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Fly me to the Moon




Medic Travel Log 08

#8_운수좋은날






 

공항으로 가는 내내 그가 내 핸드폰을 힐끔 쳐다봤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한 듯 항공사 어플에 들어가는 나를 보며 고개를 빼꼼 내민다.

 

“궁금해요?”

“네.”

“근데 왜 안 물어봐요?”

“기대하는 기분이 좋아서요.”

 

기대하는구나. 라일리는 이제 나와의 여행을 기대한다. 책임감이 생겼다. 만족시켜주고 싶었고 행복하게 하고 싶다. 우습게도 나와 라일리가 만난 지는 고작 5일째다.

샌드위치를 두 개 먹고 내 것도 한쪽 뺏어 먹은 그가 배를 통통 두드렸다. 볼록 나온 배를 쿡 찔렀다. 살집 하나 없는데 배만 톡 튀어나온 게 귀엽다.

 

“돼지.”

 

뭐든 잘 먹고 열심히 먹는 라일리가 귀여워 놀리고 싶었다. 내게 찔린 배를 움켜쥐곤 나를 쏘아본다.

 

“돼지 아니거든요? 몇 파운드세요?”

“난 다 근육이에요. 어제 못 봤어요?”

“….”

“봤죠?”

“…네.”

 

그가 짧게 대답하곤 고개를 휙 돌렸다. 또 머릿속에서 무슨 장면을 그리는 건지 귀와 목이 붉어졌다. 나도 그와의 스킨십을 상상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지금도. 그래도 표정 관리는 꽤 하는 편인데 그는 너무 무방비하다.

 

“라일리.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알아요?”

“시간이요?”

“아침이에요. 아침부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빨개요?”

“….”

“머릿속에 하는 생각은 저녁에 해요. 아, 생각 말고 실제로.”

 

그의 어깨를 당겨 손을 얹고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수줍은 척은 다 하면서 이럴 때 가만히 있는 거 보면 진짜 발칙하다. 시선을 내려 그를 바라보니 딴청을 피운다. 오늘 밤도 허락을 구한 것 같아 벌써 아래가 저릿하다.

라일리가 화장실에 간 사이 발권을 마쳤다. Riley Jimin Park. 아직도 적응 안 되는 풀네임이 적힌 티켓이었다. 지민이라고 부를까. 가족들도 그렇게는 잘 안 부른다니 내가 유일한 게 아닐까. 아마 나는 라일리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남고 싶나 보다.

 

“제 티켓은요?”

“내가 갖고 있을게요. 13번 게이트로 가면 돼요.”

 

게이트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선택한 여행지를. 어제 새벽 내내 고민했다. 화려한 게 좋다며 어디서든 돋보이는 내 삶을 동경하는 그가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뉴올리언즈?”

 

공항의 탑승 전광판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가 혼잣말하듯 내게 묻는다.

 

“네.”

“우와, 진짜 의외예요.”

“왜요?”

“다른 관광도시도 많은데 왜 이곳이에요?”

“그냥요. 그냥. 재즈 좋아해요?”

 

뉴올리언즈, 재즈의 도시였다. 빈부격차가 심한 곳이기도 했고 어느 곳은 완전히 미국 같기도, 또 어떤 곳은 쿠바의 거리를 연상시키기도 했으며 거리엔 늘 노래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그 도시에서 사람들이 라일리만 쳐다보게 할 자신이 있었다.

 

“너무 기대돼요! 어디 아프신 데 없죠? 조금이라도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본인이 여기 온 이유를 잊지 않으려는 듯 중간중간 내 안부를 챙긴다. 이제 굳이 그와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라일리.”

“네?”

“업무 내용을 좀 바꾸죠.”

“무슨…?”

 

게이트 숫자의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퍼스트 클래스라는 글자가 반짝였다. 그의 팔을 잡아끄니 아직도 퍼스트 클래스가 익숙하지 않은 듯 머뭇거리며 따라왔다.

좌석이 나란히 붙어있어 그를 창가 쪽에 앉혔다. 앉자마자 라일리가 내 팔을 톡톡 두드렸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업무 내용을 바꾼다니요?”

“내가 생각보다 아플 일이 없을 거 같아서요. 봤죠? 나 건강한 거.”

 

첫날 배탈을 빼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도 컨디션이 괜찮았다.

 

“…네.”

 

어라, 건강하다는 말의 의미는 말 그대로 몸이 건강하다는 거였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건강하시더라구요….’하며 말꼬리를 흐리고 부끄러운 듯 웃으며 볼을 긁적인다. 미치겠다. 오늘 계획 다 미루고 호텔에만 있고 싶은 심정이다.

라일리의 볼을 꼬집었다. 찹쌀떡같이 말랑한 볼이 손가락에 잡혔다. 갑작스레 꼬집힘을 당한 그가 나를 쳐다본다.

 

“아주 야한 생각만 가득해선.”

“아, 아, 아니에요. 저 그런 생각 안 했어요.”

