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은 특강 끝나자마자 집에 들렀다. 압구정 로데오 역 1번 출구에서 나와 갤러리아 이스트 명품관에서부터 5분을 더 걸으면 연준이 사는 한양 아파트가 나온다. 분리수거하던 경비원이 연준을 보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연준은 허리 숙여 공손히 인사하고 81동 로비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관문을 열자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연준을 반갑게 맞이했다. 부엌에서 밥하는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연준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이끌었다. 찌개 간 좀 봐달라는 게 그 이유였다. 국자로 한 술 떠서 혹여 데일까 후후 불어 건네는 것을 연준이 조심스레 맛보았다. 맛이 어때? 어머니가 물었다. 연준은 제 아버지 입맛에 대해 잠시 생각하더니 고춧가루 좀 더 넣어도 괜찮을 것 같다 답했다. 두어 번 정도 더 간을 본 연준은 어머니 등을 살짝 껴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땀에 젖어 옷이 들러붙은 축축한 등허리가 아까부터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연준은 미리 싸두었던 짐을 챙기고 다녀오겠다며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얘, 아침에 나갈 때 짐 챙겨 나가지 그랬니. 여자친구 집에 미리 가져다 놨으면 이 고생 안 해도 됐을텐데 뭐하러. 학교에서 같이 출발했으면 서울역 금방인데.”


어머니가 웃었다. 연준은 저가 그걸 왜 여태 생각해내지 못했는지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내 저가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해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연준은 서울역에 유진보다 먼저 도착했다. 유진은 연기실습이 늦게 끝난데다가 짐이 많아 이동하기 힘들다며 미안하다는 디엠을 보내왔다. 연준은 서두르다 다치지말고 조심해서 천천히 오라고 답장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7시 19분이었다. KTX는 8시에 출발한다. 점심먹고 줄곧 공복이었던 연준은 캐리어를 끌고 역내 파리크라상에 들어갔다. 빵 몇 개를 골라담고 카운터에서 딸기바나나라떼 한 잔을 테이크아웃 했다. 검정 뿔테안경을 쓴 멀쑥한 남자 알바생이 주문을 받았다. 연준은 수빈 생각이 나서 계산하는 남자 알바생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음료 준비되면 진동벨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남자 알바생은 카드 영수증과 진동벨을 건네주며 연준의 노골적인 시선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연준은 겸연쩍은 얼굴로 진동벨을 받아들고 매장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음료를 기다리는 내내 여대 앞 카페에서 일하는 수빈의 모습을 생각했다. 수빈은 5시 퇴근이다. 초과근무 하지 않는 한 퇴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원룸촌 길거리를 홀로 터덜터덜 걸어올라가는 커다란 뒷모습을 상상했다. 연준은 저가 찾아가지 않는 날이면 수빈이 퇴근하고 무엇을 하며 보낼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유진은 저 멀리서 걸어오며 오빠! 하고 크게 불렀다. 제 몸만한 캐리어 두 개나 끌고 오는 걸 보고 연준은 부리나케 유진에게로 달려갔다. 유진의 캐리어 두 개 중 좀 더 무게 나가는 걸 골라 거들었다. 뭐가 이렇게 무겁냐. 뭘 이렇게 많이 챙겨왔어. 연준이 물었다. 유진은 딸기바나나라떼 한 입 뺏어 먹고는 웃었다. 촬영 장비랑 메이크업 박스 때문에 그래. 어쩔 수 없잖아 가서 해야할 게 산더미인걸! 여행 횟수가 늘수록 짐 싸는 요령도 늘어난다던데 유진의 짐은 여행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무거워졌다. 유진은 셀카봉을 꺼내 DSLR을 장착하고 연준에게 들이 밀었다. 오빠, 우리 부산 간다고 한 마디 해. 빨간 불빛이 깜빡거렸다. 연준은 어제 유진과 했던 몸싸움 때문에 유진의 브이로그 촬영에 협조하고 싶지 않았으나 여행 초입부터 초치고 싶지도 않았다. 카메라를 향해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유진이 원하는 남자친구 역할에 충실했다. 

유진이 만족할 만큼의 인트로 촬영분량을 뽑고 둘은 열차 승강장으로 향했다. 특실로 티켓팅해서 앞뒤 좌석 간격이 넓었다. 유진은 창가 자리에 앉고 싶어 했다. 연준은 양보하고 복도쪽 자리에 앉았다. 연준은 캐리어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유진에게 빵을 건넸다. 유진은 나오기 전 집에서 이것저것 주워먹고 왔다며 거절했다. 연준은 혼자 빵을 뜯다가 혼자 먹는 일이 지루해져서 먹는 것을 그만 두었다.

부산역에 도착하니 10시 37분이었다. 1호선 타고 서면역에서 갈아타 2호선 해운대역에 내리니 11시 40분이었다. 택시를 잡아 타고 웨스틴 조선 호텔 앞에 자정이 넘어 도착했다. 하루종일 특강과 실습에 시달렸던 둘은 해운대 밤바다의 낭만은 커녕 얼른 씻고 잠들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체크인하고 곧장 객실로 올라갔다. 연준이 캐리어 짐을 풀고 정리하는 동안 유진은 카메라 빨간 불을 켜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 연준은 캐리어 두 개나 들고 와놓고 짐 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유진이 조금 짜증났으나 호화로운 객실 인테리어와 통유리 너머 펼쳐진 해운대 야경이 마음에 들어 짜증을 금세 털어냈다. 객실 촬영을 마친 유진은 카메라를 내려놨다. 허기졌던 연준은 기다렸다는 듯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야, 우리 편의점 가자. 배고파서 죽을 거 같단 말이야. 컵라면 사러 가자.”

“싫어. 난 안 먹어. 오빠 혼자 가서 먹구와.”

“아 왜애. 가서 과자도 사구 젤리 같은 것도 사구. 맥주도 사서 한 잔 하고 자자.”

“싫다니까. 나는 배불러.”

“그럼 같이 가주기라도 해줘.”

“싫어! 애도 아니고 뭐야.”


