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y-made heart

레디메이드 하트


OIKAWA TORU X HINATA SHOYO X KAGEYAMA TOBIO


13


We is saying.



후우우. 숨을 깊게 내뱉었다. 마음을 정하고 난 후가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어려워진 느낌이었다. 긴 휴가를 마치고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그’에게 어떤 얼굴을 보일지 잠시 고민하던 히나타의 등을 누군가 톡톡, 가볍게 쳤다.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린 그의 눈 앞에 다정한 색을 담은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해요, 히나타 대리?”

“아, 안녕하세요!”

평상시와는 다른 반응을 느꼈는지 오이카와의 시선이 기민하게 히나타의 얼굴 위를 더듬었다. 이내 몸을 움직여 문 앞에서 굳어 있는 남자의 옆에 가서 그가 잡지 못한 문고리를 대신 잡아 밀었다. 어라, 별 다른 말이 없네? 뭐라도 물으실 줄 알았는데. 히나타의 생각을 비웃듯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푹 쉬었죠?”

“아하하, 네.”

평온하기 그지없는 상대의 반응에 제 스스로 머쓱해지는 것을 느끼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다행이네요. 가볍게 말하고는 먼저 사무실에 발을 들인 그가 먼저 온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걸로 끝이었다. 묘한 찜찜함을 느끼며 그의 뒤를 따르자 오이카와의 등에 가려진 히나타를 이제야 본 팀원들의 눈이 일시에 커졌다. 히나타 대리가 복귀했다.

“대리님! 오셨어요?”

히나타의 직속 후임이 반가움을 얼굴 가득 띄워내고서 한걸음에 달려왔다. 타치바나 상. 여전한 그 얼굴에 히나타 또한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대리님, 대리님! 그럴 시간 없어요, 빨리요!”

“어, 어… 뭔데?”

히나타의 시선이 후임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에 닿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많아 보이는 양에 기겁하는 것도 잠시였다. 단 일 주일 간 주어졌던 꿈 같던 일탈로 인해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이 곳이 원래 일이 많은 부서였다는 걸 스스로도 망각했다. 먼지가 잔뜩 쌓여 있을 자리로 돌아와 제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다급한 표정의 후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저번에 지시하셨던 남성 코스메틱 프로젝트 말인데요…….”

느릿하게 흘러갔던 히나타의 시간은 시계의 톱니바퀴에 맞춰서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제 모든 것이 돌아왔다.


“하아아아…….”

밥을 먹을 시간도 모자라 소중한 점심 시간을 전부 업무에 헌납한 히나타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주르륵 늘어졌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곱씹던 이에게서 작은 한숨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일에 복귀하자 마자 쏟아지는 일의 양은 어마 무시했고, 급한 프로젝트부터 차분하게 처리하던 히나타에게 후임들은 경외를 담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히나타 대리님! 프로젝트의 주축이었던 히나타가 손을 대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일은 후임들로 하여금 히나타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르게 했다.

몇 년을 이 곳에서 일했던가. 새삼스럽게 제가 몇 년 차인지 셈해보던 남자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후임들에게 경외심 어린 말투로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은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쑥스러웠다.

이 곳에 신입으로 들어왔던 시절엔 이렇게 들어 볼 거라 생각하지 못 했다. 아니, 하더라도 그것은 막연한 상상이다. 그런 상상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은 지독히도 달콤했다.

“아.”

탄식에 가까운 신음이 남자의 입에 먹혔다. 피곤으로 눈을 감자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잔상. 그 누구도 소화할 수 없는, 바람머리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등을 보이며 서 있다. 지금 이 곳에 없는 이가 히나타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그의 마음을 종용하고 있었다.

말, 해야 하는데. 여전히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남자는 사람들을 홀릴 만한 매혹적인 미소를 보여주지 않은 채 저 멀리, 가만히 히나타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와 나의 거리는 이만큼이라는 듯이. 오이카와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고 이번에는 히나타가 그에게 가야 했다. 결국에는 히나타 쇼요, 그 스스로가 멀어진 거리를 좁혀야 했다.

그러려면 히나타와 오이카와가 단 둘이 있어야 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만남을 청하기엔 그들에게 일이 너무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연말 이벤트로 쏟아진 기획안들이 연이어 히나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언제 말을 하느냐구. 마음 속에 드는 못마땅함에 콧방귀를 뀌어 댔다.

