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클리어 슬라임에 붙잡아둔 시간이 있어요. 염색한 투명을 통에 가두면 작은 꿈나라가 생겨요. 밀봉한 클리어는 말갛게 잠든 세계 같아서. 발갛고 파란 클리어가 견고한 그라데이션을 이룰 때, 반짝이 가루는 부드러운 모양 그대로 피어오르죠. 황혼과 새벽을 잘라 붙여둔 경계도 가로지르는 은하수, 하얀 별조각을 잡아타 잠든 당신까지도 그대로예요. 영원이 흐르는 그 곳에서는 당신도 영원하지요.

짓궂은 손가락을 보세요. 이방인이 침범하는 순간, 아름다운 정지는 울렁 흐트러져요. 밀폐된 세상이 흔들리면 반짝이마다 달아둔 추억도 움직이죠. 손가락을 넣었다 빼면 잠들었던 꿈이 쫍쫍 깨어나요. 마법을 보여줄게요. 멈췄던 시간이 지금부터 움직일 거예요.

 

통에서 끌려나온 꿈덩이가 추욱 퍼지며 엎드려요. 양손으로 덥썩 들어 올려 양옆으로 쭈욱 당기고 합치고. 공중플레이를 할수록 별빛이 흩어지면서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요. 발갛고 파란 시간이 혼재된 별의 세계, 멀어졌던 추억도 당신도 방울방울 모이기 시작하고. 근사한 결과 결 사이로 기포가 쌓여가고. 돌돌 똬리를 틀어 연보라 휘핑크림을 내려놓죠. 예뻐도 금세 흐물흐물 무너질 추억이 따로 없어요.

바닥플레이로 말갛던 클리어에 기포가 겹겹 차올라요. 파도처럼 겹치고 겹친 슬라임은 당신이 몰고 올 파도 같아서. 두툼하게 쌓인 거품을 움켜쥐면 반짝이마다 웃던, 마지막까지 웃던 당신이 투다닥 소리치죠. 그렇게나마 기억 속에 남은 당신을 짓뭉개고. 당신이 뻐끔 뱉었을 기포는 간질간질 터져 손바닥을 간질이고. 마무리는 손끝으로 촙촙 포킹하며 풀거품을 터뜨려요. 자그마한 숨결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결연한 미련으로.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어요. 마법에 걸린 꿈덩이가 통으로 돌아가면 뚜껑을 닫아 재워요. 잔뜩 쏟아둔 응어리의 기포가 빠질 때까지 안녕. 잠투정하는 추억이 잠잠해질 때까지 안녕. 꿈나라는 맑았던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죠. 그렇게 한동안 정지에 빠질 거예요.


사흘인가 지나 뚜껑을 열어요. 시즐링 시간을 기다렸지요. 별가루를 얹어 하얗게 드글드글 올라온 풀거품. 빙글 휘젓자 손끝에서 취익 치이이 흩어지는 기포와 기포. 몇 번이고 반복할 사랑스러운 생성과 소실. 몇 번이고 불러낼 그리운 추억과 당신. 마법은 아직 풀리지 않았어요.

 

 

2.

간만에 버터 슬라임을 샀어요. 새파란 한낮과 연분홍 초저녁을 뜯어내 반반으로 붙여둔 아이였죠. 빙글빙글 섞자 빙글빙글 저녁이 깊어졌어요. 오묘한 빛으로 무르익던 해질녘이 저물면 연보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그리운 향이 스칠 것만 같은 연보라. 석양도 거의 물러간 하늘을 만지며 웃었어요. 꾸욱 쥐어짜면 손틈에서 빼꼼 인사하는 저녁이라니. 귀엽잖아요.

오돌토돌 젤라또 같은 아이는 부드럽고 우아했어요. 둘둘 똬리를 틀자 근사한 결과 결은 장미나 다름없었죠. 소담스레 피어난 아이를 양손으로 와압 움켜쥐고. 저녁에 젖은 장미가 내 손에 지고. 뭉개진 연보라가 손틈으로 비죽 튀어나왔죠.

손바닥을 감싸는 시간이 신기하셨나, 아이를 쿡쿡 찌르던 선배님께서 기겁을 하셨어요. 글쎄 손끝에 슬라임이 달라붙더니 껌처럼 쭈욱 늘어졌거든요. 내게 친숙한 저녁이 타인에게 낯선 저녁으로 다가가는 순간을 봤어요. 슬라임도 새로운 손길을 만나니까 기분이 좋았나 봐요. 죄송해요. 우리 노을이가 실례했지만 예뻐해 주면 좋겠어요.

 

 

3.

