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 됴름이 (上)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한창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는 한 남자가 있다. 눈을 반 이상 덮은 덥수룩한 까만 머리에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타이핑 치는 데 여념이 없다. 3시간 가까이 되어가는 연강에 지쳐 점점 몸이 무너져가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남자, 백현만은 자세의 흐트러짐이 전혀 없다. 그리고 그 모습을 두 자리 건너 앉은 작은 체구의 남자가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한참을 말이다.





“아- 졸려 뒈지는 줄. 점심 뭐 먹지?”
“오늘 학식 메뉴 좆망이더라. 후문가자.”


수업이 끝난 강의실이 떠들썩하다. 저마다 가방을 챙기며 무엇을 먹을 것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유독 사람들이 몰려있는 자리가 있었다.


“우리 됴름이 뭐 먹고 싶어?”
“으음... 날도 덥고..... 시원한 거 먹고 싶은데....”
“초계국수 먹으러 갈까? 내가 사줄게!”
“얌마, 우리 됴름이 어제 초계국수 먹었거든? 너 같은 애들 때문에 공돌이들 센스 없다고 싸잡혀서 욕먹는 거라고. 쯧쯧- 경수야, 콩국수 먹으러 갈까?”
“초계국수나 콩국수나- 똑같은 것들끼리 센스 운운하긴. 우리 됴름이 기운 없는데 고기 먹을까? 에어컨 빵빵한 데 있어. 형이 구워줄게, 가자.”
“흐응.... 고기...... 그럴까...?”


네 명의 장정들이 둘러싸인 가운데에 앉아 큰 눈을 굴리며 입술을 쭉 내미는 됴름이, 경수를 보고 다들 저마다 몰래 심장을 부여잡았다. 크흡...! 귀...귀여워!!!
도경수. 별명 됴름이. 백도대학교 공과대학 컴퓨터 공학과의 꽃이자 모든 학생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주 귀하디귀한 몸 되시겠다. 어느 공대건 아름이가 한 명씩 존재하긴 하지만 됴름이는 아주 특별했다. 여학생이 없는 게 아닌데도, 경수는 귀엽고 앳된 외모로 입학하자마자 뭇 공대 남학생들의 마음을 휘어잡으며 당당히 컴공과 아름이 자리에 올라섰다. 다들 경수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항상 경수의 주위엔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눈 짓 한 번에,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사람들이 씹덕사를 외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렇게 컴공돌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경수에게, 요즘 자꾸 시선이 가는 사람이 생겼다. 변백현. 저와 같은 1학년에 공부 잘하는 자발적 아싸. 항상 맨 뒷자리에 혼자 앉아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쏜살같이 가방을 챙겨 나간다. 과 모임에 이따금씩 얼굴을 비추긴 하지만, 구석에 조용히 앉아 콜라만 홀짝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없다. 처음엔 항상 혼자 있는 백현에게 말을 걸어본 이도 몇몇 있었으나, 무슨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우물우물 말하는 백현에 다들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자 백현은 완벽히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 백현에게 한 번씩 말을 걸어주고 좋아해주는 건 교수들뿐이었다. 백현은 중, 고등학교 때와 다름없는 익숙한 상황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혼자였고, 자신의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 공부였다. 공부는 열심히 하면 그만큼의 성과가 반드시 나온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는 노력해도 제게서 멀어져만 갈 뿐이다. 초중고 12년을 통해 깨달은 것이 그것이다. 대학 생활도 이렇게 혼자인 채로 끝이 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경수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경수가 백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며칠 전 어느 날 밤, 맨션에서 백현을 마주치고부터였다. 버스로 1시간 반이나 떨어진 곳에서 줄곧 통학을 하던 경수는 2학기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이 험한 세상에 귀한 막내아들 혼자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영 마음이 안 놓여 처음엔 반대했지만, 경수의 완강한 고집에 못 이겨 결국엔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방학이 끝나는 날에 맞춰 이사를 했고, 따로 용달을 부를 필요도 없이 됴름이 팬클럽 회원을 자처하는 동기와 선배들이 손수 짐을 날라주었다. 정작 집주인인 경수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라기 보다 못 하고) 무사히 이사를 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2학기가 시작되었다. 5층 건물에 한 층당 3세대가 사는 맨션은 여느 학교 주변의 원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학교 학생들만 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고 가다 얼굴을 익힌 이웃도 몇 생겼지만, 바로 옆방에 사는 사람은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한 번을 마주치지 못했다. 12시를 넘긴 늦은 밤이 되면, 벽을 타고 들려오는 현관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로 옆집의 귀가를 가늠했다. 여자일까, 남자일까. 경수는 이따금씩 궁금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언젠간 얼굴 볼 날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자리를 끝내고 피곤한 몸을 이끌어 겨우 집으로 돌아온 경수는 대략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경수의 몸집만 한 큰 택배 상자가 자신의 방 현관문을 떡 하니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옆으로 밀어보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술에 절어서 그런지- 아니면 상자가 심하게 무거워서 그런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싶어 핸드폰을 꺼내 들어 보았지만, 시간은 새벽 1시를 달리고 있었고, 아무리 평소 염치라곤 모르는 경수라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부르는 건 좀 미안했다. 흐응... 이걸 어쩐다....... 잠깐. 근데 난 이런 물건을 주문한 적이 없는데....? 대체 뭐지? 그제서야 택배 상자의 출처가 의심스러워진 경수가 상자 위에 붙어있는 송장을 확인했고, 수취인이 본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변...백현...? 호수를 보니 바로 옆집이었다. 아, 뭐야...... 살짝 짜증이 난 경수가 옆집을 홱- 하고 째려보았고, 곧장 발걸음 옮겨 옆집 현관문 앞에 섰다. 잘못 배달된 게 옆집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자신은 집에 들어가야 했고, 자는 걸 깨우게 되더라도 현재 상황으로선 불가피했다. 경수는 이참에 인사라도 하지 뭐.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익숙한 벨소리가 흐르고 잠시 후, 안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묵직한 현관문을 타고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경수는 큼- 하고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는, ‘늦은 밤에 죄송해요. 옆집인데 잠깐만 나와 주시겠어요?’ 하고 최대한 정중히 말을 건넸다. 이윽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아, 저, 그게 그쪽 택배가......”


