러 눈물을 닦았다. 그는 숨을 들이켜고는 브루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젖은 눈은 빗속의 뉴욕을 떠올리게 했다. 브루스는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브랜든이 입술을 끌어올려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도 죽진 않았죠. 그거 압니까, 미스터 로버트슨?”

“…….”

“왜 죽게 놔두지 않느냐고?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당신이…”

 

브랜든은 몇 번이나 말을 하려 했지만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하려다가 입을 다물며 길게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을 보던 브루스가 말을 받았다.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차라리 죽었으면 싶다고?”

 

브루스의 입에서 꺼내진 그 말에, 브랜든은 브루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지은 그의 표정은 브루스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서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어떤 표정. 수많은 공허와 외로움과 허무로 녹여낸 얼굴.


그 찰나, 브랜든은 표정을 지우고 서늘하게 웃었다.


“여동생은 그래서 그 말대로 했죠.”

 

브랜든은 다시 몸을 돌려 걸어나간다. 브루스는 다만 길게 늘어진 브랜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뉴욕에 온 이후로 약을 꼬박꼬박 먹어 본 적이 없었던 환영이었다. 아니, 환영이 아니다. 그건 브랜든의 죄책감이었고 슬픔이었다. 브루스도 갖고 있는 것.


브루스는 차가운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 * *

 

“젠장, 빌어먹을 칼 어디 있냐고!”

“버렸다고 말했잖습니까.”

“정신 나갔어? 나도 안 하는 약 했냐? 있으면 좀 나눠 먹자, 씨팔, 사람 사는 집에 칼이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없으니까, 나가서 사와요. 필요하면.”


그 말과 함께 브랜든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브루스에게 던진다. 냅다 이마에 딱딱한 카드를 맞은 브루스가 확 눈을 치켜뜨며 브랜든을 노려본다. 뚜껑 열릴 것 같은 얼굴에도 브랜든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상황에 화를 못 이긴 브루스가 씨팔, 하며 옆의 탁상을 거세게 걷어찬다. 브랜든이 브루스에게 뭐라고 하려다 입을 다문다. 농땡이 피운답시고 이틀을 병원에서 죽치다가 퇴원해, 간만에 식사다운 식사라도 차리려고 하니 칼이며 가위가 하나도 없는 거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부엌이 텅텅 비었는데 브랜든은 답이 없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브루스가 완전히 꼭지 돈 얼굴로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며 소리를 꽥 질렀지만 브랜든은 마치 들리지 않는다는 듯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답잖은 애니메이션, 씨발 여긴 포르노도 안 나오냐? 그랬었을 때 브랜든은 마치 혐오스러운 걸 본다는 듯한 얼굴로 브루스를 봤었다.

 

“멀쩡한 칼을 버리길 왜 버려! 집에서 첩보영화라도 찍었어?! 아니면 어, 뭐 사람 찔러 죽이기라도-”


그 말을 하던 브루스가 문득 말을 멈춘다. 오히려 들은 척도 않던 브랜든이 흘끔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의 눈길을 포착한 브루스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브랜든은 잽싸게 고개를 돌렸지만, 브루스는 성큼 브루스의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여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치워요. 브랜든이 웅얼거리듯 말하자 브루스가 씩 웃는다.

 

“뉴욕 이쁜이가 오빠를 걱정했나 보네. 진짜 말마따나 칼로 손목이라도 그을까봐 싶어서.”

“헛소리 집어치워요.”

“나 지금 좀 감동했잖아. 진작 말했으면 빡돌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저열하고 추잡한 깡패 같은 말투. 브랜든은 인상을 찌푸리며 리모컨을 집으려 손을 뻗었고, 워 워 하며 브루스가 브랜든의 뒷머리를 콱 움켜쥔다. 브랜든이 기가 막힌단 얼굴로 브루스를 올려보았다. 지금 내 머리채를 잡았습니까? 아무리 형사라곤 해도 저보다 작고 마른 남자한테 머리채를 잡힌 꼴이라니. 브랜든이 금세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한 얼굴로 노려봤지만 브루스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 빙글빙글 웃어 보였다.

 

“계집애처럼 질질 짜더니, 그게 그렇게 무서웠어?”

“집에 피비린내 나는 꼴을 못 보니까 그런 것뿐입니다. 미스터 로버트슨, 이거 놔요. 당장.”

“브루스라고 불러.”

 

브랜든. 짧게 그 이름을 끊어내듯 발음한 브루스가 다시 씩 웃어 보인다. 명백히 놀리는 투가 다분했고, 그 도발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결심한 브랜든이 인상을 쓰곤 제 머리채를 쥔 브루스의 팔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푹신한 소파에 몸이 기울어진 브랜든이 휘청거리자 머리채를 잡고 있던 브루스가 균형을 잃고 따라간다.

