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4일까지 수요조사 중: http://naver.me/FqksYdgZ




0. 자간, 줄간격 등 내지 편집 스타일(A5 기준)



1. 공생

“네가… 너무, 싫어….”

“마찬, 가지야, 윽….”

허벅지 사이 깊은 곳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격통이 느껴졌다. 세게 물린 목덜미 역시 격렬하게 욱신거렸다. 두 군데에서 느껴지는 고통의 양상은 좀 달랐으나, 아픈 강도로 따지면 비스름했다. 벌어진 벤의 입술 뒤로 번쩍이는 이빨이 보였다. 날카롭고 희고 번쩍이는 게 꼭 공룡 같았다. 피가 질질 흐르는 고기를 크게 한입 뜯기 전의 맹수 같기도 했다. 그것도 아니면 아마존에 서식하며 사람 다리를 결딴낸다는 피라냐.

‘정말 꼴도 보기 싫어.’

레이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사실 이성이라는 얇은 한 꺼풀의 막 뒤로 들어가면 다른 생각도 느껴지긴 했다. 더 가까이 달라붙고 싶은. 짐승처럼 붙어먹고 싶은 심정. 뇌가 끈적하고 말랑해질 정도로, 시트가 눅눅해지다 못해 천이 다 해질 정도로 섹스를 나눴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레이는 자신의 감정을 절대 믿지 않았다. 벤 같은 놈과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감정이 아니었다. 전부 페로몬이 만들어낸 강력한 착시이자 또 하나의 장난질에 불과했으니까.

애당초 원했던 결혼도 아니었기에.

둘은 처음 마주하는 순간부터 서로를 싫어했다. 첫 만남은 아주 엿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첫인상이 아무리 별로라 해도 살다 보면 만회할 기회가 얼마든지 생기는데, 둘은 만나면 만날수록 깊은 골이 생겼다. 지각이동으로 인해 아프리카의 붉은빛 대륙이 점차 둘로 쪼개지듯이 벤과 레이 역시 점점 깊게 갈라졌다.

가끔 레이의 꿈속에서는 벤의 뻔뻔했던 작태와 재수 없었던 첫 만남이 안 팔리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생뚱맞고 과감하게 펼쳐졌다. 실제보다 더 생생해서 아주 가끔은 베갯잇을 적시기도 했다. 벤의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절로 화가 치밀었다. 한 모금 마신 물도 얹혔다. 먹은 식사는 소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입 밖으로 게워져 메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꿈을 꾼 날에는 이상하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간단한 업무를 처리하는데도 실수를 저질렀고, 좋아하는 친구와 메시지 한 점 나눌 틈이 없이 바빴고, 잘 쓰던 물건이 꼭 망가졌다) 두 배로 끔찍했다.

오르가나 가문이 연 자선 파티가 아니었으면, 나에게 일어난 끔찍했던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나랑 저 자식이 만나는 일 따윈 절대 없었을 텐데.

레이는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


레이는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역시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부모 밑에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성장했다. 부모님은 싸울 때도 많았지만, 사이가 좋을 땐 냄비 속에서 펄펄 끓는 버터처럼 느글느글한 향기를 피우는 다정한 양친의 모습을 했다. 그리고 레이를 잘 챙겨주었다. 집은 그렇게 부유하진 않았다. 다른 집처럼 여러 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도(차고에 놓인 차는 겨우 90년도에 출시된 볼보 한 대였을 뿐이다), 넓은 마당에 담장이 딸린 2층 집에 살지도 않았지만,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절약하며 살면 언젠가는 더 나은 미래가 오리라 상상하는 사람들이었다. 3인으로 구성된 작은 핵가족은 서로를 살뜰히 챙겼다. 겨울 휴가철에는 산악지대로 캠핑카를 빌려 캠핑을 갔고, 여름 휴가철에는 해안가의 작은 콘도를 빌려 며칠 쉬며 계절의 정취를 느낄 정도는 되었다. 전부 레이가 열네 살 되던 해 전까지 벌어진 이야기였다.

우연을 빙자한 잔인한 현실이 레이를 향해 덮쳐왔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양친이 사이좋게 세상을 떠났다. 차에 치인 건 레이의 부모였지만 레이야말로 땅에 쓰러져 비실댔다. 어린 나이에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이었다.

레이는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넓은 장례식장 땅 위엔 두 개의 구멍이 파였고 관이 차례로 내려갔으며 곧 붉은 흙이 덮였다. 하품이 절로 나오는 목사의 추도사를 들으며 레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맨 앞줄에 앉은 사람은 오로지 그녀 혼자뿐이었다. 부모님에겐 형제가 없었다. 레이를 돌봐줄 누군가도 딱히 없었다. 그나마 부모님이 들어둔 신탁이 있었기에 성인이 될 때까지 드는 비용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일단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이 레이에게 가장 큰 문제로 작용했다. 다행인 점은 레이는 학업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는 사실. 레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레이가 직면한 사정을 대단히 안타깝게 여겼다는 사실.