 

그가 나보다 두 살 형이라는 걸 자꾸 잊는다. 얼굴도 목소리도 어려서 그렇다. 행동도, 물론 행동은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자기보다 어린 걸 알면 그의 태도는 어떨지. 원래도 다정한 사람 같아서 챙김 받고 싶기도 하고.

 

“볼, 놔주세요.”

 

계속 볼을 잡고 있었다. 그의 볼에 빨갛게 손자국이 났다. 마침 승무원이 웰컴 드링크를 가져왔다. 그에게 건네니 꼴딱꼴딱 잘도 마신다. ‘크으-’소리를 내곤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다. 연애하는 기분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서 저는 이제 무슨 일을 하면 돼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돈을 받으니 그에게 일감을 주긴 해야 한다. 그냥 데이트나 하라고 하기엔 라일리의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른다. 내게 받는 돈이 화대가 아니라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야 하는 데 솔직히 모르겠다. 뭘 시키지?

 

“동행하는 게 업무라고 치죠.”

“동행이요?”

“네, 여행 친구라고 하면 되려나.”

“…전 엄청 많은 돈을 받고 일하는 건데.”

“그러니까요, 제 동행이 쉬운 줄 알아요?”

 

라일리의 표정이 혼란스럽다는 듯 변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라곤 알 턱이 있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나도 몰라요.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직장 상사 대하듯 하지 마요.”

 

내 말에 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부담스러울 만도 했다. 이천만 원이 넘는 돈이었고, 내가 싸울 때 말실수도 제대로 했으니 그게 마음에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대하는 게 좋으세요?”

“음.”

“….”

“어젯밤에 했던 거.”

“….”

“그런 거 하는 사이인 것처럼 대해줘요.”

“…여, 열심히 해 볼게요.”

 

그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하곤 손부채질을 해댄다.

 

“친근하게 대해달라는 말이에요. 또 야한 생각하지 말고. 변태.”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슬쩍 쏘아보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비행 내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비행기가 기분 좋게 상공을 가로질렀다. 그와의 새로운 페이지를 만들 뉴올리언즈로 간다.


*


“We upgraded you to a suite room. (스위트 룸으로 업그레이드 해드렸어요.)”

 

제기랄. 이번엔 기필코 라일리와 한 침대에서 자고자 일부러 저렴한 객실을 예약했다. 침대 하나짜리 방으로. 하지만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체크인하려고 하니 갑자기 방을 업그레이드해 준단다. 표정 관리가 안 된다.

 

“Really? Thank you!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는 탐탁지 않은데 내 속을 알 리 없는 라일리는 달랐다. 신나선 입이 귀에 걸렸다. 직원의 설명을 들은 그가 내 팔을 잡고 흔든다.

 

“정국 씨, 여기 호텔 브랜드 다이아 회원이신가 봐요! 그래서 무료 업그레이드래요! 미니바 음식도 다 무료로 먹으래요!”

 

“좋아요?”

“그럼요!”

 

가장 좋은 객실을 예약하는 거야 습관처럼 되어버린 일이지만 다음엔 라일리에게 조금 미안하게 됐다. 더 이상의 스위트룸은 없다. 다음부턴 철저히 원베드룸으로 예약해야지. 이왕이면 싱글베드로.

객실 키를 받아든 그가 나를 앞장서 쫄래쫄래 걸어갔다. 내가 잘 오는지 확인하려는 듯 뒤를 돌아 나를 보곤 얼른 오라며 손짓한다. 표정이 한껏 들떴다. 드르륵거리는 낡은 캐리어를 끌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를 기다렸다.

방은 아쉽게 됐으나 밤의 일은 밤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오늘의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뉴올리언즈에서 라일리만 보이게. 그가 동경한다는 삶을 선물해 줄 하루다.


*


재즈에 도시답게 거리에 음악이 끊이질 않는다. 거의 한 블록 간격으로 버스킹이 한창이었다. 색소폰을 부는 할아버지, 피아노를 치는 청년 등 저마다 제 구역을 차지했다. 도통 라일리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른다. 연주가 끝나면 제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팁을 준다.

버스킹도 좋지만 내겐 갈 곳이 있었다. 그의 팔을 잡아 끄니 못내 아쉬운 듯 발걸음이 무겁다.

 

“정국 씨는 음악 싫어하세요?”

“좋아해요.”

 

내 대답에 그가 입을 합 다물었다. 이젠 ‘좋아한다.’라는 말만 나오면 제게 내가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는 라일리였다.

 

“음악 좋아한다고요. 또 무슨 생각 했어요?”

“안 했거든요?”

“라일리, 변태.”

“아니거든요! 저 배고파요.”

“돼지.”

 

변태도 돼지도 되기 싫은 라일리가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서곤 나를 노려본다. 콧김을 내뿜는 것처럼 시익시익 숨을 쉬기에 그에게 다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가자, 꿀꿀이.”

 

객관적으로 봐도 마른 몸이었다. 그런 그에게 꿀꿀이라는 별명을 만들었다. 라일리도 ‘꿀꿀이’라는 애칭이 황당한 듯 픽 웃었다. 팔을 당겨 그를 이끄니 내 옆에서 속도를 맞춰 걷는다. 한 줌에 잡히는 손목을 타고 내려와 자연스레 손을 잡았다. 잡힌 손이 어색한지 라일리가 손을 꼼지락거린다.

