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짤대 

#12 

w.데자와 





다니엘은 자신이 서있는 곳을 다시 한 번 내려다 보았다. 조금의 뜬 공간도 없이 빈틈없이 바닥을 채우고 있는 차콜 색상 카펫, 왠지 눈에 익은 벽 장식과 고풍스런 모양의 창틀. 여기가 어디지? 고개를 돌리자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2인용 소파가 몇 발짝 앞에 나타났다. 아.. 그제야 어딘지 기억이 났다. N파크의 강사 대기실이었다. 그렇다면 저 소파 위에는 분명 그가 있을 터, 다니엘은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예상이 맞았다. 아니. 이건 꿈속이니까, 예상이 아닌가? 어딘가에서 듣기로 자각몽 속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꿈을 설계할 수 있다던데. 다니엘은 소파 위에 웅크린 박지훈이 촌스럽기 그지없는 신입사원 연수 단체복이 아니라 좀 더 정상적인 옷을 입고 있길 바라며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정말로 하얀 셔츠에 깔끔한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다니엘은 난생 처음으로 꿔 본 이 자각몽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현실의 박지훈은 키스 한 번에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 가서 일주일 넘게 잠수를 탔었다. 마음 같아선 키스가 아니라 더한 것도 할 수 있었지만 거기부터는 본격적으로 범죄의 영역이니까. 고작 일주일이 아니라 평생을 못 볼지도 모를 일이고. 사실 입을 맞추는 동안에도 본능적으로 옷 안을 파고들려는 손을 참아내느라 손등에 힘줄이 파드득 돋았었다. 


하지만 이건 꿈이니까. 어떤 짓을 해도 상관 없다. 꿈의 주인인 다니엘이 원한다면 박지훈이 먼저 다가올 수도 있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다니엘은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언제 깰지도 모르는 이 꿈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방금 전까지 느긋하게 지훈을 내려다보던 다니엘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소파 위로 올라탔다. 옆으로 웅크리고 있던 몸을 반 바퀴 굴려 정자세로 눕히고 제 팔 아래 가두자 지훈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게 거짓인양 맑고 깨끗한 눈이었다. 다니엘은 그 순한 눈 위에 입술을 내렸다.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실감나는 꿈이었다. 입술을 떼지 않고 그대로 콧등, 그리고 더 아래로 이어가며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소파와 등 사이가 뜨도록 손으로 온통 헤집자 지훈은 제 팔을 올려 다니엘의 목에 감았다. 그리곤 손 끝으로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는데, 이게 뭐라고 아래가 벌써 다 서버렸다. 왼손으로 뒷목을 잡아 올리며 좁은 입안으로 혀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겉으로 봐도 그리 크지 않은 입은, 그 속도 작았다. 용량 자체가 작은 입은 다니엘의 두터운 혀 하나만으로도 가득 차서 입가로 침이 넘쳤다. 다니엘은 문득 생각했다. 이 작은 입에 제 것을 물린다면.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버릴지 모른다고. 


"다.. 다니엘."


꿈이란 건 참 좋은 거였다. '본부장님'이 아닌 제 이름을 지훈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을 줄이야. 반질반질 침이 번진 입술이 오물거리며 연신 제 이름을 부르자 다니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한계치까지 커진 제 것을 아래에 거칠게 부비며 지훈의 귓불을 물자 흠칫 몸을 떠는 것이 꿈 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아.."


야하게 흘리는 신음소리마저 다니엘이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딱히 튀지 않는, 매력적인 중저음. 다니엘은 귓불을 시작으로 턱선을 타고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귀 밑 각에서는 시간을 좀 더 할애했다. 그저 매끈하기만 했으면 예쁜 얼굴 때문에 너무 여성스러웠을 턱선이 귀 아래에서 한 번 꺾여 잘생긴 인상에 한 몫을 했는데, 다니엘은 평소의 지훈을 볼 때도 이 휘어진 각도가 예술이라 생각했었다. 아무튼 아끼는 부위니만큼 끈적하게 핥다가 한 입 베어물자 파드득거리며 몸을 떠는 것이, 잘근잘근 씹어 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하.. 하지마요." 


예상치 못한 말에 다니엘이 동작을 멈추었다. 이런 반응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닌데. 자각몽의 효력이 다한 것일까. 다니엘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지훈이 있는 힘껏 가슴팍을 떠밀었다. 붙어있던 고개가 떨어져 나가고,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자세가 빙그르 돌았다. 다니엘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 제 아래에서 신음을 토해냈던 지훈이, 지금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꿈이.. 아니야?”