유진이 귀찮다는 듯 비꼬았다. 여태 유진에게 맞춰줬던 연준이었다. 배고픔과 피곤함이 누적된 연준은 기분 상한 티를 내지 않는 것이 힘들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던 연준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핸드폰을 들고 복도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데 유진이 뒤늦게 쫓아와 팔짱을 꼈다. 으이그, 삐졌구나. 같이 갈게. 가 주면 되잖아. 연준은 유진에게 혹시 다이어트 중이냐고 물었다. 유진은 그게 아니라 밤에 먹으면 속이 부대껴서 그런 것 뿐이라며 연준을 달랬다. 둘은 해변 근처 편의점으로 내려가서 주전부리 할 것들을 사들고 올라왔다. 연준이 커피 포트 물 끓여 컵라면에 부어 먹는 동안 유진은 사온 것들에 입도 안 대고 인스타그램만 했다. 입맛 없어진 연준은 결국 반도 못 먹고 버렸다. 연준은 잠들기 직전까지 웨스틴 조선 호텔 카밀리아 조식 후기를 검색하며 침을 꼴딱 삼켰다.

배고프면 잠이 깊게 안 든다. 연준은 새벽같이 일어나 씻고 옷갈아입고 조식 먹으러 간다고 호들갑 떨었다. 유진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얇은 원피스에 가디건 하나 걸치고 맥아리 없이 연준을 따라 나섰다. 성인 한 명당 조식 4만 5천원이었다. 연준이 다섯 접시로 뷔페 쓸어 담을 동안 유진은 저가 가져온 고기나 해산물 따위를 전부 연준 쪽으로 밀어주고는 씨리얼을 새모이만큼 퍼다가 우유에 말아 먹었다. 어제부터 유진은 뭐 하나 제대로 먹지 않고 있었다. 뒤늦게 눈치챈 연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진을 살폈다.


“유진아. 왜 이렇게 안 먹어. 니가 가져온 걸 왜 니가 안 먹고 나를 줘.”

“오빠 내가 밥 안 먹으면 따라서 안 먹잖아. 내가 먹는 시늉이라도 해줘야 오빠가 신경 안 쓰고 편하게 먹지.”

“아니, 그러니까. 왜 안 먹느냐고. 너도 여기 조식 먹고 싶어 했잖아. 그렇게 먹고 싶어 했으면서 뭔 씨리얼 같은 거나 말아 먹고 있어 이런 거 평소에도 얼마든지 먹는 건데. 너 연어 좋아하잖아. 그 좋아하는 연어 안 먹구 뭐해. 야 여기 오믈렛도 진짜 맛있어.”

“생각 없어서 그래. 조식은 내일도 먹을 수 있잖아. 오늘은 내 몫까지 오빠가 많이 먹어. 알았지?”

“어디 안 좋은 거 아니냐. 너 어제부터 너무 안 먹는다 야. 걱정돼.”


조식 먹고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며 연준은 유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챙겼다. 기운 없이 연준에게 기대어 있던 유진은 객실로 들어가자마자 얼굴에 생기가 돌더니 이따 바다 갈 때 입을 거라며 새로 산 비키니를 꺼내놨다. 이거 예쁘게 입으려고 어제부터 종일 굶은 거라고도 실토했다. 연준은 황당했다. 연준은 한 달 용돈으로 200만원을 받았지만 돈 쓸 때 제대로 쓸 뿐이지 돈 우습게 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유진에게 쓰는 돈이 아까운 적은 없었지만 제 값 못하고 허투루 쓰인 4만 5천원은 아까웠다. 연준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려다 그만두었다. 유진이 조식 안 먹는다고 미리 말해주었어도 연준은 그걸 곧이 곧대로 듣고 혼자 내려가서 좋다고 먹고 있을 성격이 되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두 명 구색 맞추기 위해서라도 4만 5천원은 필요했다. 그깟 4만 5천원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 마음을 가라 앉히다가도 그깟 비키니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 짜증이 치솟았다.


“넌 여기 나랑 놀려고 온 거냐 아니면 이쁜 옷 입으려고 온 거냐.”

“이쁜 옷 입고 오빠랑 놀려고 온 거지.”


유진이 능청스레 웃으며 연준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유진은 연애초반 12kg 찐 전적이 있다. 연준이 잘 먹이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살 걱정 한 번 안 해보고 살았던 유진은 연준이 먹자는 대로 다 따라다니며 먹다가 처음으로 허벅지 튼살을 마주했다. 연준은 유진더러 살 좀 붙은 게 더 좋고 귀엽다고도 했으나 살 붙은 유진은 연준이 뱃살 주무르면 쳐냈고 키스하다 옆구리 만지면 신경질을 냈다. 연준과 사진을 찍으면 유진이 유독 부해 보였다. 평생 보정이랍시고 해본 게 색감 보정이 전부였던 유진이 공들여 몸선을 보정해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면 뒷배경이 울고 있다고 이름도 모르는 이들의 조롱섞인 악플이 달렸다. 남자 선배들은 유진의 턱살을 귀엽다며 주물렀고 살집있는 여자동기들은 유진과 노출 심한 여름옷을 구경하며 ‘우리’ 같은 애들은 이런거 못 입는다고 한데 묶었다. 그 이후로 유진은 병적인 몸매관리로 마른몸을 유지했다.

유진이 비키니를 입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사들고 온 비키니는 너무 야했다. 해 중천에 뜨고도 남을 때까지 침대에서 뭉개며 자다깨다 하던 연준은 유진이 비키니 입고 나온 꼴을 보고 경악했다. 연준은 너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샀느냐고 물었다. 유진은 코웃음치며 얼굴 빨개진 거나 어떻게 좀 해보라고 응수하고는 비키니 룩북 찍으려고 비슷한 거 몇 개 더 사왔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기말공연 준비하는 동안 떨어진 채널 조회수 다시 살려보고자 하는 게 비키니 룩북의 이유였다. 유진은 연준과 갈등하고 부딪치는게 두려워 일단 저지르고 통보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것들은 오히려 연준을 더 실망하게끔 만들었다. 말을 고르던 연준은 이렇게 말을 고르고 저 혼자 고민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연준은 침대 위로 엎어져 바다를 보러 가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야, 생각을 해 봐. 너가 만약에 그러고 나가. 사람들이 너랑 나를 딱 봐.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냐. 쟤는 남자친구가 돼서 여자친구가 저러고 다니는데 아무 말도 안 하냐고 그럴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다들 저 남자 복터졌다고 그러겠지. 오빠도 참.”

“막말로 이게 속옷이지 수영복이야?”

“악! 짜증나. 엄마야 뭐야. 정 싫으면 나가서 남자친구 아닌척 해. 저 멀리 떨어져서 가자 우리. 해운대에서 헌팅하다 만난 사이인척 하자. 어때? 나한테 저기 번호좀, 하면 내가 망설이는 시늉 좀 하다가 번호 줄게.”


