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관계



시간 맞춰 호텔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누르자 지난주 처럼 그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문앞에 쭈뼛쭈뼛 서서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게 흘러만 가는 시간을 저 방문 밖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고민을 하고 올 걸 그랬나. 분명 지난 일주일동안 거절할 방법도 생각했었고, 이런 상황도 충분히 생각했었다고 생각했는데  충분치 않았던가 보다.



“뭐죠? 그 후회 가득한 표정은?”



잠시 사라졌던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아직까지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술잔을 손에 쥐며 다가오고 있었다.



“먼저 씻을까요?”



갑자기 어디서 솟구친 용기인지 나 조차도 영문을 몰랐다. 나는 아직 그대로 문앞에 쭈뼛 서있으면서 당장이라도 그에게 안길 준비가 되었다는 태도로 말하며 그를 쳐다보자 그가 오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술을 한모금 마시며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옅게 웃었다.



“긴장했나 보군, 훗- 좋긴 한데 그렇게 급할 건 없어요. 난 당신 모든게 궁금해서, 우선 저녁부터 먹읍시다.”



그는 벗어두었던 자켓을 걸치며 먼저 문을 나섰다. 그는 호텔안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가는 내내 아무말도 없었고, 나는 계속해서 아까의 그 멍청한 행동을 자책하고 있었다.

식사 도중 그가 자켓 안 주머니에서 키를 하나 꺼내어 테이블로 올려놓았다. TH 로고를 보고 자동차 키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내가 무엇이냐고 묻기 전에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 놓으며 자신이 건낸 키에 대해 설명했다.



“나 만날 땐 이거 타요”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식사가 끝났는지 냅킨을 들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의 행동에 나도 의미 없던 포크질을 멈추고 내려놓으며 냅킨으로 입주변을 정리했다.



“원래 말이 없는 편이예요? 뭐 수다스러운 것도 귀찮긴 하지만 그렇게 반응 없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진 않은데”

“아, 죄송해요 뭘 좀 생각 하느라”



아까의 멍청한 발언 이 후로 나는 최대한 말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와의 대화에서 편히 받아칠 수 있는 건 한마디도 없었다. 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그를 따라 식사를 마치자 곧이어 직원이 와서 접시들을 치우고 차를 내왔다.




“요즘 작업하는 건 주로 물을 소재로 한거라고 들었는데”

“아 네, 설치 미술 쪽으로 작업하는 편이예요. 그림도 그리긴 하지만 그건 나중에 값어치가 올라가니까요”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요. 하고 싶은 형태가 있습니까?”




그는 뜬금없이 내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었다. 정말 나에 대해 모르는게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직까지 크게 눈에 띌 만한 작업을 하지 않아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작업들이었다. 하지만 이내 TH전자 전무가 사람들 시켜 내 정보 몇개를 못 알아 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3년 전 뉴욕 일도 알고 있는데 현재 작업하고 있는 일들이 뭐 대수일까. 그가 먼저 내 작품에 대한 주제를 꺼냈으니 익선동 갤러리 작품에 대한 것도 물어봐야지 싶어 그의 질문을 제치고 조심스레 그에게 작품 구입에 대해 물었다.




“그것보다… 혹시 익선동 갤러리 작품들 사신게 전무님이십니까?”

“아 그거 내가 지시했어요, 당분간 내가 소장하고 있다가 미술관에서 다시 매수 할 거예요”

“현재 작품들로 시세 차익을 남기긴 힘들텐데요...”



그의 계획은 마치 부동산 처럼 시세차익을 내기 위한 구입으로 보였다. 지인의 명의로 헐값에 구입하게 하여 나중에 땅값이 오르면 자신이 정당하게 비용을 더 지불한 것 처럼 하여 명의를 돌리는 행위 말이다. 아 물론 역으로 한전무는 저렴하게 사들인 내 작품들을 높은 값으로 팔아 자신의 재산을 늘리려고 하는 것일테고. 하지만 현재의 시세로 봐서는 시세차익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값 일텐데 허튼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두고봐야 알죠 훗, 그리고 나중에 갤러리를 통해 사들였다는 것 보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걸 사들였다는게 사람들 의심을 사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아…”




나는 그제 서야 그의 당당하고 치밀한 계획을 이해하고 작게 감탄사를 내놓았다. 역시 보통 사람들 머리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어 앞에 놓여진 잔을 들어 마시는 것에 집중했다.