*



어둠 속에서 시선이 맞부딪쳤다. 일단 떼어놓긴 했는데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나로서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고회로가 완전히 정지된 채로 가만히 있었더니 조용한 방 안에 벽시계 초침 소리만 일정하게 흘렀다. 그나저나 현실임을 자각하셨으면 손이라도 좀 떼어주든가, 허리를 감은 팔엔 여전히도 힘이 잔뜩 들어가있었다. 아무래도 민망하고 불편하여 엉덩이를 슬며시 들다가 금세 골반이 잡혀 아래로 주저앉았다. 


"저.. 본부장님..?"

"지훈 대리가 왜 여기 있어요?"

"그.. 그게.. 아니, 일단 저 좀 내려놔주시고.." 

"싫은데요." 


너무 단호해서 단호박인줄. 사실 강다니엘 아니라 단가니엘 뭐 그런 이름이세요? 할 말을 잃은 내가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그는 그 길다란 팔로 내 몸을 다시금 휘감았다. 등과 어깨를 누르는 손에 힘이 주어지고 상체가 자연히 맞물렸다.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상사와 부하의 자세라고 하기엔 좀 많이 그렇다. 


"본부장님.. 일단 이것 좀 놔주시고.."

"오늘만.. 좀 봐줘요. 어차피 다음 주면 이럴 일도 없어요." 


죄어진 팔을 풀어내려 낑낑거리다가 본부장의 말에 온 몸의 힘이 풀렸다. 다음 주면 이럴 일도 없다. 잠시 잊고 있었던, 저녁 무렵 팀장님과의 커피 타임이 생각났다. 


- 그저께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분이 오늘 점심 때 갑자기 다른 계열사로 가시겠다고 해서 말야. 

- 지훈아, 니가 좀 말려 봐. 본부장님 지금 다른 계열사로 가버리면 낙동강 오리알 될 수도 있어. 


"본부장님. 다른 계열사 가신다는 거.. 진짜에요?"

"아.."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본부장이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옹 팀장이 그새 말했나보네.. 목덜미에 웅얼거리며 다가온 숨결이 간지러웠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몸을 밀어내며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그런 거에요?"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마주 본 그의 얼굴이 순간 흠칫 굳었다가, 눈웃음과 함께 스르르 풀렸다. 하마터면 나도 따라 웃을 뻔 했을 정도로 달콤한 미소였다. 


"네. 생각해보니, 지훈 대리 입장에선 저랑 같이 얼굴 보고 일하는 게 싫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물론 그날 당황했던 건 맞다. 놀라고, 화도 나고, 이 사람이 나를 놀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또 막상 그가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생각하니 그날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억울하고 화가 났다. 지난 2년간, 가족이나 친구보다도 오랜 시간 얼굴을 봐왔던 사이인데. 사실은 이렇게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얄팍한 관계일 뿐이었나. 가버린 후는 또 어떻고. 강다니엘이 아닌 본부장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다른 부서의 본부장들처럼, 아랫사람에게 반말 찍찍 해대는 거만하고 배 나온 아저씨가 올 바에야. 


"싫지 않아요.."

"네?"

"본부장님이랑 일하는 거, 싫지 않다구요." 


그의 까만 눈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는 내친 김에 몇 마디를 더 얹기로 결심했다. 


"본부장님 업무 스타일 존경하고.. 따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

"가지 마세요." 


하아. 그가 바람 빠진 듯한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낮게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대체 이 진지한 대화의 어느 맥락에서 터진 건지 몰라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내 앞으로 숙여진 정수리를 내려다 보았다. 


"왜 웃으시.."


고개를 든다 싶기가 무섭게 그의 얼굴이 앞으로 훅 다가왔다. 이것도 한 번 당해봤다고 익숙해진 건지. 뒷목이 채여 끌려가는 와중에도 나 또 먹히는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으면 피했어야지, 박지훈. 


내가 스스로를 타박함과 동시에 입 안으로 거센 야단을 맞았다. 그는 단 한 번의 키스로 내 구강구조를 다 외운 게 분명했다. 어깨나 엉덩이 등, 전반적인 골격이 작은 편은 아닌데 손발 등 신체 말단 부위가 작은 편인 나는 우습게도 입과 혀도 작았다. 그는 그런 내 입과 혀를 삼킬 듯이 밀고 들어왔다. 그의 두툼하고 넓은 혀가 상대적으로 짧고 작은 내 혀를 뭉근하게 누르며 힘을 주었다. 고작 입맞춤을 하면서 몸 전체가 깔리는 것 같은 느낌.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막혀와서, 나는 음, 음, 비음 섞인 소리를 내며 목을 꺾었다. 뒷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고, 그 손은 자연스럽게 뒷머리 사이를 헤집었다.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 중심을 잃고 스르르 미끄러지자 내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단하게 뒤를 받친 후 품으로 더 가까이 당겨가는 그의 움직임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뿐이었다. 싫다고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싫다고 하기 싫었다. 사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머리 안에서 젤리가 끈적하게 녹고 있는 것 같았다. 감고 있는 눈앞에 빨강 초록 노랑 온갖 색깔의 젤리들이 엉켜들었다. 