말빨 좋지 않은 연준은 이번에도 유진에게 져줬다. 유진은 연준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고는 캐리어에서 파우치와 메이크업 박스를 꺼냈다. 연준이 화장실 갔다가 썬크림 바르고 머리 드라이하고 스프레이 뿌리고 나와도 유진은 계속 메이크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멀티 안 되는 건 똑같아서 유진은 메이크업 하는 도중에 연준이 말시키면 열에 아홉은 못듣고 넘어갔다. 침대에 우스꽝스레 드러누워 다리에 썬블록을 문지르던 연준이 맥빠진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더 걸리냐. 유진은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한올 한올 칠하며 대답했다. 한 삼십 분 정도만 더 기다려. 유진은 연준을 심심하게 내버려 두는 일이 많았다. 연준은 알겠다고 말하고 핸드폰 좀 만지다가 꾸벅 잠들었다. 한참 달게 자는데 유진이 올라타서 뽀뽀하고 깨웠다. 연준이 자는 동안 룩북도 다 찍었다고 했다. 룩북촬영 말리는 걸 까먹은 연준은 체념하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삼십분은 커녕 한시간도 더 지나있었다. 그래도 이제 나가 놀 생각하니 연준은 다시금 기운이 났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위로 태양이 작열했다. 해수욕장에 사람이 붐볐다. 연준은 파라솔과 돗자리를 빌리고 튜브도 하나 빌렸다. 유진은 걸치고 있던 비치웨어를 벗어던지고 비키니 자랑을 했다. 래시가드에 트렁크로 꽁꽁 싸맨 연준은 저가 그저그런 한심하고 가벼운 남자가 된 것 같아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유진은 연준의 수영복 차림을 보고 남자가 웃통도 안 까느냐고 몸에 자신이 없으니 래시가드 같은 걸로 때우는 거 아니냐며 기다렸다는 듯 한 방 먹였다. 마른 몸은 옷 입을때나 핏이 살고 좋았다. 남자인 연준은 종종 제 마른 몸이 싫었다. 상처 받은 연준은 너나 그만 좀 벗으라고 유치하게 쏴붙였다. 

유진은 바캉스 메이크업만으로도 바캉스 기분을 충분히 내고 있었다. 공들여 세팅한 머리와 기능성 없는 화려한 비키니는 물에 들어가 놀기에 좋지 않았다. 흰 살결이 타는 것도 유진은 싫어했다. 유진은 연준을 바다에 밀어 넣어 놓고 그저 파라솔 그늘에서 셀카 찍는 것에만 심취해 있었다. 혼자 튜브타고 놀던 연준은 금세 지루해져 파라솔로 돌아왔다.


“같이 놀자.”

“혼자 놀아. 난 안 들어가.”

“심심하다구.”

“온 김에 나 사진 하나만 찍어줘. 다리 길어보이게!”


연준은 유진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사진 찍어주는 시늉을 하던 연준은 대뜸 핸드폰을 돗자리 위에 던져 놓더니 유진을 번쩍 안아들었다. 악!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유진은 신경질적으로 연준의 가슴을 때렸다. 연준은 실실 웃더니 그대로 바다로 돌진해 유진을 집어던졌다.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바닷물에 풍덩 빠졌다. 연준은 배를 잡고 웃었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유진이 미역귀신 꼴을 하고 연준의 이름을 고래고래 소리쳐 불렀다. 연준은 마음에도 없는 미안하단 말과 함께 부축하러 들어갔다. 유진은 물 밖으로 나오자 마자 연준의 등이며 가슴을 있는 힘껏 아프게 때려댔다. 맞아주던 연준은 혀를 쏙 내밀고 나 잡아 보라며 모래사장을 이리저리 질주했다. 유진은 연준을 쫓아 뛰다가도 비키니가 벗겨질까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한참동안 연준과 실랑이하던 유진은 문득 신고 있던 구찌 슬리퍼 한 짝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상이 되어 해수욕장 이곳 저곳을 황망히 바라보는 유진을 연준이 다가와 살폈다.


“아까 바다에 빠졌을 때 벗겨졌나봐.”

“어떡하냐. 내가 진짜 미안하다. 똑같은 걸로 사줄게. 기분 풀어.”

“됐어. 밥이나 먹으러 가. 배고파서 더 짜증나.”


호텔로 올라간 둘은 샤워하고 옷갈아입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헤어밴드한 연준은 얇은 린넨 긴팔 니트에 반바지를 입었고 유진은 오프숄더 블라우스에 딱붙는 청스키니를 입었다. 낙곱새 먹으러 그 유명한 개미집 본점에 갔다. 대기하는 사람들이 개미떼 드글거리는 것 마냥 많았다. 연준은 다른 걸 먹자고 설득했으나 유진은 종일 굶었음에도 이거 안 먹으면 여기 온 의미가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번호표를 뽑고 야외 대기석에서 한시간 반을 기다렸다. 부산 앞바다 습기찬 더운 공기가 온몸에 쩍쩍 들러붙었다. 유진의 이마와 목덜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연준도 유진 못지않게 덥고 지쳐있었으나 유진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땀을 닦아주고, 손부채질을 해주고, 머리끈 없다 해서 긴 머리카락을 대신 손으로 붙들어주고, 갖은 애교를 떨고, 돼먹지 못한 썰렁개그도 쳐댔다. 유진은 시큰둥했다. 유진은 그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연준에게 화풀이 하고 싶은 성질머리를 참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기나긴 웨이팅 끝에 자리가 났다. 유진은 입도 짧으면서 허겁지겁 젓가락질 했다. 연준이 천천히 먹으라고, 누가 안 뺏어 먹는다고 말해도 소용 없었다. 연준은 식사하는 내내 뒷자리 노인네들 술주정과 깜빡이는 DSLR 빨간색 불빛이 신경 쓰였으나 유진은 아무 생각 없이 마음껏 먹고 행복해했다. 그래서 연준은 이만하면 된 거 아니겠느냐고 좋게 생각했다.



