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엔 그대의 폐부를 어지르는 불꽃이었으면 해요.

— 고은강, 일백 년 동안의 오늘







alpha Tony Stark * alpha Peter Parker









01) 그가 소년에게 (마흔 일곱과 열다섯)



우성 알파 토니 스타크에게 알파와 오메가의 세계란 지독히도 본능적이고 징그러운 곳이었다. 오로지 쾌락과 번식을 탐닉하며 짐승과 진배없이 서로를 갈망하니, 인간보단 차라리 동물의 왕국을 닮았다 해야 할까. 각종 술이 성행했고 그 사이로 마약과 미약이 오갔다. 하여 멋모르던 소싯적엔 그도 꽤 즐겼으나, 예의 납치 사건 이후 혀를 멀게 해버린 단내에 결국 버티지 못해 장막 밖으로 나온 후론 도로 걸음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이번 파티도 불참이신 거예요?”

“알잖아. 나 그런 자리 싫어하는 거.”


그럼 늘 하던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답에 익숙하게 말을 받은 프라이데이가 문자를 보냈다. 초청을 거절하고 의자에 등을 기댄 토니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인류의 9할 9푼이 평범한 베타인 세상에서 베타가 아닌 존재로 태어난 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다소 특별할지언정 절대 행운이 아니었다. 물론 자신은 그나마 오메가보단 나은 알파였고 그 중에서도 우성이라 스타크의 이름까지 합쳐져 오히려 혜택을 누리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온 감각을 마비시킬 만큼 저리려 드는 타인의 페로몬만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사탕을 아무리 좋아해도 너무 많이 먹으면 혀가 얼얼해 질린다. 혹은 아예 이가 썩어버리거나. 


“내일은 그 스파이더맨인가 뭔가를 찾으러 가야 하니까, 다른 일정은 빼줘.”

“입력되었습니다.”


요상한 거미 흉내를 내는 초인. 유투브를 통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친절한 이웃 히어로. 솔직히 큰 관심은 없었지만 정도를 모르고 꼬여드는 날파리에게서 벗어날 좋은 기회였다. 덕분에 만나지 않았음에도 왠지 첫인상—과연 이걸 정말 첫인상이라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은 좋았다.

기대되네. 낮게 중얼거리며 토니가 눈을 감았다. 내일을 기점으로 그의 세계가 어떻게 바뀔지는감히 예상하지 못한 채.


*


피터 파커. 피터 벤자민 파커.

토니가 방금 만난 꼬맹이의 이름을 연신 속으로 중얼거렸다. 피터 파커. 피터인가. 본인이 몇 번째 같은 사람을 입에 담는지 스스로도 세질 못했다.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라, 별 일 없이 무사히 나온 것만 해도 저는 충분히 칭찬을 들을 만했다.

알파와의 만남이 이렇게 상쾌하고 기분 좋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선천적인 알파라고?”

“네. 어렸을 적 성향 판정에서 열성 알파 판정을 받은 소년이에요.”

“그런가.”


조수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듣던 토니가 싱긋 웃었다. 하긴, 좀 약하긴 했지. 각종 페로몬을 맡느라 감이 발달해버린 자신 정도가 아니고서야 평범한 베타로 착각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오히려 본인이 귀신 같이 알아낸 축에 속할 테다.

그런데도 그 작은 양으로 저의 까탈스러운 감각을 만족시키다니. 그야말로 제 취향 자체인 페로몬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하물며 알파의 것이. 본능적으로 알파끼리는 페로몬을 기피하는 게 보통이건만.


“피터 파커라—.”