"하아.."


한참을 섞이던 혀가 떨어져 나가고 내가 가쁜 숨을 토해내자 그 역시 후, 하고 조금 거친 숨을 뱉었다. 습하고 뜨거운 날숨이 한 뼘도 안 되는 공간 안에서 섞여들었다. 나는 몽롱한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젠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박대리님."

"..네."

"제가 여기에 있으면,"

"......"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의미에요."


그는 혀뿌리까지 뽑아먹을 것 같았던 방금 전의 키스로도 충분하지 않았다는 듯, 내 입술에 슬며시 버드 키스를 날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답 없이 멍하니 쳐다만 보자 그는 또 한 번 쪽, 이번엔 소리가 날 정도의 뽀뽀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뽀뽀가 날아오려고 했을 때, 나는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아내며 저지했다. 


"..괜찮아요."

"......네?"

"이런 상황.. 생겨도 괜찮다구요." 


아. 말을 하고나서 보니 생각보다 창피했다. 나는 귓바퀴가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숙인다고 해봤자 그의 코앞이라 딱히 멀리 피할 수도 없었지만. 


키스를 마친 후 내 허리를 가볍게 두르고 있던 그의 손이 갑자기 터억, 내 두 볼을 잡아 올렸다. 그대로 시선이 마주쳐지고, 내가 놀란 눈을 깜빡거리자 그 역시 전에 없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죠..? 방금 그거?"


나는 울 것 같아졌다.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데, 나도 내 마음을 정리할 수가 없어서 엉망진창 두서 없는 말들이 튀어나오려 했다. 어, 그러니까.. 그게... 


"모르겠어요." 

"......"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

"분명히 싫어야 하는데.. 그게 맞는데. 왜 싫지가 않을까요?"


이건 개그다. 왜 싫지가 않냐니. 박지훈 너 지금 누구한테 물어보고 있는 거냐.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답을 구해야 할 말을 입 밖으로 꺼내놓고 보니 존나, 내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나는 창피함으로 벌겋게 물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내 눈을 가리니 그가 보이지 않아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마치 머리만 가린 채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애가 된 것마냥 나는 그렇게 몇 초간을 그에게서 숨어있었다. 


"아아.. 정말 반칙이야."


몇 초 뒤, 술래가 나를 찾아냈다. 양 손목이 그에게 붙들려 내려지고, 겨우 가렸던 얼굴은 다시 그를 향했다. 눈가가 휠 정도로 웃고 있는 그가 보였다. 


"지훈 대리가 이렇게 귀엽게 구니까, 도저히 갈 수가 없네요." 

"..진짜 안 가시는 거죠?"

"아. 미치겠네. 심장 아파."


심장? 본부장님, 지병 있어요? 나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가슴께를 살폈다. 내가 본다고 뭐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걱정을 해줬더니 돌아온 건 미친 듯한 폭소였다. 


"왜.. 왜 웃으세요." 

"미치겠다, 진짜. 박대리가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아프다구요." 


뭐야, 괜히 걱정했잖아. 나는 입을 삐쭉 내밀며 여즉 잡혀있던 손목을 풀어냈다. 아까와는 달리 순순히 풀어지는 그의 손이 아주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면 내가 드디어 미친 걸까. 


"안 갈게요. 다른 데."

"진짜죠?"

"네. 대신,"


그의 풀어졌던 손이 내 허리께를 다시 감쌌다. 그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어물쩍 넘어가버린 나는 그의 무릎에서 내려갈 타이밍을 또 한 번 놓쳐버리고 말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지훈 대리 꼬실 건데. 인사팀에 고발하진 마요.” 

“말씀드렸잖아요. 전 민법으로 해결할 거라니까요.” 

“저도 말했잖아요. 제 애인하면, 돈 많은 백수 만들어 준다니까요.” 

“언제는 집에서 놀지 말라면서요.” 

“아. 그렇지. 그럼 취미로 회사 다니는, 돈 많은 회사원 만들어 줄게요.”

“그건 좀 땡기네요.” 


탁구공을 주고 받듯 팅팅탕탕 넘기고 받아치는 대화가 오가길 몇 문장. 그는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슬며시 갖다대었다. 그리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소년같이 웃는데, 어찌나 해맑은지 보고 있던 나까지 웃음이 실실 번져나왔다. 원래라면 깔끔하게 넘겨져 있을 그의 앞머리가 지금은 왁스기 없이 내려와 있어 앞머리들끼리 지글지글 부벼지는 감촉이 기묘했다. 