 

“씁.”

 

어린아이 혼내듯 구니 그가 배시시 웃는다. 형한테 자꾸 내가 형인척해서 양심에 찔리지만, 그가 내 나이를 알 길은 없으니. 그래, 이런 게 내가 라일리에게 말한 ‘어젯밤에 했던 걸 하는 사이’ 같아 보이는 거다.

자연스레 깍지를 꼈다. 그도 손가락을 굽혀 손을 맞잡았다. 경쾌한 재즈 음악이 맞잡은 손안에서 연주되는 것 같았다. 잡은 손이 쿵, 쿵, 쿵, 울렸다. 그도 나와 비슷한 듯 붉어진 귀를 감추지 못했다.


*


그의 손을 잡고 들어선 곳은 명품 브랜드가 모여있는 쇼핑몰이었다. 면티에 반바지를 입은 라일리나, 캐주얼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줄이 해진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가 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가 이곳엔 왜 왔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잡은 손에 꽉 힘을 주면서.

어색한지 걸음이 조금 느려진 그를 잡아끌며 라일리와 잘 어울릴 것 같은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 뭘 입히면 좋을지 미리 생각해 뒀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고 옷을 골랐다. 라일리에게 선택권을 줘봤자 싫다고 할 게 뻔했다. 윤기 나는 실크 재질의 셔츠와 딱 맞는 검은 슬랙스를 고르고 직원에게 사이즈를 요청했다. 화려한 매장에 눈이 휘둥그레진 라일리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기에 모자를 씌우고 선글라스를 대보며 장난쳤다.

 

“여긴 왜… 어디 가시게요…?”

“네. 오늘은 좀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아.”

 

직원이 라일리 사이즈에 맞는 옷을 가져와 건넸다.

 

“저? 저 입어요?”

“네. 입고 나와요.”

“저요?”

“왜요, 입혀줘요?”

그의 어깨를 감싸고 피팅룸으로 걸어가니 품에서 쏙 빠져나간 그가 빠르게 사라졌다. 라일리가 옷을 입는 사이 나도 내가 입을 의상을 골랐다. 검은 셔츠에 검은 슬랙스. 밝은 실크 셔츠를 입은 라일리에 비하면 아주 무난한 의상이었다. 내가 아닌 사람들이 라일리만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소파에 앉아 웨딩드레스입은 신부를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이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평소와는 아예 다를 라일리의 모습이 궁금했다. 당연히 기대도 했다. 첫날 입었던 세미 정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옷이었다.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실크 셔츠와 바지. 내가 봤던 라일리의 몸 선을 천 너머로 가늠하는 게 섹시할 거 같다.

 

“저….”

 

조금 숙인 시야에 라일리의 운동화가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일리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 채우지 않은 단추 덕분에 빗장뼈부터 하얀 가슴팍이 보이는 상체 아래로 탄력있게 올라온 엉덩이와 마르지 않은 허벅지에 원단이 보기 좋게 달라붙었다.

그가 조금 어색하고 불편한 듯 옷을 매만진다. 이런 장면에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반했다는 표정이 나오던데 지금 딱 내 표정이 그럴 것 같았다.

 

“신발 고를까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멋지다고, 예쁘다고 말하고 싶은데 왜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난 부끄러운가 보다.

 

옷과 벨트, 시계와 액세서리 그리고 구두까지 그야말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메이크 오버를 끝낸 라일리였다. 어색한지 손목에 채워진 시계와 구두코를 쳐다본다. 그의 옆에 선 나도 누가 봐도 여행자일 것 같은 옷은 벗어 던지고 명품으로 몸을 감쌌다. 물론 라일리에 비해서는 아주 평범한 수준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그가 전신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다. 피팅을 도와준 직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귀여웠던 라일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다고 사업가나 재벌 같이 보인다기보단… 연예인 같았다.

 

“어색해요….”

 

그가 거울을 보다 한참 뒤에야 내 모습을 훑었다. 그리곤 ‘우와.’ 하고 탄성을 내뱉는다.

 

“정국 씨, 다른 사람 같아요.”

 

그가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나를 샅샅이 뜯어본다. 그 모습에 직원이 귀엽다는 듯 라일리와 나를 보고 웃었다. 자기가 입은 옷과 내가 입은 옷을 번갈아 보며 비교하던 그가 내 앞에 우뚝 선다. 눈을 세 번 깜빡인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말은 않고 가만히 쳐다만 본다.

멋있고 예쁜 그였다. 조금 더 화려하게 보였으면 좋겠는데. 이마를 가지런히 덮은 앞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가 발을 주춤 무른다.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살살 가르고 이마를 보였다.

 

“머리하러 가요.”

“네? 아, 네.”

 

뭐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따라나섰다. 갈 길이 바쁘니 그 말은 밤에 듣기로 하고 라일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게 뻗은 팔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그가 손을 잡았다. 아까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그리곤 스스로 깍지도 찾아 낀다. 심장이 간지럽다. 라일리와 하는 건 여행이 아닌 연애였다.