***



해운대 여름밤은 시끄럽고 더웠다. 연준은 유진과 손잡고 해수욕장을 천천히 걸었다. 바닷바람 냄새가 짜고 사방이 깜깜했다. 검은 파도가 모래사장에 철썩이며 부서졌다. 배부르게 후식까지 먹은 유진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먼저 살갑게 말을 붙이고 애교를 부려왔다. 연준은 낙곱새도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맛있었지만 유진만큼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연준은 유진의 네일아트 큐빅을 만지작거리며 유진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엉망으로 변해버렸는지를 생각했다. 유진은 잘 걷다 말고 연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연준이 내려다보자 유진은 눈을 반만 뜨고 웃어보였다. 연준은 가볍게 뽀뽀하고 끝냈다. 유진은 아쉬운지 더 엉겼다. 연준은 이런 기분으로는 스킨십보다도 대화가 하고 싶었다. 고민하던 연준은 편의점 가서 와인 사들고 올라가자고 했다. 객실에 도착해 씻고 나온 둘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인잔을 채웠다. 통유리 앞에 앉아 한눈에 들어오는 환상적인 밤바다를 구경했다. 유진은 내일 호텔 수영장과 더베이 101에 갈 거라며 들떠 있었다. 유진이 벅차오른만큼 연준은 가라앉아 있었다.


“넌 오늘 어땠어.”

“재미있었지! 슬리퍼 잃어버리고 개미집 앞에서 꼬박 두 시간 죽치던 거 빼면.”


유진이 재미없었다고 생각한 순간들은 연준이 재미있었다고 생각한 순간들이었다. 연준은 어제오늘 지루하고 따분했던 시간들마저 어떻게든 즐겁게 보내고자 노력했기에 유진의 태도가 철없고 어리게 느껴졌다. 유진이 연준보다 한 살 어린 것은 사실이었으나 지금보다 한 살 어렸던 연준은 유진같이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려면 아직 하루가 더 남았다. 유진에게 불만을 말하면 한바탕 감정소모를 거치고 둘 다 이도저도 아닌 기분으로 일요일을 보내게 된다. 유진에게 불만을 말하지 않으면 적어도 유진만큼은 서울로 돌아갈 때 까지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연준은 제 팔에 길게 그어진 손톱자국을 만져 보았다. 피가 마르고 딱지가 앉았다. 싸운지 불과 이틀이었다. 연준은 지쳐있었고 그 지긋지긋한 꼴을 또 보고 싶지 않았다. 연준은 고민했다. 유진은 샐샐 웃으며 연준의 허벅지 위에 발을 올려 놓았다. 연준은 고민을 끝냈다.


“발 치워. 장난칠 기분 아니야.”


연준은 말투도 표정도 일부러 관리하지 않았다. 유진은 놀란 토끼눈이 되어 그대로 경직됐다. 저보다 머리 하나 작은 깡마른 몸이 눈에 띄게 긴장하는 게 연준의 눈에도 보였다. 좋았던 분위기가 연준의 말 한마디에 냉각되어 살얼음 위를 걷는 듯 했다. 연준도 그걸 알기에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피로감을 느꼈다. 오빠 왜 그래. 유진이 눈치를 보았다. 연준은 유진의 발을 밀어내고 여태 고르고 고른 말들을 꺼내놨다.


“나는 있잖아. 솔직히 진짜 재미 없었어. 내일은 좀 재미있게 보내고 싶다. 내일도 이런 식이면 나 너랑 여기 온 거 후회할 거 같아.”

“…오빠.”

“너 나랑 여기 오기 전에 싸웠잖아. 웃기지 않냐 그 난리를 쳐놓고 둘이 이러고 있는 게. 너는 진짜 속도 좋다. 나는 사실 다 안 풀려서 오늘도 몇 번씩 속에서 올라오고 이게 뭔가 싶었는데 너는 나를 데리고 브이로그를 찍네. 야, 그게 그렇게 찍고 싶어? 나는 그거 찍기 싫어. 너 수빈이한테 사과는 했냐. 안 했지. 내가 너 때문에 그날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냐. 걔가 날 얼마나 병신으로 봤겠냐. 니가 걔한테 보낸 문자 읽는데 진짜 얼마나, 야, 민망해서 고개를 못 들겠더라. 너는 여태 문자만 보내봤으니까 너 그러고 나면 내가 어떻게 뒷수습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지. 니가 그래 너는 니 생각 밖에 안 해.”

“…….”

“너랑 나랑 요즘 별로 좋지 않잖아. 다시 잘 해보고 싶어서 그래도 너 데리고 여기 온 건데, 너무 힘들다.”


연준은 말하면서 후련하다가도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종일 생각만 하던 것을 말로 꺼내어 늘어 놓으니 유진과의 일그러진 관계가 실감났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고쳐보려 해봐도 손 댈 엄두조차 나지 않을만큼 복잡했다. 서로 뭐 하나 크게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얼굴을 마주하면 미워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유진은 연준이 후회할 거 같다 했을 때부터 울고 있었다. 흠잡을 곳 없는 예쁜 얼굴에서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멜로 영화의 한 장면을 잘라온 듯 했다. 연준은 이제 그 영화를 그만 돌려보고 싶었다. 유진은 휴지로 젖은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았다.


“미안해 오빠. 내가 정말 미안해. 나는 왜 맨날 이모양인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맨날 오빠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내가 너무 싫다. 아, 지긋지긋하다 진짜. …걔한테 사과문자는 정말 못 보내겠더라. 용기가 안 나. 내가 무슨 낯으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낼 수 있겠어. 나도, 나도 너무 창피했단 말이야….”

“…….”

“내일은 카메라 들고 다니지 말자. 브이로그 안 찍어도 돼. 내일 아침에 오빠 자고 있는 동안 나 혼자 겟 레디 윗 미 하나만 찍을게. 내가 채널 키우느라 욕심낸 게 맞아. 뷰티 채널인데 너무 갔지. 나보다 화장 잘 하는 사람 널리고 널렸거든. 어떻게 보면 그걸로 승부 못 보겠으니까 이것 저것 다 건드리는 거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치만 오빠랑 같이 찍은 것들, 난 그거 되게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인생에서 기억나는 순간들이 얼마나 되겠어. 동영상으로 남겨두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잖아. 사람들이 봐주고 잘 어울린다 오래 갔으면 좋겠다 해주는 것도 좋지만 나는, 사실 그런 이유가 더 컸어.” 