이러저러하게 소개받은 청소년 후원 재단에는 꽤 많은 후원자가 있었다. 아동복지국에서 레이를 맡을 위탁가정을 알아봐 주었지만, 사실 위탁가정으로 들어가기엔 레이의 나이가 조금 많은 편이었다. 맡는 사람도 맡겨지는 사람도 대부분은 예민하고 비뚤어진 사춘기 나잇대 보다는 훨씬 어린아이가 오길 희망했다. 레이 역시 자신보다 정말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아동이 대신 위탁가정에 들어갔으면 하고 바랐다. 좀 더 솔직한 속내를 털어보자면, 부담스러운 건 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탁가정이 원하는 친절을 겸허히 수용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재단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레아 오르가나라는 여자는 레이의 심정을 전적으로 이해했고, 그녀에게 새 가정 대신 돈과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레이는 재단의 지원으로 적당한 ─ 너무 비싸지 않은 ─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해 내내 3년간 학교 기숙사에 붙어살았다. 물론 성적표에 적힌 알파벳과 교내와 살던 지역 내에서의 평판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원 아동이 후원자에게 감사의 의미를 표할 방법은 단 하나, 좋은 성적 말곤 없다. 레이는 이를 악물고 독하게 굴었다. 다들 레이에게 경외를 표하고 좋아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무서워했다.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 저 정도로 노력할 필요가 있냐며 비야냥 대는 타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레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든 감정을 손바닥에 담았다. 눈앞에 세워진 깎아지를듯한 벼랑은 단단한 주먹으로 잡고 오를 수 있다는, 여차하면 손톱이라도 세울 수 있다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스스로가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눈에 고인 눈물 따위는 손등으로 닦아내면 그만이었다. 레이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비루한 손바닥을 펼쳤을 때, 먼지 한 톨이라도 좋으니 스스로가 무언가를 쥐고 있길 바랐다.

벤 솔로와 처음 만났던 시절,

그때는 레이가 한참 어느 대학을 가야 좋은지 알아보던 시절이었다. 교내진로상담실의 선생과 치열하게 미래에 대해 의논하던 시기였다. 임시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으니 거의 성인이라 볼 수 있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레이에겐 정치인에게 투표할 권리도 무엇도 없었다. 레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덜 자랐고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애송이일 뿐이었다.

재단에서는 매년 한 번 언론과 투자자를 초청하고 성과에 대해 발표하며 후원을 받는 자선 파티를 주최했다. 열일곱의 레이. 훌륭한 성적과 나쁘지 않은 평판 속에 좋은 성적을 보이고 수많은 사회활동에 참여했으며, 아이비리그가 코 앞인 레이. 재단은 타인의 재산을 받아 어떤 목적을 위해 굴리는 곳이다. 당연히 재단의 성과를 보여줄 만한 무언가를 세간에 내놓아야 했고, 결과를 보여줄 만한 사람으로 레이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받은 것이 있으니 가는 것 역시 있어야 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레이는 삶의 이치와 진리를 잘 알았기에 재단의 초청에 흔쾌히 응했다. 그녀는 짙은 선이 잡히도록 빳빳이 다림질한 교복을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모두 레이를 바라보며 훌륭한 후원 아동의 성장 예시라며 손뼉을 쳤다.

레이는 타인이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건 간에 전혀 주눅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빚 한 톨 없는 사람처럼 결백하게 행동했다. 고개를 쳐들었고 빛나는 눈으로 먼 수평선을 응시하며 파티장 안쪽을 돌아다녔다.



2. just the two of us


레이는 한동안 우주의 변두리에 있었다. 누구는 끝이라고 하고 누구는 가장자리라고 하고 누구는 쓰레기라고 부르는 장소에서. 당연한 말이지만 루크의 심부름이었다. 레이는 원래 항상 한곳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어딘가를 향하여 이동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무처럼, 발을 디디고 선 땅에 굳건히 뿌리내리기를 원했다. 콤플렉스 탓이었다. 가족을 비롯한 근원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상실감은 그녀의 가장 큰 콤플렉스이자 두려움이자 적이 되었다. 그녀의 스승인 루크는 일부러 레이를 바깥으로 내돌렸다. 겁을 떨쳐버리고 마음의 속박을 끊어내라는 의미에서. 레이는 붉게 타오르는 행성과 흰 얼음으로 이루어진 행성과 푸른 바다로 가득한 행성을 차례차례 밟았다. 스승의 곁에서 오래 머무를 기회는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


벤은 사원 안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수행이 연유였으나 실상은 갇혀 지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감시하는 사람은 혈육이자 스승인 루크였다. 벤은 뱃속의 태아 시절부터 어둠의 유혹을 느꼈다. 밤이 다가오는 순간이 제일 두려웠다. 아침이 다가와 눈을 떠도 마찬가지였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또렷한 악의가 아이를 지배했다. 벤은 잘 울지 않았고, 말이 많지 않았고, 다른 아이처럼 마냥 해맑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격렬하게 요동치는 마음속의 비명과 잔인한 충동에 몇 번이고 굴복할 뻔했었다. 들여다보던, 맑고 푸른 물이 갑작스레 붉은 핏빛으로 변해 뒷걸음질 치기도 했다. 포스를 제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선과 악의 사이에서 내내 갈등하고 흔들리는 어린 벤을 지키는 길은, 루크가 바로 옆에 붙어 있어야만 가능했다.


*


루크 스카이워커는 은하계의 모든 사람이 알다시피 마지막 남은 제다이이자 전설이었다. 레이에게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스승이었으며 벤 솔로에게는 혈육이기도 했다. 루크가 남들이 자신을 두고 내리는 평가를 달가워하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명백한 사실이었다.


*


루크를 제외한 다른 제다이는 오래전에 죽었다. 제다이가 남긴 흔적은 누군가의 발아래에서 파릇한 봄 새싹을 틔우고 있을 테다. 제다이의 목은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절반으로 분리됐다. 천년이 넘는 세월의 나이테를 간직했던 사원과 책이 불에 탔다. 고서적은 활자로 지식을 남기겠지만 썩고 구멍 난 고서적과 시신 따위는 기껏해야 거름 이하도 이상도 되지 못한다. 전통에 마침표가 찍혔다.

그러나 루크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자신을 제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제다이가 멸망했다는 사실은 그 역시 진실이라 믿었지만.

그가 수십 년간 치열하게 수행을 하고, 누군가를 베어 넘기고, 동료를 지키고, 때로는 소중했던 사람을 잃어가며 내린 결론은 제다이란 낡아빠졌고 우주의 균형을 깨어 소용돌이에 밀어 넣을 존재란 것이었다. 그것도 운명이라는 핑계를 들어가며. 그는 포스가 에너지 사이를 지키는 거대한 균형이라고 믿었고 제다이가 존재하는 한 시스도 반드시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제다이가 아니었다. 아닌 채로 지냈다.