 

*

 

백화점에서 걸어 나오는 내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맞춰 걷는 듯 라일리와 내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일정하게 들렸다. 밝은색의 실크 셔츠를 입은 그보다 살짝 느리게 걸었다. 카메라도 들고 그의 뒤에서 검은 옷을 입고 걸으니 내가 라일리를 보좌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라던 바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나보다 라일리에게 향했다. 어딘가 모르게 우쭐해 보이는 그가 귀여워서 몰래 뒷모습을 찍었다. 살롱에 들러 머리 세팅까지 마쳤다. 늘 앞머리를 반쯤 까고 다니던 나는 이마를 덮었고 가지런히 이마를 덮고 있던 라일리의 앞머리는 걷혔다. 얼굴을 드러내니 그가 이제야 이십 대로 보인다.

예상처럼 화려한 게 꽤 잘 어울렸다. 어느 행사의 애프터파티에 가도 주인공이 될 상이었다. 귀엽고 앳된 얼굴은 사라지고 화려하고 도시적인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섹시하다. 풀린 눈이나 묘한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도, 그냥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도 섹시했다.

 

“정국 씨 머리 내리니까… 완전 아이돌이에요.”

“머리 안 내렸을 땐요?”

“그땐 배우요.”

“배우가 좋아요, 아이돌이 좋아요?”

“둘 다요!”

 

당연하다는 듯 말한 그가 아차 싶은지 웃는다. 그리곤 또 백화점에서처럼 눈을 느리게 세 번 깜빡이며 나를 쳐다본다. 할 말이 있나? 눈치 없는 사람은 되기 싫어 그의 표정을 읽었다. 아, 아? 아!

 

“라일리.”

“네…!”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본다. 귀여워 죽겠다. 진짜 이 사람을 어떡하지.

 

“배고프죠?”

“…에?”

“맛있는 거 먹어요.”

“아, 네.”

“가요. 꿀꿀이.”

 

잘 먹는 그가 충분히 배고플 시간이었다. 이 도시에 도착해서 먹은 게 아직 없었다. 이미 레스토랑도 예약했다.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비싸기로 유명하다는 곳이었다. 꼭 잡은 그의 손을 슥슥 문지르고 꼬집으며 장난쳤다. 웃을 줄 알았는데 반응이 없다.

 

“배 많이 고파요?”

“제가 무슨 돼지인 줄 아세요?”

“네.”

 

푸하하, 혼자 대답하고 웃었다. 그도 따라 웃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무반응이다. 나 뭐 실수했나? 이렇게 멋지게 만들었는데.

택시를 타서도 내려서도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다. 진짜 삐졌나? 옷이 별론가? 머리가? 아닌데, 완벽한데. 취향이 아니었나? 꼭두각시처럼 느껴졌나? 아닌데. 나한테도 멋지다고 했는데.

레스토랑 앞에 섰다.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영문을 모르는 나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그. 이런 이상한 분위기로 식사하긴 싫었다. 문 앞에 멈춰서서 그와 마주 섰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가 갑자기 멈춘 걸음에 발을 헛디뎠다. 허리를 감싸 그를 붙잡았다. 내 어깨를 잡고 선 그가 헛기침하며 내게서 떨어진다.

 

“라일리.”

“네.”

“삐진 이유 말해요.”

“…안 삐졌어요.”

 

온 얼굴 근육이 삐졌다고 말하는 중이다. 입술이 저 멀리 마중 나왔다. 부리 같은 입술을 확 꼬집고 싶지만 그랬다간 라일리가 뉴욕으로 돌아간다고 할까 봐 꾹 참았다. 원래 같았으면 마냥 귀여웠을 텐데 오늘은 이렇게 꾸며놔서 그런지 냉소적으로 보였다. 차분하게 내리깐 눈에 속눈썹이 곧게 뻗었다. 콧대는 유려하지 않지만 고운 선을 그리며 뻗었고 입술은 붉었다.

 

“돼지라고 놀려서 그래요? 꿀꿀이라고 해서?”

“아니거든요. 저 돼지 아니라서 그건 괜찮거든요.”

“그건 괜찮으면 다른 게 안 괜찮다는 거잖아.”

“….”

“뭔데. 말 해줘요.”

 

한 커플이 우리를 지나쳐 들어갔다. 그의 손을 잡고 조금 한적한 길가로 나왔다. 정말이지 오늘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말해요.”

“진짜 아니에요.”

“라일리.”

 

단호하게 그를 부르자 ‘후우.’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다. 말없이 그가 말하길 기다렸다. 쭈뼛거리던 그가 제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다. 그리곤 구두를, 바지를, 셔츠까지 고개를 천천히 들며 걸친 옷가지를 확인한다. 역시, 옷이 문제였다.

 

“알았다.”

“뭘요.”

“옷이 라일리 스타일이 아니에요? 불편해요?”

“….”

 

틀려나 보다. 닥치고 있을걸. 에휴. 이번엔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결심한 듯 제 허리에 손을 척 짚었다.

 

“정국 씨.”

“네.”

