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고저없는 부름에는 한 톨의 애정도 남지 않았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차가운 사이가 되었나.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요.”

그 아이가 토해내는 ‘마지막’을 비웃어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보면 몰라요? 이혼 합의서잖아요.”

반짝임을 잃고 죽은 눈동자를 그 날이 되고서야 눈치채고서도 어리석었던 나는 제 탓이 아니라며 핑계대기에 바빴다.

“사인 해줘요.”

잔뜩 힘이 들어간 손에 쥔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를 난 잊을 수 없었다.

 

 *

 

스스로의 감정에 철 없이 회피한 채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 외치며 시간을 허비했다.

이혼 후의 첫 달에는 뉴욕에서 가장 큰 클럽을 빌리고, 사람들을 끌어모아 음악을 크게 틀고, 비싼 와인으로 비를 뿌리고, 예쁜 몸을 가진 사람과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이제야 토니 스타크가 돌아왔다고 환호했다. 나 또한 그동안 용케 참아 왔다고, 이젠 즐겨도 뭐라할 사람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작 그 아이와 있을 땐 이딴 것들이 그리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음에도.

 그 다음 달에는 집에서 매일 같이 파티를 열었다. 항상 침대를 데울 누군가를 눕혀 놓았다. 페퍼는 S.I 관련으로 자문을 구할 때 외에는 연락을 하지 않았고, 해피는 숙취에 쩔어 있는 날 보며 혀를 찼지만 신경껐다.

또 그 다음 달에는 유람선을 사서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한 달간 여행을 떠났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수영장으로 다이빙을 하고, 아이언맨 슈트 몇 개를 이용해 이 토니 스타크만의 화려한 불꽃놀이를 선보였다.

합법적인 선 안에서 약물과 술에 취한 취한 사람들이 미친듯이 내지르는 소리에 크게 웃어보았다. 이것이 진짜 내가 원하던 삶이라고. 역시 이 토니 스타크에게 배우자란 구속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뒤.

싸늘히 날 반기는 집에 돌아온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난 그 아이가 없는 이 집이 싫었던 거야.

 

 ***

 

나로 인해 그가 변한거라 착각했다. 다정한 목소리도, 애정 가득한 시선도, 뜨겁게 안아주는 품도 모두 오롯이 내 것이 되었다고 미련하게 믿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를 것이라고 그 또한 그럴 것이라... 같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은 지나가버린 시간만큼이나 함께 빠르게 식어갔다.

 이혼을 결심한 건 결혼 후 잠잠했던 연애스캔들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해서도, 내가 눈으로 그런 장면을 목격해서도, 그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점점 줄어들어서도 아니었다. 나에게 하는 키스가 줄어들어도, 그의 가슴으로 파고드려는 몸이 밀려나도, 생일을 기억해주지 않아 혼자 지내도 전혀 슬프지 않게 되버린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담담하게 합의 이혼 관련 서류를 준비 할 수 있었다. 메이에게 물어보긴 너무나 미안해서 염치 없게도 페퍼씨께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고맙게도 별말 없이 도와주었다.

함께 행복하게 꾸몄던 신혼집에서 서로 말을 섞지 않게 된지가 며칠 째인가 세지 않게 되고도 한참이 흘렀을 때. 하얗고 까만 종이를 내밀었고,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잠시의 고민도 망설임도 없이 빈 공간에 까만 선을 그었다.

결혼을 할 때는 몇 날 며칠이 걸렸는데, 이혼 할 때는 종이 위에 펜이 스쳐지는 고작 몇 초.

벌떡 일어나 펜 뚜껑을 닫고 가슴 주머니에 꽂으며 뒤돌아 나가는 그를 볼 생각도 못하고 테이블에 남겨진 종이를 응시했다.

 

이로서 그와의 시간이 끝이났다.

 

딱히 억지로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토니는 찝찝한건 싫다고 이혼 후에 꽤 많은 돈을 내 통장으로 넣어주었다. 그 금액에 매 달 나오는 은행이자만으로도 메이와 내가 넉넉히 먹고 살 수 있었다. 메이는 집으로 돌아오라 했지만 캥거루족이 되긴 싫다며 멀지 않은 곳에 다세대 주택에 집을 구했다. 메이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내 물건들로 방을 대충 채우고 일을 구했다.