욕심이 났다. 실물을 만나기 전까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성과다. 물론 당장 어찌할 생각은 없었다.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자신이 기분 좋을 만큼 자주 붙어다닐 의향이 생긴 수준에 불과했다. 애당초 자신은 사회적 지위와 이성, 상식을 고루 갖춘 21세기 상류층이자 한 기업의 회장이었고, 최근 오메가의 인권 보호까지 말이 나오고 있는데 저런 어린 애를—심지어 오메가도 아닌 알파를— 상대로 겁 없이 건드렸다간 아무리 자신이라한들 생매장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토니는 원하지도 않을 상대를 침대에 눕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원하는 상대로만 줄을 세워도 지구를 몇 바퀴나 휘감을 텐데 구태여 그런 변태적인 짓을 할 이유가 없다.

어찌 되었든, 알파지만 자주 있을 만하겠어. 외려 자신이 꽤 여러 번 찾을지도. 홀로 중얼거리며 토니가 턱을 쓸었다. 입가가 살짝 휘어져 있었다.


* *


피터에게 오늘 하루는, 정말 최악이자 최고라 칭할 만했다.

일단 수학 쪽지 시험에서 100점을 받았으며,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그리고 집에 왔더니 그 토니 스타크가 있었다. 그 토니 스타크가. 자신이 반평생이 넘도록—물론 이제 열다섯 밖에 안 되었으니 그래봐야 10년이지만— 존경해온 히어로가. 다만, 이걸로 끝났으면 좋기만 한 하루였을 텐데 그 다음 일로 최악이 덧붙었다.


네가 그, 스파이더 가이?


피가 싹 굳게 만든 한 마디에 아니라고도 못 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 사이 토니가 확신하고 온 듯 곧장 그의 용건을 밝혔다. 네 그 능력 굉장히 대단하다고 생각해. 180km로 질주하던 2톤 트럭을 맨몸으로 멈춘다? 절대 쉽게는 못하지. 그러니 문제가 안 된다면 내 지원을 받으면서, 가끔 필요할 때 날 도와줬으면 하는데. 싫다 하려다가 처음엔 이게 어벤져스 영입 제안인 줄 알고 펄쩍 뛰었다. 저도 어벤져스가 될 수 있나요? 흐음, 당장 그건 아닌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고. ...좋아. 하고 싶으면 지금은 인턴이라 하자. 쿨한 대답에 바로 스타크 인턴십이 결정됐다. 자세한 내용은 숙모조차 모르는, 토니 스타크와 피터 파커 둘만의 프로젝트—나중에 해피 호건이란 분과 페퍼 포츠 이사님도 관련 내용을 알고 계신다는 소식에 조금 실망한 것은 저만의 비밀이었다—가. 토니 스타크는 자신이 기대한 그 이상의 사람이었다. 멋지고, 대단하고, 반짝반짝 빛났다. 동경한 세월이 아깝지 않을 만큼.

그런데 그의 페로몬만은 자신이 기대한 것과 조금 달랐다. 싫진 않았으나 열성인 이상 느낄 수밖에 없었던 숨막히는 압력. 지금껏 스스로가 둔해 다른 알파의 페로몬이 주는 불쾌감과 압력을 느끼지 못했던 데에 비해 여실히 전해진 토니 스타크의 페로몬이 그의 목을 조였다. 특히 스파이더맨이 되어 감각이 예민해진 후론 거의 처음으로 마주한 우성 알파이다 보니, 엄청난 압도감에 입술이라도 깨물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았다. 거기에 덧붙여 분명 토니가 다 갈무리했을 텐데도 피터가 그를 우성 알파로 인식한 탓에 예민하게 울려대는 견제의 스파이더 센스까지.

너무나 기대한 만남이었고 상상 이상으로 좋았는데, 그것만은 가히 최악이었다.


어떡하지. 그는 앞으로 자신을 자주 보게 될 거라 했다. 좋지만, 좋은 한편 무서웠다. 본능이 두려워하는 페로몬만은 피하고 싶었다.


“...아냐. 오늘은 처음이라 그래.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자.”