스팽글이랑 글리터가 푸짐하게 들어간 크런치 슬라임이 있었어요. 만지면 만질수록 기포가 찼고, 불투명한 보물상자를 힘주어 플레이하면 짜글짜글 소리도 컸죠. 기분 좋은 고막의 진동에 취해, 무심코 세게 움켜쥐면서 뾰족한 십자 글리터에 손톱 밑을 찔렸어요.

피비린내 풍기는 슬라임이 보고 싶어졌어요. 어릴 적에는 스프나 모짜렐라 치즈를 마음껏 만지고 싶었는데. 지금은 몸속에 잔뜩 흐르는 피를 모아다 터뜨리고 싶어요. 나를 터뜨릴 수는 없잖아요?

기포 가득한 크런치에 홍실이 뻗고 핏빛이 번질 광경은 어떨까요. 터져버린 저녁하늘에 스모그가 만연할 세기말의 풍경일까요. 최후의 승자처럼 피투성이 금은보화를 독차지하면 어떨까요. 미칠 듯한 성취감을 흉내낼 수나 있을까요.

 

 

4.

클라우드 슬라임은 이름처럼 구름 조각을 닮았어요. 천천히 늘이다 보면 포슬포슬한 실구름이 가루를 남기죠. 구름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끝으로 눌러 주욱 그으면 한 줄기 비행운이 나타나요. 구름에 손을 집어넣고 한가득 주무르는 느낌이란, 처음으로 솜사탕에 닿았던 미뢰의 기억과도 같아서.

하늘에서 머흘머흘 흐르는 구름을 땅에서 만진다면, 그건 더 이상 구름이 아니게 되는 걸까요. 완전히 타인인 내가 당신의 안에 머문다면, 나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게 되는 걸까요.

 

 

5.

물처럼 출렁이는 지글리 슬라임에도 기체의 세계가 있어요. 좁쌀 같은 잔기포 말고 훨씬 커다란 세상이죠. 바닥에 넓게 퍼진 아이의 끝을 양손으로 살짝 잡아당겨요. 얇게 잡히는 아이를 가슴께까지 끌어와요. 늘어난 표면을 이불 덮어주듯 살살 내리쳐요.

풍선껌보다 커다랗게 부푼 바닥풍선.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달콤한 장소. 내가 아끼는 전부를 모아두고픈 장소. 행복한 풍선 안에서 바라본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거기선 울상인 얼굴도 곱게 보일까요. 희뿌연 풍선 속 공기를 동경하다가 그만뒀어요. 조그만 자극으로도 흩어져버릴 평화는 반대로 잔인할지도 모르잖아요.

위태로운 향기를 이만 놓아주기로 해요. 깨지기 싫다면서 몸부림치는 행복처럼, 손가락을 찔러 넣어도 풍선은 잠깐 버텨내죠. 이윽고 힘없이 터져 무너지지만요. 잡아둔 콜라향이 해방되면서 코끝으로 훅하고 끼쳐요. 풍선의 토대였던 둥근 자리가 낙원의 유적 같아서. 흔적으로만 자리한 추억 같아서. 그저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요.

 

 

6.

규사 슬라임에는 알갱이마다 바다가 잠들어 있나 봐.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 너의 바다, 나의 바다, 우리의 바다. 솨아아 귀를 감싸면서 알고 있는 바다조각이 부딪칠 때. 침식된 사랑처럼 날카로운 조각이 손가락을 찔러올 때. 아픔을 잊게 하는 아픔이 있고.

온세상의 눈물이 모인 널리고 널린 바다가 아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둘이서 웃던 바닷가야. 네게 건네받은 소라고둥 같아서. 짠맛 대신에 단맛으로 가득해서. 쿨피치 향수가 스민 바닷물로 손을 씻고.

청록과 남빛이 어우러진 규사. 마치 지구를 갖고 노는 기분이야. 규사는 클리어를 굳히는 재료라던데. 머지않아 굳어서 도는 것도 잊어버릴 지구가 되겠지. 자전도 공전도 멈췄지만 서로가 전부였던 우리만의 지구처럼.

 

 

7.

눈꽃 슬라임이 크게 부풀었어요. 깨끗한 클리어랑 새하얀 빙수가 만나 바삭바삭. 바닥에 내려놓고 쿡쿡 눌러댔어요. 눈밭에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평평하게 퍼진 슬라임에 양손을 쫙 펼쳐서 손도장을 찍었지요. 문득 당신의 마음에도 이렇게 자국을 남기고 싶어졌어요.

어둠을 헤매는 자에게 글로써 작은 빛줄기라도 비추어 그들이 새로운 길을 찾도록 돕고 싶다. 세간의 병든 운석이 나를 상처 입히려 해도 나만은 이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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