루크와 레이와 벤. 한 명의 스승과 두 명의 제자.

루크는 스승이었고 벤은 그의 첫 제자였으며 레이는 그 다음 제자였다.

셋은 얼핏 보면 괴이쩍은 관계로 보였다. 각자 스승과 제자라는 위치에 놓여 있지만 나름 평등하게 지냈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더는 섬겨야 할 활자와 과거의 인습이 없었기에 셋은 무엇보다 자유로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빼앗긴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제다이 오더를 대신하기라도 할 듯이 포스가 그들을 아주 강하게 속박했다.

놀랍게도, 밀도 높은 포스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해도 벤의 감정을 알아채기란 어려울 것이다. 벤 역시 자신을 제다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가 교육받은 방법은 루크가 받은 교육과 똑같았다. 루크의 스승으로는 오비완 케노비가, 그 위에는 두쿠 백작이, 그 위에는 요다가 있었다. 싫든 좋든 루크는 두 제자를 제다이의 전통적인 교습법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면 위험인자로 낙인찍던 제다이 오더의 방식은 벤을 겉보기에 무감해 보이는 인물로 성장시켰다.

벤의 눈동자는 항상 젖어있었다. 시선의 끝은 늘 투박했기에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지 좇아가도 알아내기 어려웠다. 고저 없이 평이한 목소리는 가끔 대화 시 졸음을 유발했다. 화가 나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도 벤은 항상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을 내보이지 않았다.

레이는 그와 정반대였다. 눈물이 많고 잔정이 많았으며 가끔은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너무 과몰입해서 임무에 실패할 뻔했던 위기도 있었다. 레이의 눈동자는 기쁨과 슬픔을 그대로 반영하며 크게 일렁였고, 목소리는 때에 따라 날카로워졌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비탄에 젖었다.

루크는 싫은 소리를 굉장히 자주 하는 스승이었으나 둘의 성격에 대해서는 딱히 잔소리하지 않았다. 사실 개개인의 성격적인 부분은 말로 고치라고 백 번을 얘기해도 뚝딱 고쳐지는 게 아니니, 어쩌면 당연하였을지도.


*


레이는 코러산트에 뜬 태양이 저물어갈 때 행성 위에 발을 디뎠다.

찬란했던 사원은 과거의 전쟁에서 전부 파괴된 지 오래다. 이후에 세워진 사원은 루크가 폐허 위에 하나하나 깨진 암석을 쌓아 올려 만든 새로운 사원이었다. 얼핏 부실해 보이는 작은 건물은, 태양과 달이 동시에 빚어내는 흐릿한 빛무리에 파묻혀 한쪽은 윤곽조차 없었고 한쪽은 지나치게 밝았다.

야트막하게 튀어나온 둔덕 그림자 사이에 벤 솔로가 서 있었다. 그 역시 사원처럼 반쪽은 어둠 속에, 다른 반쪽은 빛 속에 놓였다. 멀리서 본 벤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요했고 차분해 보였다. 깊은 흉터가 패인 오른쪽 얼굴에 박힌 눈동자는 환한 빛에 푹 잠기자 맑은 주황색 보석처럼 반짝였다. 가느다란 주홍의 빛이 점차 연한 분홍으로, 타는 노란색으로, 푸른색으로, 종내에는 회색이 되어 시야에서 영영 사라져버릴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레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물끄러미 눈앞의 남자를, 사형이자 친구이고 유일한 연인인 남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침묵이 깨질 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굳이 목소리의 형태를 빌려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벤이 처음으로 발걸음을 떼었을 때가 새로운 둘의 시작이었다.

가장자리에 밀려나 있던 둘의 우주가 점차 순환하며 가까워진다.


*


루크의 옷가지를 갈무리한 사람은 벤이었다. 그는 스승이 사라진 자리에 유일하게 남겨진 로브를 집고는, 아직 온기가 채 식지 않은 거대한 흰색 암석 위를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서 있었다. 겨우내 함박눈을 몸으로 받아내며 묵묵히 수행하는 소나무처럼. 벤은 레이가 행성에 발을 디딜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꼿꼿이 서 있었다.

레이는 벤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벤의 눈이 보였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레이는 점차 가깝게 그에게로 향하며 이질감을 느꼈다. 한때는 속내를 읽을 수 없어 어렵게만 생각했던 그였다. 눈동자에 아주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혼돈과 다소의 절망, 외로움, 담담함, 상실감, 그리고 묘한 해방감이 깃들었다.

“느꼈어.”

오로지 단 한 마디만이 레이의 입에서 떨어졌다. 깊은 곳에서 겨우 꺼내 올린 마음이었다.

“그래.”

“나는,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아.”

레이는 말을 더듬었다. 언젠가 낳아준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때도 이러지 않았다. 아마 문장을 만들 때 또박또박 발음할 수 있게 된 이래로는 최초일 것이었다. 맞물리지 않는 자음과 모음의 울림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실수를 믿을 수 없었다. 벤은 레이가 떨리는 성대로 말을 끝낼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루크는 편안하게 떠났어. 갈 시간이 됐거든.”

벤은 자신보다 한 뼘이 더 작은 레이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굵고 두툼한 벤의 손가락 사이로 레이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감기며 흘렀다.

레이의 몸이 앞으로 느릿하게 기울어졌다. 어깨에 감겨있던 작은 짐 보퉁이가 건조한 흙바닥 위에 떨어지며 작은 먼지 바람을 일으켰다. 벤은 레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거절하지도 않았다. 마른 등이 조용히 들썩였다. 흰색 상의의 어깻죽지에 거대한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다. 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워했어.”

‘아주 오랫동안.’

모호한 말이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레이의 팔이 벤의 몸을 세게 틀어 안았다.