 

“잠깐-”


브루스가 브랜든 쪽으로 와르르 무너졌고, 쓰러진 브랜든의 위로 엎어졌다.

눈을 떴을 때 브랜든은 코앞에 다가온 브루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숨을 내쉬자 곧장 그의 입안으로 호흡이 빨려 들어갔다. 입술이 닿아 있었다. 브랜든이 눈을 크게 뜬 순간, 브루스는 짓이기듯 브랜든의 브루넷을 꽉 누르며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열렸다. 브루스가 눈을 접어 웃으며 혀를 밀어 넣는다.

 

“읍…!”

 

폭력에 가까운 키스였으며, 그보다도 희롱의 의미가 짙은 입맞춤이었다. 손바닥으로 뺨을 누르고 억지로 턱을 쥐어 입을 벌린 브루스가 브랜든의 입안을 훑었다. 미끈거리고 뜨거운 살덩이가 얽히고 브루스는 마치 초콜릿을 깨물듯이 브랜든의 입술을 깨물고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빨아댔다. 춥, 춥 하고 그의 입안으로 입술이 빨려가 부풀어 올랐다. 브랜든이 당황해 숨을 내쉬고 바르작거릴 때마다 브루스는 마치 강간이라도 하듯이 최대한 그의 입 안 깊은 곳으로 그의 혀를 찔러 넣었다. 얇은 입술이 의도치 않게 그의 혀를 조이면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포말이 터졌다. 브루스는 뜨거운 숨까지 모조리 흘려 넣으며 브랜든의 입안을 마음껏 돌아다녔다. 어린아이처럼 맑은 푸른색 눈동자와 잔뜩 당황한 녹회색의 눈동자는 그때까지도 누구 하나 감기지 않고 멋대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제법 오랫동안 질척하고 야한 소리가 흐른 후에야 브루스는 브랜든의 머리채를 놓아 주었다. 타액이 길게 이어져 번들거리는 입술을 오갔고 브루스가 장난처럼 그것을 손가락으로 툭 끊어낸 순간,

 

“악!”


브랜든은 정확히 이틀 전 주먹으로 쳤던 그 광대를 강하게 쳐올렸다. 얼굴을 움켜쥔 브루스를 있는 힘껏 밀어낸 브랜든이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브루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 선물, 맘에 안 들었어?


“스코틀랜드도 남자끼리 키스 잘 안 하는데, 뉴욕이 아무리 개방됐어도 이건 아직 아니야?”


장난이니까 너무 그러지 마, 하고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마구 뒤섞여 터지는 브루스의 말을 뒤로 한 브랜든이 빠르게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는다. 그제야 브루스가 브랜든, 브랜든! 하고 이름을 뒤늦게 불렀다.

 

“장난이 좀 심했나? 어이, 어이! 미안해! 장난이었어, 고마워서 그랬다고!”  


이내 브루스가 방문을 쾅쾅 두드리며 브랜든을 불렀지만 그의 방문은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동그랗게 만 브랜든이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고 온몸에 열이 올랐다. 브랜든은 절망적으로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참았다. 아주 오랫동안, 적어도 일 년 동안, 애써 숨기고 짓밟아두고 있었던 그의 수치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흐으, 흐으……. 긴 울음소리가 천천히 나직하고 젖은 신음으로 바뀌어갔다. 방문을 두드리는 브루스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브랜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브루스는 예상보다 일찍 퇴근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좌천되어 구석으로 갔고, 인력이 없어 뉴욕으로 장기 출장 비슷하게 왔지만 그의 이력상 적혀 있는 몇 가지 말들(‘알콜중독, 마약중독, 동료 간 불륜’ ‘살인사건 범인 무단 살해’ ‘자살 시도’) 때문에 그에게 누구도 중요한 일을 맡기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일과 최소한의 월급. 완전히 찬밥 대우였고 그래서 뉴욕에서 변변한 플랫 하나 구하질 못해 브랜든과 함께 살기 시작했지만 브루스는 크게 미련이 없었다. 없어 왔다. 그는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브루스는 기침하듯 미소 지었다. 주먹을 쥐고 작게 입가를 가려 쿡쿡거린 브루스는 집으로-이 말은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뉴욕의 그 아파트는 지금 그의 집이었다. 브랜든과의 집-가는 길에 놓인 가판대 앞에 잠깐 섰다. 늙은 노파가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걸 보니 잠깐 담배가 그리워졌고, 술에 대한 욕구도 따라 일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그에게 더 흥미로운 게 있었다. 브루스는 서서 잠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지갑을 꺼냈다.