“공부 못했죠.”

“네?”

“아님 눈치가 없으신 건가.”

 

그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의대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한국에서 상위권 대학의 경제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눈치가 없으면 할배 손아귀에서 살아남지도 못할 인생이었다. 한참 잘못 짚은 라일리에게 대꾸하려는데 그가 제 자리에서 빙그르르 돈다.

 

“저 봐요.”

“봤어요.”

 

그가 내게서 한 발 멀어지곤 다시 빙그르르 돌았다. 조금 멀리서 본 그의 전신이 시야에 잡혔다. 이 와중에, 티격태격 다투는 와중에도 예쁘면 어떡하지. 혹시나 본심 섞인 웃음이 나올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저 봐요.”

“보고 있어요.”

“할 말 없어요?”

 

아, 어렵다. 어디서 본 거 같다. 연인이 싸웠을 때 가장 무서운 말. 할 말 없냐는. 그의 옷을 다시 살폈다. 뭐지, 뭐가 문제지. 존나 예쁘다니까, 대체 뭐가….

 

“아, 허리가 너무 조여서 불편해요? 내가 사이즈를 잘못 골랐나.”

“….”

“아니에요? 어, 그럼 실크가 너무 덥나? 지금 날씨엔 좀…. 아, 아닌가.”

“….”

“시계가 좀 무겁나? 팔찌라도 뺄래요?”

“….”

 

나도 한계다. 말을 해야 알지. 저렇게 입 꾹 다물면 어쩌라고. 술 취해서 싸울 땐 잘만 말하더니.

 

“아니, 말을 해야 알죠.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내 눈엔 존나 예쁘구만….”

 

아차 했지만 이미 욕과 함께 예쁘다고 내뱉은 뒤였다. 그래 뭐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

“그렇잖아요. 내 눈에는 지금 라일리가 존나 예쁘고, 섹시하고 존나 멋있고…. 여기서, 이 도시에서 라일리밖에 안 보이거든요? 사람들도 다 라일리만 쳐다보잖아요. 짜증 날 정도로.”

 

마음에 있는 말을 와다다다 내뱉고 이건 좀 아닌가 싶어 슬쩍 그의 눈치를 봤다. 더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으려나 걱정이….

 

“배고파요.”

 

내게 바짝 다가온 그가 샐쭉하게 웃는다. 와, 씨. 뭐 이런….

 

“배고파. 배고파요.”

 

어느 포인트지. 나와는 사고하는 회로 하나가 다른 게 분명했다. 내가 화를 내더니 갑자기 배고프다며 얼굴을 가까이 붙여 실실 웃는다.

얼결에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역시나 들어오자마자 우리에게 시선이 쏠렸다. 라일리는 은근히 사람들의 이목을 즐겼다. 고개를 조금 들고 도도하게 걷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 뒤에서 최대한 없는 듯 굴었다. 차 비서가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결국 그가 왜 풀렸는지는 영문도 모르고 식사를 마쳤다. 밥 먹는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는 라일리는 코스 요리가 나오는 족족 맛있게도 먹었다.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에게 화났던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 배불러.”

 

라일리가 배를 통통 두드렸다. 이 또한 습관인가보다. 식사를 마치면 부른 배를 귀엽게 두드리는 걸 몇 번 봤다. 레스토랑을 나와 재즈 음악이 퍼지는 뉴올리언즈의 거리를 걸었다. 우리가 갈 곳은 핫하다는 바가 많이 있는 매거진 스트릿이었다.

 

“이제 말해요.”

“뭘요?”

“아까 삐진 이유.”

 

그의 기분이 좋아 보여 물었다. 나 왜, 이 사람 눈치를 보게 됐지. 옷 때문에 그런가. 라일리를 대하기가 어렵다. 왜? 내가 의뢰인인데, 대체 왜? 옷 때문에? 아니면 좋아해서? 그는 당당하고 내가 전전긍긍한 상황이 웃겼다. 그래도 지금은 이 상황이 좋다.

 

“정국 씨.”

“왜요.”

“사람은, 특히 저 같은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당연한 말이다.

 

“라일리,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왜 삐졌는지 말하지 않은 건 라일리예요.”

“그건…. 좀 창피해서 그랬어요. 삐진 거 맞는데, 이유가 좀 제가 생각해도 유치하고 민망해서.”

“이유가 뭔데.”

 

곳곳에 음악이 퍼지는 거리였다. 스트릿 중심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라일리가 내 손을 먼저 잡았다. 깍지를 끼곤 손을 높이 흔든다. 잘 차려입은 남자 둘이 손을 붙잡고 신나게 흔들며 걸으니 사람들의 우리를 힐끗 쳐다봤다. 혹시 이런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하면 어쩌나 쳐다보니 웬걸, 나보다 신나 보이는 그였다. 괘씸하네. 혼자 삐지고 혼자 풀고.

 

“이유가 뭐냐니까.”

 

툭 반말을 던졌다. 나를 쳐다본 그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찬…줘…서요.”

“뭐요?”

“…찬…안…줘서…요.”

“뭘 안 줘요.”