“내가 어렵습니까?”

“당연히 전무님이니까 어렵죠”

 

그는 끈질기게 우리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을 헤집고 질문을 해댔다. 그의 질문에 나도 조금 길게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노력 했지만 그의 다음말에 나는 다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난 지금 당신이 더 어려운데”



방으로 다시 올라갈까봐 시간을 끌어 천천히 차를 마셨다. 이를 눈치 챘는지 그는 말없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모금 쯤 마신 찻잔을 미련없이 내려두고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긴장된 마음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에 탄 그는 나의 예상과 달리 1층 버튼을 누르고 별다른 설명 없이 내려가는 층수만 응시했다. 이유 모를 나는 주머니에 찔러 넣는 그의 쭉뻗은 손가락만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로비에서 직원이 열어주는 그의 차에 올랐고, 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타 말 없이 어디론가 향했다. 그도 이제 말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앞을 주시하며 운전에 집중했다. 한산한 도로를 십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빌라 단지였다. 그를 따라 내리며 나는 입을 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앞으로 이세진씨가 살 집이요”



차문을 잠그며 자연스레 엘리베이터로 앞서 걷는 그의 큰 보폭에 따라 입구에 들어서며 나는 나지막히 대꾸했다.



“차도 그렇고 집까지 이건...”

“알다시피 나도 사생활을 숨겨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고, 이세진씨도 곧 그렇게 될 텐데. 그리고 내가 드나 들기엔 이세진씨 집은 좀 그렇잖아요?”

“아, 그렇네요”



나의 난처한 심경은 네 심경따위가 무슨 상관 이냐는 듯한 그의 당당하고도 설득력 있는 주장에 곧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또 다시 어색해진 분위기는 마침 울린 엘리베이터 도착음으로 무마할 수 있었다. 다시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 그는 정면에 위치한 문앞에 서서 도어락 잠금을 풀었고 나는 익숙치 않은 구조에 눈을 굴리며 내가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와 정면의 문을 번갈아 쳐다보며 심상치 않은 빌라임을 직감했다.  



“들어가 봅시다”



곧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를 따라 들어선 복도를 지나자 입이 떡 벌어지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거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 넓은데…”



그는 또 다시 나의 심경은 상관없다는 듯 중앙에 위치한 쇼파에 앉으며 재킷을 벗었다.




“테라스쪽 방은 당분간 작업실로 쓰기에도 괜찮을거예요”

“작업실이라면 지금 쓰고 있는데가 있어서 집에서 작업 할 일은 없을거예요. 집에서 하는 성격도 아니라”

“그 작업실 이번주 부터 공사 시작할거예요. 좀 누추하더라고”

“네? 제 작업실이요?”



야경에 이끌려 넓은 창 밖으로 이어진 테라스를 향해 넋 놓고 걸어가며 답을 하던 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멈춰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이미 나를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은 뭘 또 놀라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담배를 꺼내물며 다음 말을 이었다.



“놀랄 것 없어요. 그 건물 주인이 아는 사람이라서 직접 말해뒀어요 공사한다고”

“언제 이렇게 다 준비를 하셨어요?”



익선동 갤러리 작품을 사들인 일 부터 시작하여, 조금 전 레스토랑에서는 차키를 건내었고, 며칠 사이 이런 집까지 턱-하니 내놓았다. 그런데 이번엔 어제까지 멀쩡히 있던 작업실이 거론되고 있었다. 이쯤 되자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무사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세진씨 만난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이요. 가만히 앉아 연락을 기다리기엔 좀 지루해서”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꽤나 계획성 있고 철두철미 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내 의사와 상관 없이 그 많은 걸 일주일 사이에 준비했다고?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까지 하는지. 아니, 내가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마치 내가 곧 연락이 올 거라 확신하고 미리 준비 한 듯 했다.




“제가 연락을 할 줄 아셨어요?”