나지막히 중얼거리며 피터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언뜻 드러난 귓가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 * *


기실 처음 양쪽 모두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 시점에서, 두 사람이 상대를 바라보게 될 미래는 이미 정해진 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워졌다한들 본능이 둘을 막고 있는 탓에 관계가 진전되기는 쉽지 않았다.


“Kid.”

“....”

“...피터.”

“네? 아, 무슨 말씀 하셨어요?”


이제부터 할 예정이긴 하지. 늘 자신이 부르면 처음엔 알아듣지 못하고, 두 번째에 화들짝 놀라며 움츠러드는 소년을 잠시 응시하던 토니가 애써 모른 척 시선을 거뒀다. 벌써 자신과 함께한지도꽤 시간이 지났건만 참 여전한 반응이었다. 분명 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은데. 역시 페로몬인 건가.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의 한숨이 소년 몰래 흘렀다. 피터의 페로몬은 자신을 더없이 만족시켜주는데 자신이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애당초 함께 있는 시간이 여기서 더 늘어나지 못하는 이유—토니 스타크는 본인이 분 단위 일정을 잡아야 하는 SI의 회장이라는 사실을 부러 외면했다. 제가 느끼기에 일주일에 3번은 너무 적었다.—도 그것 때문이었다. 처음 초인이라는 점으로 알게 된 피터 파커는 그 특이사항만큼이나 다른 능력 역시 욕심 낼 만한 소년이었으며, 무엇보다 언제나 밝은 미소와 상쾌한 페로몬으로 제 정신을 맑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늘 부족했다. 보고, 또 보고, 다시 만나도 헤어져야 할 시각이 빨리 오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도 감정이 과하게 깊어졌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당장 그가 필요할 때, 그리고 자신의 부름에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그를 보노라면 아무렴 어때 싶은 생각까지 드니 하는 수 없었다.

책임? 호감? 진즉 이 선은 넘었다. 조절할 수 있는 시기는 벌써 지난 것이다. 실상 누가 보면 그에게 중독되었다며 질타라도 받을, 딱 그런 상태였다. 물론 부담스러워할까 싶어 이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요즘 베이비 모니터 프로토콜을 자꾸 꺼두는 것 같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어? 잘못 건드리면 망가진다고 경고했잖아.”

“어... 그게 말이죠,”


갑자기 찌르고 들어온 질문에 피터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얼마 전부터 토니한테 고백하는 연습을 하고 있거든요. 거울을 봐야 하는데 제 얼굴을 직접 들곤 못 하겠어서 마스크 쓴 채로. 이게 스타크 씨한테 가면 안 되잖아요. 뭐... 이뤄질 거라곤 기대하지 않지만, 이래야 포기하기도 편할 것 같아서요. 차마 말 못 할 사정이 혀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지려다 겨우 삼켜졌다.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해봤자 그와 거리만 멀어질 뿐이다. 조심해야지. 제 의지와 다르게 시도때도 없이 울컥 나오려는 진심 탓에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냥, 사정이 생겨서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저도 사생활이 있는 걸요.”

“흠— 뭐 그렇긴 하지. 또 혼자 토르 흉내 내나? 아님 고백 연습이라도 하는 거야?”


네? 졸지에 정곡을 찔린 피터가 아무 말도 못하고 뺨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아, 망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토니의 눈동자가 조금 커지는 게 느껴졌다. 상대가 스타크 씨라는 건 절대 모르겠지만, 이걸 들킨 시점에서 그의 놀림을 벗어나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니는 재밌다는 듯 호오— 작은 탄성을 내더니 이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영락 없이 영웅의 약점을 찾은 악당의 얼굴이었다. 무언가 석연치 않아 보이는 표정은 분명 제 착각일 터다.


“뭐야, 그런 거였어? 꼬맹이도 다 컸군. 이제 kid라는 단어는 안 어울리겠네.”

“아, 그런 게 아니고요—!”