오늘은 오빠가 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줬잖아, 내일은 오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놀자. 유진은 말 하면서 손톱 주변 거스러미며 피부를 틱틱 뜯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는 고개를 푹 숙인채 연준에게 용서를 구했다. 눈물이 뚝뚝 흘러 원피스 위로 방울방울 얼룩졌다. 연준은 안 그래도 작고 가녀린 유진이 오늘따라 더 작게만 느껴졌다. 싸우고 울린 게 이틀 전이었는데 그새 또 싸우고 또 울렸다. 연준은 유진에게 사과받고 싶었으나 막상 유진이 눈물 흘리며 사과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유진이 하는 모든 말들이 말릴 새도 없이 연준의 마음을 후벼팠다. 연준은 저가 괜한 짓을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이틀 전에도 이렇게 사과받았음을 상기했다. 매번 이렇게 싸우고 화해했다. 변하는 거 하나 없는데도 싸우고 화해했다. 그럴 때마다 연준은 남들도 다 이러나 의문하다가도 연인이기에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고 애써 좋게 생각했다. 연준은 이번에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좋게 생각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연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에게 다가가 뜯고 있는 피맺힌 손톱부터 감싸쥐고 작은 몸을 품 안에 안았다. 손톱 뜯지 마. 아프잖아. 다음 달에도 나랑 네일샵 같이 가자. 브이로그 찍어도 돼. 늘 찍던 거니까 괜찮아. 연준이 달래자 유진은 더 서럽게 울며 파고 들었다. 연준은 유진을 안아들고 불을 껐다. 두 몸이 그대로 엉겨붙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밤이 길었다. 연준은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눈을 감고 몇 번이고 잠을 청해 보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옆을 확인했다. 유진은 등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연준은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방 안을 돌며 먹다 남은 과자 봉지도 치우고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들도 정리했다. 연준은 다시 한 번 유진을 확인했다. 유진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연준은 겉옷을 챙겨 입고는 핸드폰과 여분의 카드키를 들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새벽에도 해운대는 번쩍번쩍 빛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백사장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술판을 벌였다. 도처에 술집이 밤샘영업을 하고 버스킹이 성행했다. 연준은 편의점에서 수입 병맥주 하나를 사들고 나왔다. 정처없이 걸으며 사람들 목소리보다 파도소리가 더 잘 들리는 곳을 찾아 헤맸다. 용케도 적당히 한적한 해변가를 발견해냈다. 연준은 그 앞 계단에 걸터앉아 병나발을 불었다. 시원한 맥주를 목으로 넘기며 새까만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연준은 유진의 우는 얼굴을 생각했다. 애처로웠다. 유진과 한바탕 대거리 한 것이 후회됐다. 유진은 어떨지 몰라도 연준은 이미 내일을 즐겁게 보낼 자신이 없었다.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유진을 생각하고 서울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수빈을 생각했다.

연준은 <인간 관계의 심리> 개강 첫 주 부터 수빈의 존재를 인지했다. 연준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 친오빠가 수빈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강의실에서 수빈을 보자마자 몸을 숨겼다. 너무 닮아 혹시 본인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연준의 전 여자친구 지수는 공부를 잘했고 대치동에서 국영수 학원을 다녔다. 댄스학원 끝나고 대치동 학원 앞에서 기다리다가 지수가 나오면 그 주변에서 계란빵이나 떡볶이를 사먹으며 데이트하는 것이 연준의 낙이었다. 하루는 기다리던 지수는 안 나오고 덩치 큰 남자가 대신 나왔다. 연준은 경비원이 자리를 비운 어두컴컴한 상가 건물 로비 안에 서 있던 참이었다. 자신을 지수의 친오빠라 소개한 남자는 연준을 차가운 대리석 벽으로 몰아세웠다. 남자는 연준의 머리통을 다짜고짜 후리고 사귄지 얼마나 되었는지, 진도는 얼마나 나갔는지, 끝까지 갔는지에 대해 물어왔다. 잔뜩 겁먹은 연준은 사귄지 백일 좀 넘었고 손 밖에 안 잡아 봤다고 털어놨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연준의 이마를 힘주어 밀어대며 혀를 찼다. 야 이 양아치 새끼야. 지수가 너 때문에 공부를 안 해. 대학 가야 하는 애 발목이나 잡고 있어 어린 놈의 새끼가 까져가지고. 지수 서울대 못 가면, 네가 책임 질거냐. 책임 질 거냐고. 남자는 연준에게 다시는 지수 근처 얼씬 말라고 윽박질렀다. 그 이후로 연준은 대치동 학원가 근처라면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보았던 남자의 얼굴은 흐릿했으나 그림자 드리운 이목구비의 굴곡이나 성난 인상 따위가 연준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기억되었다. 

연준은 수빈이 지수의 친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3월 중순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핸드폰 충전 하려고 보니 강의실 맨 뒷자리에 수빈이 앉아 있었다. 고민하던 연준은 작정하고 강의실 뒤로 걸어가 수빈에게 말을 걸었다. 바닥이 지저분하니 핸드폰 충전하는 동안 남는 의자 하나 쓰게 해달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수빈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했다. 아아, 안 씁니다. 쓰세요. 허여멀건하게 잘생긴 얼굴이 허둥지둥 의자에 두었던 롱패딩과 백팩을 치워 주었다. 연준은 수빈이 자리를 정리하는동안 수빈의 책상도 흘끗 훑었다. 학교 로고 새겨진 5단 클리어파일 위에 최수빈 세 글자 단정히 쓰여 있었다. 지수는 신 씨였다. 