“기다렸다고 하는게 맞겠네요”

“전무님 아까부터 여쭤보는 거지만 정말 왜 하필 저인지...”

“....일주일이나 기다리게 했으니 이제 더 기다리게 하지마”




갑자기 그의 눈이 단호하게 바뀌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몸을 일으켰다.



“됐어 그냥 있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말에 아무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며 창가에 서있는 나를 향해 그는 단숨에 걸어왔고, 내 입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낯선 온기를 받아 들이고 있었다.




“하아…”



끈질기게 쫓아 오는 그의 입을 따돌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는 그의 어깨를 두손으로 움켜 잡으며 몸을 지탱하기에 바빴고, 그의 손은 이미 옷속을 헤집고 들어와 허리를 받치고 있었다.
한참을 쫓아오던 그의 입술이 잠시 떨어짐과 동시에 둘다 거친숨을 몰아 쉬었다. 그래, 그도 인간이라면 숨이 찰 것이다. 무섭게 몰아부친 그 때문에 밀어낼 힘조차 빠져버린 나는 그의 어깨에서 손을 거두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하아...기다린 보람이 있군”



일순간 마주친 서로의 눈빛을 읽을 새도 없이 그는 다시 크게 숨을 내쉬더니 옅게 미소를 띄우며 다시 내 입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좀 전 보다 밀착해오는 그 때문에 창에 기댄 나는 그의 손이 아래로 향하던 틈을 타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저… 전무님…그..그만”

“그만두라고 하기엔 조금 늦은거 같은데? 하아, 여긴 왜 이렇게 뜨겁지?”



그의 눈을 다시 마주하니 그의 눈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했다. 내가 숨을 고르며 애처롭게 쳐다보자 그는 내 귀에 입을 옮기며 나를 더 몰아 부쳤다. 그와 동시에 아래로 향했던 그의 손은 내 바지 버클을 단숨에 풀어내고 그 사이로 침입하여 엉덩이를 쓸어 내렸다. 위 아래로 동시에 이어진 자극에 나는 참지 못하고 낮은 신음을 뱉어내었다. 낯선 혀는 계속해서 귓불을 배회하였고, 엉덩이에서 등으로 옮긴 그의 손은 자신의 손짓에 방해가 되는 속옷을 한번에 풀어내었다. 그의 손은 장애물이 없어지자 더 자유롭게 등을 오가며 자극하였다. 내 손은 더 이상 그의 어깨가 아닌 그의 목뒤로 옮겨져 그를 감싸 안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고, 그의 입술이 떨어진 내 입에서는 멈출 수 없는 신음이 자꾸 새어나와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숨을 참으며 노력했다.



“으읍…”

“...아직 참을 만한 이성이 남아 있나 보지?”



내가 숨을  참고 있는 것을 눈치 챘는지, 귓불을 배회하던 입술은 더 가까이 다가와 뇌쇄적으로 속삭였다.
이어 목으로 내려간 혀는 나를 계속해서 자극하기 시작하였고, 바지는 어느새 흘러내려 그의 손은 내 치골과 엉덩이 사이를 반복해서 배회했다.



“꽉 잡아”

“앗!!”



그는 순간 내 무릎과 허리를 받쳐 들었고, 나는 갑자기 들려지는 몸에 깜짝 놀라 놀란 눈을 하며 그를 안았다. 그는 방으로 가는 도중 한동안 떨어져있던 내 입술을 찾아 내가 오랫동안 깨물어 핏기 어린 아랫입술을 다독거렸다.

방에 들어서는 문앞에서 내 무릎을 받치고 있던 그의 손은 문고리를 잡으려 손가락을 뻗었지만, 입술을 거두지 않은채 계속된 키스에 몇번이고 문고리를 놓쳤다.



