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작업 w.김페리님(@Peri_dot_8 )

*퇴고X

*회사원x회사원 중독 / 임신부터 시작하는 연애질



“아으…. 죽겠다.”

김독자가 앓는 소리를 쏟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전날 회식자리에서 술고래인 과장을 따라 연거푸 잔을 들이켰더니 온몸이 쑤시고 속이 쓰라렸다.

어쩌다가 성격꼬인 과장의 눈에 띄어 옆자리에서 술 시중을 들게 된 건지. 코끼리 열댓마리가 머릿속을 으적으적 밟고 지나가는 듯한 두통에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2차를 끝내고 가게를 나설 때부턴 필름을 서걱 잘라낸 것처럼 기억이 희미했다. 그 와중에 집까지 무사히 찾아와 얌전히 옷도 벗어두고 잠든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흐악…!”

울렁거리는 배를 붙잡고 바닥으로 발을 디뎠던 김독자가 크게 휘청이더니 침대모서리를 부여잡았다. 술을 마신 건 주둥이고 쓰린 건 간이건만,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관절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간신히 침대맡에 코를 박는 것을 면한 김독자는 새끼 사슴처럼 부들거리는 두 다리를 느릿느릿 옮겨가며 욕실로 향했다.

변기통에 얼굴을 파묻고 꺽꺽대며 헛구역질을 하고 있으려니 생리적으로 흘러나온 눈물이 눈가에 고였다. 앞으로 회식자리에서 두 번 다시 과장의 옆자리에 앉지 않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하면서 김독자는 엉망이 된 얼굴을 대충 손으로 훑어내렸다.

주말이라 온종일 뒹굴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었다. 평일중에 부지런히 술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은 위장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찝찝한 몸뚱이만 대강 씻궈내고 다시 이불과 한 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김독자가 겨우 세면대를 짚은 채 거울앞에 섰다.

“…이건 또 뭐야.”

헛게 보이는가 싶어 흐리멍덩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쳐다보아도 거울속 자신의 목덜미가 울긋불긋했다. 늦여름도 다 지나갔는데 이제 와서 모기떼의 습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원래 벌레에 잘 물리는 체질도 아니건만 양쪽 목 부근이 죄다 발갛거나 푸르렀다. 짜증스레 한숨을 내쉰 김독자는 금세 제 몸뚱이에서 시선을 떼고 샤워호스를 들었다.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쓰기엔 뇌를 잘근거리는 듯한 두통이 슬슬 심해지고 있었다. 서둘러 씻고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윽고 메말랐던 욕실 바닥에 미지근한 물줄기가 비처럼 흘러내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헐레벌떡 달려왔던 김독자의 미간에 잘게 주름이 패였다. 간신히 지각을 면한 것은 좋았는데 아침부터 마주친 게 하필 마케팅부 팀장 유중혁이었다.

1년이나 늦게 입사한 주제에 직급은 자신과 똑같은 팀장이었고, 나이도 하필이면 스물여덟 동갑내기였다. 그 덕분에 가장 규모가 큰 기획팀과 마케팅, 두 부서 내에서도 두 사람은 무엇을 하던 항상 서로에게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다지 꿀릴게 없는 김독자였지만 유중혁에게만은 예외였다. 일필휘지로 쭉 뻗은 눈썹하며, 티비속 캐릭터처럼 완벽한 콧대와 턱선, 보석을 박아넣은 듯한 흑안까지.

한마디로 유중혁은 영화배우 뺨 서너번은 후려칠 만큼 잘생겼다. 게다가 우성알파였고 머리도 비상했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두 사람을 비교할 때면 항상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 쪽은 김독자였다.

“기획팀은 8층일 텐데.”

묵직하고 나른한 저음이 뱉어내는 중얼거림에 김독자가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실수로 층수를 잘못 눌렀다는 것을 발견하곤 삐거덕거리며 다시 8층 버튼을 눌렀다.

“…고, 맙다.”

대충 고개만 까닥이며 김독자가 감사를 표하자 유중혁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어딘지 불만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눈빛이 흉흉한 기세로 뒤통수를 노려보자 김독자는 가만히 눈을 감고 윙윙대는 엘리베이터의 소음에 정신을 집중했다.

“엊그제.”

갑갑한 침묵속에서 유독 느리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원망하고 있던 찰나, 대뜸 유중혁의 목소리가 고막에 꽂혀 들어왔다.

“…몸은-”

“히끅.”

말을 붙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탓인지 화들짝 놀란 김독자에게서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사슴마냥 동그랗게 뜬 눈으로 김독자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낭랑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8층입니다, 라는 무미건조한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김독자는 당황한 낯빛을 띈 채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얼떨결에 혼자 남게 된 유중혁은 문이 닫히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며 힘 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뛰다시피 복도를 가로질러 자신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김독자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그와 함께 참았던 딸꾹질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한참을 히끅대다가 앞자리 사원하나가 건네주는 물한잔을 얻어 마시고 나서야 진정이 됐는지 크게 숨을 고르는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머리도 엉망이시고.”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조금 급하게 오느라….”

걱정스럽게 묻는 사원의 말에 김독자는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바람에 휘날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단한 아침 조례와 함께 업무가 시작되었다. 소란스럽던 사무실 안에도 금세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만 가득 채워져 갔다. 시선은 모니터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지만 김독자의 머릿속은 화면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중혁 그 자식이 먼저 말을 걸 줄이야.

꼭 사람들의 관심때문이 아니더라도 속해있는 부서 자체가 1, 2위를 다투는 경쟁팀이었기에 각각 팀장인 두 사람의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살갑게 사담을 나눌 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랬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출근길부터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어쨌든 시비가 붙은 것도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김독자는 잡생각을 떨쳐냈다. 마냥 유중혁에게만 신경을 쏟아붓기엔 메신저창에 깜박거리는 보고서들이 너무도 많았다.

요즘 들어 크게 떨어진 시력 때문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김독자의 손가락은 물 흐르듯 자판위를 움직였다. 오늘도 변함없이 지루한 일상의 시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지난번 거나하게 회식을 마치고 난 이후로 일이 미친 듯이 쏟아진 탓에 원하지 않는 술자리를 끌려가는 일이 줄어든 것이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특히나 좋아하지 않는 김독자였기 때문에 잦은 회식보다야 차라리 일에 치여 사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래도 하루종일 책상앞에 앉아 머리만 굴리고 있으려면 몸이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팀장님, 들어가 볼게요.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네. 푹 쉬고 다음 주에 뵈어요.”

하필 각 부서의 팀장들이 담당하는 보고서 수정요청이 퇴근 한시간전에 들어온 터라 김독자는 어김없이 금요일 저녁 사무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보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벌써 야근만 다섯 번째였다. 이놈의 회사는 금요일 퇴근 시간에 맞춰서 경비원들도 다 퇴근해 버리는 건지 이 시간만 되면 늘 난방이 꺼졌다.

11월에 들어서니 해가 진 후 불어오는 바람은 한기가 진득하니 서려 저절로 몸이 으슬거렸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있던 담요를 활짝 펼쳐 어깨 위에 두른 김독자는 파들거리면서도 부지런히 보고문서를 눈으로 훑어내렸다.

“…탕비실에 핫초코 남아있던가.”