아무리 넉넉하다곤 하나 하루종일 퀸즈 순찰만 하기엔 지루한 감이 있었기에 그나마 치안이 나쁘지 않은 오전시간대에 일을 구했다.

월급을 신경쓰지 않고 하는 일은 꽤 즐거웠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결혼했고, 쉴드나 어벤져스 관련 외에는 집에서만 지냈던 터라 간만에 하는 사회생활은 공허함도 못 느낄만큼 재미있었다. 

이 뉴욕 땅을 밟으면서 모를 수가 없는 남자를 전남편으로 둔 만큼 꽂혀오는 반갑지 시선도 있고, 일적으로나 성격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당연히 있었지만 여유가 있으니 크게 화가 나지도 않았고 힘이 넘치다 보니 일처리도 빨라서 신뢰도 빠르게 쌓였다.

첫째 달에는 그러한 과정이 너무나 신이 나서 오버타임으로 일하기 일수였고 패트롤까지 꼼꼼히 돌고 귀가하면 쓰러져 잠들었다.

다음 달에는 고등학교나 대학교때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밤늦게까지 놀기도 했다.

결혼 후에는 약속만 잡을라치면 허리를 붙들고 막무가내로 투덜대며 놓아주지 않거나 9시 정각이면 삐까번쩍한 세단을 끌고 데리러 오는 바람에 늘 친구들에게 미안했는데 돌싱이 좋긴 좋구나. 내가 바로 돌아온 탕아라며 기분에 술이나 밥 따위를 쏴보기도 했다.

일을 한지 세 달쯤 되었을 땐 나보다 몇 주 늦게 들어와서 서로 꽤 의지하며 도왔던 카렌이 뮤지컬을 함께 보자고 권해왔다. 플래시에게 빌린 차로 카렌을 데리러 갔고, 유니폼이 아닌 금잔화 무늬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보며 예쁘다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데이트 이후 우리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고 그 달 마지막 주말에는 집에 초대해 함께 밤을 보냈다.

일요일 저녁에 집앞까지 그녀를 데려다준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불이 꺼진 채 고요한 방에 들어서자 문득 깨달았다.

 

내가 돌아오고 싶었던 집은 여기가 아니었어.

  

***

 

 

“바자회? 오늘?”

[“J호텔 32층 에메랄드 홀에서 9시부터에요. 제발 부탁이니까 잡으러 가기 전에 알아서 가요.”]

“아~ 귀찮게. 내가 그런데 일일히 찾아다니는 타입은 아니잖아?”

[“랩실 구석에서 버섯으로 발견될 것 같아서 잡은 일정이에요. 집 밖으로 안나간지 몇 달째에요, 대체?! 제가 언제까지 방탕한 아들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동동대는 엄마마냥-”]

“어우… 혹시 요새 RATM 노래라도 들어? 아메리칸 갓 탤런트에 나가도 되겠는데. 추천장 써줘?”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

“그래 그래. L호텔 23층 엘리자베스 홀에 6시까지 갈게”

[“아~주 완.벽.하네요.”]

 Off되는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줄곧 만지작대던

팔모양 파츠로 시선을 내렸다. 붉게 칠해진 겉면에 토니의 얼굴이 길게 늘어져 비추어졌다. 랩실 구석에서 버섯으로 발견될거라니. 말재간 없는 그녀 치고는 꽤 신랄한 비판이었다. 아마 크루즈 여행이 끝난 즈음부터 틀어박혔던가? 그게 여름이었으니...

창 밖에는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해피가 아내랑 타임스퀘어에 카운트다운을 하는데 참여한다며 자길 부를 일 없도록 하라고 당부 했던 것도 같은데... 그렇다면 새해는 지났군.

“지금 시간은?”

[오후 3시 27분입니다. sir.]

“또 시끄러운 랩메탈을 듣기 전에 슬슬 움직여볼까?”

귀찮아서 아침에 대충 다듬기만 했던 수염도, 슬슬 단발이 되어가는 머리도 다듬고, 옷도 대충 보기 괜찮은 걸 걸치려면 일찍 출발하는게 좋았다.

[바자회에 어떤 품목을 올려놓을까요?]

“어떤 걸 올려야 뚱뚱한 베짱이들이 와인잔을 높이 들려나?”

무감각한 눈동자가 홀로그램에 뜬 리스트를 무심하게 훑었다.