연준은 그 때의 일에 대해 곱씹다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불순한 의도로 안면을 튼 수빈과 팀플을 같이 하고 어느새 친해지기까지 했다. 영화 보고 공연 보고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그 시간 동안 연준은 수빈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수빈은 연준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으나 제 이야기는 좀처럼 해주지 않았다. 연준은 수빈이 궁금했으나 수빈은 자꾸만 선을 그었다. 눈치빠른 연준은 그 선의 존재가 신경쓰여 수빈을 마주할 때마다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 선을 넘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질 때 쯤 종강했다. 종강하고 수빈은 연락 한 번 없었다. 그래서 연준은 먼저 연락했다. 더 알아가고 싶다 어필하며 은근슬쩍 선을 넘었다. 수요일마다 보러 가겠다고 말 했을 때 수빈이 지었던 애매한 표정을 연준은 종종 떠올렸다. 마냥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연준은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읽으려 애썼으나 매번 실패했다. 수빈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수빈은 늘 좋지도 싫지도 않은 듯한 반응이어서 연준은 수빈을 만나기 위해 지하철에 올라 탈 때마다 매번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저가 뱉은 말에 수빈이 눈 휘어가며 입 찢어지게 웃어대면 저를 좋아하는구나 싶었고, 저가 불러도 대답않고 멍하니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으면 저를 싫어하는구나 싶었다. 싫어한다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을 쯤 수빈은 마침내 연준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연준은 그 때서야 여태 저가 수빈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준은 수빈의 우는 얼굴을 생각했다. 서럽게 통곡하며 제 품에 안겨오던 커다랗고 다부진 몸과 손바닥에 만져지던 흥건한 식은땀을 생각했다. 그 때 연준은 수빈을 슬프게 만든 것들이 저 말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수빈이 우는 소리는 너무나도 침통해서 연준은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엽고 불쌍했다. 애틋한 마음이 들어 틈 하나 없이 꼭 껴안아 주었다. 다 알면서 왜 안아주느냐 묻는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고 더 깊게 끌어당겨 안았다. 수빈이 파고들자 묵직한 남자 향수 냄새가 코 끝에 훅 끼쳤다. 목덜미에 쓸리는 수빈의 턱 피부가 거칠었다. 커다란 몸은 연준을 무게감 있게 짓눌렀다. 짧게 친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니 남자 샴푸 특유의 알싸한 향기가 솟아 올랐다. 연준은 수빈의 그 모든 걸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으나 이내 그것이 주는 낯선 충격이 싫지 않다는 것 역시 받아 들였다. 넓다란 등을 오래도록 보듬으며 언제부터 수빈이 제 마음에 들어 왔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관계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연준과 수빈이 남녀사이 였다면 진작 눈 맞았을 일이지만 남녀사이고 마음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사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준은 유진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느꼈다. 그렇기에 연준은 수빈이 남자인 걸 원망했다. 수빈이 남자였기 때문에 연준은 여태 아무것도 모르고 방심하고 있었다. 수빈이 여자였다면 연준은 유진을 생각해 진작 눈치채고 선을 그었을 것이다. 남자인 수빈을 연준은 선 긋고 생각해 볼 틈도 없었다. 정신 차려보니 이미 이렇게나 수빈을 생각하고 있었다. 연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수빈이 여자였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연준은 갑자기 수빈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부드럽게 울리는 그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고민 끝에 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빈은 받지 않았다. 그제서야 연준은 정리하고 형동생으로 남고 싶다 했던 수빈의 말이 떠올랐다. 연준은 다시 걸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텔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수빈의 우는 얼굴과 유진의 우는 얼굴을 번갈아 생각했다.

유진은 연준이 나가기 전부터 깨어 있었다. 연준이 했던 말들을 내내 곱씹느라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진은 연준이 옷을 주워 입고 나갈 채비를 할 때 저를 깨워 데리고 나갈 줄 알았으나 연준은 혼자 조용히 나가 버렸다. 공허함이 밀려온 유진은 민성에게 연락했다. 오빠 자? 하고 보냈다. 3초도 채 되지 않아 아니, 하고 답장왔다. 연준이 밖에 나가있는 내내 유진은 민성과 카톡하고 전화했다. 핸드폰이 뜨거워 질 쯔음 현관에서 카드키 대고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유진은 민성에게 연준이 왔다고 서둘러 답장하고는 눈 질끈 감고 자는 척 했다.




***



수빈은 금요일에 퇴근하고 알바비를 받았다. 받자마자 학교 앞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투블럭으로 치고 파마했다. 관리하기 힘들기도 했고 한결같은 단정한 스타일이 지겨웠다. 옆머리와 뒷목에 닿는 바리깡 감촉이 소름끼쳤다. 머리 하고 거울 앞에 선 수빈은 제 꼴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쳤다. 길거리 오만 일반 남자들 다 하고 다니는 헤어 스타일인데 저가 하니 영락없는 게이새끼 같았다. 수빈은 그 길로 얼굴값 하러 이태원에 갔다. 알던 얼굴들이 환호하며 반겨주고 모르는 얼굴들이 넋나간 듯 말을 걸어왔다. 수빈은 꽤 우쭐한 기분으로 남자들 틈바구니에 끼어 들었다. 짧은 방황을 끝내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열에 아홉이 수빈과 자고 싶어 했다. 늘 겪어오던 상황이었으나 그간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있던 수빈은 제 수요 많은 잘난 껍데기로 망설임없이 횡포했다. 작업 걸어 오는 남자들에게 싸가지란 싸가지는 있는대로 부렸다. 키작으면 키작아서 싫다 하고 키크면 키커서 싫다 했다. 근육질이면 부담스럽다고 까고 슬렌더하면 한 대 쳐서 부러지는지 확인해봐도 되냐고 깠다. 수빈은 그렇게 말 한 마디로 몇 명을 울렸다. 몇 명은 화를 냈다. 싸움 날 뻔 한 걸 옆에 있던 태주가 진땀 빼며 중재했다. 술 취한 수빈은 깍깍 웃으며 형이랑도 잘 생각 없다고 태주의 속을 박박 긁었다. 태주는 수빈이 연준에게 까인 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수빈의 빈틈을 노려볼 참이었으므로 정곡이 찔려 아무말도 못했다. 

낮 시간동안 남자들 점수 매기고 밥과 술을 얻어먹던 수빈은 밤이 되자 번개 상대를 악에 받쳐 불 켜고 찾아댔다. 술자리 합석도 하고 어플로 쪽지도 돌렸다. 수빈에게 대차게 까였던 남자들은 그럼에도 수빈과 자고 싶어서 수빈 주변에 얼쩡거리고 비위를 맞춰왔다. 수빈은 이 따위 별 볼일 없는 남자들과 저가 같은 처지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 역겹고 혐오스러웠다. 저를 받아주는 곳을 찾아 다시 제 발로 기어들어 왔음에도 저를 받아주는 곳이 이런 곳 뿐이라는 게 끔찍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있다가도 거기에 조금이라도 어우러지는 게 두려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처럼 발악했다.

태주는 수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놀러 나온지 얼마 안 된 뉴페이스 몇 명을 수빈에게 소개시켜줬다. 모두들 수줍게 웃으며 수빈의 껍데기에 호감을 표시했다. 수빈은 쌍꺼풀이 예쁘게 진 왜소한 체격의 스무 살 한 명에게 슬쩍 작업 걸었다. 작업 걸기 전부터 넘어와 있었기에 곧바로 나가서 베드인 하기로 했다. 수빈은 술자리를 뜨며 쌍꺼풀 없는 애들한테 눈에 줄 긋고 오면 받아 주겠다고 패악 부렸다. 다리 놔줬던 태주는 무안함에 고개도 못 들었으나 수빈에게 화내진 못했다.