점점 싸늘해지는 사무실 안에 앉아 있으려니 본능적으로 따뜻한 무언가가 입에 당겼다. 마침 오늘은 일에 파묻혀 끼니도 거른 터라 당이 부족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큼지막한 담요에 둘둘 쌓인 채 김독자는 비적비적 사무실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색 시트지를 덧댄 찬장문을 열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보니 한쪽에 처박혀있는 핫초코 박스가 보였다.

외국 어디 유명한 동네에서 만든 것이라며 막내대리가 들고 온 것인데, 팀원들은 입에 맞지 않는지 한 번씩 맛만 보곤 손대지 않고 있었다.

“맛있는데….”

이제는 막내대리도 손대지 않는 그 핫초코를 먹는 사람은 김독자 한명뿐이었다. 두 수저 큼직하게 흑색의 알갱이들을 퍼넣고 뜨거운 물을 한가득 들이부으니 탕비실 가득히 단내음이 퍼져나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들고 자리에 돌아가려는 찰나, 기획팀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인영을 발견하곤 김독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해…세요.”

“새삼스럽게 존댓말은.”

“왜 여기까지 와서 시비냐.”

하도 오랜만의 대화라 저도모르게 튀어나온 반말을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었다. 유중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백장은 됨직한 서류들을 김독자의 품으로 넘겨주었다.

“기획부가 착각해서 마케팅 팀으로 보낸 제안서다.”

“그건 또 왜 거기로 갔어….”

얼떨결에 종이 뭉치를 받아든 김독자가 유중혁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구겼다. 투덜거리면서도 꼼꼼하게 누락된 서류가 없는지 살펴보던 김독자는 볼일이 남아있는 듯 사무실 앞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유중혁을 보며 눈을 흘겼다.

분명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치인데, 우물거리는 입술은 쉽사리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독자뿐 아니라 각 부서의 팀장들 모두 뒤늦게 요청을 전달받은 터라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시간임에도 유중혁은 계속해서 미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안가?”

“…김독자 네놈….”

“나 할 거 많은데.”

“…회식날…. 기억 안 나나…?”

회식날? 김독자가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마지막 회식이 언제였는지 세어보는 듯 초점이 허공에서 까닥거리는 것을 보며 유중혁의 얼굴이 점점 식어갔다.

한동안 일에 치여 사느라 몰랐는데,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과장의 술 상대를 해야 했던 그날의 회식자리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되짚어보던 김독자가 아, 하고 눈을 깜박였다.

…이 자식이 이걸 왜 묻지…?

부서간의 친목을 위한 단체회식 이었던지라 당연히 마케팅팀도 있었을 테지만 그건 김독자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유중혁이 회식자리에 있었든 없었든, 이제 와서 그날의 기억을 묻는다는 게 이상했다.

“총 회식날 말하는 거야? 기억…안 나는데.”

“…그런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내가 너한테 뭐 실수했냐?”

“…아니…. 하던 일이나 마저 해라.”

어딘지 부루퉁해 보이는 표정을 한 채 유중혁은 미련없이 몸을 틀었다. 얌전히 집에서 깨어났길래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유중혁을 마주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없는 게 맞나? 정작 당사자가 몇주가 지나고서야 슬쩍 떠보는 정도이니 큰일은 없었던 듯한데, 말을 해주지 않는 게 오히려 없던 호기심까지 자극했다.

괜스레 어깨를 한번 으쓱인 김독자는 다시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서류들을 정리했다. 아직 파일수정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것들마저 분류하려면 오늘도 어김없이 달을 보며 퇴근하는 게 확정이었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숨길 생각도 없이 입밖으로 내뱉은 김독자는 갑갑한 넥타이를 풀고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늦어질 거, 서두르다 실수할 바에야 느긋하게 꼼꼼히 진행하는 쪽이 나았다.

고요한 사무실 안에 일정하게 사락거리는 종잇장의 소리를 배경음 삼으며, 김독자는 제 할 일을 이어나갔다.

 

 

“팀장님, 오늘도 안 나가세요?”

반쯤 넋이 나간 채 창밖을 내다보던 김독자가 대꾸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것을 보고 기획팀 사원 몇몇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사흘 연속 김독자가 점심을 먹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으로라도 배를 채운다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허기지지 않은 것도 아닌 탓이었다. 점심은 물론이고 저녁이 되어도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한 채 정말 쫄쫄 굶었다.

심한 위장염이라도 걸린 건지 김독자는 며칠 전부터 입에 뭔가 들어가기 무섭게 게워냈다. 비단 회사에서만이 아니라,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피골이 상접한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기획팀 사원들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힐끗대며 눈치를 살피는 사원들에게 어서 식사하고 오시라며 손을 흔들어준 김독자는 사무실이 텅 비자 물먹은 솜마냥 책상 위로 늘어졌다.

진작에 병원에 가봤어야 하는데 끝도 없이 불어나는 업무량 덕에 벌써 사흘연속 야근이었다. 본인혼자 야근하는 것도 아닌데, 고작 장염 때문에 팀장이란 작자가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이 난리였다.

그래도 오늘은 마침내 길었던 야근의 끝이었다. 급하게 마감지어야 했던 계획안도 넘겼고, 외근을 나갔던 사원들의 보고서도 작성이 끝났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왔는지 한동안 기획팀을 알짱거리던 유중혁도 없었다. 지긋지긋한 일정이 끝나면 드디어 병원에 갈 수 있었다.

“대체 뭘 잘못 먹었지….”

평소에는 잘만 먹던 음식들도 최근 들어서 유난히 거부감이 들었다. 그냥 속만 더부룩하면 모르겠는데 심리적인 거부감도 함께 몰려왔다. 심지어 멀쩡한 음식 냄새들 마저 역겹게 느껴졌다.

빈속에 간신힌 미지근한 핫초코만 들이부으려니 괜한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조용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한참을 홀짝이고 있는데, 누군가 출입패드에 사원증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점심시간이 시작된 지 2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식사를 끝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나싶어 고개를 들었던 김독자의 시선이 새카만 머리통에 꽂혔다. 무어라 말을 이을 새도 없이 두리번거리던 남자와 눈빛이 마주친 김독자는 어벙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유중혁…?”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다가오는 유중혁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책상에 납작 엎드린 김독자의 머리옆에 크래프트지의 쇼핑백 하나가 놓여졌다. 잔뜩 움츠러 들어있던 김독자는 눈만 뻐끔대며 쇼핑백과 유중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떠먹여 주기까지 해야하나.”

“어…?”

“…밥을.”

못먹고 있다길래. 답지않게 뒷말을 흐린 유중혁은 김독자의 곁에 의자를 끌고와 앉았다. 의심가득한 눈빛을 띄우고 쇼핑백 안을 슬쩍 들여다본 김독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활짝 피었다.

아까 책상 위에 엎어져 다 죽어가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며 유중혁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속이 안좋으면 무리하지 말고, 괜찮으면 먹어라.”

사실 표정은 밝아졌지만 김독자의 머릿속은 여전히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아무래도 저 하나만을 위해서 기껏 준비해온 도시락 같은데, 그 앞에 대고 헛구역질을 해대는 건 아닐까 싶어 쉬이 손이 가지 않았다.

그것이 퍽 답답했는지 팔짱을 끼고 있던 유중혁의 손이 다가와 툭툭 끈을 풀어내고 투명한 도시락 뚜껑을 열어젖혔다. 흐읍, 반사적으로 숨을 참은 김독자는 수저를 들고 머뭇거렸다.

“억지로는 먹지 마라.”