3. 소문들

언어라는 것은 육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에 쥘 수도 없는 일종의 공기와 같다. 그런데도 한번 입 밖으로 내뱉으면 주워 담기 힘든 데다, 발도 실체도 없으면서 퍼져나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빠르다. 굳이 직접 보고 들을 필요도 없다. 누군가의 혀끝이 지겨울 정도로 언어를 재생산해서 퍼트리기에. 머리가 두 개 이상만 모여도 언어가 오고가는 세상이다. 주제는 지나칠 정도로 다채롭다. 어느 행성의 은행은 암암리에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어 금리를 더 많이 쳐준다던가, 비밀스럽게 제다이 강습을 하는 은하계 학원에 대한 말, 빠르게 발전하는 우주선의 주행속도, 죽은 저항군의 숫자, 중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도망자들, 아주 가끔은 새로이 발견된 채굴 광산이 상권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나름 건설적인 이야기도.

다만 요새 수많은 은하계 신문이 첫머리로 실어 내보내는 기사와 입에 오르는 주제에는 경이로울 정도로 뚜렷한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다루는 대상. 그 대상은 한때 퍼스트 오더를 통치하던 스노크의 제자였으며, 결국은 스노크를 베어버린 뒤 직접 퍼스트 오더를 통치하기 시작한, 두 번째 수프림리더 카일로 렌에 대한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사실이 아닌 소문으로 분류되었다.

입자처럼 얇고 보이지 않는 소문은 카일로 렌이 처음 스노크를 두 동강 내었을 땐 속삭이는 밀담의 형태로 천천히 번지더니, 그가 수프림리더가 되어 은하계 곳곳을 부수기 시작하자 목청을 돋구고는 날개가 달린 듯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스노크의 죽음과 함께 한 계급 승진해 이인자가 된 아미티지 헉스와 카일로 렌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모든 행성마다 거대한 안테나를 설치해놓고 동시 방영하는 것처럼 소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인간, 토그루타, 몬 칼라마리, 티스피아스인……. 모두 카일로 렌의 최근 근황에 관해 많은 추측을 했고 깊은 대화를 나눴다. 카일로 렌이라는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에 관해서. 포스.

카일로 렌이 소지한 능력은 그를 더욱 특출나고 위압적인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으며, 사용자인 본인보다 더 널리 은하계에 명성을 얻고 있었다. 타인이 무엇을 보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듯 마음을 읽어내기로 유명한 카일로 렌이 어쩌다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이미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은하 곳곳에서 추측하고 토론하는 장이 열렸다. 목소리는 아주 작은 속삭임에서부터 아랫배에 힘을 주고 토해내는 우렁찬 고동까지 다양했다. 모든 이야기란 궁금증을 가장한 경멸이었고 친절함인 척 위장한 비웃음이었다.

정말 포스가 실존하느냐, 제다이와 시스는 사실 잘 훈련된 사기꾼 집단이었다, 저항군과 함께 있다는 ‘최후의 제다이’ 역시 저항군이 세를 늘리기 위해 퍼트린 헛소문이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막연한 이야기만 어지럽게 떠돌았다. 말은 입을 통과해 귀를 꿰었다가 머리 어딘가에서 부닥친다. 남과 나를 통과해 크게 부풀고 다시 터진다. 대부분의 소문은 아주 작은 하나의 사실에서 시작하여 거대한 거짓으로 부풀려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무엇이든 간에 기저에는 진실이 있다.

카일로 렌은 더는 수프림리더가 아니었다.


카일로 렌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한 솔로다.

카일로 렌이 수프림리더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다.

카일로 렌이 저항군 수중에 사로잡혔다.

카일로 렌이 부하였던 헉스에게 배신당했다.


풍문의 근원이 어디에서 발화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분명히 카일로 렌이 몸을 담은 퍼스트 오더에서 나온 이야기일 텐데, 퍼스트 오더는 나오고 싶다고 해서 문을 활짝 열고 태평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으며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역시 전부 기밀 사항으로 취급되었다. 물론 말만 기밀이었지 은하 곳곳에서 몰래 거대한 암흑조직의 정보를 사고파는 이들은 있었지만. 낡은 시장마다 자리를 편 수상한 이에게 일정 크레딧을 내밀면, 수프리머시에 오를 수 있는 승무원의 숫자나, 퍼스트 오더가 은밀히 손을 뻗친 행성의 목록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기밀이 어떻게 ‘기밀’인지 알려면 당연히 누군가가 퍼트려야만 한다는 첫번째 전제가 주어진다.

그러니 카일로 렌에 관한 이야기 역시 누군가가 퍼트린 게 분명했다.

트루퍼일까? 새하얗고 부실하기만 한 어떤 헬멧이 퍼트린 이야기였을까?

트루퍼는 원래 기계에 가까운 집단이다. 트루퍼가 소문의 근원이라 보기엔 가능성도 작았고 신뢰성은 더 낮았다. 저항군에까지 카일로 렌의 최근 소식이 흘러 들어갔을 때, 핀은 자신처럼 퍼스트 오더를 배반하는 행보를 선택한 트루퍼가 있을 수도 있으나 확률 자체는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납치와 세뇌를 통해 ‘만들어지는’ 퍼스트 오더의 트루퍼는 독백할 수 있는 능력을 제거당한 반 생명체이자 반 드로이드였다. 핀은 정말 특이하고 유일에 가까운 경우였다. 필연이건 우연이건 간에 같은 일이 또 벌어졌을 거라 바라는 일은 요행을 노리는 도박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스톰 트루퍼의 헬멧을 버리고 탈출하여 결국 스타 킬러 베이스를 폭파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영웅의 이야기는 퍼스트 오더와 저항군 내에선 파다하게 퍼진 얘기였지만, 기실 은하계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또 다른 트루퍼의 행위였다면 클론의 붕괴라는 이름을 달아 군대의 무용론이 퍼져나갔을 것이 당연했다.


