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겨울안개






  정원에 놓인 새카만 바위는 민석이 꽤나 어렸던 그 어느 날부터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 당시 민석의 키는 아직 아버지의 허리춤에 있었고, 여느 집 아이라면 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공을 차고 있었을지도 모를 나이였다. 그런 어린 나이에도 정원에 놓인 바위는 참 이질적이게 느껴졌었다. 정원의 곳곳엔 정원사의 손길이 잔뜩 스며들어 모든 것이 정해진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바위는 그런 정원의 암묵적인 질서를 깨트리기라도 하겠다는듯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육중한 몸을 뽐내고 있었다. 상부가 평편한 바위. 아버지는 종종 그곳에 앉아 계셨다.  



  여름방학의 막바지였던 어느 더운 날. 민석은 지겨운 바이올린 레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해는 뜨거웠고, 몸을 짓누르는 공기는 눅눅했다. 더위에 약한 민석은 시원한 차에서 내리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문 손잡이마저 뜨거워 짜증이 치밀었다. 아무도 마중하지 않는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빨리 차가운 실내로 들어가고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멈추게 된 이유는 아버지가 그 바위에 앉아계셨기 때문이 아니라,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편안한 얼굴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민석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은 정수리로 쏟아지는 햇빛이 어쩐지 수그러드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눅눅했던 공기 속에서 청량한 여름밤공기 냄새가 난 것도 같았다.  




  '도련님. 오셨어요?'




  뒤늦게 달려 나온 고용인이 민석의 어깨를 짓누르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어주었고, 그  소란에 아버지의 눈이 뜨였다.




  '아, 민석아.'




  그리 살갑지 않던 부자 사이에 저렇게 맑게 웃는 웃음을 본 적은 드물었다. 민석은 아버지의 웃음에 작은 미소로 화답했고, 아버지는 행복해 보였다.  




  '쉬엄쉬엄해.'




  그 말에 뭐라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아버지의 눈이 다시 감겼다. 까맣고 평편한 바위 위에 앉아 여름의 바람을 느끼고 있는 아버지는 싱그러웠다. 엄마의 곁에서 색을 잃어 가던 모습이 아닌. 온몸으로 색을 뿜어내는 싱그러운 모습. 민석은 아버지의 행복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



  아무도 나와보지 않은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은 했다만, 이 기괴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단정한 색상의 매니큐어가 곱게 발려진 손을 높이 치켜들고, 다시 거세게 휘둘렀다.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던 고용인의 손등 위로 엄마의 손이 떨어지면 찰싹 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손등이 빨갛게 붓기 시작한다. 엄마만의 특이한 채벌이자 화풀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때리면서도,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흘긋거리는 게 지금 엄마의 분노는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온한 아버지의 모습과 그 모습을 흘끔거리며 괜한 히스테리를 부르고 있는 엄마. 두 사람의 사이엔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것일지 감히 짐작도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자신이 입을 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민석은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담고 침묵한다.  


  아버지의 이상한 행복과 엄마의 불안이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가슴에 남게 될 줄은 몰랐다.  



  "네가 그 아들이야?"



  아버지의 행복 위에 한쪽 발을 올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를 보며 그 옛날 일을 떠올리는 것이 그랬다.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고, 남자의 오렌지색 머리에 두 번 놀랐으며, 반바지인 줄 알았던 바지가 사실은 무릎이 파여진 채로 정강이에서부터 다시 이어지는 것에 또 놀랐다.  



  "뭐야. 벙어리라는 소린 못 들었는데."



  아버지의 죽음은 엄마에겐 불안의 종식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모든 불안을 삼킨 것은 엄마의 기쁨과, 분노와, 슬픔과, 우울이 아니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만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로써 민석은 두 사람의 관계는 '엄마의 가식으로 인한 불안증과 그것을 감수하면서도 서로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는 절망감'으로 점철되어있음을 깨달았다.