“히나타 대리?”

“…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자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자신을 내려다 보는 다갈색 눈동자, 살짝 젖어 있는 머리카락. 조금 전에도 보았던 자신의 상사는 온 몸 가득, 차가운 눈의 냄새를 묻히고 왔다.

“일은 다 끝났나요?”

“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히나타가 말 끝을 흐리자 남자는 히나타의 앞에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먹어요.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은 회사 앞 카페에서 파는 샌드위치였다. 얼결에 남자에게서 제 점심식사를 받은 히나타가 작게 감사의 목소리를 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다. 아무도 없는 지금 오이카와에게 얘기를 해야 했다.

“저, 팀장ㄴ……!”

“어라, 팀장님! 어딜 가셨나 했더니 대리님께 줄 샌드위치를 사온 거예요?”

문이 벌컥 열리며 한 공간에 있는 상사들의 모습을 발견한 팀원들에 의해 말이 가로 막혔다. 심장이 쿵, 쿵, 하고 요란스레 뛰어 댔다. 저절로 식은땀이 났다. 한 발만 더 늦었더라면 히나타는 오이카와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만천하에 공개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 히나타 대리. 방금 저 부르지 않았어요?”

“아니에요…….”

또 언제 얘기할 수 있으려나. 속으로 침음을 삼키며 웃었다. 어색하게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어차피 시간은 있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초조해지고 있었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생각이었다. 오이카와가 자리에 돌아갈 때까지도 히나타의 작은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으흠.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던 오이카와의 시선이 멍한 표정으로 돌을 씹듯 샌드위치를 먹는 히나타에게 향했다. 히나타가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일까.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한 단호한 눈동자, 갈망을 부르던 입술. 그리고 뜻하지 않게 타인이 끼어들 때 당황을 담아 허둥지둥하며 대답을 피하던 태도. …히나타가 휴가를 신청하던 그 날, 오이카와는 그가 그 기간 안에 마음을 결정하길 바랐다.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숨겨진 속내를 히나타가 알아채 준다면, 아니— 어떤 경로로든 그의 고백에 반응하며 좋은 쪽으로 말해준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이다.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달콤한 상상을 한 켠으로 밀어내며 컴퓨터의 절전을 해제했다. 가만 있어보자. 그러고보니 최근에 카게야마와 히나타 둘이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던가? 자신의 ‘연적’ 이라 말할 가치도 없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수려한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히나타에게 줄 샌드위치를 사고 돌아오던 길, 저 멀리서 걸어오던 이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암청색 머리카락 위로 작은 눈송이를 묻히며 걷던 남자 또한 오이카와를 보았는지 잠시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그들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그 둘만 아는 어색한 정적을 뒤로 계속 걸었다. 이미 서로를 발견한 이상 무시하기도 뭐했다. 그렇다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넬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안녕하세요, 오이카와…팀장님.”

봐봐라, 저 짧은 머뭇거림. 그리고 살짝 찡그린 얼굴. 너무나도 선명히 보이는 감정에 어이가 없어서 웃길 지경이었다. 누군 좋아서 받아주는 줄 아나. 하지만 오이카와는 얄밉게 웃어 보였다.

“이런, 카게야마 상. 지금 어디 가는 길 입니까?”

카게야마의 입술이 살짝 달싹였다. 역시 그 웃음이 통한 듯했다. 부들, 하고 떨리는 입술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제 의도가 뭔지 살피는 시선. 그러나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었는지 순순히 내뱉은 목적지.

“잠깐 커피 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대충 마무리를 짓고 들어가려던 찰나,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태양같이 눈부신 그 사람. 자신과 눈 앞의 남자 사이의 공통점인 주홍의 남자. 오이카와는 지금 그 남자를 걸고 제 옆을 지나가려던 카게야마의 발을 묶고, 도발을 해 볼 심산이었다.

“아, 참. 그렇죠.”

“네?”

마저 걸어가려던 남자가 멈칫한다. 남자의 진한 남색의 코트가 빳빳했다. 잔뜩 젖어 있는 어깨 위로 쌓이는 눈송이를 한 번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는 암청의 눈을 보았다. 무덤덤하지만 날이 서 있는 눈동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에 대한 ‘확인’이었다.

“히나타 대리.”