아니, 사실 비주얼 자체만으로도 김독자는 보이지도 않는 침샘이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워낙 손재주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유중혁이 직접 싸 온 도시락은 윤기가 좔좔 흐르고 영양가도 균형 있는 재료들로 만들어진 듯하면서 색배합도 조화로웠다.

직접 쌌다는 말만 안 했더라면 어디 유명 도시락집에서 파는 것처럼 보였다. 사흘을 내리 굶다시피 한 김독자였기에 그런 음식앞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샐러드를 깨작거리던 포크로 큼지막한 고기조각을 푹 찍으며 김독자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야…. 이거 냄새…완전….”

끝내준다는 말이 미처 나오기 전에 고기조각이 입속으로 쏙 들어갔다. 몇 번이고 입술이 오물거리나 싶다가, 이내 목울대가 꿀꺽, 하며 음식을 삼켰다.

“…맛있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순수한 감탄에 유중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독자는 아예 수저와 포크를 양손에 들고 허겁지겁 음식들을 입으로 날랐다.

말하는 법도 잊고 우물거리는 김독자에게, 유중혁은 천천히 먹으라는 말 대신 따뜻한 녹차 한잔을 내밀었다. 원래 입도 짧고 거르는 음식이 많아 식사시간도 오래 걸리던 김독자였으나,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3단짜리 도시락통이 죄다 바닥을 보였다. 분말가루로 직접 우려낸 녹차마저 마음에 들었는지 보온병 하나가득 채워온 찻물마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속은 괜찮나? 장염이라고 들었는데.”

“완전, 괜찮은데.”

“…그렇군.”

꾀병 아니냐는 잔소리라도 날아올 줄 알았건만 유중혁은 의외로 순순히 빈 도시락통만 챙겼다. 배가 부르고 나서야 고마움과 어색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언제부터 자신에게 그리도 신경을 썼다고.

고작 원수 같은 옆부서 동료가 밥을 못먹는다는 이유로 손수 도시락을 챙겨온 유중혁이 새삼 달라 보였다. 정말 도시락 하나만 전해주러 온 건지, 빈 도시락통을 다시 챙기고 나자 유중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획부 사무실을 떠났다.

“웬일이래….”

매일같이 얼굴만 마주쳤다하면 비아냥거리거나 서로 무시하기만 했는데, 어쩐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유중혁의 미묘한 태도에 김독자는 눈알만 도륵 굴렸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 정도 감상으로 귀찮은 생각을 떨쳐내고 있으려니 팀원들이 하나둘 식사를 끝내고 들어오고 있었다. 오전과 달리 싱긋 웃어 보이는 김독자에게 얼굴색이 밝아졌다는 평이 오갔다.

제대로 배를 채워서 그런지 확실히 기분도 훨씬 나아진 느낌이 들어 허탈했다. 굶주림에 성격이 휙휙 오가는 게 남들눈에 어떻게 보일지, 헛웃음이 절로 났다.

각자 커피잔을 하나씩 손에 들고 제 곁에서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던 사원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김독자는 손목을 돌리며 모니터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메신저 창은 그새 숨쉴틈도 주지 않고 번쩍거리고 있었다. 컨디션이 나아지니 화면위를 훑어내는 시선또한 단어 하나 놓치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은 정시퇴근을 해볼까요.”

김독자의 활기 띤 한마디에 주변에 앉아있던 사원들의 표정에 일제히 진지함이 피어올랐다. 곧이어 너른 사무실 안에 들려오는 것은 묵직한 키보드 자판소리와 복사기의 자잘한 소음뿐이었다.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겨울이 가까워지니 해가 짧아져 창문 밖이 어둑했다. 서너가지 검사를 마친 김독자는 결과를 기다리며 주섬주섬 자신의 코트를 챙겼다.

벌써 5년째 입고 있는 겉옷이 얇은 편은 아니었음에도 이르게 불어오는 북녘의 칼바람을 막아내진 못한 모양이었다. 아직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도 아닌데, 요즘에는 하루에 수십번씩 추위로 몸을 움츠리곤 했다. 잘 챙겨 먹지 않아서인가, 예전에 비해 몸이 허해진 기분이었다.

“오래 걸리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온 간호사가 김독자의 이름을 불렀다. 얌전히 가방을 챙겨 간호사를 뒤따라 들어가자 훈훈한 인상의 의사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진단서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덩달아 긴장한 김독자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질문이 날아들었다.

“독자씨. 혹시 마지막 관계가 언제셨나요?”

“……예?”

“히트사이클 때 피임약은 따로 드신 거 없으신거죠?”

김독자가 어벙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이고 있자 의사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관계…? 긴장으로 바짝 움츠러들었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없는데요.”

“예?”

“성…그런…관계 말씀하시는 거라면 없는데요….”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비밀이 보장되니 말씀하셔도 됩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된다는 너그러운 의사의 말투에 김독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왔다가 갑자기 동정고백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아까보다 진심을 듬뿍 담아 단호한 목소리로 김독자가 없다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의사가 어벙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독자씨, 지금 벌써 6주차세요.”

“……네?”

바보 같은 목소리가 진료실안을 가득 메우고 나니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곧이어 한숨을 내쉰 의사가 확인 사살을 하듯 다시금 힘주어 입을 열었다.

“김독자씨, 임신 6주 차입니다. 초기가 굉장히 중요한데 페로몬 수치도 낮고, 입덧도 벌써 시작된 것 같은데요. 다른 분들보다 더 신경 쓰셔도 모자랄 판에….”

“잠…깐만요. 제가…뭘 했다고요?”

결과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던 의사가 그제야 축하의 의미를 담은 미소를 지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하셨어요.”

해맑은 목소리와 동시에 김독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어쩌지, 라는 의문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어떻게, 라는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당당히 이야기할 만한 건 아니지만 김독자는 맹세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과 몸을 섞어본 일이 없었다. 오메가로 태어났지만 열성이었기에 일반인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페로몬이 옅었다. 성정 자체가 연애와는 거리가 멀어서 열성오메가라는 사실에 그다지 부족함을 느낄 일도 없었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기에.

“…전 자웅동체가 아닌데요.”

“잘 생각해보세요. 상대 알파분이 없으시면 인공 호르몬 주사라도 처방해드려야 하니까요.”

“아니, 알파고 뭐고 섹…한 일이 없다니까요.”

“혹시 주변 알파분들 중에 페로몬 향이 느껴지는 분은 안 계셨나요?”

임신후엔 알파와 오메가 모두 상대방의 페로몬에만 반응한다고 의사는 이야기했으나 김독자의 표정은 여전히 펴질 줄 몰랐다. 열성 오메가들이 페로몬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은 드물었고, 김독자또한 마찬가지였다.

회사내에서도 직원의 3할가량이 알파에 속하지만 김독자는 입사후 단 한 번도 그들의 페로몬 향을 맡아본 일이 없었다.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의 양또한 희박했으니 종종 그가 베타인 줄 아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껏 그래왔는데 알파 페로몬이 느껴지는 사람을 찾으라니.

최근 들어 음식냄새가 그렇게나 역하고 씁쓸하던 것이 임신 때문임을 알게 되니 병원에 오기 전보다 더욱 허무함이 몰려왔다. 죄 없는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안달내는 것을 포기한 김독자는 진지한 얼굴로 ‘저희 병원은 낙태수술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간호사를 뒤로 한 채 털레털레 병원을 빠져나왔다.