 

“잔돈은 가지세요.”

 

그가 집어 든 건 플레이보이였다. 물론 동성간의 키스가 충격일 순 있지만, 그걸로 그날 내내 방 밖을 나오지 않았다니. 순진해도 어지간히 순진하다 싶었다. 뉴욕으로 와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러한 것들을 끊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동거인이 너무 나이브한 것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음담패설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어야지. 그리고 구슬려서 포르노 채널도 구매 좀 하고. 같이 사는 몇 달간, 브랜든은 그러한 것이라곤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노트북에는 포르노 동영상 하나도 없었고 아무리 뒤져도 성인잡지는커녕 화보 한 장도 나오질 않았다. 남자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브루스의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린다. 같이 보자고 하면 또 놀라겠지.


집으로 향하는 브루스의 발걸음이 아주 오랜만에 가벼웠다.



 

“브랜든, 퇴근했- 이런!”

“젠장!”


현관에서부터 커다란 음악소리가 들리기에 일찍 퇴근했구나 싶어 활기차게 문을 연 브루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브랜든이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 문을 쾅 닫았다. 이내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브루스는 놀란 얼굴로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브랜든은 완전히 벗고 있었고, 그리고 그는-


브랜든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손놀림을 빨리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거울을 등진 채였다. 씨발, 씨발. 답지 않게 욕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더 흥분이 되는 건 왜일까. 자괴감과 혐오감에 휩싸이면서도 그의 분신은 욕망을 더해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브랜든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뜨겁게 단단해지는 그의 것과 그것을 감싸고 스치는 손바닥과, 웅웅거리듯 닫힌 문을 타고 들어오는 노랫소리, 브랜든의 입술에서 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얼굴이 쾌감으로 일그러졌다. 탁 탁 하는 손길이 빨라졌다. 씨시의 일 이후로 브랜든은 모든 걸 버렸고 모든 걸 포기했다. 새집에서 단 한 순간도 여자를 부른 적도 없었고 포르노를 보지도 심지어 자위를 하지도 않았다. 애써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끝없는 자괴감은 더욱 커다란 욕망이 되어 브랜든의 몸을 덮쳤다. 키스를 했을 때, 상대가 브루스인 것보다도 그런 식으로 살결이 겹치고 젖은 분위기에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었다. 브랜든은 자괴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잠그지 못한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린다. 거울을 피해 문을 바라본 채 자위하던 브랜든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당황해서 말을 찾지 못한 브랜든을 향해 푸른 시선이 끈적하게 묻었다.

 

“그런 거였어?”

“미스터 로버트슨, 지금-”

“브루스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브랜든.

그때처럼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온몸이 쭈뼛하게 소름이 돋는다. 셔츠만 걸친 브루스가 후우, 하며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 여전히 장난스러워 보이는 앳된 얼굴이, 수염이 말끔하게 밀린 수려한 얼굴이 똑바로 브랜든의 몸을 훑었다. 브랜든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브루스가 등 뒤로 팔을 밀어 문을 닫는다. 쾅. 하는 소리에 몸이 움찔 튀었다. 브루스가 나직하게 웃었다.


“어쩐지, 너무 금욕적이라고 생각했었지.”

“당장 나가-”

“억지로 욕구를 참고 있는지는 몰랐어.”


그 말과 함께 브랜든에게 달려든 브루스가 그때처럼 브랜든의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악 소리를 내지른 브랜든이 미끄러운 욕실 바닥에 휘청거리다 쿵 주저앉았다. 욱신거리는 무릎의 고통에 인상을 쓰기도 전, 브루스가 그의 고개를 잡아당겨 제 사타구니 쪽에 강하게 문질렀다. 헉. 브랜든이 짧게 숨을 삼켰다.


“매번 네가 날 살려줬잖아, 브랜든.”

“이것 좀…”


이번엔 내 차례야. 브루스가 바지의 버클을 풀며 브랜든의 머리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브랜든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브루스의 허벅지를 잡았다. 브루스는 남자의 뉴욕을 닮은 눈동자가 수치심에 물들어가는 색을 보았다. 그것은 그 어떤 날의 뉴욕보다도 매력적이었다. 브루스가 작게 키들거렸다. 명백한 스코티쉬 억양과 강압적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브루스는 브랜든에게 명령했다.


“빨아.”


모든 비밀은 수치스럽고, 죽음과 욕망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테다. 절정과 파멸을 향해 속도를 올리는 그 순간만큼 은밀한 것은 또한 없을 것이다. 나는 너의 비밀을 알아. 브루스는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너도 나의 비밀을 알지….


브루스는 입을 벌리는 브랜든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는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What the hell am I doing here, I don’t belong here……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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