  남편이 없어진 엄마에겐 더 이상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다. 아침마다 단정한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남편 앞으로 반찬을 당겨주던 모습과, 곱게 치장하고 조용히 집안을 돌보는 모습 따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민석이 보아온 엄마의 모습은 실크 슬립을 입고 거실에서 차를 마시거나, 늦은 밤 붉게 칠한 입술로 외출을 하고, 가끔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집안 어딘가에서 머무르는 것들 정도였다. 이 모든 것들에 환멸이 일었다. 이렇게 민석에게도 침묵의 한계점이 도래하고 있었다.  


  서퍼와 자동차, 야자수 따위가 그려진 파란색 하와이안 셔츠. 그런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성모마리아의 펜던트가 남자의 목에서 반짝거린다. 민석은 그 눈부심에 숨을 참았다. 두통이 시작되고, 끼끅 거리는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진짜 병신이야?"



  엄마의 남자일 것이 분명했다. 가만 보면 하나같이 알록달록한 머리색에 양아치 같은 어린 남자였다. 몇 살이나 차이가 날까.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와 자신의 나이차를 가늠해보던 민석은 이내 귀찮은 생각을 접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로 스트레스는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고, 민석은 그것을 푸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과부하가 걸린 뇌에서 기계음이 끊이질 않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무시한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서늘한 에어컨의 냉기가 온몸으로 쏟아진다. 그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슬리퍼를 끌며 몇 걸음 더 옮기면, 여전히 얇은 속옷 차림인 엄마와 눈이 마주친다. 짙은 화장과 독한 향수 냄새. 그 아래 숨겨진 알코올의 진한 향. 민석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다녀왔습니다."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까딱거려 인사를 하는 민석과, 그런 그럴 바라보는 엄마. 얼음이 가득 담긴 물을 벌컥거리면, 턱 아래의 기다란 목이 잘게 꿀렁거렸다. 붉게 얼룩이 진 목덜미가 추악해 보였다.  



  "그래도 엄만데, 표정이 그게 뭐야. 하여간 아빠 하는 짓이랑 똑같지."

  "그렇지? 얼굴이 진주씨랑 하나도 안 닮아서 조금 놀랐어."



  민석의 뒤에서부터 목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라 뒤돌아 보면, 오렌지색 남자가 실내용 슬리퍼를 직직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짧은 복도 안으로 담배 냄새가 번진다.  



  "생긴 거나, 하는 짓이나, 다 즈이 아빨 닮았어."



  다시 컵을 들어 꼴깍꼴깍 물을 삼키는엄마의 곁으로 오렌지색 남자가 자릴 잡는다.  



  "왜에~ 하는 짓은 진주씨 닮았던데? 성깔 더러워. 인사도 안 받아주고. 그렇지? 어.. 이름이.. "

  "....."



  민석에게 동의를 구하려는듯한 몸짓과 눈썹을 까딱거리는 모양은 민석의 속을 울렁이게 했다. 빈정거리는 모습은 두말할 것 없이 양아치였다. 민석의 머릿속에 공장에서나 들릴법한 기계음이 점점 거칠고 더욱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민석이. 김민석. 그리고 내가 성깔이 더러운 게 아니라 세훈씨가 지랄 같은 거야."



  대신 대답하는 엄마를 뒤로한 채로 민석은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남자의 만족스럽지 못한 눈빛이 뒤통수에 날아와 박히는 걸 느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지러운 머리가 점점 아득해져 가고 있었다.  



-



  여전한 아빠의 모습이었다. 단정한 면바지와 여름 셔츠를 걸치고,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모습. 아빠는 바위 위에 앉아 한여름 뜨거운 바람을 맞으면서도 덥지도 않은지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온화하게 웃고 있다. 민석은 전처럼 그의 행복을 방해할까 걱정되어 살금 거리며 정원을 가로지르지만, 안갯속에 놓인 자신의 앞엔 들어가야 할 집은 보이지 않는다. 갈 곳을 잃은 민석이 손을 펼쳐 보지만, 바이올린 케이스마저도 사라져있다. 몸만 잔뜩 커버린 민석과, 그날의 풍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 상황이 모두 어리둥절했다.


  안갯속에서도 바람은 불어오는지, 앞머리가 살랑이며 이마를 간지럽힌다. 오늘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언제나 가져본 적이 있었을까. 민석은 모든 행동을 포기하고, 아빠의 곁으로 가 앉았다. 바위 위에 나란히 앉은 부자가 눈을 감고, 여유를 만끽하며 미소를 짓는다.  



