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선홍은 그 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임관 글이 창피해서도, 날이 더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화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전부, 끊기기 직전까지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오히려 미술관에서 봤던 작품을 묘사하라면 더 잘 할 자신이 있었다. 화진은 이른 점심을 먹었지만 배는 고프지 않다고 했다. 방학 때마다 가족과, 때로는 혼자 서울에 있는 할머니를 보러 온 적이 있어서 그런지 선홍보다 지하철에 익숙했다. 선홍이 공부한 게 무색하게도 화진이 앞장을 섰고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할머니 집에 가서 하루 자고 온다고 했어. 그것 밖에 방법이 없더라고.”


화진과 선홍은 스스럼없이 말을 놓았다. 화진은 고3이어서 선홍보다 나이가 많았다. 대입을 위해 매일 깨어있는 거의 모든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었고 모의전을 하는 시간만이 유일한 자유 시간이라고 했다. 자기 전까지 동영상 강의를 듣고, 쉴 때 잠깐씩 글을 쓴다고 했다.


“그래서 황제랑 싸웠을 때 확 나가버려야겠다 이런 말을 못 했어. 새로 모의전을 찾고 거기서 누군가랑 친해지고 이런 걸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거든.”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미술관에서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두 사람은 천천히 동선을 따라 이동했다. 화진은 조용한 목소리로 드문드문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선홍이, 어쨌든 숙제는 숙제거니와 어머니에게 보여드릴만한 증거를 만들어내느라고 필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쉼 없이 흐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홍이 필기를 멈추고 이 구역은 건너뛰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 어김없이 화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건륭이랑 전혀 모르는 사이야?”

“모르지. 내가 이 모의전 초기 멤버였는데 그때 글 몇 번 나눈 게 마음에 들었는지 2기부터 운영진으로 와달라고 했어. 같이 글 쓰고 가끔 회의하는 정도지,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몰라.”

“그렇구나.”


화진은 전시 중에 제일 커다란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선홍을 바라보며 코를 찡긋거렸다.


“그러고보니 나 인터넷 통해 누구 만난 거 네가 처음이야.”

“어, 나도.”


선홍은 어쩐지 쑥스러워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너 진짜 이름이 뭐야? 나는 오예지.”

“나? 나는.”


선홍은 불현 듯 자신의 본명을 생각해내었다. 절대로 그 이름을 알려줄 순 없었다. 황제가 자신의 목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 안 될 것 같았다. 선홍은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가능한 한 진실처럼 들리길 소망하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연규리야.”

“규리? 예쁘다. 완전 아이돌 이름이네.”


예지는 선홍의 손을 잡아끌었다. 커플처럼 보이는 사람 둘이 선홍과 부딪힐 듯이 스쳐지나갔다. 심장이 버거킹 와퍼를 주문하기 직전보다 더 크게 뛰었다.

미술관에서 나온 선홍과 예지는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몇 군데 둘러보고 들어갈까, 라는 얘기를 했다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덮치는 열기에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메뉴 판을 보고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같이 먹을 수 있는 과일 빙수를 골랐다. 예지는 어떨지 몰라도 선홍은 이 모든 게 새로웠고, 좋으면서도 긴장의 연속이었다.


“할머니 집 가기 싫다.”

“왜? 할머니랑 안 친해?”

“안 친하다기보다.”


예지는 키위와 파인애플, 연유가 섞인 곱게 갈린 얼음을 듬뿍 퍼 입안에 담았다.


“할머니가 아침잠이 없어서 일찍 깨거든. 그러면 성경을 펴놓고 읽으시면서 자꾸 기도를 해. 그게 싫어.”


아아, 선홍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참 잘 시간에 거실에서 누가 그렇게 중얼거리면 나라도 싫겠지. 할머니랑 같이 자는 게 그렇게 불편한데도 자신을 만나기 위해 그걸 감수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잠시 잊고 있던 쑥스러운 감정과 이유 모를 초조함이 올라왔다. 선홍이 그런 마음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예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 화제를 옮겼다. 선홍은 얼른 자신의 감정을 뒤로 밀어 넣고 예지의 그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둘은 빙수 한 그릇을 해치우고 카페 의자에 기대어 앉아 시시한 이야기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담임 선생님 이야기, 예지가 기르는 강아지 이야기, 모의전에 글을 잘 쓰는 회원 이야기, 싫어하는 과목 이야기,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 과제 이야기 같은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다. 이 정도로 길게 떠들고 웃었으면 목이 아플 법도 한데, 예지와 선홍 둘 다 물 한 잔 마시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지나가 있었다.


“어, 여섯시 넘었다.”

“아, 진짜 그러네.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같이 저녁 먹을래?”


선홍은 은근슬쩍 예지의 눈치를 보았다. 예지는 휴대폰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 안 될 것 같아. 할머니가 저녁 차려놓고 있을 거거든.”