조금만 더 건드렸다간 터져버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달아오르는 피터의 두 볼을 보며 토니가 애써 고소를 감췄다. 좋아하는 사람 있구나.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했다. 의연하게 대처하려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도저히 축하나 응원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도 힘들었다. 자신일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안 했다. 그가 자신을 존경하고 따르는 줄이야 잘 알지만, 조금만 바짝 붙어도 힘겨워 하는데다 부담스러운 티가 났던 만큼 그 감정이 연애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으므로. 좋은 일이다. 실상 저가 포기하기 위해서라도 이 상황은 반길 만한 소식이었다.

그래. 분명 잘 된 건데, 왜 속이 쓰리지.


“뭐, 잘 해봐. 과연 꼬맹이 네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놀리지 마세요—!”

“좋겠네, 체리마냥 빨개진 피터 파커에게 고백을 받는 상대는.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꼬맹이 너 객관적으로 꽤 괜찮아. 기죽을 필요 없다고. 누가 되었든 다 물리쳐버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게다가 고, 고백한다고 꼭 사귀는 건 아닌 걸요! 차일 수도 있는 거고.”


특히 제 사랑은 차일 확률이 높은 짝사랑이니까. 그보다 이런 얘기를 왜 스타크 씨와 하고 있는 거야. 이랬다가 자신이 사실 그를 좋아했었다 하면 분명 잔뜩 곤란한 표정을 지으실 텐데. 살짝 입술을 깨문 피터가 잠시 어색한 정적 틈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갈게요.”

“......그래.”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한 발짝 멀어졌구나. 둘 모두 저만의 방식으로 속에서 아쉬움을 삼켰다. 잠시 후 피터가 나가고, 토니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그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차라리 참고 좋은 말이나 해줄 걸.

답답했다. 피터의 페로몬이 돌 때면 이런 적은 없었건만. 


* * * *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어이 없는 거 알아요? 어쩜 그렇게 감쪽 같이 아닌 척을 하셨지.”

“너도 만만치 않아, peanut.”


그 고백 연습이라는 게 나를 상대로 하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그리고 마음을 먹었으면 얼른 해야지, 내가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줄 거라 믿은 건데? 적반하장 같은 소리에 피터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선 반발했다.


“전 진짜 토니가 저한텐 마음 없다 생각했단 말이에요. 토니야말로 뭐가 무서워서 저한테 아무 말도 못한 건데요?”

“허어, 그걸 몰라서 물어? 그리고 마음 없다 생각했다니, 내가 얼마나 티를 냈는데. 난 내 사회보장번호도 기억 안 하는 인간이라니까. 그런 내가 너 동아리 활동까지 분 단위로 꾀고 있으면 당연히 알았어야지. 그런 걸로 따지면 내가 더 착각하기 쉬웠다고. 만날 때마다 대놓고 페로몬 싫어하는 티가 나는데 어떻게 건드려. 심지어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를.”

“꼬맹이 아니라니까.”

“물론 이젠 아니지. 지금은 그냥 땅콩이잖아. 그것도 제일 작은.”


귀엽긴. 얄궂게 맞는 소리만 쏟아낸 토니가 곧 태도를 고쳐 옆에 버젓이 팔을 베고 누운 제 어린 연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폭 안긴 체온이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알아챘거든? 안 그랬음 우리 아직도 삽질하고 있었어.”

“그건... 고맙게 생각해요.”


참 격동적이었지. 즉흥적이었고. 다시 떠올려보자면 우연이었다. 하지만 필연이기도 했다. 아주 잠깐, 힘겨워하는 눈동자 속에 서린 피터의 진심을 자신이 투시해버린 것은.

평소처럼 아슬아슬한 관계 속에서 싸우던 때. 피터가 스타크 씨는 어차피 저 같은 건 어린애로밖에 안 본다며, 자신은 스타크 씨의 아들 따위가 아니라 소리치던 찰나.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이 좋아요. 시선에 담긴 절절한 호소가 지금껏 두 사람을 가려왔던 안개마저 뚫고 날아들었다.