 

 * 

 

역시 베짱이들의 바자회란 지루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누가 더 별 볼일 없는 물건을 내놓고, 누가 더 헛돈을 많이 쓰는가를 자랑하는 꼬락서니란 몇 년만에 보아도 신물이 났다. 적당한 시간에 나타나서 주목을 좀 끌어주고, 적당히 폼 나는 물건을 던져두고, 적당히 필요 없는 물건을 약 3배의 갚어치 정도를 내고 사들였다.

그 뒤에 이어지는 파티에까지 굳이 자리를 지킬 필요는 없겠지.

틈을 타서 전화를 받는다는 핑계로 넓은 홀을 나섰다. 두껍고 정교한 장식의 문이 닫히자 안에서 풍기던 역겨운 냄새들이 어느 정도 차단되는 듯 해서 후- 하고 괜히 숨을 들이쉬었다.

자정을 가리키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연결된 복도 너머에 있을 스위트룸을 향해 걸었다. 잠시만 눈 좀 붙이고 갈까?

 

 *** 

 

새해에 들어서 가장 바쁜 날이었다. 홀 담당 직원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요구했다. 수건, 매트, 식기, 디저트, 테이블보, 물 등등 1층에서 지원만 했는데도 정신이 쏙 빠졌다. 모든 직원들이 오버타임으로 버티고 있었다. 다 던져버리고 싶어도 이 뒤에 올 달콤한 보너스를 알기 때문이었다.

“이크, 미안해.”

“...흥.”

문을 여는 타이밍에 부딪힐뻔한 카렌에게 사과하자 그녀는 새침하게 무시했다. 다 피터 스스로가 자처한 결과라 난감하게 웃었다. 그래도 5개월 넘게 이러는 건 너무한 것 같기도 하고...

“피터-! 32층에 포크가 부족하대!”

“제가 전달할게요!”

아니 무슨 돈 많은 사람들은 은식기도 1회용으로 쓰는 모양이라며 화풀이처럼 궁시렁대면서 직원용 엘리베이터에 32층을 눌렀다.

‘띵-’

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가 나타났다.

  

*

 

“더 필요 한거 있음 또 말씀하세요.”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며 32층 전용 부엌 문을 닫았다. 민감한 코로 밀려드는 냄새를 막느라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다시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빨리 내려가봤자 더 많은 일거리들만 날 반길 뿐이기에 걸음걸이는 매우 여유로웠다. 벽지에 묻은 티끌을 떼내거나 문 손잡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D.N.D를 보기 좋게 걸어놓기도 하는 등 쓸데없이 두리번거리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몸에 밴 습관대로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손님에게 인사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니 구겨진 셔츠와 주름잡힌 바지, 그리고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몇 년간 재벌과 결혼했었다고 해서 옷 차림새로 사람을 차별할 의도는 아니었다. 다만 직업병적으로 이 층과 그의 차림새가 매우 맞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뿐이지. 결정적으로 그 사람의 가슴에는 옷 재질과는 다르게 꽤 비쌀법한 카메라가 걸려있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서비스직에 종사해온 덕에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자 남자는 당황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 저.. 다른게 아니라 에메,에메랄드 홀을.. 찾는 중인데요...”

“오, 이 층이 좀 복잡하죠? 건물 두 개가 연결되는 곳이라. 찾으시는 곳은 초대장을 받으신 분만 입장가능합니다만, 실례지만 제가 확인해드려도 될까요? 고객님?”

“초대장! 그렇지! 그게 필요하죠. 하하.. 어이쿠! 차,차에 두고왔나봅니다. 다시 가져오죠!”

이 호텔에서 발급하는 초대장은 모바일로 전달되기에 초대된 고객들은 보통 휴대폰 등을 꺼내 보여준다. 예상대로 그는 VIP고객들에게 붙은 파파라치였던 모양인지 있을리 없는 초대장을 찾는 시늉을 하다 멋쩍게 웃으며 되돌아가는 남자에게 끝까지 정중히 다녀오라 인사를 하고는 사뿐히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반질반질하게 닦인 업무용 구두가 카펫 위를 무겁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내려가서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점검했다.

‘뚜벅. 뚜벅’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미소지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

  

약 열 달만에 전 남편을 만났다.