본인이 보아도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남들눈에는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까. 혹시나 오진은 아닐까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른 병원 두어군데를 더 들러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심지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매한 임신 테스터기도 양성이었다.

선명하게 세줄이 표시된 플라스틱 막대를 든 채로 김독자는 세상이 무너진 것마냥 욕실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성모 마리아도 아니고, 어떻게 섹스한번 해보지 않은 몸으로 아이를 임신할 수 있는건지.

뒷구르기를 하고 생각해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녁도 먹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걱정과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온갖 감정이 뒤엉켜 머리가 지끈거렸다.

의심과 혼란으로 일렁이던 심장에 어느샌가 두려움까지 번졌는지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가 울려댔다. 박동소리가 크게 들리자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떨리는 몸을 일으켜 세워 간신히 욕실로 향한 김독자는 그대로 변기통을 붙잡은 채 헛구역질을 해댔다. 신물만 토해내려니 목구멍이 쓰라리고 비어있는 속도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한참 동안 게워내고 나서야 머리가 맑아지니 여태 뒷전으로 미뤄둔 근본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6주…?”

6주 차…. 6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자 또 그놈의 회식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유중혁.”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간 총 회식날을 유일하게 김독자에게 언급했던 사람은 한명뿐이었다. 유중혁의 곁을 지나갈 때 페로몬 향이 났던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열성 오메가라는 형질 자체가 페로몬을 잘 느끼지 못했기에, 사실 상대방 알파의 페로몬이 풍겨나온다고 해도 알아챌 자신이 없었다.

“…하….”

근래에 쉽게 우울해졌던 것도 임신한 탓이었을까. 초기에는 입덧과 함께 감정 기복도 클 것이라는 의사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직 신내가 남아있는 입안을 물로 헹구고 젖은 입가를 손으로 대강 문질러 닦아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걱정거리 하나가 무겁게 어깨 위를 짓눌렀다. 하지만 마냥 낙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출근과 함께 알아봐야 할 것이 많았다. 유독 이르게 찾아온 밤이, 괜히 길고 외롭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없다. 향은 고사하고 딱딱한 사무실에는 기계냄새와 텁텁한 종이냄새만 그득했다.

“이 자식은 또 왜 이렇게 메신저를 안 읽어….”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금수마냥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녀석이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가도록 사내 메신저 창에 답이 없었다. 회사내에서 사원들이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연락망이니 깜박거리는 메신저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됐고, 필시 일부러 무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며칠째, 오전 업무내내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혹여 낯선 향이 느껴지지 않는지 오감을 곤두세웠으나 점심때가 다되어 가도록 수확은 없었다.

“유중혁 이 자식 말고는 물어본 사람이 없는데….”

회식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 왜 자신에게 그날에 관해서 물어본 것이냐고. 마지막 동아줄이라 생각하고 연락한 것인데 정작 당사자가 연락이 닿질 않으니 애먼 속만 타들어 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나니 사무실에는 김독자 혼자만 덜렁 남게 되었다.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심리적인 것 때문인지 그나마 넘길 수 있던 간식거리들도 영, 입에 넣기 힘들어졌다. 간신히 끓여온 보리차만 연신 홀짝거리며 김독자는 책상 위로 길게 엎어졌다.

“…도시락 맛있었는데.”

허기가 지니 또 생각이 났다. 지난번에도 김독자가 홀로 남아있을 때 찾아왔던 것이 유중혁이었다. 임신 사실을 모르던 그때도 입덧 때문에 밥 한술 못넘기고 있었건만, 어떻게 만든 것인지 유중혁이 만들어온 도시락은 신기할 만큼 입에 잘 맞았다.

다른 것들처럼 역하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속이 더부룩하지도 않았었다. 한참 그때를 회상하고 있자니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덧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배는 착실하게 허기를 느끼고 있으니, 김독자는 괜한 서러움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 와중에 아직까지도 자신의 메시지를 읽지 않고 있는 유중혁이 얄미워 보였다.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 가뜩이나 머리가 혼란스러운 데다가 회사 성수기가 겹쳐 며칠을 내리 야근 중이었다. 찹쌀떡같이 하얀 얼굴에 눈가만 피로가 짙게 내려와 있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혼자만 힘든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다른 이들의 상태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오늘도 우는 소리는 집어삼킨 채 김독자는 우울한 낯으로 검은 글씨들을 써 내려갔다.

 

 

“…죽겠다….”

몸이 피곤한 거야 늘 있던 일이지만,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데다가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겹치지 딱 죽을 맛이었다. 점심시간, 사람들이 빠져나간 사무실에 10분 정도 엎드려있자 머리가 점점 더 울려대는 듯하여 김독자는 그냥 몸을 일으켰다.

세수라도 하고 와야겠거니 싶어 담요를 셔츠위에 둘둘만채 비적대고 걷고 있는데, 유리문 앞에 익숙한 뒤통수가 삐죽 솟아있었다.

“아직 안 나간 사람이 있나….”

아직까지 나가지 못한 사원이 누군가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시선을 굴리던 김독자의 눈이 커다랗게 크기를 키웠다. 낯설지 않은 검은색 반곱슬 머리칼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야.”

소리 없이 다가간 김독자가 어깨를 틀어쥐자 평소보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들이 파르르 떨렸다. 답지않게 크게 놀란 모양새인 유중혁이 고개를 들자 김독자가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너 왜 내 연락 안보냐.”

“…바빠서 못봤다.”

“단체메신저는 칼같이 답하더라.”

“그건…놓치면 안되는 연락이니까.”

이 새끼 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짚은 채 김독자가 불평하듯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하. 그러면 여기서 대답해. 할말있는데 오늘 끝나고 뭐하냐.”

“일이…있다.”

그렇게 말하는 유중혁의 시선이 바닥으로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는 모양새라 김독자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욱 흉흉하게 변해갔다. 무슨 볼일 때문에 기획팀까지 내려왔는지는 몰라도 그대로 몸을 틀어 제길을 가려는 유중혁을, 김독자의 손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잠깐.”

순간, 유중혁의 팔이 반사적으로 김독자의 손을 내쳤다. 그리 세지도 않은 힘이었고, 밀어낸 것도 아니고 손을 툭 쳐냈을 뿐인데 김독자의 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평소였다면 그저 털어내고 말았을 정도임에도 그러했다.

“…김…!”

휘청거리던 시야가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고 검게 물들었다. 텅, 소리와 함께 유리창에 몸을 부딪힌 김독자가 바닥을 구르기 직전, 뒤늦게 유중혁이 손을 뻗었으나 허사였다.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 가뜩이나 주위환경에 예민해진 몸이었다. 알파의 페로몬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몇 날 며칠 이어진 야근으로 피로까지 진득하니 쌓여있었다. 식사는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을 테니 약해질 대로 약해진 김독자의 몸뚱이가 대번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김독자!”

남들은 멍이나 좀 들었을까 싶을 정도의 부딪힘 이었다. 하지만 한번 넘어진 김독자는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헐떡거렸다. 당황으로 물든 유중혁의 시선이 김독자가 끌어안고 있는 아랫배로 향했다.

“…아…프….”

바닥에 부딪힌 건 팔과 엉덩이인데, 김독자는 배가 아프다며 잔뜩 몸을 웅크렸다. 점점 더 새하얗게 질려가던 얼굴위로 굵직한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고 나서야 굳어있던 유중혁의 손이 움직였다. 단순한 타상은 아니었는지, 고통을 참느라 악물었던 입술이 희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김, 독자.”

