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른 전력 '소나기'










쩌렁쩌렁한 외침과 바닥을 때리는 스파이크의 타격음이 사라지자, 비로소 밑에 어둑하게 깔린 비 내음이 났다. 어슴푸레하던 시각에 낭랑하게 말을 읊던 리포터는 어김없이 틀렸다. 비 안 온다더니만. 소나기는 제법 길어서 짐을 싸고 집에 가는 발걸음이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부칠에 비치한 우산을 삼 학년부터 챙기는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스타팅 멤버라는 이름만 번쩍이지 실상 권력 한줌 없는 일 학년은 얌전히 뛰어갈 판이다.


“우산 없어?"


어느새 옆에 다가온 물음이 다정해서, 또 그 다정함이 익숙해서 쿠니미는 눈을 의식적으로 깜빡였다. 있어요, 하고 거짓말 하기에는 이미 미묘한 틈이 생겨버렸다. 다른 선배였다면 뻔뻔하게 메웠을 아주 조그마한 간격. 쿠니미는 이와이즈미를 돌아보았다. 별것도 아닌데 일이 꼬여버린 기분이다. 집에 있는 우산이 순간 떠오른 탓이다. 쿠니미가 주의를 기울였다면 지금쯤 손에 있을 회색 접이식 우산이 아니다. 우산통이 아닌 방 한구석에 모셔놓은 남색의 장우산.


쿠니미 아키라의 집에는 누군가 잃어버린 분실물이 있다. 시원시원한 필체로 반듯하게 주인의 이름까지 적혀있는 우산이다.


고개는 태연하게 고정한 채로 시선만 밑을 훑는다. 집에 있는 것과 같은 색의 장우산이다. 선배는 그 색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언제나 장우산이고. 평소처럼 무심하게 말을 뱉는 대신 속으로 꼭꼭 씹었다.  






꽤 지겨운 구도였다. 쿠니미는 이와이즈미 앞에선 언제나 일 학년이고, 또 이와이즈미 역시 언제나 삼 학년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겹친 일 년. 쿠니미가 학교를 입학하면 이와이즈미는 학교에 빼곡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순식간에 흘러가는 1년 뒤에는 먼저 휙 자취를 감추게 되겠지. 그러니 중학생의 쿠니미 아키라는 조금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저 대사를 처음 들었으니까.


"우산 없어?"
“…."
“쓰고 내일 줘."


갓 열네 살이 된 후배가 멀뚱히 선배를 파악하는 것을 이와이즈미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 아래에서도, 쿠니미는 가만가만 참 정이 많구나 싶었다. 냉큼 빗속을 내달리는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딱히 따라 뛰어가서 붙잡진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의 고민은 쿠니미의 뒷자락을 꾸욱 붙잡았다. 지각이 아슬아슬한 정도였다. 쿠니미는 미끌미끌한 그 감각을 뿌리치고 우산을 두고 왔다. 명백한 고의였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이와이즈미는 어제의 흔적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쿠니미에게 우산을 달라고 하지도 않고, 심지어 빗속을 내달린 주제에 그 흔한 감기 기운도 내비치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이 왔냐고 등을 가볍게 두드려줄 뿐이었다. 쿠니미 아키라는 기분이 상했다. 스스로가 너무 유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치한 고집은 몇 달 내내 이와이즈미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다, 결국 대답 없는 애꿎은 선배를 졸업식 때 놓쳐버렸다.


2년이 끔찍하게 느리게 지나고, 지망서의 '아오바죠사이'는 쿠니미에게 껄끄러운 이름이었다. 뻔한 선택이었는데도 자꾸만 쓸데없는 갈등이 마음을 휘저었다. 미숙한 오기가 우산에 적힌 이름을 신경질적으로 뇌리에서 지웠다. 분실물은 행여 누군가 실수로 쓰고 나갈까 봐 계속 방 한구석에 곱게 모셔져 있었다.




그래, 그때, 키다이치 때도 이와이즈미를 내려다봤는데. '이와이즈미 씨'는 남색 져지를 벗고 민트색 유니폼을 꿰어차도 여전히 자신보다 작다. 예상은 했지만. 멋대로 우산을 쥐여주려는 무책임한, 아니, 무고한 손목을 잡는다. 정말 하나도 기억 못하네요, 이와이즈미 씨.


손 안의 이와이즈미가 따듯하다. 반대로 제 피부는 시릴 거라 생각하니 넘보면 안될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유치한 감상이 이번에도 끈덕지게 쿠니미를 감싸려 할 때, 이와이즈미가 올곧게 그를 바라보며 기다려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쿠니미는 이 년간 질질 끌었던 첫걸음을 내디뎠다. 겨우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행세를 한다.   


"괜찮으면 데려다주세요."


혼자 두고 훌쩍 달려가지 말라는, 고작 그런 애원이었다. 가능한 뻔뻔하게. 일부러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선배라면 해줄 걸 알았다.




"비 맞으면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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