 


 

“........”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던 복도의 공기가 제 존재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바짝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근육이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이 고요한 복도에서 내가 굳은 채 서 있는 것처럼 그도 걸어오던 모양 그대로 정지했다. 어떤 말을 해야하지? 아니, 그전에 아는 체 하는게 좋을까? 이미 서로 의식했는데 하는게 당연한가? 머릿속이 굵은 펜으로 엉망으로 낙서한듯 깜깜해졌다. 일하던 초반에는 유명한 호텔인만큼 그와 마주칠 가능성이나 상황을 몇 번 예상해본 적 있었지만 지금은 그 중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걸어오던 방향은 분명 에메랄드 홀. 아, 바자회에 참석하셨구나. 반년 가까이 칩거한단 소문을 들었는데....

거북해지는 속에 그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하― 하고 내뱉었다. 그 작은 행동이 신호였다는 듯 토니... 아니 스타크씨가 굳은 표정 그대로 걸음을 가까이 옮겨왔다. 핏기 없이 차가워진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가 먼저 보인 반응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무슨 말을 걸어올지 머리가 엉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그가 느리게 다가오는 시간이 너무나 빨랐다. 그가 애용하던 까만 뿔테안경이 조명으로 반짝이는 것에 시선을 두었다. 도저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어째서? 그야...

“....”

무겁게 울리던 발자국 소리가 멎은 순간은 팔을 조금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 그가 멈춰섰을 때. 입술을 안으로 꾹 말아눌렀다. 그가 답지않게 벌어진 입을 다물다가 조금 열어 말을 꺼낼 듯 말 듯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함께 했던 시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그 헤어짐의 시간동안 그는 조금 변한 듯 했다. 예민한 귀에 손목시계의 초침이 한 칸 움직였을 때,

 ‘뚜벅. 뚜벅’

예민한 청각이 제가 걸어온 복도 모퉁이 너머로 들어본 적 있는 인기척을 잡아냈다.

“피..터억?!”

“쉿!”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그를 잡아당겨서 바로 옆에 빈 객실에 마스터키를 빠르게 찍고 열어 스타크씨를 먼저 밀어넣고 들어가 문을 빠르지만 소음이 나지 않게 닫고 문을 잠궜다. 문에 등을 붙인 채 숨을 죽이자 막 모퉁이를 돌아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자 그도 소리를 들은건지 입을 다문 채 묘한 표정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눈을 다시 문으로 돌렸다. 현관 센서등이 꺼지면서 어두워졌음에도 둘 중 누구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가 범위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문에서 등을 약간 떼어내 시선은 그의 목 근처에 두었다.

 “갑작스럽게 죄송해요. 이 층을 어슬렁대는 기자가 있거든요. 딱히 문제 될만한 행동을 취한게 아니라 쫒아내지는 못해서.. 그... 혹시라도 저랑 함께 계신 장면이 찍히...?!”

느리게 뻗어오는 두 손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내 입으로 무언가 주절대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 머릿속이 까맣게 변했다. 거칠면서도 뜨거웠던 그 두 손이 내 두 귀를 감쌌을 땐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강제하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하지만 간절하고 애절하게 그는 다가온다. 건조하게 부르튼 두 입술이 맞닿는 이 순간이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졌다. 목 뒤까지 넉넉하게 감싸는 손가락이 아프지 않게 누른다. 망설임 없이 벌린 입술에 느리게 들어오는 혀가, 감겨지기 전 마주친 짙은색의 눈동자가, 다시 문으로 부드럽게 밀어 붙이는 단단한 몸이 기뻐서 차갑게 식었던 손으로 그의 등을 강하게 감쌌다. 그 격한 움직임에 센서등이 다시 환하게 그와 나를 비추었다.

나누어 갖는 숨결을 달콤하게 삼키고 그의 굵은 엄지손가락이 문지르는 귀가 오싹하니 간지러워 괜히 그의 날개뼈 부근에 있던 손으로 부드러운 정장을 꽉 긁어 쥐어본다. 간만에 이어진 입술이 낯설지 않게 내 윗입술을 물었을 땐 작게 신음을 흘려버렸다. 분명 작게 냈는데도 크게 틀어놓은 스피커 마냥 크게 귀를 파고들었다.