“배…아, 아파….”

“…배가?”

그대로 몸을 붙잡아 일으키려던 유중혁의 손이 허공에서 주춤거렸다. 뭔가 혼란스러운 듯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유중혁은 자신의 정장 코트를 벗어 김독자에게 덮어준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같은 부서 사원인 듯한 상대방에게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고, 유중혁은 그대로 김독자를 품에 안아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미친놈이라 욕을 하며 얼굴을 구겨댔을 김독자도, 어디가 얼만큼이나 아픈 것인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식은땀만 줄줄 흘려댔다.

통증 때문에 원래도 밀가루처럼 새하얗던 얼굴이 핏기가 죄다 가셔 시체처럼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라.”

한눈에 보기에도 참을 만한 고통이 아니라는 게 보였지만 그것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픈이를 옆좌석에 태우고 차마 멀쩡하게 운전할 자신이 없어서, 유중혁은 급한대로 아무 택시에 손을 뻗었다.

회사에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에 큰 병원이 있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마치 한 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응급실 입구에 차가 멈춰서기 무섭게 유중혁은 5만원짜리 지폐를 기사에게 건네주곤 김독자를 품속에 안아 들었다.

차 안에서도 끙끙 앓기만 하던 김독자는 그새 통증이 조금 가셨는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부끄럽다며 칭얼거렸다. 그래도 팔다리가 축 늘어져 얌전해진 김독자를 단단히 품에 안은 채, 유중혁은 뛰다시피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넘어지고 난 뒤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배가요? 아, 일단 보호자분은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좁은 침상위에 눕혀진 김독자의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고, 유중혁은 간호사를 따라 로비로 나왔다. 병원에 들어서면서 반쯤 정신을 놓았던 김독자였지만, 마지막에 자신의 셔츠를 붙잡고 놓지 않던 손가락이 어쩐지 기억에 남았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문진표를 작성하고 서류 몇 가지를 써내려가던중, 키보드를 두드리던 간호사의 표정이 어딘가 오묘하게 비틀어졌다.

뒷주머니에서 전화가 오는지 핸드폰이 웅웅대며 진동했지만 유중혁은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수 없었다. 간호사의 어딘가 날 선 눈빛이 유중혁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김독자 환자분의…배우자이신가요?”

“…….”

사람이 크게 당황하면 할 말을 잃는다고 하는데, 옛말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김독자의 배우자라고? 결혼도 하지 않은 이에게 배우자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질문 자체를 이해하느라 어안이 벙벙해진 유중혁의 반응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간호사는 아까보다 더 날카로워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메가분이 홀몸으로 초진을 받으러 오시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거든요. 알파분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궁금했네요.”

“…무슨….”

“아마 의사 선생님께 직접 들으셔야 할 안내사항이 있을 테니 같이 들어가 보세요.”

아까 로비를 안내해 줄 때보다 훨씬 불친절해진 태도로 간호사는 유중혁을 진료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쯤 되어 회사 동료임을 밝히고 오해를 푸는 방법도 있었으나, 유중혁은 그러지 않았다. 어쩐지, 그래선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음파실에 앞에 앉아 검진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최근 들어 찜찜하게 느껴지던 판도라의 상자를 마침내 열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초진….”

간호사는, 분명히 초진이라고 이야기했다. 오메가가 혼자 방문하는 경우가 드물다고도 했다. 알파와 오메가가 나란히 손 붙잡고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오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김독자님 보호자분 들어오세요.”

쓸데없는 상념은 접어두라는 듯 때맞춰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온 간호사가 그를 불렀다. 회사에 3차 전형까지 통과하고 최종 입사면접을 볼 때마저도 이렇게 긴장되진 않았는데.

부디 의사의 입에서 나올 진단결과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기를 바라며 유중혁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간단한 검사를 마치고 다행히 눈에 띄는 이상은 없었는지 김독자는 안정제를 맞고 잠들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김독자의 병실로 향하기 전, 떨떠름한 표정으로 결과지를 넘겨보던 의사가 안경알 너머로 시선을 힐긋 던져왔다.

“앉으시죠.”

“…네.”

유중혁이 동그랗고 낮은 의자에 몸을 구겨넣어 앉았음에도 의사는 아무 말 없이 침묵만 지켰다. 그렇게 몇 분을 더 묵직한 적막이 흐르고 나서야 기다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파분을 찾아보라고 권해드리긴 했지만 아마 독자씨가 제대로 상태 설명은 안 하셨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

“이제 7주 차고, 아직 안정기는커녕 몸에 영양분도, 페로몬도 한참 불균형할 때 인 데 이렇게 무리하게 만드시면 안 돼요. 알파분께 전해드리라고 했던 안내문도 전달 못 받으셨을 테니 가실 때 꼭 챙겨가시고, 크게 무리되지 않으신다면 필요한 영양제도 몇 개 처방해드릴 테니까 받아 가세요.”

어지간한 일로는 크게 당황하지 않는 유중혁이었지만 오늘 하루만 벌써 몇 번째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참이나 충고어린 잔소리를 퍼붓고 난 의사는 그제야 넋이 나가 있는 유중혁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어 보였다.

그리곤 처음 만남이야 어쨌든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며, 사람좋은 미소를 그려 보이기까지 했다. 무어라 입한번 뻐끔하지 못한 유중혁이 주춤대며 진료실을 나오자 간호사가 어딘가로 그를 안내했다.

“다행히 태아에게 이상이 있는 건 아니라서요. 오늘은 영양제만 맞고 퇴원하시면 됩니다.”

생글거리며 병실 하나로 유중혁을 밀어 넣은 간호사는 그대로 미닫이문을 닫아버렸다. 이곳 사람들은 왜 모두 사람말을 들을 생각도 안 하는 건지. 잠깐 떠오른 불평은 병실의 안쪽에서 희미하게 이불을 뒤채는 소리에 파묻혀 완전히 기화되어 버렸다.

“…으응….”

“…….”

…아주 잠깐이지만, 유중혁은 이대로 문을 열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며칠째 김독자의 연락을 피해 왔던 것처럼. 왜 하필 아무런 기억이 없는 듯 굴던 회식날의 일을 이제야 물어보았던 것일까.

하필 그날 일 이후로 자신의 러트사이클 주기가 틀어진 것도. 김독자를 마주할 때마다 천지에 꽃이 핀 듯한 환상이 보이는 것도. 다른 이들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페로몬이 김독자에게서만 나는 것도. 자신과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김독자가 던진 질문에 심장이 쿵쿵대며 내려앉는 것도. 모두 유중혁 본인이 물어야 하는 것일 텐데.

그날 밤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있다는 김독자의 연락을 일부러 피해왔던 것이 무색하게, 방금 의사의 한마디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유중혁….”

새카맣고 동글동글한 흑안이 유중혁의 얼굴을 가감없이 담아내고 있었다. 마치 그날처럼. 저 하얗고 서늘한 인상이 흥분에 겨우면 어찌나 뽀얗게 달아오르는지, 유중혁은 기억하고 있었다.

“…김독자.”

“여긴, 어디….”

“…회식날, 있었던 일이 궁금하다고 했던가.”