  '이래서 그렇게 웃으셨어요? 편안해서?'
  '제가 조금 바쁘게 살긴 했나 봐요. 저 지금 엄청 편안해요.'



  아빠에게 이렇게 조잘거린 적은 처음이었지만 별로 부끄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편안하게 말을 늘어놓던 민석이 감은 눈을 뜨고 몇 번인가 끔뻑거렸다. 편안함 뒤로 따라오는 두통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런 여유는 반갑다.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저 지금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아빠.'



  고갤 돌리는 민석의 얼굴엔 여유로운 웃음이 가득했다. 눈가엔 또래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장난기 까지 묻어있었다. 하지만, 고갤 돌려보니, 아빠는 온데간데없이 오렌지 머리를 한 남자가 앉아 담배를 빨며 자욱한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성깔 한 번 더럽네.'



  입꼬리가 아래로 추락하고, 눈은 놀란 듯 크게 뜨였다. 급변하는 민석의 표정에 남자가 웃었다. 입술 사이로 뿌연 담배연기가 쏟아진다. 눈앞은 안개로 더더욱 흐려져만 가고, 남자의 웃음소리는 귓가를 맴돌았다. 민석은 점점 더 심해지는 두통에 두 손으로 머릴 잡고 괴로워했다.  



  "으... 으으..."



  천천히 눈을 깜빡이면 안개를 모두 걷혀지고, 뿌옇던 시야가 캄캄한 방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민석은 벌써 캄캄해진 방 안에서 땀에 젖은 교복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았다.  










오세훈



X




김민석









탈출 00.








  "비실비실한 것까지 진주씨랑 판박이라니까."



  남자는 민석이 식탁에 앉으려다 잠시 휘청인 것을 두고 저렇게 빈정거렸다. 어제부터 시작된 두통과 언제부턴가 쌓여만 가던 스트레스로 컨디션은 그 어떤 날보다 최악이었다. 아침부터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정말이지 달갑지가 않았다. 남자의 비아냥과 엄마의 무관심. 그런 기류 속에서 식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사과주스만 주세요."

  "불편하니?"



  티를 홀짝이는 엄마의 앞엔 오렌지가 하얀 접시 위에서 새콤한 즙을 흘리고 있었지만, 엄마의 곁에 나란히 앉은 남자의 앞엔 반쯤 담긴 물 컵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이내 민석의 앞으로 사과주스가 담긴 컵이 놓였다. 날렵하게 휘어진 컵의 손잡이로 손가락을 넣으려는데, 엄마의 말이 이어졌다.  



  "계속 그러면 곤란해. 인사도 안 했다며. 앞으로 계속 볼 사인데."



  긴 손가락으로 잘린 오렌지의 껍질을 벗겨내는 손끝엔 파란 매니큐어가 반들거리며 윤이나게 발려있었다.  



  "네?"

  "아빠도 없는데 잘 됐지 않니?"



  손잡이에 꼭 맞게 들어간 손가락이 가만히 멈추었다.  



  "편하게 아빠라고 생각하던가."

 그 후로 엄마의 굳게 다문 입은 오물 거리며 저작에 충실하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건 민석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멈춰진 시간을 깨트린 건 남자의 비아냥이었다.  



  "좀 오버 아닌가? 아빠는 무슨.."


  "네. 그럴게요."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입가로 컵을 가져가며 짤막하게 대답한 민석의 목구멍으로 사과주스가 꼴깍거리며 넘어갔다. 식탁 위에서 남자와 시선이 엉켰다.  



  "잘 부탁해요. 아빠."

  ".... 씨발.. 진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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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써둔 썰을 바탕으로 시작합니다. 

비축분이 없어요. (환장포인트)

감사합니다.


+혹시 이게 원래 썰이었던거 아세요?. .....

https://twitter.com/mist0221/status/914062384901144576?s=19


일부는 지웠어욥



RPS 슈른. 겨울안개. 짜부. 결개. 슈슈밍. 뭐든 편하게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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