귀를 따뜻하게 덮은 손들이 내려가 어깨와 팔을 지나쳐 허리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진다. 호흡이 좀 더 거칠어졌음에도 입술이 달라붙기라도 한 듯이 떨어지질 않는다. 오히려 입 안을 전부 집어삼킬 것처럼 농밀해진다. 나 또한 품안에 가득 차는 그의 몸체를 끌어안던 손을 밑으로 내린다. 힘이 들어간 옆구리를 훑다가 좀 더 올라가 그의 셔츠 단추를 푸는게 낯설어진 손이 둔해져 단추를 구멍에서 빼는 동작이 버벅댄다. 벅찬 숨을 짧게 삼키고 그의 셔츠를 구기듯 빼내며 벨트 부근의 살을 쓸자 막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던 그의 입 속이 그르릉대는 소리를 흘린다. 쇠와 가죽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벨트를 풀고나니 토니의 입술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그의 손에 의해 내 유니폼은 활짝 벌어져있었다.

“읏...”

날을 세운 치아가 쇄골을 깨물고 배와 옆구리에서 가슴까지 쓸어올린 손이 엄지로 붉은 살을 눌러 문지른다. 아찔하게 시야가 흔들리고 그의 바지춤을 놓친 손이 가슴 위의 흉터를 더듬었다. 센서등이 정신없이 깜박거리길 몇 번. 천천히 떨어진 두 입이 가쁜 숨을 고르고 그와 나의 시선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치며 엉키고 있었다.

“미친 소리 같지만.”

격정적인 행위로 흘러내린 뿔테안경을 벗으며 토니가 말을 꺼냈다.

“침대로 갈까?”

그에 내가 무슨 말로 대답하는지 기억하지 않았다. 분명 나도 미친 소리를 했을테니까.

  

***

  

머릿속에 수만가지의 단어들이 뒤엉키는 생소한 경험은 이 타이밍에 전혀 즐겁지 않았다. 보통 이혼한 부부들이 전 배우자를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하지? 젠장. 몸이 노후된 기계처럼 멈춘걸 깨닫지 못하고 마주친 눈동자에 사로잡혀 입 안에서 정리되지 않는 말들을 굴렸다. 아직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할지 고르지도 못했는데 꼬맹이에게서 터져나온 한숨이 내 꼴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만 같아 일단 피터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움직였다. 녀석에겐 마지막까지 뒷모습만 보여준 주제에 나는 피터의 뒷모습을 보기가 싫어 앞을 막을 것처럼 다가가다 한 걸음을 두고 멈춰섰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버리면 그 어떤 말도 하기 전에 끌어안아버릴 것 같아서.

가까이에서 본 꼬맹이는 분위기가 좀 더 성숙해져 있었다. 한 때는 얼른 어른이 되어주기만을 바랬던 적도 있었는데,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성인의 향기를 물씬 풍기게 된 꼬맹이는 달갑지 않았다. 여전히 맑은 눈동자가 그런 유치한 생각이나 하는 날 읽어버릴 것만 같아서 옅은 색의 눈썹 사이로 시선을 옮겨버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끌어모아야했다. 녀석의 이름을 부를 용기가.

“피...터억?!”

당겨지고 나서야 꼬맹이에게 손을 붙잡혔다는 걸 알았다. 얇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는 동작을 보지 못했다면 꼴보기도 싫은 전남편을 집어던져버리려는 걸까 –심지어 한 번 당했던 전적이 있었다. 침대 위로 였지만- 싶어 몸을 둥글게 말아버릴뻔했다. 순식간에 근처 방을 열어 나를 밀어넣더니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처럼 신속하고 조용하게 문을 닫고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주홍빛 전등 아래 드러난 하얀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시선을 가득 채웠다. 유니폼을 보고 이 호텔에서 일하는건가 싶었는데 혹시 또 무슨 위험한 사건에 뛰어든건가 싶어 피터의 표정을 살폈다. 문 너머로 남성인듯한 발걸음 소리가 드릴 때 눈이 다시 마주쳤다. 지금 지나가는 사람에게 들키면 안되는 거라 짐작하고 숨소리조차 죽이며 시선을 고정했다. 옅은빛깔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다 방향을 바꾼다 싶더니 센서등이 꺼졌다.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그가 보이지 않아 불안해졌다. 잡혔던 손이 간질거렸다. 그 온기가, 촉감이 그리웠다는 듯이. 한 번 더 닿아도 될까? 천천히 어둠에 눈이 적응 했을 때, 문 쪽으로 향하고 있어 반쯤 보이는 등을 돌려 정면으로 세우고 싶었다. 이미 새로운 삶을 이루고 있는 꼬맹이는 날 밀어낼지도 몰랐다. 그 날카로운 거절을 난 견딜 수 있을까.