그 순간 토니가 피터를 붙잡고선 앞뒤 안 가리고 물었다. 그럼 kid, 넌 오메가를 안지 않아도 되냐고. 사랑하는 상대라면 알파든 베타든 상관 없느냐고.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무래도 좋아졌다. 마치 어떻게 알았느냐 말하는 듯해서, 충동적으로 토니가 고백했다.


피터 널 좋아해. 그냥 아끼는 거 말고. 키스하고 싶은 감정으로.


어떻게 이걸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기회를. 사실 예전부터 스스로의 마음은 자각했지만 싫어하는 애에게 들이대고 싶지도 않아 삭혔다. 처음엔 함께 있는 걸로 충분하다 여겼다. 피터 파커가 자신에게 바라는 건 선배이자 우상이지 애인이 아니라 판단했다. 게다가 알파와 알파이니 맺어질 확률부터 낮았다. 하지만 이런 비겁한 변명으로 홀로 결론 지어놨을 뿐, 언제든 몇 번이고 제 욕심으로 옭아매고 싶었다. 그런데 작은 제 거미가... 자신에게 욕정하는 시선을 봐버리고서 이성이 멀쩡할 리가.

아니나 다를까 정타를 맞은 피터는 표정을 숨길 생각조차 못한 채 입을 떡 벌리고선 새빨개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고개를 겨우 끄덕였을 뿐이다.


“사실... 전 그러고 바로 진도 나갈 줄 알았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미성년자였어. 누구 손목에 수갑 채울 생각이야?”


아무리 내가 아이언맨이라지만 그런 것과 친해지는 건 사양이라고. 넌더리를 내는 토니에게 피터가 불만스럽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각인하기 전까진 진짜 힘들었단 말이에요. 각인 한 번이면 그렇게 편해질 일이.


“...어쩔 수 없잖아.”


우여곡절 끝에 서로 좋아해 맺어진 후에도 한참동안 여전히 피터가 토니 페로몬을 힘들어하던 건 저 역시 마음이 많이 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각인이 이런 현상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피터가 자신을 몰아붙였다. 해줘요. 우리 서로 좋아하는 거잖아요. 저 예전부터 궁금하기도 했고. 당돌하다못해 무시무시하게까지 느껴지는 꼬맹이의 안광을 슬금슬금 피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단언컨대 그 날은 토니 스타크 인생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두려운 순간이었다.

결국 확실하지도 않은 걸로 일을 치기엔 너무 위험 요소가 많다고, 이게 널 위해서이니 성인 전까진 절대 안 된다며 못 박아 위기는 넘겼지만, 나이가 되어 미루고 미루던 각인을 무사히 해낸 후 정말 아무렇지 않아진 피터를 보며 속으로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각인할 걸 그랬나 후회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만의 비밀이었다.


“물론 처음엔 페로몬 조절이 안 돼서 좀 고생은 했지만, 뭐 사소한 일이었고.”

“...그것 때문에 날 얼마나 곤란하게 만들었는진 기억나지 않나 보지, 파커 군?”

“흐응— 파커 아니에요. 조금만 지나면 저도 스타크라고요.”

“너한텐... 아직 너무 무거운 이름이야.”

“토니와의 짐을 나누는 거니까 상관 없어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저 괴력인 거.”


그야 스파이더맨이니까. 뒷말을 삼킨 토니가 맹랑한 제 연인을 슬금 눈으로 훔쳤다. 정말 이 녀석이 저와 결혼한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피터 벤자민 스타크라. 묘하게 어울린다. 누가 들으면 꼴사나워 할 생각을 곱씹으며 토니가 피터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줬다.

