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스크우드 엔딩 이후 제이크 시점 독백글입니다. 

* 직전 연성인 '비현실(MC 시점 독백글)'과 연계되는 내용입니다. 읽고 오시면 좋습니다.
https://posty.pe/sx0jqg

* 엔딩 시점 이후이므로 약간의 상상 가미와 설정 날조가 있습니다.




제이크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를 묻자면, 역시 단순하게 춥기 때문이다. 눈 오는 풍경의 아름다움이나 연말 휴가철이 되면 온 세상이 축제 분위기로 들썩이는 낭만적인 기류에 대한 공감도의 저조함은 차치하고라도, 환경의 혹독함이 가장 큰 이유라 하겠다. 마땅한 정착지 없이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 지도 오래됐다지만,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는 따뜻하고 아늑한 지붕을 바랄 수 없고 언제 어디서든 자취를 감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그로서는 추운 날씨가 반가울 리 없었다. 

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는 올해가 몇십 년 만에 가장 추운 겨울이라고 했다. 그에 동조하듯 아까부터 끄무레하던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이크는 무심하게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겨울…….'

혼자서 단조로운 길을 운전하는 운전사는 자연스럽게 사고의 방향을 요즈음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로 돌린다. 어차피 어떤 소재가 던져져도 사고의 흐름은 언제나 같았으리라.

'너는 겨울을 좋아할까.'

네가 좋아하는 계절은 무언가.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지만, 너는 겨울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올해 겨울은 무척 춥다는데, 혹시 감기 같은 거라도 걸리지 않았을까. 아프지 않으면 좋을 텐데. 너는 눈을 좋아할까. 하얀 눈이 예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어보고 싶다.'

당장이라도 휴대 전화를 꺼내서, 그날 이후 멈춰 있는 채팅창을 열어 메세지를 보내고 싶다. 제이크는 예전에, 그런 종류의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중국 요리 좋아하나? 생각해보면 상대 입장에선 정말이지 뜬금없는 타이밍과 맥락 없는 주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크는 그때도 이미 머릿속에 온통 한 사람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눈에 담는 모든 것을 그 사람과 연결시켜 버리곤 했다. 그런 질문도 실제로는 딱 한 번 했을 뿐이지만, 제이크의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모두 모아 정리한다고 한다면 몇날 밤을 새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때부터 제이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항상 한 사람을 생각했고, 그 사람이 궁금했고, 세상 모든 것이 그 사람과 연관 있어 보였다. 연락하지 못한 시간이 어느 새 너무 길어졌는데도 마음은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말았지만.'

제이크의 추격자들은 말 그대로 턱밑까지 닥쳐왔다. MC의 휴대전화를 비롯해 제이크가 접촉한 모든 사람들의 기록을 그들은 생각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단순히 그들을 따돌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광산에서의 화재 이후, 제이크는 자신이 죽었다고 추격자들에게 믿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추격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약속도 지킬 수 없게 된다.
사실은 아직도 안전하지 않았다. 몇 가지 속임수와 함정을 준비해두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안전을 보장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서서히 잊혀질 시간이. 제이크는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먼저 연락할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MC의 휴대 전화는 아직 감시를 받고 있을 터였다. 아무리 철저하게 암호화된 연락을 보낸다 한들, 연락이 왔다는 것만으로 제이크의 생존 사실이 발각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MC는 모른다. 제이크가 설명할 시간도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확신도 보증도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날, 나누었던 약속만이 남아 있었다.

약속. 반드시 만나자는 약속. 너는 그것을 아직 믿고 있을까. 제이크는 알 수 없었다.

제이크는 길에 차를 멈춰 세웠다. 한적한 도로 위에는 제이크의 차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고서 머리를 기대고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어 운전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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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달리고서야 겨우 찾은 가게는 앞쪽으로도 뒤쪽으로도 온통 산지, 숲길, 계곡뿐인 이 외딴 지역에서 딱 하나 있는 매장으로, 심지어 주유소까지 딸려 있어 오랜 운전에 지친 운전자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눈발은 내리기 시작할 때부터 더 거세지지도 약해지지도 않았으나 확실하게 쌓이고 있었고, 슬슬 운전이 힘들어질 무렵이었다. 

제이크는 후드와 머리칼에 조금 쌓인 눈을 털고, 카운터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등받이 의자가 있는 자리를 찾아 몸을 기대 앉았다. 창밖을 보자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리며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고 있었다. 조명 불빛에 반사된 하얀 눈이 부서져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눈.

사고는 다시 익숙한 흐름으로 귀결되어 간다.

너는 눈을 좋아할까.

제이크는 허공에 메신저 창을 띄워 MC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상대는 즉답을 해왔고,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 제이크를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고 현실이 아니었으므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제이크는 물 속에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에는 생소한 감정이었기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웠으나, 이제는 그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예전에 익숙해져 편해졌다고 생각한, 세상에서 고립되어 단절됐을 때의, 철저한 고독감. 

너는 알고 있을까. 제이크는 생각했다. 널 만나기 전까지 나의 세상은 비현실이었다. 

제이크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유령이었다. 이름을 지워야 했고 정체를 감춰야 했으며 존재를 숨겨야 했다. 세상은 제이크가 드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림자 밑만이 그에게 허락된 안식처였다. 친아버지조차 그의 존재를 모른다. 

가끔 제이크는 궁금해졌다. 나는 정말로 살아 있는 게 맞나? 제이크는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도, 나라는 존재를 알고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데, 기껏해야 네트워크에 떠도는 0과 1의 알고리즘만이 돋보여 신병을 추적당하고 있을 뿐인데. 이건 정말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은 오래 전에 죽었던 게 아닐까? 누군가는 웃기는 생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제이크로서는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을 만나고 나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사람은 그의 이름을 불러줬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궁금해했다. 제이크는 그 질문들에 성실하게 대답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유령으로 부유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네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유령은 살아 있지 않으므로 마음도 감정도 갖지 못한 채로 고독을 호흡 삼아 숨쉬며 부유한다. 그러나 제이크는 유령이 아니다. 고독 속에 빠질 수는 있어도 고독으로 호흡하지는 못한다. 제이크는 사람이고, 또한…… 사랑을 하고 있다.

제이크는 후, 하고 고르듯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온 이유에 대하여 생각했다. 여기는 MC가 한 번도 오지 않은 곳이지만, 그에 대해 생각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리움이 절정에 달한 오늘 같은 날에,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약간의 위험 정도는 감수할 만한 곳. 마지막 대화를 하며 서로 약속을 나누었던, 목적의 장소.


덜거덕.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제이크는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종업원이 커피 포트를 들고 서 있었다.

"커피, 리필해 드려요?"

막 주문 받아 나와서 테이블에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내용물이 가득 찬 커피잔을 흘긋 내려다보고 제이크는 사양의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종업원은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제이크의 건너 건너 앞자리에 앉은 여자 손님에게로 다가갔다.

후에 돌이켜 봤을 때, 제이크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순간.


- Fin.


그때 그때 좋아하는 것을 막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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