카일로 렌을 주제로 삼은 소문이 저항군 내에서 절절 끓던 역사적인 순간, 레이는 막 청소를 끝낸 청소부의 마대자루처럼 열린 문틈 사이에 삐딱하게 몸을 세웠다. 모두 흥분된 목소리로 원형의 공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전 기지를 짓던 도중 발생한 폭발 사고로 양팔에 금색 합금 대신 광택 없는 붉은 고철을 단 C-3PO의 목소리가 그중에서도 제일 시끄러웠다. “크나큰 기쁨입니다. 우리로서는 말할 수도 없이 크나큰 기쁨입니다!” 눈치 없음의 현신과도 같은 C-3PO는 뒤쪽 의자에 심란한 얼굴로 턱을 괴고 앉은 자신의 주인 ─ 레아 오르가나 장군 ─ 을 모르는 듯싶었다. 오로지 R2-D2만이 레이의 발치에서 고개를 연신 돌려가며 레이와 레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레이는 양손을 우묵하게 세우고 턱을 괸 뒤 고민에 잠겼다. 소문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카일로 렌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사실이다. 레이와 카일로 렌은 포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둘은 단순히 포스로 연결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나누었다. 짙고, 어떨 때는 열정적이고, 시원하게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사적인 여러 일을. 레이가 원해서 시작했을 리는 만무했고, 이미 고인이 되어 포스와 하나 된 스노크의 농간으로부터 자연스레 그들의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그 덕에 레이는 카일로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선연하게 느낄 수 있는 유일의 인물이었다. 지금의 카일로 렌은 어디에 있는지 레이도 느낄 수가 없다.

포스가 차단되었다.

카일로 렌 본인이 원했거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인해 차단되었거나.

혀에서 혀끝을 타고 다니던 이야기는 결국 단물이 다 빠졌다. 목소리가 잦아들며 저항군이 한둘 자리를 떴다. 다들 맡은 임무가 있었다. 소문이라는 훌륭한 하나의 대주제 앞에서 신나게 떠들었지만, 전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순간 ─ 그리고 이야기의 신선도가 썩은 달걀처럼 쉽사리 뭉개진 순간 ─ 바깥으로 발길을 돌렸다. 드로이드마저 몽땅 어딘가를 향해 나가 버리자 텅 빈 원형의 회의실에는 레이 혼자 남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레이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4. 취향의 말로


1


요리 하기 귀찮아하는 맷은 평소 혼자 있을 때 식사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마트 표 냉동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데워먹곤 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냉동실에서 눅눅해진 피자를 꺼낸다. 겉의 종이를 벗겨내고 내용물만 쏙 뽑아낸다. 딱딱한 빵을 그릇에 올리고 전자레인지의 버튼을 한 번 누른다. 피자 아이콘이 그려진 오른쪽 위 구석의 작은 버튼을. 3분 뒤면 매캐한 올리브 향과 페퍼로니 향기가 풍기는 즉석 피자가 완성된다. 피자는 커다랗지만 맷 역시 큼직한 몸뚱이를 가졌기에 한두 조각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다. 식간 사이의 가벼운 간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식사를 때우려면 레인지 조리를 두 번 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면 6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한 번의 식사를 위해 대기하는 그 짧은 시간도 채 안 되는 차이. 시곗바늘이 흘금 움직이는 짧은 차이로 인해 둘의 관계가 뒤바뀌었다. 맷과 벤은 겨우 오 분 차이의 쌍둥이 형제였다. 초로 치자면 300초.

맷은 제 손에 들린 피자 상자를 볼 때마다 종종 그 생각을 했다. 5분만 더, 내가 300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형이 되는 건데… 하고 말이다.



2


맷은 옷장을 탈탈 뒤집어엎었다. 꺼낼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내용물을 전부 빼앗긴 흰색 붙박이 옷장은 사라진 내용물과 함께 본연의 목적 역시 빼앗겼으므로, 그저 거대하고 얇은 나무 쪼가리의 집성체에 불과했다. 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철제 서랍과 바구니 덕에 바닥이 너저분했다. 옷장의 상단에 장식품처럼 올려져 있었거나 바닥 구석에 박혀 있던 수많은 과거가 맷을 습격했다. 어렸을 때 신었던 빨간색 축구화도 있었고(지금 맷의 발에는 절대 맞지 않는), 목 부분이 누렇게 변색이 된 남색 보이스카우트 제복(안 그래도 몇 개 없던 배지가 시간이 지나며 대부분 떨어져서 더욱 초라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옆 옆집 할머니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떠주신 파란색 목도리(너무 감사했지만, 받을 때부터 보풀투성이라 오래 두르고 있으면 재채기가 나왔다)가 맷의 손에 걸려 나왔다. 맷에겐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맷은 저것을 헤집고 이것을 들었다가 다시 저것을 놓았다가 혼자 분주하게 날뛰었다.

반짝, 맷의 눈에 빛나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까맣게 빛나는 검은 정장 소재. 꽤 괜찮아 보이는 물건이었다.

‘찾았다, 인턴 면접용!’

맷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한때 그들이 키웠던, 털에서 윤기가 잘잘 흐르던 닥스훈트 비비와 닮아 보이는 물건이 맷의 손가락 끝에 딸려왔다. 구린 냄새를 옷자락 끄트머리에 질질 묻히고서는.

실패. 꽝. 망한 로또. 13일의 금요일, 그리고…….

모든 저주와 악담과 각종 신화와 낱말들이 맷의 머리 어딘가에서 툭툭 빠져나와, 그의 눈앞을 흐릿하게 치고 지나갔다. 집어 올린 것은 맷이 원하던 면접 정장이 아니었다. 사실 면접 정장 역시 구린 건 마찬가지였는데 그나마 맷이 가질 수 있는 선택지 중에선 멀쩡한 축에 속했다. 그래서 면접용 정장을 바랬던 건데!