“아니, 칭찬 안 해줘서요!”

 

크게 소리친 그가 민망한지 손을 놓고 나를 앞질러 간다. 칭찬 안 해 줘서? 무슨 칭찬. 무슨 칭….

 

‘정국 씨, 다른 사람 같아요.’

‘정국 씨 머리 내리니까… 완전 아이돌이에요.’

 

내게 멋지다는 말을 돌려 하곤 한껏 기대에 부푼 눈을 한 그였다. 난 분명히 예쁘다고 생각했다. 내 표정도 넋이 나가 있었고, 얼굴도 붉어졌을 텐데. 눈으로, 표정으로 존나 예쁘다고 당신에게 골백번은 더 반했다고 말했는데. 왜 모르지.

남들이 보면 우리가 하는 건 존나 유치하고 닭살 돋는 연애질이다. 나도 안다. 근데 이 닭살 돋고 소름 끼치는 연애가 이렇게 재밌는 건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앞질러 걷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돌려세웠다. 괜히 나를 쏘아본 그가 피식 웃었다. 자기도 어지간히 민망한 모양이다.

 

“라일리, 존나 멋지고, 존나 예쁘다.”

“….”

“와, 어떻게 이렇게 잘 어울리지.”

“….”

“연예인 같다.”

“….”

“왜 이렇게 섹시하지. 당장 호텔로 데려가…윽.”

 

그가 아프지 않게 내 명치를 때렸다. 둘 다 웃음이 터졌다.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는데 분위기에 취했나 보다. 둘 다 미친 사람들처럼 깔깔 웃으며 거리를 걸었다.

그와 신나게 웃으며 들어간 곳은 가장 사람이 많은 재즈바였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용케 테이블을 잡았다. 라일리가 웃으며 ‘Excuse me’하고 말하면 너나 할 것 없이 홀린 듯 길을 터준 덕이었다.

칵테일 두 잔을 시키고 공연을 관람했다. 나란히 붙어 앉아 어깨를 들썩일 땐 몸이 자연스레 붙었다. 완벽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와 정식으로 사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라일리의 표정이 행복했다. 남이 웃는 것에 내가 만족을 느낄 수도 있구나.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또 경험했다.

 

“Anyone want to sing? (노래 부르실 분?)”

 

막 공연을 마친 흑인 가수가 객석을 둘러보며 물었다. 노래엔 영 자신이 없는 나였다. 혹시 막무가내로 시키진 않겠지.

 

“Let’ see…. (어디보자….)”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우리 테이블이었다. 나와 라일리를 보며 그녀가 손가락으로 우릴 가리켰다.

 

“What a perfect couple! (완벽한 커플이 있네요?)”

 

그녀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래, 라일리를 집중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 맞다. 혹시나 내게 노래를 시킬까 봐 당황한 나와 달리 라일리는 한껏 들떠 보였다. 이제보니 관종이었다, 저 꿀꿀이는.

 

“You look so gay. I mean perfect gay. (너희 환상의 게이 커플 같아.)”

 

그녀가 수위 높은 농담을 던졌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라일리도 눈을 접으며 하하 웃었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당황스러운데 이럴 때 보면 라일리는 영락없는 미국인이다.

 

“So, Who want to sing? (그래서 너희 중에 노래는 누가 할래?)”

“Of course me! (당연히 나지!)”

 

용기 있는 라일리가 손을 번쩍 들며 일어났다. 취했나? 그의 술잔을 확인했다. 높지 않은 도수의 칵테일이 반도 넘게 남아있었다.

그가 분위기를 즐기는 게 보였다. 성큼성큼 무대로 나가 그녀 옆에 섰다. 라일리보다 몸집이 훨씬 큰 그녀 옆에 선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웃었다.

 

“Oh my little kitty. (아이고, 내 고양이새끼)”

 

그녀가 익살스럽게 라일리를 놀렸다. 신나 보이는 그가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손을 흔드니 그도 내게 작게 손 인사한다.

 

“Okay. So, a song with your huge heart! (네 마음이 가득 담긴 노래를 불러줘.)”

“Sure! (물론이지.)”

“For him? (저 남자를 위해 부르는 거지?)”

 

그녀가 손이 나를 가리켰다. 라일리가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에게 귓속말을 전한다.

 

“Wow, is that really what you want to say? (와, 그 노래가 정말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과장하며 말한 그녀가 밴드 세션에게 무어라 전하자 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리 앞에 스텐딩 마이크가 놓였다. 라일리의 노래라. 상상해 본 적 없다. 목소리가 고우니 음색도 고울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담긴 노래라니. 그의 마음이 궁금하다.

 

“I really want him to know how I feel. It's a song for you. (부디 제 마음을 알아주세요. 당신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나를 향해 선 라일리가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와 함께 밴드의 반주가 시작됐다. 익숙한 노래였다. 가사도, 멜로디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모든 조명이 꺼지고 무대 위 라일리만 비췄다. 그가 쑥스러운 듯 웃곤 나를 쳐다본다.

 

Fly me to the moon

저를 달에 데려다 주세요.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그리고 별들과 놀게 해 주세요.