수빈은 모텔로 올라가기 전 콘돔을 사고 담배도 한 갑 달라고 했다. 수빈은 번개 상대와 몸을 섞고 침대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웠다. 바텀 한 애는 몸 섞고 나니 수빈이 신처럼 느껴졌는지 쳐다보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담배 할 줄 모른다며 가르쳐 달라고 존경 가득한 애교를 부려왔다. 끼부리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 수빈은 담배 한 대 물려주고 깊게 빠는 법을 가르쳐 줬다. 바텀 한 애는 필터 몇 번 빨더니 콜록콜록 기침했다. 수빈은 남자가 담배도 못 피워서 되겠느냐고 담배 못 피우는 남자 매력 없다고 웃었다.

수빈은 그렇게 연준이 부산 내려간 금토일 삼일 연짝을 종로와 이태원에서 보냈다. 많은 남자들과 닥치는 대로 잤다. 모텔 대실을 할 때마다 연준이 보여줬던 웨스틴 조선 호텔 결제 내역과 객실 사진을 떠올렸다. 콘돔을 뜯을 때마다 연준과 유진이 엉겨 붙은 모습을 상상했다. 온종일 화난 얼굴로 연준을 미워하다가 아랫배가 마비되어 무감각해 졌을 쯤 허탈한 얼굴로 연준을 놔줬다. 기운 빠진 수빈은 온 몸에 뜨거운 피가 도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남자 좋아하다보니 연준을 좋아한 것이고, 연준도 수많은 남자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이게 맞다고, 원래부터 이랬어야 한다고. 최연준 걔도 별 거 없다고. 그게 그거 아니겠느냐고. 졸린 눈으로 담배불을 붙이고 연준의 얼굴에 연기 뿜는 상상을 했다. 연준이 눈을 질끈 감고 콜록거리다가 저를 원망스레 쳐다 보았다. 수빈은 낄낄거리며 싸구려 모텔 침대 위를 데구르르 굴러 다녔다. 그러다 일요일 새벽 연준이 전화를 걸어 왔을 땐 한껏 불쌍한 척을 하며 핸드폰을 쥐고 숨을 떨었다. 잘못 누른 건가 생각하는 시간보다 진동 울리는 시간이 더 길었다. 만감을 교차시키며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받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걸어 준다면 그 때는 받을 생각이었다. 재다이얼을 기다렸으나 다시 오지 않았다. 수빈은 화가 났다. 전화가 다시 오지 않는 것도 화가 났고 저가 전화 오길 기다렸다는 것도 화가 났다. 수빈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태껏 외면해오던 사무치는 외로움이 수빈의 목을 조여왔다.

일요일엔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 화난 수빈은 일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로에서 술을 퍼마셨다. 주변에서 그만 마시라 말려도 멈추지 않았다. 밤이 되어 사람들과 헤어지고 장우산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추적추적 내리는 장대비 사이를 걸어 종로에서 가장 큰 금은방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하얗게 샌 할아버지가 수빈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술에 잔뜩 취한 수빈은 어깨에 튄 빗물을 털어내며 벌개진 얼굴로 진열장 앞에 섰다. 비틀거리며 귀걸이 좀 보여달라고 할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여자친구 주려고?”


할아버지가 물었다. 수빈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웃었다. 할아버지는 요즘 이런 게 유행이라며 많이 팔려 나가는 무난한 디자인 위주로 보여 주었다. 수빈은 좀 더 화려한 디자인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너무 과한 건 받는 사람도 부담스러워 할텐데, 화려하게 생긴 아가씨인가봐? 할아버지가 물었다. 수빈은 실실거리다가 그건 아니고 화려한 걸 좋아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보여준 14K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띄는 화이트 골드 드롭이어링을 골라 계산했다. 결제를 기다리는 동안 진열장을 구경 하는데 그 옆에 더 예쁜 것이 눈에 띄었다. 수빈은 이것 좀 보여 달라 부탁했다.


“그건 좀 더 비싼데. 18K야.”

“이걸로 할게요. 방금 건 취소해주세요.”

“허허, 여자친구가 정말 좋아하겄구만.”


금은방을 나온 수빈은 카드 영수증에 찍힌 61만원을 한참동안 들여다 보았다. 3박 126만원인 웨스틴 조선 호텔 객실 가격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저가 고심하고 쓰는 큰돈이 연준에게는 푼돈일 것 같아 겁이 났다. 연준이 좋은 사람임을 마음 깊이 알고 새겼음에도 두려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저가 물질적으로만 가난한 것이 아닌 정신적으로도 가난하다는 것을 이미 연준에게 들켜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보잘 것 없는 물건이어도 마음만은 값비싸다 연준에게 우기고 싶었으나 이미 마음조차 볼품없고 초라하여 몇 번이고 연준을 괴롭혔다. 이젠 사랑이라 변명하며 이기적으로 구는 것이 양심에 찔렸다. 저 같은 사람이 계속 연준을 사랑하면 연준만 힘들 것 같았다. 수빈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발레 연습실 한 귀퉁이에서 저를 노려보던 연준의 얼굴을 생각했다.

기상청은 이상기후를 발표했다. 고기압의 영향으로 여태껏 힘못쓰던 장마전선이 뒤늦게 올라와 반도 전역에 집중호우를 퍼부었다. 주말 끝나고도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서울로 올라온 연준이 수빈을 만나러 여대 앞에 온 날에도 비가 세차게 내렸다. 수빈은 우산을 각자 쓰려 했다. 연준은 우산을 같이 쓰자고 했다. 둘은 가까운 실내 포장마차에 들어가 어묵탕에 소주를 시켰다. 연준은 수빈의 바뀐 머리를 잘 어울린다 칭찬하며 수빈을 낯설어했다. 너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다. 수빈은 그런가요,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여행하는 동안 정신이 너무 없어서 아무것도 사오질 못했어. 미안해.”

“몸 건강히 잘 놀다 왔으면 됐죠. 괜찮아요.”


수빈은 연준에게 작은 쇼핑백을 건네 주었다. 


“이게 뭐야?”

“월급 들어 왔거든요. 형 생각나서 샀어요. 전부터 하나 해 주고 싶었거든요.”