이제 막 졸음을 털어낸 길고 풍성한 아미가 그의 말 한마디에 바르르 몸집을 부풀렸다. 사슴처럼 동그랗게 키운 눈망울이 살포시 찌그러지는 것을 보며, 유중혁은 눈에 힘을 주곤 천천히 감았다 떴다.

“…갑자기…무슨 소리야. 네가, 왜….”

“…잤다.”

“뭐…?”

짧은 한마디일 뿐인데,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굴렸다. 그래서 김독자의 표정은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되물어오는 목소리에서 낯선 감정이 묻어나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와…잤다고 했다.”

“…너…무슨, 소리야. 제대로 얘기해.”

계속해서 꼼지락거리는 손끝이 거슬렸는지 김독자의 하얀 손바닥이 유중혁의 팔목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렇게 당당하게 붙잡은 주제에, 김독자의 낯빛은 형편없이 어두워져 있었다.

 불안과 근심이 가득담긴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마저 놓칠 것 같아서, 유중혁은 한숨과 함께 반대쪽 손으로 김독자의 손등을 감싸주었다. 바들거리던 작은 손이, 그의 온기에 녹아내리듯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총 회식날, 네가 술에 많이 취해서 데려다주려는데…. 내가….”

“…네가 뭐?”

대답을 재촉하는 김독자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새되게 쏘아졌다. 자신의 손등위로 얹어진 유중혁의 손바닥아래로 심장 박동소리가 살갗을 뚫고 전해지는 것만 같아서, 김독자는 그 이상 보채지 않았다.

“…러트가….”

“…….”

“네가 페로몬을…. 아니, 아니다.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했어?”

새파랗게 질린 김독자의 얼굴을 보며 차마 대꾸하지 못한 유중혁의 고개가 가냘프게 끄덕거렸다. 허. 머리 위에서 힘 빠진 김독자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니 더욱 죄책감이 번지는 듯하여 널찍한 어깨가 자꾸만 움츠러 들었다.

“…미친…놈이. 러트왔다고 콘돔도 안 끼고.”

“꼈는데 네 손으로…벗겼다.”

…안에 싸달라고…. 못믿겠다는 눈으로 김독자가 입을 떡하니 벌리자 유중혁이 잔뜩 눈치를 보며 턱을 닫아주었다. 마치 지난번 말없이 도시락을 싸 왔을 때 보였던 죄지은 강아지의 표정과 같았다.

그럴 리 없다고 소리치기고 싶었으나 막상 스스로도 술기운에 기억이 날아가버렸고, 아이는 들어섰으니, 당당히 외칠 수가 없었다. 놀람과 당황, 두려움으로 번져가던 얼굴이 이내 연홍빛으로 달아오르더니 눈가가 흐릿하게 젖어들었다. 유중혁은 이왕 꺼낸김에 눈을 딱감고 아예 그날일을 브리핑하듯 웅얼거렸다.

“히트가 아니면 괜찮다고…네 놈이 올라탔는데, 나도 러트인데다 술기운이 올라서 말리지 못했다.”

“…이…개…. 나, 처음…이었….”

“…처음이라는 것도 그날 네 입으로 직접 이야기했다, 김독자.”

그 한마디를 끝으로 꾸역꾸역 차오르던 맑은 물방울이 데구르르 뺨위로 굴러떨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티슈만 한움큼 뽑아 유중혁이 건네자 그제야 서러운 울음이 엉엉 터져 나왔다.

제 탓도 남 탓도 하기 애매하니 차마 뭐라 더 소리치지는 못하고, 김독자는 이불속에 온몸을 파묻은 채 아이처럼 울기만 했다.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를 달래주려 이불고치를 토닥거렸다가 괜히 울음소리만 더 키우곤 얌전히 손을 거뒀다.

 

나중에 듣게 된 사실이지만, 유중혁은 그날의 정사 이후 안절부절못하고 몇주 내내 김독자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불규칙한 러트사이클이 주기보다 2주나 이르게, 거기다가 회식이 끝나가는 자리에서 터져버렸었다. 스스로도 당황해 급하게 페로몬을 갈무리 했으나 하필 바래다주기 위해 곁에 있던 김독자가 자신의 열기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몸을 엉겨왔다.

분명 취기로 제정신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유중혁의 양 뺨을 붙잡고 길게 늘였다가 가벼운 입술박치기를 몇 번 해대더니 느물느물 바지버클을 풀어 헤쳐댄 것이었다.

김독자, 그만…이라는 외침은 기다렸다는 듯 얽혀오는 뜨거운 혓바닥에 파묻혀 목구멍 너머로 쑤욱 들어갔다. 중혁아, 좋아해. 평소에는 살갑지 않던 사이임에도, 주체할 수 없는 열기속에서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나직한 고백들을 듣고 있자니 자신의 의자와 상관없이 아래가 빠듯해졌다.

열성 오메가라면서 제 러트에 맞춰 풍겨나오는 페로몬은 어찌나 농염하고 달큰한지. 딱 한 번만, 이라는 달달한 본능과 이성의 가운데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던 줄다리기는, 결국 김독자가 스스로 옷가지를 벗고 유중혁의 허벅지 위로 올라탐과 동시에 끊어져 버렸다.

사실 그 뒤로는 유중혁도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사가 끝난 후 필사적으로 김독자를 씻기고 집을 정리해준 뒤 간신히 귀가했다는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거짓말처럼 가라앉은 러트사이클은, 자신이 노팅을 했다는 뜻이었다. 회식이 끝난 후 필름이 끊긴 김독자가 이유 모를 근육통에 시달리는 동안, 유중혁은 죄책감과 걱정, 고뇌속에서 몇 날 며칠을 헤매이고 있었다.

그뒤로도 김독자가 잠잠했고 쓸데없이 으르렁 대는 게 평소와 똑같아 더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졌는데, 한 달여가 지났을까. 가깝게 지내던 기획팀 사원으로부터 김독자가 속이 좋지 않아 일주일 넘게 끼니를 거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었다.

그 말을 들으며 유중혁은 인생에서 두 번째로 심장이 밑바닥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하루에도 수백번 심란한 마음이 들락거려 머리가 지끈거리던 차에 듣게 된 김독자의 소식이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제 음식은 별 탈 없이 잘만 먹길래 불안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려 했건만,

[ 유중혁, 그때 회식날 기억나냐고 물어봤잖아. 혹시 나랑 무슨일 있었어? ]

깜박거리는 메신저 창위로 향하던 마우스가 미리 보기로 표시되는 내용을 확인하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유중혁은 그대로 김독자와의 메신저 알람을 꺼버렸다. 무시가 올바른 해답은 아니었으나 당장 김독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이어져 오던 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었다.

 

조금 진정이 된 건지 이불뭉치는 간간히 훌쩍대는 소리만 냈다. 옆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유중혁이 한 번 더 휴지뭉치를 건네자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휴지만 냉큼 빼앗아갔다.

“…안 하다.”

“…….”

“미리…말해주고 곁에서 챙겨줬어야 했는데. 혼자 힘들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빼꼼히 고개를 들곤 유중혁을 노려보았다. 발개진 코끝을 잡아주려던 유중혁은 머뭇거리다 엉망이 된 김독자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는 쪽을 택했다.

“…아이는 네가 원하는대로 따르겠다.”

“너한테는….”