활짝 열린 문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본 경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
“아.... 태...택배요...?”


갓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트레이닝 바지만 입은 맨 상체의 어깨에는 수건이 걸려 있었고, 올백으로 넘긴 머리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얼굴.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이목구비지만 순하게 아래로 휜 눈꼬리와 하얀 피부, 얄쌍한 턱. 전체적으로 본다면 흔한 생김새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소 경수가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얼굴에 꽤나 근접한 생김새였다. 경수는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변...백현씨 맞죠? 우리 집으로 잘못 왔는데....”


경수는 아까 송장에서 본 이름을 퍼뜩 기억해내곤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백현이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아, 아.. 아 잠, 잠시만요!’ 하더니 허둥지둥 슬리퍼에 발을 껴 넣으며 밖으로 나왔다. 앞에 바짝 다가선 몸에 경수가 순간 숨을 흡- 하고 참았다. 시야에 가득 들어찬 탄탄한 상체를 본능적으로 빠르게 스캔했다. 마른 편이지만 적당히 근육이 잡힌 몸은 저와 비슷한 키임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떡 하니 벌어져 있어,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핫가이가 옆집에 살고 있었다니...! 경수는 이 집에 이사 오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아.... 죄송해요. 바로 치워드릴게요.”


어깨에 걸린 수건을 목에 옮겨 두르곤 백현이 경수를 지나쳐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바디워시 향도 딱 제 취향이었다. 코끝을 살짝 맴도는 머스크 향에 경수는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삼켰다.


“꽤 무겁던데, 저도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혼자 들 수 있어요. 잠시만요.”


백현이 주위를 눈으로 슥- 한 번 훑고는 다리를 넓게 벌려 상체를 낮추었다. 그리곤 상자 아래에 손가락을 끼워 넣더니, 단번에 그 큰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경수는 소리 없이 오- 하고 몰래 감탄했다. 힘이 바짝 들어간 팔에는 근육과 힘줄이 빡 하고 선명하게 돋아있었다. 대박이다, 진짜- 변백현 개멋있어. 경수의 눈에선 당장이라도 하트가 뿅뿅! 하고 발사될 것만 같았다.


“늦은 밤에 죄...죄송했습니다.”
“괜찮아요. 이렇게 얼굴 트는 거죠, 뭐.”


방에 상자를 내려놓고 다시 나온 백현이 우물쭈물 경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생긴 거와 다르게 말투가 좀 소심해 보이지만, 뭐 어떠한가. 저것도 나름 귀여운데? 속으로 그런 생각이나 하며 경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백도대 학생이세요?”
“...네, 네....”
“어? 저돈데! 제 이름은 도경수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여러 가지 의미로. 경수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백현이, ‘...름이....’ 하며 작게 말을 내뱉었고, 그걸 들은 경수가 ‘네?’ 하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곤 제 앞에 내밀어진 작은 손을 소심하게 살짝 붙잡았다.


