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레이는 삼촌의 표정이 당황과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상냥한 삼촌, 변함없이 나를 지켜준 삼촌. 알고 있었다. 어른의 의무가 아닌, 레이 본인을 어여쁘게 여기고 보호해주려고 노력했음을.


레이는 애초에 이 얘기를 꺼낼 생각도, 현실을 말해서 삼촌의 마음을 해칠 생각도 없었다. 지금의 레이는 자신이 상처받기 싫다고 남을 상처 주려고 하고 있었다. 여전히 이렇게 더러운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레이는 자신을 비웃었다. 


4년전 삼촌이 모종의 거래로 레이 본인을 그 집에서 빼내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는 나중에 다시 가문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레이가 행복해하는 꼴을 지켜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고 트집을 잡아 다시 부를거다. 아키바 에이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 뒤, 예상했던 대로 아버지는 호시탐탐 레이가 실수를 하기를, 가문에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삼촌은 몰랐겠지만, 레이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그런 아버지를 보며 살아왔으니, 그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아버지에게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훌륭하게 원하는 바를 움켜 쥐었다. 아키바 에이지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칠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징그러운 혐오가 레이에게 들러붙고 끔찍하다는 눈빛이 그녀에게 향할 때에도, 그런 아버지에게 분노를 표출할 때에도 올마이트의 충고와 부탁을 잊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삼촌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삼촌이 레이에게 하는 말이, 눈빛이, 행동이, 마음이, 레이를 따끔거리게 했다. 심장부근에 바늘을 찌른 것처럼 따끔거렸다. 삼촌은 레이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거였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삼촌은 여전히 저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삼촌이 옛날에 해줬던 이야기. 아키바가의 진통제 이야기. 그거 삼촌의 경험담이었잖아. 완전히 기억하지는 않지만 삼촌의 표정만큼은 아직도 기억해. 내가 본 삼촌의 모습 중 가장 행복해보였거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삼촌의 가까운 사람이 죽은 그 날 말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그 날은 빌런의 습격도 없었어. 경찰에서는 비밀 임무 중에 순직했다고 했겠지. 근데 이제 막 경찰에 합격한 신입에게 그런 중요한 임무를 줄까?" 



타이세이는 뜻밖의 이야기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아키바 타이세이는 자신의 아픔을 조카에게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이 이야기는 레이는 모르는 이야기여야 했음이 분명했다.



"내가 삼촌에게 발견될 때까지 그 집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했지? 아니야, 틀렸어. 나 10살때. 그러니까 삼촌이 구해주기 2년전에 밖으로 도망친 적이 있었어."



기억의 서막을 펴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레이는 당황과 놀라움에 휩쓸려 갈피를 잡지 못하는 타이세이를 놔두고 그 날을 회상하듯 어느 먼곳을 쳐다 보았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그 날은 너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도망쳤어. 가까운 경찰서로. 도와달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도망치던 길에 순찰 중이었던 경관을 만났어. 그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할 새도 없이 바로 기절했어. 거의 이틀 넘게 잠을 못잤거든."



이야기의 시작은 담담했다. 결말이 잔혹하고 끔찍할 것은 분명했지만, 시작만은 불행하고 다급했던 아이를 도와준 다소 아름다운 한 경찰의 미담이었다.



"내가 누군지 못 알아봤던 건지 가까운 병원으로 나를 데려 갔나봐. 그런데 그 병원이 어디였는 줄 알아? 아키바 병원이었던거야. 하핫 어떻게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지? 도망친 곳에 제 발로 들어간 격이었어!" 



레이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 날의 기억을 쏟았다. 억지로 비틀어 연 기억의 상자에서 피가 맺힌 기억이 하나 둘 굴러 떨어졌다. 레이는 자신의 발 밑 근처가 피투성이로 보였다. 그래, 그 날 그 곳처럼.



"살면서 그렇게 빌어본 적이 없어. 아까까지...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사람이었는데, 눈을 뜨고 다시 본 그 사람은 핏덩이였어. 그냥.... 저 사람을 살려달라고,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빌었어. 빌고 또 빌었어. 제발 저 사람에게 닿게 해달라고. 어떤 짓이라도 할 테니까. 제발 살려달라고."



이 빌어먹을 삶은 늘 레이에게 냉정했고 자비가 없었다. 조금의 행운도 행복도 레이의 손아귀에 쥐어주지 않았다. 레이는 웃으면서 울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하고 그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볼 수 밖에 없었어.

내가 우니깐, 그...다정한 사람이...무서워하지 않게 자기 얘기를 해줬어.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 계속 나오는거야. 그래서.... 그 때 알게 됐어."


타이세이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두렵기까지 했다. 레이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더 들으면 안될것 같았다. 그 다음 나올 이름의 주인을 알 것 같았지만. 듣는다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듣고 싶지 않았음에도 듣고 싶었다. 타이세이도 레이도 이야기의 진행을 막지 않았다.



"그 경관의 이름 유우토였어. 타케우치 유우토. "



쿵. 타이세이가 벌떡 일어나자 그가 앉았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엉망으로 쓰러진게 의자만은 아니었다. 타이세이의 안의 커다란 무언가 역시도 엉망으로 떨어졌다. 

타이세이는 귀를 막았어야 했다고, 레이의 말을 멈추게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이름을 들어버렸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그 이름을. 타이세이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진통제였던 그 이름을.



레이는 충격에 휩싸인 삼촌을 보며 참았던 눈물을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옛날에 삼촌이 아버지가 하는 말은 다 무시하고 잊어버리라고 했었다. 그거 다 개소리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 


"아키바 레이 너는 태어나서는 안됐었다."


아버지의 그 말이 오늘따라 더 가까이 더 크게 들렸다. 지금의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레이 본인 때문에 누군가는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레이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건 잊어서는 안되는 낙인이었다.



"이래도 나를 용서할 수 있어? 이래도 나를 딸이라고 부를 수 있어?" 

"나는... 비겁하고 겁쟁이야. 그 집에서 어떻게든 나오고 싶어서 삼촌에게 사실을 얘기하지 못하고 이용했어. 왜 숨기냐고? 왜 이야기하지 않냐고? 그야 당연하지! 이런 걸 어떻게 말해!!!!"

"이런 비밀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삼촌에게 화를 내?! 어떻게... 삼촌에게 아프다고 해?! 나랑, 아키바랑 연관된 사람은 모두 불행해져! 모두! "



레이는 영혼에 박혀버린 낙인이 아파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던 상처의 붕대를 풀어 여감없이 타이세이에게 드러내었다. 타이세이는 레이의 고통에 가득 찬 말이, 그 날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지만,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다. 1년 넘게 찾아 해메던 진실을 드디어 만났음에도 기쁘지 않았다.


타이세이는 이 진실이 너무나도 무겁고 무서웠다. 그는 본인도 모르게 뒤로 조금씩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손끝에 닿은 문을 열고 뒤를 돌아 도망쳤다. 도망치는 그의 뒤로 어렴풋하게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나를 도와주려고도 구해주려고 생각하지마." 

 



마음의 바다(心海)에서 헤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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