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루.”

 성큼대는 걸음으로 골목을 지나치려던 루는 어둑한 그늘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저분하고 알록달록한 로브로 몸을 감고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집시 여자가 주글주글한 손을 들어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해보인다. 꽉 죄는 주머니에 손끝만 집어넣은 채 거리를 둘러보던 루는 아무렇지 않게 그늘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질척하게 고여 있던 이끼 낀 물웅덩이가 워커 아래에 밟히며 묵직한 소리를 낸다.

 “안드레아, 이쪽은 단속이 심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흥, 할 테면 하라지. 이제 와서 그런 걸 무서워 할 것 같니? 그건 그렇고, 자. 네가 전에 부탁했던 것.”
 “빨리 구했네요. 솔직히 백 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집시가 건넨 것은 손톱보다 조금 작은 자석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단추 같아 보이는 그것을 재킷 안쪽에 잘 갈무리한 루는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머리에 쓴 로브 안쪽에 돈뭉치를 집어넣은 안드레아가 다시 구부정하게 앉은 순간, 골목 바깥으로 지나가던 순경이 루와 안드레아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무렇게나 부려져 있던 낡은 나무 상자에 루가 눈치 빠르게 동전을 얹자, 안드레아는 마치 준비나 하고 있었던 것처럼 로브 안쪽에서 귀퉁이가 닳아빠진 타로 카드를 땅바닥에 펼쳤다.

 “갔니?”
 “아직요.”

 루는 자리를 지키고 선 순경을 향해 보란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 안드레아의 카드로 시선을 옮겼다. 마약 거래라도 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는지, 순경은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를 서성대다 안드레아가 두 번째 카드를 뽑을 때쯤 사라졌다.

 “갔어요.”
 “어디 보자, 루. ...아하, 이런.”
 “안드레아, 내 미래 점 치지 마요.”
 “이미 나온 점을 어쩌겠니? 돈까지 받았고 모처럼이니까. 흠. … 루, 여자 조심해야겠구나.”
 
 루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 거나 뽑아놓고 말은 잘 하셔.”
 “진지하게 하는 소리니까 새겨들으렴. 도취되지도 말고 꼬임에 넘어가서도 안돼.”
 “됐어요, 안드레아. 그럴 일 없으니까 내 걱정 말고 안드레아 걱정이나 해요. 또 노숙인 센터 같은 데에 끌려가지 말고요. 알겠죠? 나 가요.”
 
 무릎을 털고 일어난 루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벗어났다. 타로 카드 같은 것에 휘둘리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안드레아에게 들은 그 말은 블록을 두 개 벗어나기도 전에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슬롯머신을 조작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마찬가지로 심증만 가질 정도라면 핀 휠이나 타이 파이 판은 그것보다 더 쉬웠다. 루는 정확한 타이밍을 골라 대담하게 자석을 갖다 대었다가 숨길 줄 알았다. 딜러의 표정이 심각해질수록 루는 여유로워졌고 그가 여유로워질수록 판은 기름을 칠한 것처럼 굴러갔다. 목표한 액수만큼의 칩을 환전한 루는 유유히 카지노를 벗어나 호텔로 들어갔다. 가발 사이즈가 잘 맞지 않는지, 누군가 머리 안쪽을 밀고 당기는 듯한 뻐근함에 눈을 깜빡이던 그는 자신의 방 앞에 서 있는 낯선 여자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도와드릴 일이라도?”
 
 심상하게 말을 건네면서, 루는 재빨리 여자를 살폈다. 경찰 같지도 않고, 카지노에서 보낸 사람 같지도 않아 일단은 마음을 놓았다. 하긴 카지노에서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검은색 홀터넥의 원피스를 걸친 그는 루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확실하게는 알 수 없었다. 아무렇게나 올려 묶은 고동색 머리카락이 귀 옆으로 흐트러져 있는 데에 시선이 닿았을 무렵, 선글라스 너머로 루를 쳐다보는 눈동자는 뜻밖에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얘기 좀 할래요?”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데비라고 해요. 데비 오션. 여기서 이야기 하기는 좀 그런데.”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은데요. 내가 당신이랑 할 이야기는 없는 것 같네요. ...오션 씨.”
 “아닐걸요, 음… … 여권에 적힌 이름이 뭐였죠? 레이첼? 레이븐? 시곗줄 장식인 것처럼 자석을 숨긴 것까지는 좋은데, 그런 식으로 야금야금 털어먹다간 본전도 못 찾고 잡힐 거예요.”
 “알았어요, 알았어요. 좋아요.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네요.”

 양 손을 번쩍 든 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을 열었다. 권하지도 않았는데 앞서 들어가면서 웃는 얼굴을 그렇게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 이후 아마 한 번쯤은 후회했던 것도 같다.


 
 “데비.”
 “음?”
 “너 대체 어디서 뭐 하다 여기 온 거야?”

 난방기가 이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융단처럼 바닥에 깔린다. 데비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얇은 숄을 추슬러준 루는 턱 밑에 베개를 괸 채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망고 주스에 꽂힌 빨대를 물고 있느라, 입술이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냥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훔치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이제 와서 내 과거가 궁금해진 거야?”