맷이 집어 올린 천 쪼가리는, 물론 정장은 정장이었다. 다만 십대 후반, 그가 고등학교 프롬 파티를 갈 때 입었던 검은색 정장이었다. 그 시절의 맷은 아주 ‘푸짐했다’. 희고 두둑한 뱃살이 한 발을 내밀 때마다 무릎을 가리며 출렁댔고 목에 낀 지방은 무려 세 겹이었다. 당시 맷의 별명은 베이컨이었다. 베이컨이라 말하면 왠지 성격 딱딱하고 비쩍 마른 사람에게나 붙이는 별명이 아닐까 싶겠지만, 먹기 좋게 말리고 잘라 가공한 육포가 아니라 베이컨이 되기 전의 퉁퉁한 고기 상태를 일컫는 말이었다.

재킷과 바지를 탈탈 털자 고운 먼지가 날렸다. 겨우 꺼낸 정장 모양은 원피스라고 해도 믿을 만한 수준이었다. 과장을 보태서 50인치도 넘는 것 같은 거대한 허리. 지금의 맷이라면 형제인 벤과 함께 나란히 다리를 꿰어 넣을 수도 있는 옷. 과거의 신체 기록이 현재의 맷을 꼭지 돌게 만들었다.

“이런……. 말도 안 돼.”

그나마 찾아낸 것이 이 꼬락서니라니! 맷의 무릎이 금방이라도 방에 깔린 연미색 카펫과 키스를 할 것 같았다. 울고 싶었다. 소리 지르고 카펫을 긁고 침대 위에 몸을 날렸다가 다시 풀쩍 일어나서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맷은 겨우 마음을 다잡고 자신을 지켜냈다. 맷, 참아야 하느니라. 여기서 이 정도로 무너지면 안 된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니까.

맷은 바닥을 수놓은 옷가지 몇 벌을 걷어찼다. 방문을 겨우 열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의 끝, 맷의 방 반대편에 맷이 향하는 목적지가 있다.

바로 벤의 방이다.

맷이 가끔 형제인 벤에 관해 이야기 하면 사람들은 놀라곤 했다. 형이라는 존재 여부나 형이라는 인간에 대해서가 아니라 둘의 거주 형태에 놀랐다. 둘은 같이 살았으며, 또한 부모님과 함께, 더 정확히는 부모님께 얹혀서 살았다. 그들은 독립하지 않은 캥거루 신세였다. 줄곧 한 지역에서 살았고 대학 역시 같은 도시 시내에 있었다. 이 사실은 내놓고 얘기하기도 좀 민망한 소재였고 창피함과 짜증을 동시에 수반했으나, 무언가 타인의 손길이나 물건을 빌려야 할 일이 생길 땐 간편해서 좋았다.


*


낮이었는데도 벤의 방에는 블라인드가 전부 내려졌다. 전등 또한 꺼져 있었다. 사방이 컴컴했다. 맷은 벤의 방 전구 스위치를 올렸다. 플라스틱이 딱, 하고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건 맷의 착각이었다. 혹은 아주 간절한 바람이었거나. 불이 켜지자 침대 위에 구겨져 있던 이불이 갑작스레 부스럭대며 크게 점프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에는 벤이 있었다. 그의 손에는 번쩍이는 핸드폰 액정 화면이, 귀에는 끈이 없는 흰색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벤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노크도 없이 남의 방에는 갑자기 왜?”

맷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 올렸다. 한쪽 눈꼬리가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맷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거나 화가 났을 때 나타나는 일종의 도식이었다. 인체의 신비 덕에 눈꼬리가 떨릴 때 입꼬리 역시 한쪽만 길게 따라 올라가서 덜덜 떨렸다. 오지랖 넓은 사람과 마주했을 때면 마그네슘 꼭 챙겨 먹고 다니라는 잔소리를 듣는 얼굴.

벤은 길게 하품을 하며 귀에 꽂힌 이어폰을 뺐다.

“남의 방에 들어오려면 노크는 해야지. 그게 매너 아니겠어?”

맷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오늘은 약속이 없나 봐. 없는 줄 알았어.”

“사람이 없으나 있으나 노크는 해야 하는 거라고, 맷.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에 한참이나 말씀하셨던 내용 같은데.”

어머니. 레아. 그들의 어머니는 엄격했고 깐깐한 훈육 방식을 고수하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어쩔 땐 무서운 어머니. 어머니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맷의 몸에 오한이 들었다. 등줄기에 땀이 맺히는 기분이 들어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야?”

어린 시절부터 시종일관 쌈박질을 해대고 물어뜯었지만, 형제라서 그런지 가끔 서로 가려운 어딘가를 긁어줄 때가 있다. 같은 타이밍에 팔을 들어 올리고 같이 입을 떼는 시기. 이럴 때가 다가오면 정말로 쌍둥이라는 기분을 실감한다. 맷은 친절한 척 안부를 묻는 벤이 갑자기 조금 고마워졌다. 아주 조금. 거실에 놓인, 아버지가 키우는 열대어 수조 속 구피들이 싸대는 똥의 크기만큼.

“옷이 필요해서.”

벤은 푹신한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으며 농땡이를 피웠다.

“하기야 네 패션 감각이 구린 건 옆집 강아지도 알아보는 수준이지.”

“닥쳐, 나도 알아!”

“뭐야, 내 옷을 빌리러 왔으면서……. 아니지, 내가 없었으면 몰래 꺼내 갔을 테니 내 옷을 훔치러 왔다는 게 맞겠군. 옷을 훔치러 온 자식이 이런 식으로 행동해도 돼?”

아픈 구석을 찔렸다.

“형제여.”

맷은 기도하는 모양처럼, 손을 가슴팍 앞으로 끌어모았다. 벤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적댔다.

“넌 꼭 이럴 때만 형 취급을 하더라.”

“형제여, 부디 소인을 가엾게 여겨 그 옷장 문을 열어주오.”