쇼핑백을 받아든 연준은 의아한 얼굴로 작은 박스를 꺼내 열어 보았다.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우와, 하고 조심스럽게 귀걸이를 꺼내 들었다. 이거 정말 나 주는 거야? 연준은 재차 물었다. 수빈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연준은 어쩔 줄 몰라하더니 지금 당장 해보고 싶다며 저가 하고 왔던 피어싱을 거울도 보지 않고 전부 뺐다. 연준의 취향으로 요란했던 귀가 순식간에 발가벗겨지고 오롯이 수빈의 순정어린 취향만이 매달려 반짝반짝 빛났다. 연준은 너무 마음에 든다며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시했다. 수빈은 소주잔을 비우며 연준에 대해 멋대로 재단해오던 제 오만과 편견에 대해 생각했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천둥번개가 쳤다. 퇴근한 직장인들이 하나 둘 포장마차 안으로 모여들어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둘은 전처럼 학교얘기와 알바얘기를 주고 받았으나 이젠 그것이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둘은 더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 잔을 부딪치며 눈치 없는 사람을 서로 자처했다. 연준은 부재중전화에 대해 수빈이 묻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다. 수빈은 부재중전화에 대해 연준이 설명해 주길 바랐다. 소주병 갯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한참동안 말 없이 잔을 비우며 눈치게임을 하던 중 연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부산 갔을 동안 너는 뭐했어.”


소름 끼칠 정도로 상냥하게 쌓아올린 말투, 수빈은 귀를 의심했다. 순서가 잘못됐다. 수빈은 연준이 잘못 걸었다고 차라리 거짓으로라도 변명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연준은 설명 해 주기는 커녕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천진하게 물어왔다. 수빈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 마냥, 수빈이 이제서야 생각난 것 마냥, 연준은 무심한 태도로 수빈에게 넌지시 묻고 있었다. 모르는 척 던지는 질문에는 모르는 척 답해야 한다. 수빈은 연준이 말을 돌리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태껏 연준이 해왔던 행동은 몰라서 라는 이유로 용서가 되었다. 하지만 연준은 이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넘어 가려 하는 것이다. 거짓말 싫다더니 거짓말 하기 싫어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수빈은 그런 연준의 태도에 화가 나서 연준에게 모든 괴로운 진실을 솔직하게 떠넘기기로 했다. 


“이태원 갔어요.”

“이태원?”

“남자 만나고 놀았어요.”


연준은 말이 없었다. 수빈은 계속 말했다.


“오랜만에 갔거든요. 그래서 신나게 놀다 왔어요. 그동안 못 했던 거 실컷 다 하구.”

“뭘 하고 노는데.”

“질문이 좀 웃기다. 뭘 했을 거 같은데요. 나 어린 애 아닌데.”


수빈의 뉘앙스를 연준은 단번에 읽었다. 연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준은 잠시 말이 없더니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잔을 비웠다. 그래, 몸 건강하게 잘 놀다 왔으면 됐지. 연준이 웃지 않고 말했다. 수빈은 연준의 얼굴 표정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의 근원을 더듬다가 그것이 소극장 대기실에서 연준이 민성에게 지어 보였던 것임을 기억해냈다. 연준은 분명하게 화내고 있었다. 연준이 유진과 삼 일 내내 자고 놀았다는 사실에 수빈이 화냈던 것처럼 수빈이 삼 일 내내 다른 남자와 자고 놀았다는 사실에 연준은 화내고 있었다. 수빈은 그걸 눈치채고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란한 마음으로 잔을 비웠다. 뜨겁게 타들어가는 목으로 미련을 삼켰다. 수빈은 문득 저가 주말 내내 얼마나 공들여 감정을 정리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동시에 그간 연준이 남긴 여지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곱씹었다. 달랑거리는 화이트 골드 귀걸이에 의미부여를 해보다가도 그것을 사러갈 적 얼마나 쓸쓸했었는지를 회상했다. 이내 선물은 받아줘도 화는 못 받아주는 연준이 괘씸해 견딜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연준은 잔을 만지작 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언제부터 이랬냐.”

“뭐가요. 남자 좋아하는 거?”

“언제부터 알았어.”

“태어날 때 부터.”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데.”

“잘생긴 남자랑 키스해보면 알 수 있어요. 했을 때 기분 좋으면, 좋아하는 거예요.”


급발진 한 것을 핸들을 뽑아 들이 받기로 한다. 수빈은 부러 노골적으로 대답했다. 그간 연준이 제게 던져댔던 무수한 섹스어필을 떠올리며 연준과 키스하고 싶다는 뜻을 그 어느 때보다 적나라하게 내비쳤다. 잘생겨서 눈에 띄었다, 귀엽다, 목소리가 좋다, 옷핏이 좋아 연예인이 서 있는 줄 알았다, 팔뚝이 남자답고 굵어 섹시하다, 그 모든 말들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음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코 언저리를 보는가 싶더니 입술을 뚫어져라 보고 이내 다시 눈을 맞춰왔다. 수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맞바로 눈을 맞춰 연준의 시선을 붙잡았다. 머릿속으로는 연준의 옷을 벗겼다. 한참동안 시선이 오고 갔다. 입술을 달싹이던 연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돌연 낯가리며 수빈의 눈을 피했다. 수빈은 아랫배가 뻐근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당장이라도 연준을 제 마음대로 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둘은 포장마차에서 나왔다. 하수구로 흙탕물이 콸콸 쏟아지고 공기에서 비냄새가 진동했다. 연준이 계산하는 동안 수빈은 처마 밑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빠는데 뒤늦게 나온 연준이 너 우산 두고 갔다며 수빈에게 우산을 건네 주었다.


“담배 피워?”

“모르셨구나. 나 골초인데.”

“안 피울 거라며.”

“금연하기 힘들더라고요.”


연준은 수빈이 담배 피우는 내내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인상을 찌푸리지도 기침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수빈이 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 날 이후로 연준은 수빈을 만나러 매장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연락도 없었다. 문자도 카톡도 전화도 없었다. 수빈은 비가 많이 와서 찾아오기 힘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비만큼 대기 좋은 핑계도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종종 연준의 화내던 얼굴을 떠올렸다. 포장마차에서 연준이 보인 모든 행동과 태도를 곱씹으며 연준이 화내던 이유에 대해 고민하던 수빈은 연준이 부산에 내려가 제 생각을 너무나도 많이하다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저도 모르는 새에 제 짝사랑이 끝나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그것도 모르고 포장마차에서 연준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수빈은 연준이 어떤 마음으로 서울에 돌아와 포장마차에서 저와 술을 마셨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마음을 헤아려 보다가 핸드폰에서 연준의 번호를 지웠다. 연준의 인생에 그만 끼어들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연준이 앞으로도 너무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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