 장난스럽게 힐난하면서, 데비는 다 마신 주스 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몸을 돌려 드러누웠다. 테두리에 맞는가 싶더니 용케 안쪽으로 들어간다.

 “계속 궁금했는데 물어 볼 기회가 없었던 거지.”
 “정말 알고 싶어, 루?”
 “관두자. 물어봐야 답 안 나올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뻔뻔하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는 태도로 객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그 후로, 루는 데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떨어진 적 없다는 것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정보가 없었다. 객실에 들이고서도 좀처럼 의심스런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루에게 데비는 태연스레 동업을 제안했다. 너무 간단해서 심사숙고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제안이었다. ‘같이 하면 더 좋을 텐데 어떻게 생각해?’ - 루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어처구니가 없어 혼자 헛웃음을 치곤 했다. 도와줄 테니 뭘 어떻게 해 달라, 혹은 내가 판을 더 크게 해줄 테니 어떻게 해라 따위의 흔한 사설 한 마디 없었다. 분명한 것은, 루는 데비가 제안한 것에 대해 정확히 동의한 적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데비의 제안도 명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 좀 해보겠다는 루의 대답은 그 자신의 의도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확실한 동의로 탈바꿈 했고, 그 날 이후부터 두 사람은 장소를 옮겨 자석처럼 붙어다녔다.
 
 “그럼 너는?”
 “내가 뭐?”
 “너는 어디서 뭐 하다가 여기로 왔는데?”

 데비가 말했다. 루는 턱 밑에 괸 베개를 빼지 않은 채 한 차례 시선만 굴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하다가.”
 “그것 봐, 피차 못할 대답은 묻지도 않는 거야.”

 루의 눈이 불만으로 가늘어졌다. 그러나 데비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넓은 침대 위에서 팔다리를 편안하게 뻗은 채 눈을 감았다. 잠이 들 것처럼, 그러나 잠들지 않는다. 루는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자리한 가발과 보석들, 그리고 화장품 따위를 잠깐 쳐다보았다.
 계산적으로 생각하면 데비와 같이 다니는 것은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적극적으로 동의했더라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사흘 밤낮을 자찬해도 모자랐을 것이다. 잘 차려 입은 여자 한 명이 하루 종일 카지노를 돌아다니며 돈을 따면 그것은 의심을 살 수 있지만, 잘 차려 입은 여자 두 명이 이리저리 엇갈리듯 함께 다니며 돈을 따면 의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데비는 루보다 안목이 좋고 재빨라 돈을 잃어도 큰 소란을 피우지 않을 만한 사람을 잘 골라냈고, 루는 데비보다 도박판의 생리에 익숙해 돈을 딸 만한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옆에 있는 데비가 낯설게 느껴졌다가도 호텔로 돌아오면 그런 이질감은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질감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은 남았다. 루는 눈을 감고 있는 데비를 조용히 내려다보면서 이 껄끄러움의 정체에 대해 고민했다. 데비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지만, 만약 사라질 작정을 한다면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때부터 루는 자기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덜미를 잡힌 기분이었다.

 “왜 그래, 루.”
 “아무 것도 안했는데.”
 “계속 쳐다보고 있잖아. 뭐 할 말 있는 거야?”
 “여길 떠나면 넌 어디로 갈 건지 궁금해 하던 중이었어.”
 “넌 어디로 갈 건데?”
 “그게 중요해?”
 
 말끝을 잡아채듯이, 루는 자신의 목소리가 약간 신경질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소리없이 눈을 뜬 데비가 루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베개 위로 흩어진 데비의 머리카락들이 어두운 물결처럼 스멀스멀 쌓이며 입을 막는 기분이 들었다.

 “중요하지.”
 “왜?”
 “왜냐면, 루. 너랑 같이 갈 거니까. 넌 안 그럴 생각이었어?”

 그 다음에 터져나온 웃음소리가 자신의 것이었는지, 데비의 것이었는지 루는 순간적으로 분간하지 못했다. 데비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웃던 루는 데비의 손이 뒷머리에 닿아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느다랗고 긴 팔이 배 위를 지나 허리를 감싸 안자, 뻣뻣한 금발을 훑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치고 귓가에 가 닿았다.

 “루.”
 “왜?”
 “이런 거 관심 있어?”
 
 짧은 손톱이 물길처럼 도드라진 연골 위를 지난다. 루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데비의 허리를 안은 팔에만 약간 힘을 주었다.

 “생각 좀 해볼게. 관심 있는지 없는지.”
 “좋다는 거지?”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네?”
 “좋으면서.”

 난방기의 엔진이 요란하게 돌았다. 루는 데비의 어깨 아래에 깔린 숄을 잡아채듯이 빼냈다. 생각 할 여유 같은 것은 사실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황홀한 낭패감 끝에 모서리가 낡은 타로 카드가 떠올랐을 때, 루는 눈을 감듯이 협탁의 불을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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