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나지 않는 어둠을 무작정 걸으면서도 연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까지 쓸만한 단서를 손에 넣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간의 구성을 파악하는 생각뿐이었지만 계속해서 머리를 쓰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처음에는 무채색 속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색을 가진 두 장의 그림을 관찰하였고, 그다음은 벽과 타일, 천장을 보며 걸었다. 서른네 바퀴를 넘어설 무렵 연이 내린 결론은, 이 공간은 역시 뫼비우스의 띠처럼 완전무결하게 이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슬슬 지칠 기미도 보였으나 그의 호기심은 아직 닳지 않았고, 날카롭게 벼른 탐구심은 다시금 하늘이 변하는 성 앞에 그가 멈추도록 만들었다.




―액자를 치우면 어떻게 될까?




후발 주자인 누군가가 나타나도 변하는 게 없다면 지금껏 건드리지 않은 것을 건드리는 게 제일이다. 청명한 하늘을 응시하는 녹안에 합리적인 의문이 깃들었다. 그림은 두 개. 그렇다면 기회도 두 번. 이것마저 소용이 없다면 정말 굶어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죽는다고 나간다는 확증이 없으니 어쩌면 께름칙한 혓바닥에 잡아 먹힐 수도 있다. 힘없이 늘어진 몸뚱이가 머리끝부터 잘근잘근 씹어 먹히는 상상이 스치자 변화 없던 연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뒤편에 손을 걸어 액자를 잡아 뜯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나타난 것은.



"…역시 이게 정답이었잖아."



진작 해볼걸. 이렇게 늦게 떠올린 것이 허탈할 정도로 간단한 답이었다. 하늘이 변하는 성 그림을 치우자 사람 하나쯤은 쉽게 지나갈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자태를 드러냈다. 그는 애초부터 예술에는 관심도 없었고 기묘한 것을 존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툭, 하고 액자를 내던지자 바닥과 쇠가 부대끼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연은 눈길도 주지 않고 구멍으로 들어갔다.




***




"……"


어둠을 벗어나는 순간 찌르는 햇살에 눈이 시려 연은 손등으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누군가는 보는 순간 감탄할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정원에 산들바람이 불자 꽃잎과 나뭇잎이 살랑거렸다.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정원을 한번 훑어본 연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뭐에 대한 위화감이지? 걸음까지도 멈추고 눈을 굴려 구석구석 살핀 연은 일단 자기보다 먼저 도달한 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저택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어? 저게 뭐지."




연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일견 나비처럼 보였다. 샛노란 곤충의 형태를 한 것이 나폴거릴 때마다 종이가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짧은 순간 감을 잡은 연은 홀린 듯이 나비를 눈으로 쫓았다.



…분명 잘 만들어진, 관리자의 애정까지 느껴지는 화려한 정원은 생기가 없었다. 편지지로 접은 나비처럼 겉보기엔 제대로 갖춰져 있어도 모든 게 황량했다.




―바스락.




연은 그제야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풀을 밟는 소리가 아니다. 자세를 낮춘 그는 이미 확신을 하고도 잔디를 뜯었다. 그 사이에 핀 꽃을 땄다. 냉담한 시선이 숨 쉬지 않는 것들을 응시했다. 미약한 힘으로 쥐고 있던 손을 놓으면, 그것은 진짜처럼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떨어졌다. 자세를 바로 하고 일어선 연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더 넓게, 전체를. 정원은 사방이 가시덤불로 얽혀있어 나갈 수 없어 보였다. 흐음. 작게 콧소리를 낸 연은 이 정원에서 가장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앙의 분수로 향했다.




―펑!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연의 어깨가 튀었다. 고양이마냥 커진 눈으로 하늘을 보면 요란한 소리와는 달리 폭발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파편을 대신하듯 파아란 비닐이 꽃잎처럼 팔랑거리며 추락했지만. 연은 자신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비닐을 잡아 앞뒤로 돌려가며 확인하더니, 다음은 물 대신 비닐이 들어차 바싹 마른 분수 안을 살폈다. …토끼? 연은 분수에 빠진 토끼 인형에 손을 뻗었다. 귀엽거나 사랑스럽거나, 아니면 이런 곳에 자리한 인형에게 흉흉함도 느끼지 않은 채, 그저 의아한 마음에 미간을 좁히며 아무렇게나 토끼 인형을 건졌다. 보드라운 털 사이에 총총 박힌 새빨간 눈동자가 그의 속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도 느껴졌으나 그다지 신경 쓸만한 것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일이 연달아 벌어져 예민해진 거겠지. 연은 그리 생각하며 분수대를 따라 한 바퀴 빙 돌았다. 더는 아무것도 나올 것 같지 않아 창고처럼 생긴 건물로 향했다.




