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위터에 썼던 글을 수정하여 가져왔습니다.

* 영화 '스토커'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아원에 그가 찾아왔다.


은수는 매년 생일날 선물을 보내오던 키다리아저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창준... 이름만 듣고 수 십 가지 상상을 했던 그 남자는 기대 이상으로 멋진 사람이었다. 농담으로 불렀던 키다리 아저씨처럼 정말 큰 키에 주름하나 없는 정장을 걸치고 그는 그렇게 은수의 앞에 나타났다.

 

은수의 경우는 꽤나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이가 이렇게 들도록 후원을 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는 은수를 보고 자신이 거두겠다고 했다. 고아원 친구들은 은수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은수는 묘하게 불안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 그건 뭐였을까.

 

그의 저택은 정말 엄청난 크기였다. 마차를 타고 달리고 달려도 저택 내부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차에서 내린 은수를 반긴 것은 창준이 아니라 연재였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은은한 미소를 짓는 그녀는 은수가 본 어떤 사람보다도 아름다웠다.

 

"우리 그이는 아무나 동정 안하는데."

 

연재는 은수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라서 나한테 그렇게 꽁꽁 숨겼나봐."


연재는 미소를 지었지만, 은수는 느낄 수 있었다. 날이 선 적의. 은수의 심장이 가시로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연재는 하인을 부르더니 은수를 방으로 안내하라고 말하곤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구박받으려나. 은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아무도 그녀의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이럴거면 뭐 하러 날 여기 데려온거지. 은수는 저녁 식사에 가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식탁은 저택처럼 크고 길었다. 은수 또래의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자리를 메웠다. 은수는 느낄 수 있었다. 다 나 같은 아이구나. 내가 특별한 게 아니라... 은수가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남자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너 오늘 온거지?"

"어..어.."

"삼촌이 너 좋게 봤나보다? 이렇게 만찬을 다 열고 말야. 이러는 적은 별로 없거든."

"그래?"

 

남자아이는 자신을 동재라고 소개했다. 장난기가 많아보였는데 이 집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자신에게 물으라고 성화였다. 은수가 약간 정신이 산란해지려는 찰나, 창준이 식탁에 나타났다. 주위가 단박에 고요해졌다.


"앉지."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아, 다들 인사해. 오늘 새로 온 친구야. 영은수. 은수야, 너도 인사하고."

"네..안녕하세요. 영은수라고 합니다."

"안녕, 은수야."

 

아이들이 입을 모아 인사하는 것이 일견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식사는 잔잔하게 흘러갔다. 아이들끼리 떠들기도 하고 창준과 말을 하기도 하고. 동재는 역시나 말이 많은 아이였다. 주변 아이들과 전부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창준이 특별히 자신을 의식하거나 말을 걸지 않자 은수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음식은 고아원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맛있는 음식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새 식사시간이 끝났다. 다들 제 방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여서 은수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창준이 자신을 불러 세웠다. 아이들은 눈치를 보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불편한 점은 없고?"

"아, 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하인들이나 하녀들 통해도 되고 나한테 직접 이야기해도 되고. 내 방은 서편 복도 끝이야."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호칭은 삼촌이라고 하면 돼. 아이들 다 그렇게 부를 거니까. 친구들끼리 그냥 편하게 반말하고."

"네. 뭐 또 지켜야 할 건 없나요?"

"흠...글쎄. 여기서 뭘 하던 니 자유야. 다만 밤에 내가 부르기 전에는 절대 내 방에 오지마."

"알겠습니다."

 

창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가라는 손짓을 하자, 은수는 자리를 떠나 자신의 방으로 갔다.

 

은수는 잠이 오지 않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무들이 심어진 정원에 연재가 보였다. 이 시간에 산책을 하는건가. 그리고 조금 있다 뒤따라 나가는 동재가 보였다. 은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내가 본 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겠구나.

 

아침에 하녀가 자신을 깨우기 전에 은수는 일어나 자신을 정돈했다. 뭘 해야 하지... 자신의 방에 책들이 꽂혀있는 것을 본 은수는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살폈다. 철학...문학....성경... 다양하네. 정말 자유롭게 공부해도 괜찮겠다. 라고 은수는 생각했다.

 

그 뒤로는 일상적으로 흘러갔다. 생각보다 창준을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주 밖으로 떠나는 듯 했고, 은수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홀로 방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친구들이 가끔 창준의 방에 들어가는 밤이면 저택이 왠지 더 고요했지만, 일부러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언젠간 닥칠 일이라고 생각하며.

 




연말이 다가오자 저택이 분주해졌다.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라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서였다. 은수와 아이들도 파티 준비를 도왔다. 연재는 평소에도 예민했지만 더 예민해보였다. 그녀는 한 방 전체를 꾸몄다가 다음 날 다 새로 꾸미라고 하인들을 닦달했다.

 

창준도 파티가 다가오자 자주 식사시간에 나타났다. 그는 가끔 은수에게 요새 무엇을 공부하는지 물었다. 은수가 법학이라고 이야기하자 흥미로운 듯 웃으며 말했다.

 

"법학이라...법은 세상을 재단하기 좋은 수단이지. 좋은 선택이야. 법관이 될 건가?"

"가능하다면요."

"그래, 니가 원하면 뭐든지 될 수 있지."

 

창준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은수는 동재가 자신을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을 보고 살짝 웃었다. 창준도 그것을 눈치 챈 것인지 진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고 아이들은 모두 들떠있었다. 식사시간에 창준이 나타나 말했다.

 

"각자 선물 방에 가져다놨다. 메리 크리스마스."

"감사합니다. 삼촌. 메리 크리스마스."