그때였다. 


지잉 — 


보안 도어가 해제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비공개 업무가 많은 신규사업 부문 특성상,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사무실에 들어올 때 찍는 출근 패스 외에도 우리 구역으로 꺾는 복도 앞에서는 별도의 카드를 찍어야 하는데 바로 그 보안이 해제되는 소리였다. 본부장과 나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본부장실의 버티칼은 누운 채, 그리고 문은 도어락이 자동으로 걸어잠긴 채였다. 


이 시간에 또 누구지. 나야 잠깐 켜졌던 본부장실 불을 보고 우연히 온 거라지만. 그러고 보니 본부장이야말로 퇴근 다 해놓고 사무실에 왜 다시 돌아왔던 걸까. 나는 의문을 가득 담은 눈으로 본부장 쪽을 돌아보았다.


“쉿—”


방금 전까지 순하게 웃고 있던 소년은 어디 가고, 예리한 눈매의 본부장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마치 어린 아이를 가르치듯 입에다 검지를 대며 입단속을 시키곤, 부드럽게 내 머리를 눌러 책상 아래로 몸을 가라앉혔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조용. 책상 밑에 들어가 봐요, 일단.” 


들릴듯 말듯 작은 목소리인 것도 모자라 귓속말까지 하는 그가 너무 진지해서 나 역시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맞장구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 뭐, 무슨 일인지 알면 어쩌겠어. 여긴 일단 직장이고 저 사람은 내 상사니까, 본부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지.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웅크리며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본부장 책상은 아래 공간도 충분히 커서 나 하나쯤은 거뜬히 들어가고도 남았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 들어갔을 때의 일이고. 내가 잘 숨은 것을 확인한 그가 제 몸도 밀어넣기 시작하자 널럴하던 공간이 갑자기 좁아졌다. 나는 어깨를 수납하며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뭔데요, 이게.”

“쉿!” 


그의 손바닥이 황급히 내 입을 막았다. 말을 하던 차에 막힌 입이라, 벌려져 있던 입술이 손바닥에 침을 묻히고야 말았다. 으아. 더러워라. 나는 그의 손을 내 앞으로 당겨와 코트 자락으로 쓱쓱 침을 닦아 주었다. 그는 좀 놀랐는지 뒤로 물러나다가 책상 바닥에 머리를 콩 찧고는 널찍한 어깨를 다시 수그렸다. 아까는 푸른 달빛 아래 잠든 늑대를 보는 것 같았는데 이래 보니까 또 제 덩치에 안 맞는 개집을 선물 받은 사모예드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개과는 개과인가. 


아무튼 둘 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숨소리마저 가라앉히고 가만히 바깥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사무실 안을 배회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기분 탓일까, 타일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띡.띡.띡.띡.


착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본부장실이 목표였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치는 손가락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띠릭’하는 전자음과 함께 유리문이 열리고, 핸드폰 플래쉬를 켰는지 한쪽 벽면에 하얀 빛이 일렁거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본부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다 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다시 한 번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음. 끝까지 닥치고 있으라는 뜻이구나. 알겠다는 의미로 나 역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앞머리를 가볍게 흩어놓고 지나갔다. 


미확인 인물은 한참을 방 안에서 서성이며 핸드폰 불빛을 비춰댔다.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 바스락대는 소리가 (구)비서 자리 근처에서 끊임 없이 들렸다. 열어봤던 서랍을 또다시 열어보고 의자를 빼냈다 다시 집어넣는 등 한참을 헤매더니, 초조한 듯 구둣발을 바닥에 딱,딱, 찍어댔다. 어라. 이 소리. 분명 어딘가에서 들어봤던 소린데. 어디서, 누구에게서 들었던 거지.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감각이 외우고 있는 익숙함. 순간 척추를 타고 번지는 소름에 나는 몸을 잘게 떨었다. 


원래 찾으려던 곳은 다 뒤져본 건지 잠시 멈춰있던 불빛이 이윽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본부장의 책상 방향이었다. 우리가 숨어있는 바로 이곳 말이다. 나는 이제 어떡하냐는 눈빛을 본부장에게 쏘았고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씨익 웃으며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수신호를 취했다. 나는 또 시킨 대로 얌전히, 몸을 더 웅크리고 앉았다. 


“이걸 찾나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나한테는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해놓곤, 본부장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미확인 그림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정체불명의 침입자 역시 본부장의 출현에 깜짝 놀랐는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플래쉬 불빛이 뒤집어지고, 파삭, 액정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보.. 본부장님.”


—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대된 동공에는 흔들림 없이 서있는 본부장의 긴 다리만 잡힐 뿐이었다. 






트위터 @tejava_mil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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