맷은 손깍지를 풀고 양팔을 쩍 벌렸다. 지나치게 과장된 몸짓이었다. 물론 그만큼 간절하기도 했지만. 벤이 손가락을 후후 불며 말했다.

“로미오가 등장하셨군.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야 빌려주던지, 말든지.”

“아주 중요한 일이야.”

“면접 보러 가냐? 네 면접용 정장 바지에 페인트 묻은 건 알고 있지?”

예상치 못한 말에 맷은 그만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 페인트가 묻었다고? 무슨 소리야? 그리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제, 네 옷이 내 방 드레스룸에 들어왔거든. 아마 가사도우미 분이 착각해서 갖다 놓은 것 같은데.”

“옷이 바뀐 걸 알았으면 말해줬어야지!”

“다 너를 위해서 입을 닫고 있었던 거야. 엄마 어제 출장 끝내고 들어왔잖아. 엄마가 알았으면 넌 죽은 목숨이야.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

벤이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크흠, 하는 짧은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벤은 이미 근엄한 표정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네 옷 하나 제대로 간수를 못 하는 거니? 맷? 그리고 당장 면접 볼 일도 없다며?”

맷은 얼굴이 희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벤은 맷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감상하며 히죽거렸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벌렁 몸을 눕혔다. 뭘 해도 수세에 몰린 사람은 맷이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맷은 눈빛에 애절함을 가득 담아 벤의 방 옷장을 쳐다보았다. 벤의 옷이 당장 필요했다. 아주 간절하게.



3


벤은 꽤 옷을 잘 입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옷 입는 감각이 남달랐고 패션에 관심도 많아서 남성 패션지를 때마다 사서 읽었다. 소위 말하는 댄디룩, 프레피룩이 벤의 방을 꽉 메웠다. 덩치도 좋았다. 큰 키와 미식축구 쿼터백의 필수품인, 크고 탐스러운 어깨. 물론 벤은 미식축구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멀리서 걸어오는 벤의 모습을 보면 그의 너른 떡대 위에 걸쳐진 아름다운 옷가지가 그를 더 멋지게 만들었다.

반면 맷은 옷을 더럽게 못 입었다. 그가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긱, 너드, 공대생이라서였을까? 아니다.

맷이 너드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둘은 그저 취향이 달랐다. 벤이 깔끔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색상의 옷을 선택할 때, 맷은 아주 쨍하고 강한 붉은색이나 바다같이 파란 티셔츠를 선택했을 뿐이다. 게다가 맷이 가진 옷 대부분은 셔츠의 한가운데에 좋아하는 캐릭터 얼굴이 큼지막이 박힌 옷이었다.

그나마 맷이 덩치가 큰 편이라 봐줄 만 했지, 그러지 않았다면 사회가 만들어낸 너드 스테레오 타입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을 거다. 빼짝 마르고 모르는 사람에게 한마디 말을 붙이려 선 채로 5분 넘는 시간을 낭비하는(말을 걸까, 건다면 어떻게 걸어야 할까 머뭇대며 소비하는 시간 말이다), 얼굴은 여드름에 파묻혀 안경을 겨우 걸친 그런 인간으로 성장했을 거다. 맷은 가끔 아버지의 큰 몸집에 감사함을 느꼈다. 유전자는 위대했다.

스타일 뿐만이 아니었다. 두 형제는 정반대의 성향과 취향을 가졌다. 좋아하는 음식, 음악, 여행지, 하고 싶은 연애, 장래 계획…. 전부 반대였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맷은 소극적이고 내향적이며 집구석에 처박혀있길 좋아했다.

벤은 적극적이고 활달하며 대부분 집 밖에서 노는 인물이었다.

프롬 파티에 초대해달라며 여자애들이 줄을 서는 벤과 정반대인 방구석 찌질이로 성장한 맷. 엄마의 아랫배를 붉은 피로 적시며 나란히 나온 두 쌍둥이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런데도 외형만큼은 판에 찍은 듯이 똑같았으니, 유전자라는 것은 이렇게나 신비하다.

“옷 좀 빌려줘.”

“대체 무슨 일인 건데?”

맷은 입에 침을 발랐다. 정오 직전의 태양은 머리 위로 높게 솟아 맷의 밤색 눈동자를 촉촉하게 적셨다. 햇빛이 맷의 입술과 벤의 눈동자를 반짝반짝 광채 돌게 했다. 따뜻한 느낌이 전해지자 뱃속에서 알 수 없는 용기가 끓는 기분이었다. 이 이야기로 얼마 동안 놀림을 받을지 모르지만, 맷은 하나뿐인 형제에게 진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고백하려고 해.”



5. 왕의 귀환


어둠은 불가해한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가령 행성을 에워싼 우주 바깥의 풍경이 그렇다. 해가 지표면 아래로 숨을 감추었을 때 나타나는 하늘이 그렇다. 검은색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많이 숨어 있다.

방의 문이 느릿하게 열린다.

‘의자’가 놓인 공간의 어둠이 둘로 쪼개진다. 긴 빛줄기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의자’를 비춘다.

문가에 사람이 비친다.

레이가 들어온다.


왕좌의 방과 바로 연결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오로지 권세를 가진 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다각형의 문이 보인다. 문이 열리는 순간 공간 바깥의 우주선과는 완전히 유리된 구역이 나타난다. 열린 문 사이로 발을 내밀면 긴 통로가 펼쳐진다. 통로는 좁다. 아스트로메틱 드로이드 세 대가 겨우 어깨를 붙이고 들어올 수 있는 너비이다. 비좁고 검고 맨질맨질한 대리석 바닥을 가졌고 입구와 가운데 의자 사이에 놓인 유일한 접근로이기도 하다.