…원하지 않는 아이잖아…. 그 말에 유중혁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아까 붙잡지 못한 코끝을 붙잡고 한번 가볍게 흔들어준뒤 놓기까지 했다. 악소리를 내고 양손을 파닥거리던 김독자는 금방이라도 화를 낼 듯 구겨진 유중혁의 표정에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큰소리를 내는 대신 티슈한장을 더 뽑아 덜 마른 김독자의 눈가를 톡톡 눌러 닦아주었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없이 입만 달싹거리던 김독자의 눈가가 그 상냥한 손길에 다시금 울상이 되었다.

담담한 척하면서도, 여태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혔을 걱정거리들을 유중혁은 알고 있었기에, 다른 감정보다 미안함이 크게 와닿았다.

“…일할 때 네 놈은 입만 잘털고 손은 느려서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이 자식이…. 가볍게 툭 휘두른 팔이 커다랗고 단단한 손에 붙잡혀 끌어 당겨졌다. 추욱 늘어진 채 이불속에 둘러싸여 있던 김독자는 유중혁의 힘에 이끌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너른 품에 폭 안긴 김독자를, 단단한 팔뚝이 놓치지 않고 끌어안았다. 작은 버둥거림은 금세 사그라들고, 두 사람 사이엔 가느다란 숨결만 오갔다.

“하지만.”

유중혁의 나직한 목소리가 김독자의 귓바퀴를 살랑바람처럼 훑고 지나갔다. 그가 쏟아낸 문장들이 스쳐 간 김독자의 얼굴에는 선홍빛이 빼곡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너와 함께하는 연애는 생각보다 내 취향에 잘 맞을 것 같은데.’

피식 웃음을 터트린 유중혁이 김독자를 짜낼 듯이 꼭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 옆구리 근처에서 꼬물거리던 손가락이 느릿느릿 등 뒤로 향하는 것을 느끼곤 유중혁의 입꼬리가 더욱 길게 말려 올라갔다.

“네가 거절할까 봐 사실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7주나 방치해놓은 주제에….”

“…그건…미안하다.”

입덧인지도 모르고 하루하루 말라가던 때를 생각하던 속상한 마음이 울컥 차올랐지만 그것도 금세 가라앉았다. 연애도 시작해보기 전에,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도 전에, 너무나 이르게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소중한 생명이 솟아났지만, 그것마저 달콤한 운명처럼 느껴졌으니 이것이 사랑을 하는 첫 번째 지름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 과장님한테 병가 이야기 안 하고 그냥 나왔는데….”

“기획팀에는 내가 말해뒀다.”

“근데 너 전화는 왜 자꾸 울려…?”

“…정신이 없어서 마케팅 팀에는 연락을 못했다.”

“미…친놈아, 너 무단외출이잖아…!”

욕설을 퍼붓는 김독자의 입술위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감미로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고작 몇시간 사이, 상냥해진 유중혁을 마주하는 것도 어색했지만, 그전에 끊이지 않고 울려대는 진동소리가 더욱 두려웠다.

어차피 시말서감이라며 어기적대는 유중혁의 등짝에 시원스럽게 손바닥이 내려쳐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이었으나, 그 틈새에 아주 작은 애정이 새순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하늘에서도 마음이 이어진 두 사람과 새로운 생명을 축하하듯, 새하얀 눈발이 송이송이 흩날려 바닥을 적셨다.

날이 맑은 12월 초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팀장님, 팀장님.”

서류 무더기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김독자가 앞자리 사원의 부름에 파득 고개를 들었다. 주말동안 밀리고 밀린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시간 가는 것마저 모르고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김독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획팀에서 가장 막내 사원임에도 눈치가 빠른 앞자리 팀원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으로 사무실 입구를 콕콕 찔렀다.

“마케팅 팀장님 오셨어요.”

“아…. 그러네요.”

“쉬엄쉬엄 하세요. 요즘 살도 좀 내리신 거 같은데….”

슬그머니 지갑을 챙겨 일어나는 사원에게 실없는 웃음을 지어준 김독자는 기지개를 쭉 펴며 슬쩍 유리문 너머를 내다보았다. 벌써 한 달이 넘어가도록 유중혁은 점심때만 되면 기획팀으로 내려와 김독자와 함께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고는 했다.

다른 음식들은 입에도 못 대는 김독자였지만 신기하게 유중혁이 직접 만든 음식만큼은 거부감 한번 느끼지 않고 잘 먹었다.

“너까지 여기서 먹을 필요는 없다니까….”

유중혁은 따뜻하게 우려온 차를 익숙하게 김독자앞으로 밀어주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미안했는데, 유중혁은 매번 점심시간마다 직원들과 외출을 거부하고 아래층인 기획팀까지 내려와 주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라.”

어떻게 신경을 안 써…. 투덜거리면서도 김독자는 도시락 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아침은 몰라도 점심과 저녁은 든든하게 매일같이 먹이는데, 김독자는 살이 오를 생각을 안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중혁의 기준에 맞춰서 싸 온 1인분의 점심식사는 늘 반절가량이 남았다.

김독자는 허기가 지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달려들고는 했으나 막상 수저질을 시작하면 몇 번 깨작거리곤 배부르다며 뒤로 빼기 일쑤였다.

“편식하지 말고.”

“으응.”

달걀조림 하나를 입에 물고 한참 동안 우물거리는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남은 음식은 자신이 먹어 치우니 크게 아깝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꾸만 말라가는 김독자를 보고 있자면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했다.

“…왜 이렇게 기획안만 많지?”

“그야 연초니까…. 너희는 한가해 보이네.”

유중혁의 부서라고 한가한 편은 절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마케팅팀은 손이 빨랐다. 김독자의 낯빛이 몇 날 며칠은 피곤함에 절어 둔 사람처럼 보여서 유중혁은 반박하는 대신 얌전히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하필 구정을 앞두고 있는 터라 결재를 올려야 할 서류들도 한가득이었는데, 연초라고 신입사원까지 왕창 뽑아버린 회사가 문제였다. 일개 사원들도 바쁜 건 마찬가지였지만 간부급 사원들은 정말 야근이며 특근이 끊이질 않고 밀려드는 시기였다.

“무리하지는 마라.”

“으응….”

“…걱정되니까.”

벌써 배가 부른지 미트볼하나를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조각내고 있던 김독자가 대꾸없이 얼굴만 붉혔다. 애당초 만나면 서로 무시하기 바쁘던 사이인지라 갑작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어색하고 낯간지럽기만 할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생각보다 부지런히 애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중혁이 그 정도가 과했다.

그새 눈에 콩깍지라도 씐 건지. 김독자는 유중혁의 다정함에 유난히 부끄러워했고, 유중혁은 김독자가 수줍음에 몸을 떠는 것을 좋아했다.

십여분이 지나도 더 이상 음식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자 유중혁이 도시락통을 닫았다. 아직 몇분 정도는 더 여유가 있었지만 마케팅 부서도 업무량이 적은 편은 아니었기에 더 머무를 시간은 없었다.

“오후에 간부회의가 잡혀서 연락이 안될 수도 있다.”

“응…. 길어질 것 같아?”

“…아마도.”

어쩐지 우울한 얼굴로 유중혁이 중얼거리자 김독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해맑은 표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유중혁은 올라가기 직전 김독자의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민망한 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에 울리고 김독자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를 즈음, 때마침 점심식사를 끝낸 사원들이 하나둘씩 사무실 안으로 돌아왔다.

“이따 보지.”

“…으응….”