이젠 제 사람이었다. 아직 익숙지 않은 파티에 함께 참석해 곁을 지키는 그가. 온갖 난잡한 향에불쾌해져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면 으레 자신을 슬쩍 보더니 능력 있게 페로몬을 제 주변에만 슬슬펼쳐 환기해줄 줄 아는 꼬맹이가. 새까만 의도 없이, 그저 하얗게 사랑한다 말할 줄 아는 사랑스러운 소년이.


살다 보면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행복할 수만은 없다. 어떤 사소한 일로든 싸우게 되리라. 그리고 쉽게 끝나진 않겠지. 둘 모두 고집 부리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인물들인데다, 태생적으로 지배하고 이기기를 바라는 알파니까. 기운을 충돌시키다가 어디 하나가 날아갈 지도 모르고, 거창하게 기사가 나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혼설까지 뜨며 한창 문제의 화두로 오르게 될 수도 있다. 피터는 열성이지만 각인한 후 토니에겐 더없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밀리진 않을 테다.

—그래도 다만 함께라서 행복할 수 있는 상대가 제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해.”

“제가 더 사랑해요.”


나지막히 고백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었다. 이제는 오래되어 조만간 새것으로 바뀔 왼손 약지의 반지가 햇빛에 닿아 반짝였다. 새겨진 문자가 선연하게 드러났다.


나의 알파에게.








02) 소년이 소년에게 (열일곱과 열일곱)