새까맣고 반질거리는 타일이 가득 깔린 왕좌 아래는 꼭 거울같다. 어둠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만, 광택 나는 검은 타일은 상대를 비춰내고 자신을 드러낸다. 사실 까맣고 반들대는 검은 바닥은 누구보다 더 성실하게 움직인 드로이드가 빚어내는 결과물이다. AI가 한참이나 쏟아부은 모든 노력은 레이의 등장으로 인해 한순간에 망가지고 만다.

레이가 크게 고개를 돌리며 안을 살핀다. 발자국 소리는 몇 번 나지도 않았는데 금세 멎었다. 레이는 문의 바로 앞 복도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섰다. 그녀의 등 뒤에서 느릿하게 문이 닫힌다. 모두의 시선이 문 앞의 레이를 향한다.

그녀의 손에는 날 없는 은빛 칼자루와 꺼진 생명이 들려 있다. 역한 냄새가 풍긴다. 생명이 마지막 불씨를 태운다.

슈프림오더의 새 집행자이자 기사단장 레이는 늘 미천한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본보기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는 거역하지 말라는 뜻이었고, 그 방식으로는 주로 끝까지 저항한 이들의 신체 어딘가를 도려내는 식이었다. 다들 불필요한 살육이라고들 말했다.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필요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는 사람은 우주 내에 몇 없었다. 사실 몇 없는게 아니라 단 한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슈프림리더는 광기에 가까운 레이의 집착을 잘 알았다. 레이에게 임무를 맡기면 빈손으로 등장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 어떤 때는 끝까지 반항했다는 이유로 상대의 손가락을 자르기도, 어떤 때는 자신의 얼굴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상대의 눈을 뽑았으며, 어떤 때는 상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결혼반지를 가져왔고, 어떤 때에는 무기를 들고 오기도 했다. 본보기라고 했지만 사실은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슈프림오더가 오는 순간 저항의 깃발을 바로 분질러버리고 투항한 이들에게서도 무언가를 가져왔으니까. 가진 것이 하나 없어 남의 물건을 탐내야만 견뎌낼 수 있었던 과거의 레이가 만들어 낸 습관이었다.

왕좌의 주인은 다 알면서도 침묵했다. 그녀의 취미 덕에 퍼스트오더의 악명이 은하계를 더욱 공포에 떨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 불필요할 정도의 잔악함이 전시되었고 모든 일은 전부 슈프림리더의 제자이자 슈프림리더를 모시는 기사단장이자 집행자인 그녀의 손 끝에서 이루어졌다.

레이는 얼마 전까지 한 행성의 왕이었으며 아주 먼 옛날엔 공화국의 의원이었던 남자의 머리를 손에 들고 등장했다. 슈프림리더의 명령을 받고 우주표준시간으로 약 일주일간의 짧은 출장을 다녀온 것이다. 살육의 출장이다. 하나의 국가가 붕괴되었고 두개의 행성이 거멓게 불탔다. 코스믹 포스가 한참이나 출렁이며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알렸다.

왕좌 앞에는 한 명의 누군가가 서 있다. 방문객이 레이 한 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미 십여분 전에 도착해 있던 아미티지 헉스가 왕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어깨를 부풀려 자신의 부피를 키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생물과 비슷한 행위를 취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든 과시해보려 노력한다. 자신이 더 우위에 서기 위해, 한방을 날리기 위해 다듬고 준비한다. 레이는 헉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헉스의 목 역시 빳빳하게 세워져 있다. 그녀가 왕좌 앞까지 걸어오는 몇 초의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헉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레이는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가 둥글게 만다. 헉스는 레이의 여유로움과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입김이 힘겹게 토해진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헉스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다. 사지가 제멋대로 뻗대어 꽤나 우스꽝스럽다. 헉스는 급하게 무릎을 굽혀 일어나다 자신이 입은 긴 코트자락을 밟으며 다시 주저 앉는다. 거나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시선은 여전히 레이를 향해 있다.

“그만하면 됐다. 헉스 장군, 이만 나가봐.”

왕좌의 검은 그림자 사이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미티지 헉스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잽싸게 몸을 돌린다. 그는 자신의 둥 뒤로 두 명의 상관을 남겨둔 채 먼저 방을 빠져나간다. 그는 왕좌가 놓인 방에 한가지를 더 남겨 두었다. 비릿한 승자의 미소, 아직 가지지도 못한 것을 노리는, 일종의 도취이자 선언과도 같은 미소를 남긴다. 헉스는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다. 문을 나서는 얼굴은 아마 증오로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슈프림리더, 왕좌의 주인, 카일로 렌은 코앞까지 도달한 새로운 방문객을 천천히 쓸어본다.

레이는 항상 짙은 머리칼을 뒤통수로 끌어모아 가지런히 묶는다. 얼굴과 팔, 그리고 목을 제외한 몸의 나머지 부분은 칠흑처럼 새까만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뾰족한 눈초리가 형형하게 카일로 렌을 노려본다. 카일로 렌은 시선으로 가해지는 도전을 피하지 않는다. 둘은 서로를 계속 쳐다본다. 레이의 눈동자가 먼저 카일로 렌의 눈을 떠났다. 레이가 팔을 치켜올리고, 렌은 레이의 느린 움직임을 따라간다. 레이의 손에는 어떤 생명체의 머리였던 것이 들려 있다. 파랗게 질렸고 여전히 잘린 단면에 짙은 피를 머금고 있다. 레이가 바닥에 머리를 던진다. 썩어가는 머리통이 한참을 굴러 카일로 렌이 앉은 의자 발치까지 굴러온다. 카일로 렌은 꼼짝하지 않는다. 대신 벽 가장자리에 죽은 듯이 붙어 있던 여섯의 가드가 몸가짐을 달리한다. 무기의 끝에서 뿜어지는 플라즈마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카일로는 다시 레이를 바라보았고, 레이 역시 카일로를 똑바로 바라본다. 레이는 조금 전과는 달리 눈을 떼지 않는다. 둘이 기다려 왔던 날이 찾아온 것이다.



6. 아무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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