“아...”


선홍은 미리 구입해둔 기차표 시간을 떠올려보았다. 혹시 몰라 넉넉하게 잡아둔 거라 지금 이동하면 저녁을 먹고도 마을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남았다. 역에 가서 취소를 하고 다시 구입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그릇을 반납하고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카페를 빠져나왔다.

여름의 저녁은, 저녁인 것만 빼고는 아무것도 저녁 같지 않았다. 아직도 사위가 밝았고 열기가 한 꺼풀 가셨지만 여전히 갓 깔린 아스팔트에서 김이 올라오듯 뜨거운 길 위를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알지? 거꾸로 타면 안 돼.”

“알겠어. 고마워. 너는 어떻게 가?”

“나는 저쪽으로 가서 버스 타면 돼.”


선홍은 어색하게 웃었다. 헤어지는 행위가 낯설었다. 현관에서, 교문 앞에서, 학원 건물 입구에서 몇 번이고 했던 것들인데 어쩐지 서울 바닥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이 새롭게 익히는 습관 같았다. 예지는 자리에 서서 선홍이 발걸음을 옮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홍은 여전히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기름칠을 할 때가 한참 지난 경첩처럼 끼익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해를 마주보며 걸어야 해서 눈이 부셨다. 양손을 눈썹 위에 올려 그늘을 만들어 지하철 입구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선홍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려놓으려다가 그 발을 뒤로 뻗었다. 양 발의 앞꿈치를 축으로 몸을 90도 돌렸다.

예지는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햇빛을 마주하고, 선홍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햇빛이 아니라 햇빛을 등에 업은 선홍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구부터 역까지 되게 멀다고 생각했는데 이목구비가 대충 구분되는 걸 보면 그렇게 멀지도 않았나보다. 선홍은 마주한 시선에 사로잡혀서, 에스컬레이터의 진입부를 막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예지를 쳐다보았다. 예지의 입초리가 천천히, 천천히 올라갔다. 동시에 눈꼬리가 비슷한 속도로 내려왔다.

예지가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환하게. 선홍은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달려가고 싶었고, 정확히 그만큼 메두사를 마주한 인간마냥 움직일 수 없었다. 두 기운이 척추 언저리에서 강렬하게 맞부딪혀 넘어질 것 같았다. 예지는 몇 초인지 모를 시간 동안 그렇게 웃는 얼굴로 선홍을 바라본 뒤, 좀 전에 자신이 말했던 버스 정류장이 있다고 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홍은 예지가 작아지고 작아지는 동안 계속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지만, 예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선홍만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잊고 하행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 황조는 멸망했다. 긴 시간 치밀하게 역모를 꾸민 대장군이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대장군은 새로운 황조를 세울 것을 약속함과 동시에 황제와 황태자는 사형에 처했다. 황후를 포함해 궁 내 여인들은 전부 폐위시켰으며, 선 귀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운영진은 황제의 사형일 2주 전에 황실 모의전 시즌 5 양 황조의 마무리 일정을 알렸다. 큰 역할을 맡고 있는 운영진들이 일정에 맞춰서 글을 올렸고 어떤 사람들은 2주 간 모르는 척 평화롭게, 어떤 사람들은 낌새를 눈치 챈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대장군 쪽에 붙어서, 어떤 사람들은 황제에게 여전히 충성을 맹세하면서 글을 썼다. 선홍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 사람에 속했다. 그래야 예지와 주고받는 글 어디에도 어두운 분위기를 드리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끝은 다가왔고, 운영진은 바로 그 날을 어김없이 지켜냈다.


고마웠어, 규리야.

나 다음 시즌부터는 수능 공부 때문에 못 할 거야.

운영진도

그만한다고 했어. 어차피 황제랑 싸우기도 했고.

잘 지내.


선홍은 고마웠어로 시작해서 잘 지내로 끝내는 그 글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럴 때마다 단어들 사이사이에서 황금빛 저녁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선홍은 다시는 주황색 고딕체를 쓰는 카페 회원을 볼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선홍은 잠이 들기 전에 늘 그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자도 여자를 좋아할 수 있냐고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이때까지 내가 본 드라마, 영화, 책, 공연 어디에서도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 같은 건 나온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관성적으로 접속하는 모의전을 배경으로 깔아두고 이런저런 키워드를 검색하던 어느 날, 청소년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마우스 커서 끝에 걸렸다. 선홍은 더듬더듬, 자음과 모음을 처음 배우던 어린 날들처럼 그 안에서 떠도는 말들을 익혀갔다. 여자도 여자를 좋아해. 여자도 여자를 좋아할 수 있대. 그걸 레즈비언이라고 해. 게이라고도 해. 동성애자가 사실은 그런 뜻이었어.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놀라우면서도 두려웠다. 알아도 되는 것을 알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고 알아가고 있는 게 사실은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번뜩번뜩 떠올릴 때마다 재빨리 모니터 우측 상단의 엑스 표시를 눌러 창을 치워버렸다. 그러면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마음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또래 친구들의 고민 상담글 같은 것을 읽을 때면 울컥울컥 화도 나고 내 이야기도 아닌데 눈물이 나기도 했다. 교회에 끌려간 친구들, 부모님에게 맞은 친구들, 집에서 쫓겨난 친구들 얘기가 제일 많았다. 누군가가 울면서 썼을 길고 긴 글을 읽을 때면 선홍은 예지와 만났던 그 날 저녁을 떠올렸고, 뒤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고 몇 번을 읊조리기도 했다. 그 날, 뒤만 돌아보지 않았더라도.