* 썰을 그대로 재업했습니다. 오타, 비문 및 어미는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추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둘 다 알파인 젊토니피터(2)는 내가 볼 땐 한 삼백 퍼센트 정도 싸우며 시작할 것 같다. 어른 토니야 어릴 때부터 TV로 동경심도 키웠고 아이언맨에게 구출된 적도 있으니 피터가 싫어하지 않겠지만 피터 가만 보면 또래라 상정했을 때 토니랑 피터의 성격이 부딪치지 않고 넘어갈 애들이 아니랄까. 특히 둘 다 알파라면 피터가 원래는 온순한 편이긴 해도 걸어오는 싸움을 딱히 피하지 않아서 많이 부딪칠 게 예상된다. 이 경우 토니 우성, 피터도 우성. 그리고 여기에 화룡점정은 토니와 피터가 서로의 페로몬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점.
그런 와중에 여러 가정이 있겠지만(히어로로서 알게 될 수도 있고, 다른 학교 다닐 확률이 높긴 한데) 난 개인적으로 둘 다 평범하게 같은 학교 다니다가 토니가 피터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둘의 관계가 바뀌는 그런 이야기가 보고 싶어ㅠㅁㅜ 여기서 토니는 아 내가 저 재수 없는 범생이의 약점을 잡았구나 본능적으로 알고 회심의 미소를, 피터는 아니 들켜도 하필 왜 쟤한테! 라며 속으로 비명을 지르겠지. 그리고 입술을 씹은 채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고민할 거야. 충분히 페로몬으로 토니가 다가오고 있는 걸 감지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몰랐지? 자문하다가 방금 너무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 걸고 범죄자들 잡느라 스파이더 센스가 가리키는 대상이 한 명 더 있었는 줄 미처 파악 못했구나, 다른 감각은 거의 닫고 전투 본능에 집중하느라 넘겨버렸구나 그 여파 때문이구나 깨달아 한숨이 길어짐. 그렇게 멀뚱멀뚱 정말 복잡하디 복잡한 얼굴로 피터가 서 있으니까 그 모습이 지금껏 알아왔던, 머리 좀 좋은 것 빼곤(그마저 본인보단 못한) 별 볼 일도 없으면서 괜히 자꾸 눈앞에 알짱대 자신을 짜증나게 만들던 피터 파커의 모습과 약간 괴리감이 느껴져 토니도 덩달아 조용해지고. 약간 어색한 와중에 일단 계속 슈트 차림으로 있긴 그러니 미안한데 나 옷 좀 갈아입어도 되겠냐며 결국 피터가 먼저 입을 열어. 토니는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이고 몸에 밴 예의에 따라 등을 돌리려는데 살짝 드러난 복부에 채 아물지 않은 상처(그것도 꽤나 심해 보이는)가 눈에 띠어 버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 함. 야 너 잠깐만. 이거 뭐야? 으르렁대던 상대인 것도 잊고 놀라서 묻는 토니 때문에 잠시 주춤한 피터가 머뭇거리더니 그냥 얼버무려선 안 물러설 게 뻔하니까 한숨 푹 쉬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투로 어제 다른 사건 해결하다가 좀 긁혔어, 라 대답. 그리고 토니는 태연하다 못해 둔하게까지 느껴지는 피터의 반응을 보며 이유 모를 분노가 치솟는 걸 느낌.
심지어 덧붙인 말이 괜찮아, 금방 나아. 흉터도 안 남으니 상관 없어. 따위의 내용인데다 어투도 별 것 아닌 남일 이야기하듯 심드렁해서 속으로 아 얘 진짜 나랑 안 맞아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음. 반대로 피터는 토니가 자길 싫어하니까 내심 약점이라도 쥐고 흔들 줄 알고 긴장했더니 이건 또 무슨 전개인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 그러다가 토니가 대뜸 말하겠지. 너 우리 집 좀 들르자. 당연히 피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문. 아니 내가 갑자기 왜?! 그리고 벌써 거절이 묻어나는 그의 반응을 가만히 보던 토니가 아니 그럼 넌 평소 사이야 어쨌든 같은 반 애가 그런 식으로 다친 걸 봐버렸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겠냐고, 난 못하겠으니 불편해도 따라오라며 먼저 앞장 섬. 그렇게 피터는 그의 주장에 딴지를 걸 수가 없어(분명 자신도 누군가 상처 입은 채로 있었다면 무시하지 않았을 테니) 조금 이상한 기분으로 얼결에 토니 스타크의 자택으로 입성하게 된다.
여차저차 비밀 숨기는 처지라 이게 피터의 약점인 건 알지만 다쳤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얘를 싫어하고 증오한 건 아니어서(재수 없고 거슬린다 정도였지) 네가 원하면 비밀은 지킬 테니 그렇게 좌불안석하지 말라고 말하는 토니. 그런 그에게 좀 벙쪄 있다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조심히 고맙다 대답하는 피터 보고 싶다. 그 후 무어라 표현하긴 어렵지만 명백히 둘 사이의 관계가 바뀌어. 두 사람이 다니던 학교는 원래 상류층 애들이 많은 이른바 귀족 학교인데(피터는 시험 봐서 장학생으로 들어온 경우) 그런 집단에 언제나 존재하는 알파 무리 중심이었던 토니가 조금씩 걔네보다 피터 파커를 신경 쓰기 시작한 것. 얘기 나누다 보니 진짜 본인 수준까진 아니어도 장학금 충분히 받을 만큼 영리하고 은근 책임감도 있고 아무튼 그가 꽤 괜찮은 애라는 걸 알게 돼서 같이 지내는 게 좋았던 거지. 어째서 예전엔 그렇게도 부딪쳤는지 모를 정도로.
피터는 사실 돌변한 토니의 태도가 엄청 신경 쓰이고 뭐랄까 아직 불편한데 또 수업 관련 얘기가 잘 통하는 애랑 대화 나누는 점은 좋고, 좀 가까워지고나니 그저 거만한 도련님일 줄만 알았던 토니가 의외로 저와 상성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놀라워할 테고.
다만 여전히 서로의 페로몬은 싫어해서 토니가 이런 교육 따로 안 받았을 피터에게 페로몬 갈무리하는 법 요령 알려줄 것 같다. 강하든 약하든 절대 본인이 원하지 않을 때 새어나오지 않게 조절하는 나름의 꼼수 막 이런 거. 사실 피터도 평소엔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 토니랑 처음 만났을 땐 둘 다 강한 편이라 피터의 페로몬이 먼저 무심코 샌 거고, 한정된 배경에만 익숙해있던 토니로썬 그게 일종의 결투 신청 같은 시비였기 때문에 본인도 감출 것 없이 개방했던 거지. 아무튼 이렇게 멋도 모르고 훅 친해져버려서 둘 다 정신 차렸더니 서로 좋아하게 된^ㅁ^ 피터고 토니고 어떡하지 살짝 멘붕 오는데(피터는 경험이 없으니 아직 “내가 스타크를? 설마!”하는 단계인데 이게 리즈를 호감으로 좋아할 때와 명백하게 다른, 좀 더 강한 감정이라 곤란한 상태고 토니는 지금껏 당연하게 짝은 오메가나 여성만 선택해왔건만 (보통은 이 둘이 겹치는 여성 오메가 위주로 사귀었음) 쟤는 일단 오메가도 아니고(베타여도 당혹스러울 텐데 심지어 알파) 여성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 객관적으로 이 두 가지를 모두 무너뜨릴 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애도 아니라 자꾸 아무 이유 없이 흘러가 꽂혀버리는 제 시선이 당혹스러움) 이렇게 싱숭생숭한 와중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건이 발생함. 스파이더맨의 비밀을 지켜주던 토니가 충분히 폭발할 만한.
피터가 사라졌거든. 그것도,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상처를 달고서.