Let me see what spring is like on Jupiter and Mars

목성과 화성 사이에서 봄이 어떤지 볼 수 있도록이요.

 

말하는 목소리만큼 다정하고 나긋한 미성이었다. 화려한 기교없이 담백한 목소리가 퍼졌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우리 둘만 이 공간에 있는 느낌이었다. 예쁜 옷을 사주길 잘했다. 오늘의 라일리는 너무나 완벽했다.

 

 

In other words hold my hand

다시 말해서, 손을 잡아달라고요.

In other words darling kiss me

다시 말하자면, 키스해 주세요.

 

웃는 표정과 달리 마이크를 꼭 쥔 양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내게 고백을 하고 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고백이었다.

 

Fill my heart with song And let me sing for ever more

노래로 제 마음을 채워서 영원히 노래 하게 해주세요

You are all I long for All I worship and adore

당신은 내가 숭배하고 사랑하길 바라는 모든 것이에요.

In other words please be true

다시 말해서. 제발 솔직해주세요.

In other words I love you

다시 말하자면. 사랑해요.

 

단순히 노래 가사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모든 음절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기분이 좋았다. 라일리를 생각하며 드는 맨 첫 번째 감정이었다. 이 감정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우리의 끝을 알고 있는 내게 드는 두 번째 감정은 두려움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명확해진다. 좋아하고 있다. 밀려오는 두려움은 그와 꼭 비례했다. 여행을 마친 후의 폭풍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감당할 수 있을까.

해맑게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내려오는 그를 보며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벌써 안쓰럽다. 미국 땅을 벗어난 전정국의 미래가.


*


“저 노래 어땠어요? 잘하죠?”

 

재즈바를 나와 한적한 거리를 걸었다. 자기 노래에 꽤 만족했는지 라일리가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렇게 관종인 걸 어떻게 숨겼지.

 

“네. 엄청 잘해요. 가사도 잘 들었어요.”

“…아.”

 

졸지에 내게 고백을 한 그였다. 라일리의 노래가 끝나고 관객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저보다 몸집에 두 배는 큰 여가수의 키스 세례를 받고 나서 라일리가 겨우 무대를 내려왔다. 노래 가사에 대한 얘기는 일부러 하지 않기에 묻어두려 했는데, 자꾸만 까부는 그가 귀여워 좀 놀렸다.

 

“달로 데려다줘요?”

“아니 뭐….”

“손잡아 줘요?”

“…그만 해요.”

 

민망한 듯 말해도 내가 내민 손을 그가 덥석 잡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서늘한 밤의 공기가 알맞았다. 술도 한잔했으니 우리의 취기도 분위기를 잡는데 한몫했다.

번화가를 나와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니 인적이 아예 끊긴 골목이 나왔다. 빈곤과 사치가 공존하는 도시라더니 딱 맞는 말이었다.

우리가 걷는 곳의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앞만 보고 걸었다.

 

“정국 씨.”

“네.”

“뭐 여쭤봐도 돼요?”

“네.”

 

그가 내게 질문을 해서 좋았다. 나에 대해 더 궁금해하길 바랐다. 좋아서 두려운 것과는 별개의 마음이었다.

 

“카메라가 혹시 엄청 소중한 거예요?”

“이거요?”

 

오늘도 내내 목에 매고 다닌 카메라였다. 명품 옷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분신과도 같아 빼 놓을 순 없었다.

 

“오래된 거 같아요. 이 줄도 좀 낡았는데….”

“아.”

“정국 씨 되게 부자신데 낡은 카메라는 어딜 가나 챙기시고.”

“내가 그랬나?”

“네. 뉴욕에서 본 날 퇴원할 때도 가장 먼저 챙긴 게 카메라였어요.”

“그래요? 나 되게 유심히 봤네.”

 

라일리가 낡았다곤 했지만 몇 년밖에 안 된 건데. 물론, 내가 하고 다니는 것에 비해 가장 볼품없는 것이긴 했다.

 

“혹시, 그거 막….”

“네.”

“유품…. 뭐 그런 거예요? 죄송해요, 곤란한 질문이었죠?”

 

조심스레 묻곤 얼른 말을 거둔다.

 

“영화 너무 봤네. 그냥 예전부터 썼던 거라 애착이 가서요. 제일 아끼는 거예요. 그리고 보기엔 이래도 렌즈는 제일 좋은 건데.”

 

카메라를 들어 재빨리 라일리의 얼굴을 찍었다. 허름한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남자였다.

 

“뭐예요.”

 

갑자기 사진이 찍힌 그가 민망한 듯 카메라를 뺏으려 든다. 그 모습을 한 번 더 찍었다.

 

“제일 하고 싶은 일이에요. 지금은 좀 못 하지만. 언젠간 할 거예요. 사진 찍는 일.”

“지금은 왜 못 해요?”

“우선순위가 아니라서요.”

 

카메라 줄을 매만졌다. 두꺼운 줄이 해질 정도로 많이도 가지고 다녔다. 더 좋은 카메라로 바꿀 마음도 없었다.

 

“사진 보고 싶어요.”