그런 글들을 몇 개고 읽다 보면 스스로가 집에서 나와 독립하고자 노력하는 친구들, 애인하고 싸운 친구들 얘기도 드문드문 올라왔다. 아주 오래 괴롭고 아주 많이 고되고 아주 짧게 행복한 이야기들이었다. 선홍에게는 일면식도 없는 그 사람들이, 같은 반 앞 옆 뒤에 앉아있는 같은 교복을 입은 같은 반 아이들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 종일 공부를 핑계로 컴퓨터 앞에 앉아 문제집을 펴놓고 친구들의 글을 읽었다. 모의전 글을 읽듯이 커뮤니티의 글을 읽었다. 읽다 보니 어느새 고민 이야기들 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적어놓는 게시판으로 넘어가게 됐다. 가장 최신 글부터 차례차례, 저녁이 맛이 없었다는 얘기부터 어제 간 카페 옆자리에 앉았던 언니가 너무 내 취향이라는 글까지 게시판에 있는 모든 글을 다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퀴어문화축제 후기 글을 발견했다. 홍대, 더웠고, 퍼레이드, 너무 좋았어요, 노래, 부스, 스티커, 목이 다 쉬었지만, 현금, 얼음물 등등의 단어들이 두서없이 선홍의 뇌에 들어찼다.


“엄마!!!”


선홍은 부엌을 향해 몸을 빼고 소리를 꽥 질렀다.


“왜 소리를 질러, 얘는! 집이 육십 평도 아닌데.”

“나 서울에 있는 대학 갈래!!!”

“붙기나 해라, 빚을 내서라도 보내주지.”


선홍은 다시 모니터 우측 상단의 엑스 표시를 눌러 창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느끼는 이 역동이 사라지길 바라서는 아니었다. 이 두근거림, 예지를 보러 갈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심장 박동, 이 설렘, 그 저녁의 심정, 이 기대, 이 불안, 이 초조, 이 벅참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선홍은 EBS 동영상 강의를 틀었다. 그리고 펼쳐만 놓은 문제집을 제자리로 당겨와 맞는 페이지를 찾아냈다. 그 날, 뒤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다. 그 날, 뒤돌아서 예지를 향해 뛰어갔어야 했다. 그 날 뛰지 못해서 지금 두 배로 뛰어야 한다는 것을, 선홍은 본능적으로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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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멘트 By. 케이

상편과 하편을 먼저 공개한 선홍빛 인생 중편입니다. 가장 먼저 하편을 올렸을 때 말씀드렸다시피 하편을 먼저 쓰고 상편과 중편을 쓰게 되어서, 상중하로 나뉘었지만 사실 하편은 그 자체로 일종의 완결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것이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상중편을 하나의 이야기로, 하편을 일종의 속편으로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쓸 때는 모의전 과거사를 공개하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으흑 으흑 하며 썼지만 쓰고 나서 한 달 가까이가 지난 지금 다시 보니 잘 썼네요. 나는 훌륭하다. 단편소설을 마감한 사람이 되어서 메달을 하나 획득한 기분입니다.

홍대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진행했던 것은 몇 년 전 일입니다. 그러니 나름대로 시간의 흐름에 맞춰서 쓴다고 쓴 것 같은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워낙 관찰력이 없는 인간이라 과거 일을 쓰려고 하면 늘 어렵더라고요. 왜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되어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지... 그리는 걸 좋아했더라면 좀 달랐을 것 같은데요...

좋아하는 사람들을 못 본 지가 두 달 가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체감하고 있고 그 중요성을 나날이 알게 되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군가를 봐야 해소되나 봅니다.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사적인 일로는 아무도 안 만난 걸 떠올리면 더욱 그렇네요. 5월에는 더욱 희망적인 관측이 발표되길 바랍니다. 여름에 마스크 끼고 에어컨도 못 키는 건 정말 끔찍하니까요. 늘 건강하시고,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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