***




연이 창고의 문 앞에서 자세를 낮추고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는 한껏 곤란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붙들고 있었다. 상비하는 락픽(Lock Pick) 도구가 너절해질 정도로 잠금장치를 들쑤셨음에도 창고의 문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한 문을 못 열 리가 없는데. 같은 형태의 다른 문은 1분도 걸리지 않아 열어내는 그는 자신의 실력을 결단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상한 것은 이 문일 것이다. 연은 늘 그랬듯 자신의 사고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이 창고에도 무언가 괴이쩍은 힘이 깃들어 있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선선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까 있던 공간과 같은 메커니즘이라면 이곳에도 알맞은 공략 방법이 있으리라. 한껏 들쑤시고 다녀 지친 탓이었을까, 그는 순간의 휴식을 위해 창고 옆 그루터기에 앉았다. 그 순간.




우지끈!




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그루터기가 폭삭 내려앉았다. …하? 나무 밑동에 엉덩이부터 푹 빠져 얼빠진 꼴을 하게 된 연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실소가 흘렀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들뿐이다. 아직 남아있는 부분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그마저도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고운 미간에 내 천(川)자가 새겨졌다. 참자, 참아. 그 자세 그대로 짜증 나는 심경을 겨우 녹여내자 뒤늦게 어딘가 어설픈 소리였다고 생각했다. 바닥을 더듬은 연의 손이 나무 파편을 하나 주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의심은 더욱 확실해졌다. 짙은 고동색으로 나뭇결이 그려져 있으나 안쪽은 허연 우드락이다. 아무리 말랐다고 해도 성인 남성의 무게를 버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정말이지. 뭐 하나 진짜인 게 없네."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말이었다. 발치에서 폴짝대는 벌레 한 마리조차 홀로그램처럼 빛이 나니 이 안에 생명체라곤 자기 하나뿐인 것 같았다. 스스로가 웃긴 꼴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일어날 기분이 들지 않아 연은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덩치 큰 인간이 겁나지도 않는지 알짱대는 귀뚜라미를 응시하다, 작은 곤충이 구두코를 통과하는 모습에 깜빡, 하고 머릿속에서 전구가 켜졌다.



―신발은 통과해도 잔디에 올라가면 무게에 맞춰 흔들리잖아? 그럼 여기에 있는 걸로 감싸면 잡을 수 있으려나?



채집을 해도 큰 의미는 없을 테다. 그는 곤충에 관해선 문외한이었고, 애초에 곤충학자라고 해도 이곳에서 저걸 이용할 방도는 찾기 힘들 테니까. 그러나 호기심을 추구하는 것이 그의 성정이니 연은 자연스럽게 토끼인형과 함께 들고 있던 파란 비닐을 꺼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키자 코트자락에 붙어 있던 우드락 조각이 우수수 떨어진다. 가만히 기회를 노리던 연은 비닐로 귀뚜라미를 감싸 쥐었고.



"…으악."



단말마와도 같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다리 많은 것을 특히 두려워하거나 잡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닐 막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통통한 곤충이 손아귀에서 꿈틀대는 감각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매사에 담담한 연 조차 오소소 소름이 돋아 솜털이 쭈뼛 섰다. 연은 얼른 사방의 모서리를 한데 모아 손목에 차고 있던 머리끈으로 묶어 작은 보따리를 만들었다. 질색하는 얼굴로, 일단은… …일단은.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슬슬 저택으로 가 볼까. 저 안에서 나올 미지의 무언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니 가는 수밖에 없다. 타인의 정원을 헤집는 것은 굉장한 매너 위반이라고 생각하나 모조리 가짜이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저벅, 저벅. 최단 거리로 정원을 주파하는 연의 발에 영롱한 붉은 빛을 띤 꽃이 짓이겨졌다.



그 순간, 얼굴 옆을 스쳐가는 나비떼 덕분에 흠칫 발걸음이 멈췄다. 상체만 돌려 나비들이 날아온 방향을 보고, 다시 앞을 보면.



"…또 토끼 인형이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그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토끼인형 하나가 길을 막듯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마치 네 운명은 이런 것이라 위협하듯이 새빨갛게 물든 종이 나비가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게 금지. 팸플릿에 추가된 글귀가 떠올라 바싹 마른 얇은 입술을 축였다. 피식. 새는 웃음을 흘린 연은 손에 물감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나비를 펼쳤다. 분명, 이것에도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그 예상대로 편지에는 검은 물감으로 휘갈긴 문장이 있었다.



"잔디를 밟지 마세요, 라."



평소의 연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신경 썼을 문장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것은 모조리 가짜이며 어떤 생명도 머금지 않는다. 이미 죽은 것이기에 소생을 기할 수 없을 테지만 이런 조화에까지 신경 쓸 생각은 없다. 주어진 수수께끼들은 모두 누군가의 장난이며 꿈처럼 깨질 것들이니 연은 신경 쓰지 않고 분수에서 그랬듯이 토끼 인형의 머리를 잡았다. 그는 아직 의미를 알 수 없는 전리품을 그득 들고 저택의 현관을 열었다.

쓰고 싶은 걸 쓰고 그리고 싶은 걸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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