“아, 씨발…”



그가 낮게 내뱉은 욕에 나는 움찔 거렸고, 그는 빠르게 문고리를 눌러 열고는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입술 깨물지 마, 피나잖아”




그는 침대에 앉으며 나를 고쳐 앉혔다. 그의 무릎에 마주보고 앉은 자세가 된 나는 쿵쾅대는 내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어린아이같은 걱정을 했다. 그만큼 내 심장은 다음 이어질 상황을 예상하고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또한 그를 코앞에 두고 마주한 자세가 부끄러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그는 눈을 피하는 나의 시선을 쫓고 있었고, 손은 쉴새 없이 허리와 엉덩이를 오가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린 그의 시선은 블라우스 단추로 향하더니 이내 미간을 조금 구겼다. 그의 표정을 읽었지만 영문을 몰라 그를 빤히 쳐다보니 나와 시선을 잠시 맞추던 그는 블라우스 아래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나는 허리를 휘었고, 그 허리를 다시 한손으로 지탱하며 매섭게 파고 들어왔다. 루즈한 핏의 블라우스 안으로 들어온 그가 내 배에 입술을 내려 애무하며 나머지 한손으로는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득해 지는 시야 사이로 그가 아까 문고리를 놓칠 때 처럼 단추 하나 풀어내는 데도 꽤나 여러번 헛손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헛손질하는 손을 떼어내고 스스로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하자 옅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 보더니 자신의 일에 다시 집중했다.

단추를 거의 풀었을 때쯤 그는 블라우스와 속옷을 걷어내고 나를 돌려 눕혔다.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 보는 위치가 되자 다시금 긴장감과 부끄러움이 함께 몰려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남자 경험이 없다는 것은 내숭일테지만 사실 그리 많은 경험은 아니었다. 이렇게 벌거 벗고 누워 남자와 마주 하는 건 정확히 이번이 세번째다. 그것도 두번 다 같은 한 남자였으니 내 눈 앞에 있는 그가 두번째 상대라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이런 내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도 셔츠 단추를 급하게 풀어내고 바지를 벗어내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것이 조금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 우리를 비추는 것은 테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밝은 달과 야경 불빛 뿐이었다.

내가 잠시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그는 내 턱을 정면을 향하게 돌리더니 부드럽게 볼을 감싸고 그 행동과 맞지 않는 차가운 말투로 내 정신을 번뜩 들게 하였다.



“나랑 있을 때 딴 생각 하지마”



그는 다시 처음 입을 맞추었을 때 처럼 아니, 그보다 더 깊고 빠르게 내 입술을 쫓으며 정신을 차릴 틈이 없게 내 온몸을 애무하며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빠른 속도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자꾸만 새나오는 신음만 겨우 참아가며 눈을 꼭 감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점점 아래로 입술을 옮기는 듯 하더니 내 팬티를 벗겨내고 자신 또한 벗어냈다. 다시 내 얼굴에 가까이 다가와 키스를 퍼부으며 자신의 두 팔안으로 나를 가둬 밀착하더니 그의 단단한 것이 내 다리 사이에 닿고야 말았다.



“하아 전무님!!!”

“조금만 참아 하아...”

“천천히…"

“하아 이세진씨 지금 천천히 가능하다고 생각해? 읏”



그는 생각 할 틈 없이 정말 단숨에 내안에 들어섰고, 나는 빠르게 드나드는 그를 감당 하느라 의식없이 내뱉어진 신음 소리를 들으며 그의 어깨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다음날 포근한 침구에 파고들다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마자 마주한 것은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걷어내고 있는 그였다.



“괜찮나?”

“네”



괜찮다고 대답은 하였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리며 가슴즈음에 있던 이불을 목 끝까지 가져왔다.




“괜찮지도 않고 후회하는 표정이군”

“…..아닙니다”




그는 침대에 걸터 앉으며 내 턱을 자신을 향해 당겼다. 그는 상의를 벗은 몸으로도 당당하였지만, 나는 이불을 꼭 쥐고 있는 꼴이었다.




“이사는 언제쯤 가능하지?”

“급한게 아니라면 정리를 좀...”

“나는 내가 여기왔을 때 이세진씨가 항상 있었으면 좋겠는데”

“… 그러면 오늘 간단한 짐은 챙겨 오도록 할게요”




사회적 위치를 실감하게 하는 그의 말투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약점이 잡혀있어서 그런걸까. 그는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게 해야할 것만 같은.



