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편의 영화를 보고 자유롭게 씁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짐 자무쉬 감독의 2013년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를 보았다. 사실 너무 졸려서 다섯번쯤 끊어서.. 아니 그보다 더 자주 스페이스바를 누른 것 같다. 물론 운동 샤워 식사 수순에 이어 불 꺼진 방에서 보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영화 특유의 느릿한 속도가 한 몫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수세기를 살아온 뱀파이어 아담과 이브가 각자 미국 디트로이트와 모로코에서 살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불멸자들에게 권태로움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감정인지라 그들은 시종일관 무덤덤하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막아야했던 불가피한 찰나를 빼면 다투거나 반가운 이를 만나도, 좋아하는 일에 심취하거나 혹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급해보이는 구석 없이 느긋하다. 사람은 내뱉는 말의 어조나 속도에서 감정이 드러나고 몸짓과 표정에서 처한 상황을 읽을 수 있는데 그들은 그저 변함없이 느리며 고요하다. 억겁의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에겐 어떤 조급함도 없고 서둘러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런 삶이 온 몸에 배어 있다. 

이 삶의 속도를 너희도 한번 견뎌보라는 듯, 감독은 이브의 여동생 애바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떠한 사건도 만들어내지 않고 러닝타임 1시간을 느릿하게 흘려보낸다. 뱀파이어가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동안 화면에는 감각적인 음악과 미쟝센이 흐른다. 환상적이고 두려운 존재로 그려졌던 뱀파이어들은 이제 때에 따라 알맞게 사용할 수 있는 위조 여권으로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를 한다. 깨끗한 혈액을 정기적으로 구하기 위해 애쓰는데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기란 이제 어려운 일이다. 아담은 누구보다 우울하고 권태롭지만 유일하게 음악과 이브만을 사랑한다. 그러나 뮤지션으로서 어쩌면 가장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을 무대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다른 이를 통해 세기의 예술작품을 발표해온 뱀파이어들의 역사란 꽤 그럴 듯한 설정이라서 조금 애잔하기까지 하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면 안달이 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영영 아무 흔적도 남길 수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들은 괴롭겠지만 보는 나는 문득 '얼마나 홀가분할까'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는 두사람을 찾아온 애바가 아담의 일을 도와주던 인간을 산 채로 흡혈하면서 전환점에 접어든다. 똘끼가 충만한 애바는 아담과 이브의 권태롭고 잔잔하던 일상에 끼어들어 모든 걸 휘저어놓는다. 아담에게 스스럼없이 "Fucking boring" 같은 말을 내뱉는 망아지 같은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영화는 등장인물이 미친짓을 좀 해줘야 재미있는 법이다. 그러나 꽤 긴시간 자신만의 루틴과 생활환경을 구축해온 것이 무색하게 그들은 애바의 '미친짓'으로 인해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브가 살던 모로코로 두사람은 이주하지만 그곳에서 혈액을 구해주던 다른 뱀파이어마저 오염된 피를 마셔 사망하고, 그들은 막막한 상황 속에서 예의 그 느릿한 몸짓으로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한다. 

괴로워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발을 질질 끌며 걸어다니는 와중에도 아담의 귀를 사로잡는 건 음악이다. 그는 염세적인 탐미주의자 같다. 멍청하고 무례한 좀비(인간)들이 이 세상을 망치려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이 만들어낸 악기와 음악에 곧잘 심취한다. 그것은 앞서 사망한 뱀파이어 말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음악이 아닌 문학에 진심이었지만. 아담과 이브는 그간 많은 문화권의 나라를 떠돌아서인지 생김새와 상관 없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정체가 들킬만 하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저 나라에서 또 반대편의 나라로 여행하듯 살았다는 사실이 여러가지를 통해 섬세하게 비춰진다. 그들이 가진 책과 음악이 모호한 국적이나 스타일을 가졌던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 즈음 카메라는 꽤 긴 시간 동안 레바논의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들려준다. 아담의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녀의 노래가 미칠 듯한 허기를 잠시 잊게 해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도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마침 눈 앞에 나타난 한 연인이 좋은 표적이 된다.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우니 죽지 않을 정도로만 깨물어 변화시키겠다는 이브의 결심에 아담은 로맨틱하다며 힘없이 맞장구를 치고, 그렇게 좀비처럼 달려드는 그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아담의 대사 중 '생명의 존속은 균류에 달렸을지 모른다'는 말이 있었다. 어쩌면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인 존재이면서도 결국 생명을 연장하고 유지시켜주는'균'이라는 건 인간일 수 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제목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문장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어쨌든 그 의미는 중의적이다. 긴 시간 동안 오로지 밤을 걸어야만 하는 그들이 권태와 우울에 빠져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반드시 무언가를 사랑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것이 오직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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