뛰어난 청력을 가진 녀석이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나를 향해 섰다. 말간 눈을 끌어올리다 내 목언저리에서 멈췄다. 아, 저 표정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다.

 “갑작스럽게 죄송해요.”

내가 좀 전까지 느끼고 있던.

“이 층을 어슬렁대는 기자가 있거든요.”

거절을 향한 두려움.

“그... 혹시라도 저랑 함께 계신 장면이 찍히...?!”

두 손을 피터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들어 뻗었다. 다시 켜진 센서등에 빛나는 눈동자가 다가가는 손에 고정되었다. 단지 그 뿐. 손을 쳐내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 그 소심한 허락에 용기내어 손바닥으로 피터의 귀를 덮고 손가락으로 목 뒤를 지긋이 눌러 입술을 맞댔다. 오직 나와 닿은 그 입술에 집중해 달라고. 내 그늘 아래로 들어간 눈동자가 비로소 나를 온전히 담은 걸 느꼈을 때 전율이 일었다. 망설이지 않고 벌려 환영하는 입술과 수줍에 엉켜오는 혀가 사랑스러웠다. 등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던 손이 재킷을 움켜쥐는 느낌이 생생해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순식간에 열이 올라 뜨거워진 손에 땀이 베였을까봐 얼굴에서 떼고 미처 벗지 못한 안경이 눌리도록 입안을 점령하며 유니폼을 하나씩 벗길 때, 등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손이 허리의 맨살을 쓸었다. 도발이 목적이었다면 매우 성공적이었다. 상황도 잊고 머릿속이 순간 붉어지며 아래를 맞대 비비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으니까. 지금 우리의 상황은, 이 관계는 매우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기에 탐하던 입술을 빨아당겼다 놓아주며 눈을 마주쳤다. 자신이 놓쳐버린 반려가 겁먹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을 골랐고, 좀 더 어른스러운 대화의 시작을 트려 했었다. 피터가 아크리액터가 있던 흉터를 더듬기 전까진 맹세코.

“미친 소리 같겠지만.. 침대로 갈까?”

오- 젠장, 돌았구나. 토니 스타크! 주책맞은 주둥이를 치려는 손을 간신히 자제시키며 이번엔 정말 집어던져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답할 입술만 쳐다봤고, 천천히 떨어지는 입술은 긍정을 그렸다.

  

***

 

“.....히익?! 악!! 망할!!”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켠 피터가 잔뜩 쌓인 메시지에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가 짜릿할만큼 온 몸을 울리는 근육통에 침대를 뒹굴었다. 통증때분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쳐다본 액정에는 갑자기 사라져버린 피터를 찾는 메시지들이 어지럽게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다음 달이 승급심사인데... 아연한 표정으로 액정을 닫으며 한숨을 쉬니 커다란 팔이 머리를 끌어당겼다. 뻐근하게 돌아가는 고개 앞에 예쁜 속눈썹이 있었다.

“못 본 새 기상 방법이 요란해진거야..?”

낮게 잠겨 허스키해진 목소리에 피터는 머릿속에서 방금 본 메시지들을 날려버렸다. 뻐끔대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궁금해졌는지 겨우 눈을 뜬 토니가 배부른 표정으로 웃었다.

“역시 이거였어.”

“뭐가요?”

대답없이 입술을 닫은 토니가 손을 올려 부슬부슬 솟은 머리를 넘겨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이 그리웠던 피터는 뭉클해진 기분이 입술을 꾹 늘이고 그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단단한 손바닥에 뺨을 부볐다. 그리운 살내음을 들이키다 눈을 뜨자마자 맞춰오는 입술을 맞대며 꽉 껴안는 그를 마주 안았다. 오래 비워둔 곳을 가득 채우는 만족감에 헤실헤실 풀어지는 얼굴근육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혼도 이혼도 너랑 처음 해본거지만, 재혼도 해볼까 우리?”

“풉! 그거 프러포즈에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터진 웃음을 손으로 가리며 되묻자 토니는 어깨를 으쓱였다. 잠에서 깨고 마주친 순간부터 자신만 담고 있는 눈동자에 피터는 느꼈다.

“그럼, 우리 재혼도 해볼까요?”

그의 시선의 끝에는 항상 내가 있을거란 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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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타에 전체연령글 올린게 얼마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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