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맑았다. 로한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흰 턱시도가 맵시있게 로한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침부터 부산을 떠는 죠스케 탓에 일찍부터 준비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울 속의 자신이 타인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찮겠지.

괜찮겠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로한, 준비 다 했어요?"

언제 들어왔는지 죠스케가 뒤에서 톡톡 등을 쳤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

로한은 대답 대신 제 손의 반지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딱 제 손가락에 맞는 반지였다. 언제부터 이 반지를 끼고 있었지. 죠스케가 손을 겹쳐잡고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는 탓에 그런 생각은 곧 녹아 없어졌다.

"로한.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요. 저 말고 다른 생각은 나중에 했으면 좋겠슴다."

로한은 몸을 돌려 죠스케를 바라봤다. 새카만 턱시도부터 잘 다듬은 머리, 가슴엔 부토니에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 잡을 곳이 없다. 안그래도 잘생긴 얼굴을 완전 광내놨군. 속으로 생각하며 로한이 짧게 웃었다.

"빨리도 준비했군."

"다들 기다리고 있다구요. 늦는 건 로한임다."

부드러운 웃음, 죠스케의 팔이 로한을 감싸 안았다. 다정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맘같아선 이대로 안고 있고 싶지만, 중요한 날이니까요. 로한."

키시베 저택의 앞마당은 오랜만에 북적였다. 이른 봄이었지만 포근한 햇살이 사람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렇다곤 해도 열 몇 명 정도 되는 가부키쵸 주민이 대부분이었지만. 예전, 로한의 축하연에 모인 그 얼굴들 그대로였다. 다들 저마다 격식을 차려 입은 탓에 마당은 연회장처럼 보였다.

"로한 선생님!"

계단을 내려서자 코이치가 소리쳤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코이치는 곁에 유카코가 다정히 팔짱을 끼고 있단 것만 빼면 축하연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로한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저, 예식도 안하신다고 하긴 하셨지만... 그래도 꽃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덧붙이며 코이치가 수줍게 내민 흰 안개꽃 다발을 로한은 받아들었다. 향이 강하지 않아 고마웠다. 

토니오가 축하의 뜻으로 먼저 나서 제 솜씨를 선보이고 싶다고 말한 덕에, 음식은 다 맛있었다. 죠스케는 로한 옆에 붙어 앉아 하나하나 다정히 로한을 챙겼다. 당연하다는 듯 로한의 입에 전복 버터 구이를 잘라 넣어주는 죠스케의 표정은 그야말로 행복함 그 자체였기에 보는 사람들까지 미소를 머금게 했다. 

"로한, 맛있어요?"

"로한?"

"입에 뭐 넣은 채로 대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앗, 그랬죠... 그치만 로한 요새 오랜만에 잘 먹는 것 같아서..아앗, 꼬집지 마십셔. 기뻐서 말임다."

아하하, 죠스케의 볼을 잡고 있는 로한을 만류하듯 코이치가 말을 이었다. 

"로한 선생님, 몸이 계속 안 좋으셔요? 걱정되네요."

"이상하게 요새 뭘 먹기만 해도 속이 좋지 않아."

 안그래도 마른 몸이 더 핼쓱해진 건 죠스케의 말에 의하면 악몽 때문이었다. 키라 요시카게의 악몽. 손이 달아나는 악몽. 로한을 보던 죠스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내렸다. 

"로한이 병원은 더 이상 싫다고 해서 말임다."

로한은 가만히 죠스케와 코이치, 드문드문 오쿠야스며 유카코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의 화제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로한은 잡아낼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먼 곳에서 귀에 익은 클래식이 들려왔다. 

오, 반지 멋지잖아요, 로한 선생님. 

오쿠야스가 호들갑을 떨었다. 죠스케가 로한의 손을 겹쳐잡았다. 발끝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이 점점 무거워졌다. 마치 반지나 죠스케의 손이 쇳덩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점점 무거워져서 손가락을 잘라낼 것만 같다. 귓가에 이명이 울렸다. 소름끼치는 손이 로한의 팔목을 타고 올랐다. 히가시카타 죠스케가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묶여 있지 않은데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얼굴 없는 히가시카타 죠스케가 로한의 손에 자리잡은 반지를 어루만졌다. 로한. 

황급히 죠스케를 밀치고, 로한은 반지를 잡고 당겼다. 빠지지 않는다. 입 안이 바짝 타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당장. 당장. 죠스케가 다시 일어서기 전에. 죠스케가 다시 반지를 끼우기 전에. 

왜?

잘 아는 목소리가 반문했다. 눈앞에서 비틀거리던 죠스케는 이미 키시베 로한 자신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비틀린 미소. 너무나 잘 아는 자신의 얼굴, 자신의 목소리. 눈 앞의 로한이 말을 이었다.

"왜 그래?"

반지는 단단히 자리 잡은 채 빠지지 않았다. 손가락과 반지 사이를 파내듯이 득득 긁어내던 로한이 멍한 눈으로 눈 앞의 로한을 올려다 봤다. 왜 그러냐고? 왜... 로한의 손가락이 멈췄다.

"......"

"히가시카타 죠스케를 사랑하잖아?"

손이 얼굴로 뻗어왔다. 부드럽게 턱선을 쓸어내리는 손이 선명히 느껴졌다.

"히가시카타 죠스케를 사랑하지?"

그럼.. 로한.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요. 눈 앞의 죠스케가 빙긋이 웃었다.

로한은 눈을 깜박였다. 어느 새 선율이 그쳐 있었다. 죠스케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여러 얼굴들과 함께 자신을 내려다봤다. 로한, 괜찮아요? 로한 선생님? 자신을 일으키는 죠스케 덕에 로한은 멍한 머리로 코이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어요. 말이 없으시다가 쓰러져서..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물 갖다 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로한이 멍하니 손을 내려다봤다. 반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 맞아요. 반지를 자꾸 빼시려 하시길래... 조금은 의아한 눈빛으로 코이치가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가 볼게요..죠스케군, 다음에 봐."

죠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힐 때까지 로한은 멍하니 생각을 잡으려 애를 썼다.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다. 생각이 손 사이로 빠져나갔다. 죠스케가 로한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로한, 괜찮아요? 갑자기 쓰러질 줄이야...

로한이 시선을 떨궜다. 로한의 시선이 빈 손가락 위에서 머물렀다. 내려다보던 죠스케가 기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반지를 꺼냈다. 

"아까 쓰러질 때 손가락에서 빠졌슴다. 로한, 정말 너무 말라가는 거 아니에요? 조금 더 조였어요. "

로한은 죠스케가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모습을 바라봤다. 반지가 손가락을 미끄러져 다시 약지에 자리잡았다. 

"이제 안 빠질검다. 안심이죠?"

로한이 희미하게 미소짓고는 팔을 뻗어 죠스케를 끌어안았다. 

"왜요, 추워요?"

어리광 섞인 몸짓에 죠스케가 미소지으며 로한을 마주 안았다. 이상하게, 계속 추워. 로한의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죠스케가 로한을 토닥였다. 이제 괜찮아요. 제가 있잖슴까. 죠스케의 말이 꿈결처럼 멀게 들려왔다.

응, 죠스케. 로한이 눈을 깜박였다. 죠스케가 입을 맞췄다. 걱정할 것 없어요.

"이제 영원히 함께임다. 사랑하는 로한." 

서걱거림, 헐떡임, 찰강이는 사슬 소리. 자신의 손을 아주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죠스케가 말했다. 

키시베 로한은 악몽을 꾼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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