 


은수도 방으로 돌아가 곱게 포장된 리본을 풀어냈다. 생일날이면 늘 받던 제 품에 꼭 맞는 면 셔츠가 아니었다. 소름끼치도록 매끄러운 실크 블라우스. 무엇이라도 묻을까 두려울 정도로 흰 색이었다. 게다가 거기에 어울리는 와인빛 스커트. 몇 번 만져보며 머뭇거리던 은수는 결국 옷을 입고 파티장으로 나섰다. 아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옷들을 걸치고 있었지만 은수처럼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아이는 없었다. 모두 묘하게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있어 은수는 자신이 너무 튀는 것 같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와인 잔을 흔들며 멍하니 서있는 은수에게 창준이 다가왔다.

 

"잘 어울리네."

"아, 감사합니다. 삼촌"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았는데 다행이야."


창준의 눈이 자신의 블라우스 너머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뱀같은 시선이 은수의 몸 전체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평소랑은 다른...노골적인 눈빛이었다. 은수가 약간 당황한 찰나 창준이 은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거..지금 당장 찢어버리고 싶어."

 

"...삼촌이 선물해준 건데 찢으시게요?"

 

은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자 창준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려고 선물한 건데?"

 

창준은 그 말을 남기곤 은수에게서 멀어졌다. 은수는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그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져 실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은수의 곁에 동재가 다가왔다.

 

"축하해."

"뭘?"


"너 오늘이야."

"뭐가?"


"순진한 척 하긴. 너도 알잖아. 오늘 파티 주인공이 누군지. 너야."

"...."

 

그래, 때가 된 건가. 은수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와인 잔을 더 세게 쥐었다. 파티는 순식간에 흘러가고 어느새 자정이었다. 다 같이 케이크에 불을 붙이곤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여자 아이들 중 몇 명이 은수에게 다가와 손을 한 번 쥐고 사라졌다. 격려인가. 은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심호흡을 하던 은수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오라는 건가.

 

아까 시끄럽던 것이 무색하게 저택 안은 고요했다. 은수의 발이 떼는 대로 가끔 삐걱거리는 나무 판자들만 소리를 낼 뿐. 걷다보니 그의 방 앞이었다.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그가 말했다.

 

"들어와."

 

은수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준이 기다렸다는 듯 은수의 손을 홱 낚아채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입을 맞췄다. 블라우스가 그의 손에서 사정없이 찢어졌다.

 

"자..잠깐만요..처..천천히.."

"싫어."

 

창준은 은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은수가 겨우 버둥거려 그의 품에서 벗어나 말했다.

 

"바..밤은 길어요. 삼촌. 제발."

"삼촌이라고 부르지마."

"그럼..."

"창준..창준이라고 불러. 난 지금 니 삼촌아니니까."

"알았어요. ... 창준."

 

밤은 정말 길었다. 창준에게도 은수에게도.






창준의 손길은 은수의 여린 몸에 수없는 생채기를 만들었다. 은수가 고통어린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창준은 무시했다. 돈을 주니 이 정도는 참으라는 건가. 은수도 지기 싫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나오는 소리를 죽였다. 창준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하지 않은 것만큼을 전부 받아내겠다는 기세로 은수의 안을 집요하게 찔러댔다.  은수의 블라우스가 바닥에 갈기갈기 찢겨 나뒹굴었다. 눈부시던 옷감은 달빛이 비쳐 처연하게 빛을 잃어갔다. 은수의 눈에 어려있던 총기가 죽어갈 때 쯤, 창준은 은수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서재 책상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다리를 꼬고 걸터앉은 채로 파이프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불을 붙이고 바닥에 흐트러진 은수를 관찰했다. 정복욕... 같은 것으로 보였다. 은수는 수치를 참으며 몸을 바부작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살을 덜 보이려 움직이는 은수를 보더니 창준은 비웃음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더 건드리지도 않았지만 가라는 소리가 없었다. 은수는 바닥에 너덜거리는 블라우스 조각이라도 주워서 가리고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때 창준이 바닥으로 나이트 가운 한 장을 던졌다. 


"이거."


걸치고 가라는 의미인 듯하다. 은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여 시커먼 그 천을 주워올렸다. 꼭 제 주인의 속을 닮은 옷이었다. 


은수가 방문을 닫기 전에 나직하게 창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주 이 시간에."




끼익- 탁 -




은수는 그 목소리를 못들은 척하고 싶었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방에 약이 있으려나. 제 방까지 가는 길이 지나치게 길었다. 고요한 저택에서 걷는 소리가 크게 울려 친구들이 모두 자신이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아내지는 않을까. 은수는 발꿈치를 듣고 천천히 걸었다. 평소의 배가 걸려 은수는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무언가 있었다. 상처에 바르는 약과 진통제. 



은수는 웃음이 났다. 웃겨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독립을 하기 전까지 이 생활을 반복해야 한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야. 은수는 태연하게 앉으려 애썼다. 쓰라리는 몸에 스스로 약을 발랐다. 나아야 해. 나아야 다음 주를 또 견디지. 자조하며 은수는 생각했다. 이 은혜는 꼭 갚고 갈게요. 이창준씨. 


  

다음 날 아침, 은수가 걸치고 왔던 새까만 나이트 가운은 흔적없이 사라졌고 친절하게도 아침이 대령해있었다. 이 소름끼치는 저택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다시 저녁 때가 되어  창준을 만났을 때 그는 평소처럼 온화하고 자애로운 '삼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수는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이 저택에서 살아남아야했으니까. 



시간은 말도 안되게 흘러가버리고 다시 약속된 시간이 찾아왔다. 잊었을까 혹시나 싶던 은수의 방문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긴 밤이 다시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 2017년을 마무리하며 임시보관함에 있던 글들을 약간만 다듬어서 내놓으려고 합니다.

* 다들 한해동안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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