“자...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경수는 다음 날, 백현이 저와 같은 학과에 같은 학년,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이란 걸 알게 된다. 언제나처럼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출석을 부르는 교수의 목소리에서 변백현의 이름이 귀에 들어온 것이다. 첫 수업도 아니고, 분명 숱하게 들어왔을 이름일 텐데... 전날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아마 앞으로도 쭉 몰랐을 것이다. 경수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대답이 들렸던 곳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


분명 방금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보기에도 답답해 보이는 까만 머리통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경수는 눈을 가늘게 뜨곤 그 정수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하.... 그러고 보니, 저런 애가 있었지. 경수는 그제야 맨 구석 자리에 앉아, 항상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범생이 한 명을 떠올려냈다.


‘완전 딴판이네. 그러니까 이제껏 내가 못 알아봤지. 저런 촌스러운 스타일로 보석 같은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니.’


경수는 마치 바닷속 깊이 숨겨진 진주를 찾아낸 듯한 짜릿한 쾌감에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이후로 경수는 백현을 관찰했다. 원활한 탐색을 위해 자리도 일부러 백현의 옆 옆자리로 옮겼다. 겹치는 수업시간 때마다 시종 백현만 바라보았다. 분명 백현도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절대 저와 눈을 마주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며칠을 참고 참다, 결국 경수는 칼을 빼 들었다.





“리포트 제출 내일까지니까 다들 잊지 말도록. 이상.”
“감사합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경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여느 때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리들에게 눈길조차 안 주고 쌩하니 지나친 경수는 어느 한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모든 시선이 경수의 뒤를 쫓았다.


“점심, 같이 할래요?”


허둥지둥 가방을 챙기는 백현의 앞에 우뚝 선 경수가 수줍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강의실 안에 있던 모두의 눈이 일제히 경수의 얼굴로 한 번 향했다가 곧바로 백현에게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됴름이가 저 변...변.... 아, 이름이 뭐더라? 암튼 저 변 머시깽이 아싸한테 점심 제안을?!


“아....아.....저, 저......”


고개가 거의 90도로 꺾일 정도로 얼굴을 푹 숙인 백현이 떠듬떠듬 말을 뱉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경수의 눈이 널찍한 어깨에 잠시 동안 머물렀다. 아, 매달리고 싶다. 선 이쁜 거 봐. 진짜 저건 타고난 거다. 흐뭇하게 웃으며 경수가 백현의 가방에 손을 뻗었다. 꾸물대는 게 대답을 들으려면 한참 걸릴 것 같고- 언제까지 이러고 서 있을 수는 없으니 따라오게 만드는 수밖에.


“가요. 지난번에 신세 진 보답으로 제가 살게요.”


자기 택배 자기가 찾아간 건데 무슨 신세를 졌고, 무슨 보답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경수는 그렇게 말하며 백현의 가방을 들고 강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자...잠깐......잠깐만요!”


그런 경수에 당황한 백현이 우당탕탕 자리에서 요란하게 일어나더니, 경수의 뒤를 쫓아 황급히 달려나갔다.


“......”


그 모습을 시종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뭘 보고, 뭘 들은 거지, 방금? 매일 얻어먹을 줄만 알지, 지갑 한 번 열어본 역사가 없는 됴름이가... 지금 자기 입으로 쏘겠다고 한 거???





백현의 눈동자가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어...어떡하지. 제 앞에 앉아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경수의 시선에 백현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됴름이가 제 옆집에 산다는 거에 놀란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지금은 제 앞에 앉아선 저를 쳐다보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백현은 경수를 알고 있었다. 컴공과 됴름이. 매일 수업 때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만인의 귀염둥이. 항상 맨 뒷자리에 앉다 보니 제대로 얼굴을 본 건 몇 번 안 되지만, 제가 보기에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싸고도는 지 수긍이 가는 외모였다. 크고 맑은 눈동자에 웃을 때 방긋이 솟아오르는 탐스러운 볼, 하트모양의 예쁜 입술...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자그마한 체구- 어차피 저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너무나도 먼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힐끗힐끗 그저 바라보기만 했지만, 백현은 확실히 경수를 인지하고 있었다.


“같은 수업 듣고 있는지 몰랐어요.”


몰랐겠지. 아니, 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백현은 입술을 감쳐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이죠? 동갑인데 말 놓아도 될까? 아, 만약 싫은 거면 계속 존댓말 해도-”
“괘...괜찮....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며 다급하게 말을 내뱉는 빨간 얼굴에 경수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 부끄러워하는 거 봐. 귀여워....


“그래. 그럼 말 놓자. 백현이는 뭐 좋아해? 여기 음식 다 맛있는데.”


백현이... 됴름이가 배...백현이래.... 백현이 또다시 얼굴을 붉히며 경수의 말을 곱씹었다.


“...메뉴 별로야? 다른 데 갈까?”
“아, 아니야! 나...나는 다 좋아.... 뭐든 다 잘 먹어서......”