그의 예상대로 히나타의 이름을 꺼내자 마자 카게야마가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한 때 ‘연인’이었던 남자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반응에 대한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속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제어하지 못한 질투가 서서히 바깥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히나타 대리가 이제 제 자리로 돌아왔으니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단념하는 게 좋지 않겠어, 카게야마? 말을 삼키며 더 없이 오만한 얼굴로 추위에 젖은 손을 제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어차피 저 남자는 오이카와가 말하려던 속 뜻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직설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 오이카와는 눈 앞의 그에게 굳이, ‘친절’을 베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 순간 카게야마가 입을 달싹였다. 뭐라고? 되물어오는 그에게 카게야마의 무덤덤한 암청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가 카게야마에게 친절을 베풀어 줄 생각이 없듯 카게야마 또한 오이카와에게 거듭 말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의 재촉에 가볍게 목례한 카게야마는 몸을 돌려 마저 갈 길을 갈 뿐이었다. 망연히 쳐다보는 오이카와를 등 뒤에 남겨 두고서.

그의 도발에 뒤따라온 카게야마의 반응은 묘한 것이라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카게야마의 등에서 시선을 떼고 발길을 돌려 히나타에게 향하는 와중에도, 히나타와 카게야마 사이로 연결되어 있을 고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파도처럼 밀려오는 업무 때문에 사적인 대화를 할 시간도 없어 그들 사이에 있었을 일도 모르던 상황이었다. 나오지 않는 답을 이끌고 눈길을 헤치며 돌아온 사무실에는 히나타가 혼자 남아서 업무를 마저 마치고 있었고, 아무 것도 못 먹었을 그에게 샌드위치를 전달해 주고 자리에 앉아 가만히 생각하던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히나타와 카게야마. 오이카와의 예감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분명, 둘 사이에 뭔 가가 있다.


*


“그 사람에게 말했어?”

카게야마가 히나타에게 커피를 건네며 물어왔다. 멈칫. 손을 내민 채로 굳어지자 그의 손에 무심히 쥐여주고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도 못한 주제다. 히나타는 잠시 제 컵을 만지작거렸다. 손바닥 가득히 느껴지는 따뜻함이 차게 식은 손을 녹이고 있었다. 어차피 카게야마도 알고 있다. 숨길 이유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아니, …언젠간.”

작게 속삭이는 히나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남자의 눈을 응시하는 카게야마의 얼굴은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짧게 침묵하다가, “그래.” 하고 희미한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그 표정에서 카게야마가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그 날, 미야기 현에서 마주친 이후 내내 제 마음 한 켠에서 자리한 불편함을 이제서야 지울 수 있었다. 이것이 또 다른 관계의 시작이라면 히나타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짜식, 그렇게 궁금했어?”

“내가 왜 궁금해하냐.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거지!”

순간적으로 발끈했는지 빠르게 내뱉는 반박을 들으며 시큰둥히 네, 네, 그러셨어요? 중얼거렸다. 그 작은 소리를 들은 카게야마가 날뛰는 것을 무시하면서 제 목을 축였다. 시선은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을지라도 머릿속은 오이카와로 가득했다.

“빨리 해. 히나타 쇼요. 오이카와 팀장님이 나 쏘아보는 거 안 보이냐. 진짜 죽겠다. 내가 말해야 하냐?”

“뭐라고?”

“너 몰라? 네 뒤에 있다. 내가 가서, 나 카게야마 토비오는 히나타에게 그 어떤 것도 없다고 말을 해야 알아 들으실까?”

카게야마가 고갯짓으로 오이카와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제 뒤에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등이 서늘했다. 히나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를 마주했다. 그는, 오이카와는 탕비실 내부가 아주 잘 보이는 복도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저를 흘깃 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눈에 먼저 들어온 묘한 눈동자에 들어있는 감정을 알 것 같아 시선을 비껴 내렸다. 시야 사이로 무엇인가가 반짝인다. 푸른 암청색 넥타이 위로 자리한 넥타이 핀이 창가 사이에 스며드는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 눈부신 빛을 망연히 쳐다보며 히나타는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는 그 눈엔 열기가 가득했다. 왜 그러시지? 잠시 갸웃하던 남자는 의혹을 품었다. 설마, 질투인가? 흘깃, 히나타의 의뭉스러운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제 옆에 서 있었던 카게야마에 대한 질투라면. 그 사실을 자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저 남자도 질투할 줄 안다는 사실이 좋았다.