“안 돼요. 혼자 두고두고 보고 싶은 것들만 찍어요. 잊고 싶지 않은 거.”

 

내 말에 라일리가 걸음을 멈췄다. 사진을 보여달라는 건가? 그건 곤란했다. 그가 나온 사진 몇 장은 보여줄 수 있지만 나머진 내게만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다. 또 민망했다. 대단한 사진들도 아니었고, 아직 누군가에게 내 작품을 자랑한 적도 없었다. 아니지, 작품이라기에도 민망한, 그냥 허접한 사진이었다.

카메라를 달라고 할 줄 알았던 그가 내가 몇 걸음 떨어져 앞에 섰다. 멀리 떨어져 오도카니 나를 쳐다본다.

 

“자요.”

 

그가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저 찍어요.”

 

브이로 만든 손을 양옆으로 세차게 흔든다. 어색하게 웃는 표정이 웃겼다.

 

“두고두고 보고 싶을 라일리, 찍으시라구요.”

 

그의 말에 코끝이 찡했다. 두고두고 보고 싶을 라일리. 그도 나와의 끝을 생각하는 걸까. 우울함에 젖기 싫어 얼른 카메라를 들어 라일리를 찍었다.

 

“한 번 더 찍어요.”

 

이번엔 양팔을 넓게 벌리고 선다. 한 번 더 그를 찍었다. 후미진 골목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컨셉 화보인 듯 근사했다. 이렇게 보니 의사 선생님하긴엔 아까운 얼굴이다.

길을 걸으며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그를 따라 쭉 걸었다. 족히 열 장은 찍었다.

 

“잘 나와요?”

 

나와 멀리 떨어진 그가 물었다. 말할 것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머리 위로 손을 동그랗게 만들어 원을 그렸다.

 

“마지막 한 장만 더 찍게 해줄게요. 원하는 포즈 있어요?”

“손으로 하트 그려줘요.”

 

배경, 옷, 포즈 뭐 하나 어울리는 게 없었다. 그게 별거냐는 듯 라일리가 손으로 하트를 그렸다. 반짝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큰 하트를 그린 그가 내게 달려왔다.

 

“사진 보여주세요.”

“안 돼요. 나만 볼 거라서.”

 

카메라를 뺏으려는 그와 옥신각신 다퉜다. 꽤 위험한 뉴올리언즈의 밤거리라는 것도 잊고 그와 내가 핑크빛이었다. 내게서 카메라 뺏기를 포기한 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초상권이 자기한테 있다며 우기던 그가 걷던 걸음을 멈추고 코를 킁킁댄다.

 

“정국 씨.”

“네.”

“우리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왜요?”

 

그를 따라 코를 킁킁거렸다. 지독한 풀잎이 타는 냄새였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집에서 대마초를 피우는가 봐요. 이 동네는 위험해 보여요.”

 

라일리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와 사진을 찍는답시고 정처 없이 걸어오다 보니 이 지역의 할렘인 듯 보이는 곳에 와있다. 지금 나는 퀴퀴한 냄새가 대마초를 태우는 향이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전까지 재즈 음악으로 가득했던 곳과 몇 분 떨어지지 않은 곳은 음악 하나 들려오지 않는 메케한 곳이었다.

카메라를 들어 눈앞에 보이는 골목을 찍었다. 셔터 소리와 함께 밝은 플래시가 터졌다. 이제 정말 가자며 손을 이끄는 라일리를 안심시키려는데 그의 몸이 굳었다.

 

“저, 정국씨.”

“Fuck. Who is there! (씨발, 누구야?)”

 

플래시가 터진 곳 바로 옆길에서 느릿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장한 흑인 남자가 비틀거리며 골목을 나왔다.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그 뒤로 세 명의 남자가 뒤따른다.

 

“Fucking fancy boys. (존나 잘 차려 입었네.)”

 

대마초에 절은 듯 동공이 풀렸다. 휘적휘적 걸으며 네 명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악취와도 같은 썩은 풀냄새가 풍겼다.

어쩐지 오늘 여행이 너무 완벽했다. 그를 주목받게 하겠다는 계획도 성공했고 라일리가 부르는 노래도 듣고, 그 노래는 심지어 고백이었고.

 

“Come on chinky. (야, 와봐.)”

 

이런 무시무시한 결말이 기다릴 줄은 몰랐던 운수 좋은 날.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랜만에 사족을 달아요. 포타를 통해선 참 오랜만입니다. 다들 잘 지내시죠?

메딕트레블로그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로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는 독자님들이 계셨는데. 저도 여행이 참 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제가 미국에 있는것 처럼 쓰고 있어요.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 없이 잔잔하게 천천히 흘러가는 글이에요. 물론 앞으로 위기가 닥치긴 하겠지만.. 그동안의 발랄했던 로코와는 다른 분위기에요! 알콩달콩 둘의 모습을 상상하며 쉬어가는 기분으로 주인공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힘을 쭉- 빼고 편한게 쓰는 글이라 힐링하는 기분입니다. ๑'ٮ'๑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참 많아요. 그 중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정말정말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정국이, 라일리와 함께 여행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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