백현이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올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 그럼 내가 좋아하는 거 시킬게.”


그렇게 말하며 경수가 백현을 향해 만인이 환장해 마지않는 베시시한 웃음을 흘렸다. 백현은 순간 멍한 얼굴이 되어 그 미소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됴름이.... 너무 이뻐......


백현이 태어나 처음으로 공부 이외의 것에 빠져버린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교내에서 경수와 백현이 붙어있는 장면이 자주 목격되었다. 모두가 의아해했다. 접점이 전혀 없던 두 사람이 갑자기 친해졌고, 수업시간에 옆에 찰싹 붙어 앉아있는 것도 모자라 집에도 같이 가는 것이었다. ‘됴름이와 변아싸’라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이 기묘한 조합에 컴공과 커뮤는 연일 이 두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게, 백현은 원래부터 주변에 무관심한(=관심이 1도 없는) 사람이었고, 경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게 일상이다 보니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었다.

그날 점심을 먹은 이후부터 백현의 옆자리는 경수의 전용자리가 되었다. 아직도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백현은 수업만 시작되면 사람이 180도 바뀌었다. 교수가 말을 시작하면 일단 눈빛부터가 달라진다. 꼿꼿하게 허리를 편 자세로 타닥타닥- 엄청난 속도를 내며 타이핑을 치는데, 눈이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오타 한 번을 안 낸다. 경수는 그 빠르고도 정확한 손놀림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백현아-”
“......”


경수가 최대한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백현의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된 채이다. 백현은 항상 수업이 끝날 때까지 옆에 앉은 제 존재를 잊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다. 그런 백현의 무시 아닌 무시에 처음엔 내심 서운함을 느꼈던 경수지만, 무언가에 집중할 때의 백현은 정말이지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다. 살짝 좁혀진 미간과, 감쳐 문 얇은 입술, 날카로운 눈빛. 평소의 백현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이러한 갭들이 경수로 하여금 모든 걸 다 용서하게 만들었다. 남들은 촌스럽고 독한 범생이라 혀를 내두르지만, 경수에겐 백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다 매력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남들이 알면 콩깍지라고, 정신 차리라고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저는 이미 백현에게 푹 빠져버린 것을.

경수는 아예 책상 위에 턱까지 괴고선 백현을 관찰했다. 마치 명화를 감상하듯, 눈으로 음미하고 눈으로 탐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백현이 빨리 제 손안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빨리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음흉한 생각이나 하면서 말이다.




겹치는 수업을 함께 듣고, 공강 시간 맞춰 점심을 함께하고- 시험 기간엔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 함께 공부했다. 공유하는 시간들이 점점 쌓여갔다, 두 사람이 붙어 다닌 지 어느덧 석 달을 넘어서면서 최근에 경수에겐 고민이 하나 생겼다. 분명 백현도 저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둘 사이에 이렇다 할 진전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냥 내가 먼저 고백해야 하나? 연애 경험도 전무한 것 같고.... 언제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경수는 그냥 친한 친구 사이와 다름없는 현재의 간격에 적지 않은 조바심을 느꼈다. 그래도 제가 먼저 고백하는 건 뭔가 좀 자존심이 상하니, 일단 살짝 찔러라도 볼까.... 경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나 오늘 약속 있으니까, 먼저 들어가~]
[어디 가는데?]
[애들이 술 먹자고 해서. 집에 갈 때 전화할게!]


백현이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와 다니고 부턴 큼지막한 모임을 제외하곤 웬만하면 안 나갔었는데 갑자기 왜...... 백현은 경수와 이렇게 가까워지기 전, 학기 초 몇 번 나가봤던 술 모임을 떠올렸다. 그때도 경수의 주변엔 사람들이 득실거렸었다. 다들 살짝 취기가 올라 기분이 업된 됴름이가 귀엽다고 볼을 꼬집고 어깨에 팔을 두르고- 사심이 아예 없지 않은 손길로 경수를 한 번씩 건드렸다. 그때는 화기애애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테이블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백현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백현은 경수가 걱정되었다. 아니, 걱정된다는 단순한 감정으로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제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낯선 감정들이 백현을 온통 뒤덮어왔다. 언제나처럼 술에 적당히 취해 헤실헤실 풀어진 경수를 귀엽다는 핑계로 이곳저곳 만져댈 검은 손길들을 생각하니 입안이 바싹 마르고 손바닥에 땀이 찼다.


보내기 싫다... 안 갔으면 좋겠다.... 가지마 경수야...... 싫어.... 아무도 경수 만지지마...... 경수는..... 경수는 내꺼야......


백현의 눈빛이 매섭게 변해갔다.








@gongs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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