하루종일 나른한 몸으로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다 몸을 일으켰다. 창 밖을 바라보니 여름 쨍쨍한 햇볕이 물러나고 있었고 집은 고요했다. 몸을 일으켜 어제 미쳐 둘러보지 못한 방을 둘러보니 어제 그가 벗겨낸 옷가지들이 사방에 널부러져 있었다. 어제의 흔적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애써 외면하려 방에 딸린 욕실 향했다. 다행히 기본적인 세면도구는 모두 갖추어져 있었지만 아침 그가 한말도 있고, 피부가 예민한 편이라 쓰던 세면도구를 챙겨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맡겨 긴장을 풀고 몸을 내려다 보자 눈에 띄는 그의 흔적에 잠시 눈쌀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이젠 익숙해져야 하는 흔적들이라 생각하며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걸려 있는 가운을 대충 입고 나왔는데 생각해보니 입을 옷이 없었다. 어제 이렇게 갑작스레 외박을 할 줄 몰랐으니까 당연했다. 머리를 말리고 방에 널부러진 옷들을 주워 입었다.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내다 발견한 어제 그가 건낸 키를 발견하곤 자신의 차를 호텔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젯밤 너무나 많은 것이 뒤엉켰다. 내 처지도 내가 가진 것들도 그로 인해 뒤엉켜 버린 듯 했다. 이미 뒤엉킨 처지이니 화장이 뭐 필요가 있나 싶어 가방에 나뒹굴던 선글라스만 끼고 현관을 나섰다.

어제 들어오면서 느낀 거지만 이 빌라는 보통 아파트들과 달리 한 층에 한집만 거주하는 형태인 듯 했다. 엘리베이터 층수 또한 8층 까지만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 그가 건낸 키를 눌렀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차에서 소리를 내며 헤드라이트를 반짝였다. 차를 향해 걸어가다 다른 차인가 싶어 걸음을 멈춰 세워 다시 한번 키를 눌렀다. 자신이 잘못 봤다 생각한 은빛차체에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을 밝혔다. 그의 회사에서 새로나온 신형차인 듯 했다. 아직 서울 시내 도로에서 잘 보이지 않는 차라서 순간 자신이 모르는 외제차인가 싶었다. 다시 한번 차키를 확인하니 TH자동차 로고가 정확히 새겨져 있었고 차에는 TH자동차의 익숙한 엠블런이 아닌 복잡하고 세련된 엠블런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를 넋놓고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운전석에 앉으며 내부를 둘러보니 밝은 아이보리색 시트에 외관 만큼이나 세련되지만 그렇다고 무겁진 않은 스포티한 쿠페차량이었다. 시동을 걸고 가방을 조수석에 내려놓으며 어두운 지하주차장을 벗어났다. 큰 도로로 나오자 퇴근시간과 맞물렸는지 사거리를 지날 땐 여러번의 신호를 대기해야 했다. 무심코 시간을 확인하자 해가 길어 아직 어두워지진 않았지만 어느덧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가 오늘도 오는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 있으니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이제 막 그 집을 나선 내가 집에 없으면 화를 내지 않을까? 아침에 자신이 왔을 때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조금 조급해진 마음에 엑셀을 조금 더 밟으며 멀지 않은 집으로 향했다.


그날 집에 도착하여 쫒기듯 캐리어를 꺼내들고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겨 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걱정과 달리 집은 나갈 때 처럼 고요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듯 서둘렀는데, 아무도 없자 조금 허망했다.




오늘 그의 집에 짐을 푼지 삼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그날 아침 그렇게 떠난 후 단 한통의 연락도 없었다. 아, 물론 그의 직접적인 연락은 없었지만 이틑날 작업실에 있는 짐들이 그의 집으로 배달되어 왔고, 나에게 차키를 받아간 남자는 몇시간 뒤 호텔에 두고 온 차를 지하에 가져다 놓았다.

그가 연락이 없던 이틀 동안 나는 작업실에 들러 언제쯤 끝나는지 확인하고, 집에 들러 짐을 좀 더 챙겼다. 그의 집에 내 물건이 하나씩 늘어났고 당분간 작업실로 쓸 방에 앉아 그간의 작품 스크랩을 보며 다음달에 갤러리에 새로 걸어 놓을 그림 구상도 했다.

honey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