이마위를 손등으로 살짝 짚어보던 김독자의 귓가가 이제는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방금전 아슬아슬하고 간질거리는 스킨쉽하나에 두근거리던 김독자는 대뜸 어깨 너머에서 들이밀어지는 종이 뭉치에 화들짝 놀라며 파드득 튀어 올랐다.

“유 팀장님 이제야 올라가셨나 봐요. 이거, 아까 복사 부탁하신 거요.”

“아…. 고, 고마워요.”

“요새 마케팀부장님 되게 자주 오시는 것 같네요. 두 분 사이 안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게요…. 김독자는 대답대신 실없는 웃음을 흘리곤 서류를 받아들었다. 다들 큼지막한 테이크아웃 커피 한잔씩을 손에 든 채 자리에 돌아오고도 죽겠다는 곡소리가 끊어지질 않았다.

끼긱대는 복합기 소리를 시작으로 웅성대던 사무실 안은 금세 키보드 소리가 가득 메워졌다. 해가 차차 기울거가는데도 부산스러운 사무실 안에는 종잇장이 부지런히 넘어가는 소리만 사부작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부지런히 손을 움직인 덕에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올때즈음 오늘치 할당량은 대부분 마무리가 된 상태였다. 엉덩이 한번 떼지 못하고 내내 자리에 앉아 모니터만 들여다보던 김독자도 그제야 길게 기지개를 켰다. 한숨과 함께 등받이에 주욱 늘어지는 꼴이 족제비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때, 책상 한구석에 던져놓았던 핸드폰이 웅웅거리며 요란스레 울렸다.

“병원?”

액정위에 떠오른 것이 초진을 봐주었던 병원의 전화번호임을 알아채곤 김독자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임신 초기에 진행하는 정기검진 때문에 연락이 갈 거라는 전언이 있었기에 김독자는 핸드폰을 들고 탕비실로 향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여보세요,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을 찾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다급히 넘어왔다.

“어…. 네, 김독자 맞는데요.”

아아, 안도어린 목소리가 조금 안정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검사 결과에서 뒤늦게 발견된 부분이 있어서 안내를 꼭 해드려야 한다며 퇴근후 시간 날 때 병원에 방문하라는 소리였다. 나쁜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하는 것까지 들었지만, 무덤덤하게 대답한 것과 달리 김독자의 마음에 불안감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혼자, 가야겠지.”

아직까지 마케팅 부서의 간부진들은 모두 메신저창이 부재중이었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했으니 지레짐작하지 말자, 혼자 겁먹지 말자, 스스로 다짐했으나 손끝이 차게 식어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바들거리는 손가락을 주무르고 있자니 마침 업무 마무리후 퇴근하라는 사내 채팅창이 올라왔다. 하필 오늘따라, 칼퇴근이었다. 과장에 이어 차장까지 오프라인으로 바뀌는 것을 보니 당장 옷을 챙겨 나가도 상관없을 듯했지만, 김독자는 일부러 평소보다 느리게 책상 위를 정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인사가 몇 번 오가고 나니 사무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가방을 손에 쥐고, 김독자도 결국 사무실을 나섰다. 여전히 유중혁의 메신저창은 부재중이었다.

 

 

“…네?”

의사의 손에 들린 얇고 기다란 막대기가 하얀 초음파 사진위로 동그란 원을 죽죽 그려냈다. 하얗고 까만 반점이 어우러져 있는 사진 위에서 김독자는 눈을 떼지 못했다.

검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한번 깜빡일 때마다 담당 의사의 입꼬리도 주욱 말려 올라갔다.

“처음 찍은 초음파 사진과 얼마 전 검진때 찍은 초음파 사진이 많이 차이가 나길래 다시 눈여겨 봤거든요. 쌍둥이인걸 놓친 적은 처음이라….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제 실수였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사는 연신 생글거렸다. 이제 길고 얇은 막대는 새똥만 한 크기로 콩닥대는 태아의 심장 두 개를 가리키고 있었다.

“쌍둥이….”

바들거리며 들어섰던 것과 반대로 김독자는 얼이 빠진 채 병원을 나섰다. 추운 것도 잊고 한손에는 코트를, 한손에는 초음파 사진이 든 서류봉투를 든 채 터덜터덜 걸었다.

속으로 생각해보아도, 소리내어 중얼거려 보아도 아직까지 믿기지 않았다. 쌍둥이라고 했다. 하얀 덩어리가 유독 크다 했더니,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얼떨떨한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 기쁜 만큼, 유중혁이 기뻐하지 않을까 봐. 당사자가 들었다면 노발대발 할만한 이야기였으나 아직은 불안감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관계였으니까.

얼마쯤 걸었을까, 어깨 위로 두꺼운 코트자락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나서야 김독자는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길거리를 배경삼아 조각 같은 사내가 걱정가득한 눈빛으로 김독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늦게 끝나서. …미안하다.”

“유중, 혁.”

“무슨…안좋은 이야기였나? 왜 옷도 안 입고….”

모든 것이 슬로우 비디오를 재생시킨 듯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놀란 나머지 토끼처럼 눈을 키우는 유중혁의 표정도 비현실적이었고, 어깨 위에 얹어져 있던 큼지막한 코트가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도 물결처럼 느리게 보였다. 김독자가 양팔을 가득 벌려 목덜미를 끌어안자 유중혁은 혹여 맨바닥에 비틀거리기라도 할까 본능적으로 자신의 연인을 끌어안았다.

“김독자?”

“…쌍둥이래.”

근심이 먹구름마냥 짙게 끼어있던 이목구비가 그 한마디에 바보처럼 굳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김독자가 그러했듯이, 유중혁의 얼굴위로 걸쳐있던 긴장감이 녹아내리자 햇살을 닮은 환한 미소가 숨기지 못하고 피어올랐다.

회사 일로 어쩔 수 없이 김독자를 홀로 병원에 보내야 했던 자책감도, 지금 이 순간에는 모두 날아가버렸다. 불그스름한 입꼬리에 주체하지 못한 기쁨이 그득히 채워져 갔다.

자신의 코트를 벗어주고도 추운 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유중혁은 김독자를 품 안에 꼭 끌어안은 채 초음파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직 뭐가 무언지, 의사가 아닌 눈으로는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마냥 좋은 눈치였다.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콩알만 한 심장 두 개가 나란히 서로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예정일은?”

“무슨, 벌써 예정일 타령이야. 이제 겨우 3개월인데….”

“출산휴가 규정좀 다시 찾아봐야겠군.”

“…저기요, 지금 3개월 이라니까?”

제 팔뚝을 콩콩 내려치는 김독자의 손끝이 발갛게 언 것을 보고 유중혁은 양손으로 하얀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택시도 마다하고 집까지 20분가량 걸리는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어쩐지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널 닮았으면 좋겠군. 비실거리는 것만 빼고.”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던 김독자가 왜, 라고 묻자 유중혁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눈을 흘겼다.

“널 닮으면, 사랑스럽겠지.”

“…너어어느은…. 진짜….”

“널 닮은 아이는 예쁘고, 선할 테니까.”

얼굴에 철판을 깔아놨냐는 비아냥에 유중혁은 김독자의 옆구리를 콱 잡아채 버렸다. 그럼에도 부드럽게 마주 잡은 손깍지만은 놓지 않았다.

길지 않은 도롯가를 거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달빛에 엉겨 하나로 어우러졌다. 늦은 겨울밤, 소복이 쌓여가는 눈발에도 네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따뜻하고 반짝이며 빛을 냈다. 

성인 판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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