“오이카와 팀장님!”

히나타가 웃었다. 카게야마의 곁에서 자신에게. 그것은 분명 좋은 신호였으나 오이카와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언제부터 저랬지?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상상에 얼굴 근육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좋지 않아. 그러나 히나타가 자신을 보고 있으니 애써 입꼬리를 잡아 올렸다.

“히나타, 대리.”

속이 좋지 않아. 마치 토하기 직전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히나타의 이름을 부르자 멀리 떨어져 있던 남자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오이카와는 깨달았다. 저 답지 않게 마인드 컨트롤이 실패했다는 것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무너진 표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그게 성공했는지, 오이카와는 모른다.

“괜찮으세요?”

“아, 괜찮습니다. 히나타…….”

“네?”

“아니, 아닙니다. 히나타 대리, 지난 번 브랜드 네이밍 건으로 잠시 후 회의하겠습니다.”

“아… 네, 준비해 두겠습니다.”

순순한 반응에 고개를 끄떡인 그가 히나타를 남겨두고 몸을 돌렸다. 실패했구나. 기민하게 제 얼굴을 살피는 히나타의 시선이 조심스럽고, 묘한 난색을 보였다는 걸 눈치챘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을 그에게 예고하듯 던져주고 화장실로 도망친 자신은 비겁했다. 그 사실이 뼛속 깊이 새겨진다. 제 등 뒤에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찬란한 밝음은 오이카와의 속내를 환히 드러내고, 습윤한 어둠은 오이카와의 오만을 비웃는 것처럼. 설령 이 모든 것이 착각일지라도, 오이카와는 히나타를 향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히나타와의 회의에 들어갈 때까지도.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손목을 내려다본다. 까만 가죽 시계, 그 속에서 정지된 시침과 분침 뒤로 초침이 빠르게 움직인다. 두 시, 오십 칠 분.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중얼거린 그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운명의 시간’.

감성적이기 짝이 없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상황을 달리 부를 만한 대체어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실제로 오이카와는 단 둘이 있을 그 시간을, 감히 공적인 시간으로 볼 수 없었다. 업무를 가장한 사적인 시간이었고 오랫동안 지켜온 마음에 대한 결론을 내기 위한… 불안한 시간이었다. 과연 그의 판단은 오판일까. 오이카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는 감히 히나타의 마음이 제게 있다고 확언을 내릴 수 없다. 그가 바라는 그 답은 오직 ‘그’의 손에 달려있었으므로, 처형대에 서 있는 죄수의 심정으로 제 부하를 기다렸다.

분명 난방을 틀었음에도 손 끝이 차갑다. 서늘한 감각에 연신 제 손을 만지작 거렸다.

똑똑.

“히나타입니다.”

드디어 그가 기다리는 남자가 찾아왔다. 들어오세요. 무거운 허락이 떨어지고 이어 작은 체구의 남자가 긴장한 듯 흔들리는 동공으로 정면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또렷하게 응시하는 노을의 눈이 천천히 깜박인다. 그 사이로 허공에 자유롭게 부유하던 공기가 차분함을 찾으며 숨을 죽였다.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고요가 흐른다.

히나타가 머뭇거리며 오이카와의 맞은 편에 앉기 위해 걸어왔다. 어둠에 갇혀졌던 그가 빛 사이로 들어온다. 태양이 찬란한 빛에 잠식하는 짧은 순간의 눈부심을, 오이카와는 그 기묘한 광경을 고요히 지켜보았다. 마지막일수도 있음에, 가슴 부근이 계속해서 뛰어 댔다. 쿵, 쿵, 쿵……. 심장이 보내는 통증은 설렘일까, 경고일까, 아니면… 두려움일지 판단하기 어렵다. 단지, 그에겐 이 오래된 마음을 끝내야 할 시간이 눈 앞에 살아있는 이의 형태로 빚어져 자신에게로 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히나타.”

오이카와의 입술 끝에 유려한 미소가 걸린다. 그린듯이 아름다운 웃음에 히나타의 시선이 정지한다. …네. 지루한 침묵을 삼킨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수 없이 떠도는 감정의 편린들을 뒤로 하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이 시간이 멈추고 너와 나, 서로의 마음은 어디로 갈까. 알 수 없는 마음의 향방에 대한 답은 남자의 손 아귀에 있었다.



Ready-made heart

-레디메이드 하트

W. 은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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