일의 경위는 대략 이랬어. 아직 스파이더맨으로 활동한지 그리 오래 되진 않은 피터는 토니에게 들킨 것만 봐도 예상할 수 있듯 정체를 숨기거나 싸우는 데에 서툴었는데, 그 때문에 다치거나 기타 아슬아슬한 상황이 많았던 것. 그래서 친해진 후론 은근히 토니가 피터 걱정도 하고 혼도 내고 잔소리도 한 바가지씩 쏟아냈지. 피터는 그게 예전에 하던 비꼼이나 놀림 같은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염려임을 알기 때문에 보통 가만히 마주 서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편. 물론 그렇다고 친절한 이웃 활동을 안 하진 않았어. 토니는 내심 저걸 다 참견할 순 없지만 위험한 일에까지 끼어들진 말았음 싶은데, 피터 입장이 “내가 도울 수 있는 데까지 한다. 이 힘이 가진 책임감까진 내가 진다”여서 늘 간접적으로만 본인 의견을 흘릴 뿐이야. 분명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뭔줄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 걸 테니까. 실제로 피터는 이 일론 토니에게 양보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얼버무려왔고. 그런데 점점 다치는 빈도가 잦아지는데다 상처 크기나 깊이도 심해져. 오죽하면 예전엔 보통 하루만 있음 나아 학교까지 다친 걸 보일 일이 없었건만 최근 들어 아물지 못하는 바람에 주렁주렁 상처를 달고 다녀. 피터 단짝인 네드나 같은 반 미쉘마저 은근히 의심하는 기색을 비출 정도이니 비밀을 아는 토니야 당연히 무슨 일이 있구나 눈치채지. 그리고 워낙 티가 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피터를 추궁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누군가 스파이더맨 가면 속 얼굴의 신원이 피터 벤자민 파커라는 걸 알아버린 거야. 그걸로 피터는 협박당한 거고.
당연히 타박이 이어졌어. 그리고 토니의 상기된 표정과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던 피터의 눈썹이 별안간 한 마디에 움찔 떨려. 너 진짜 이것 좀 그만하면 안 돼? 순간 욱해서 토니 본심이 그대로 나와버린 거지. 피터는 본인 부주의인 줄 알지만 설마 저 말을 직격으로 듣게 될 거라곤 생각 못해서 딱딱하게 굳어있었어. 토니는 하아, 잠시 한숨을 쉬더니 이 참에 잘 됐다고, 그런 거 그만하고 차라리 자기랑 다른 식으로 사람 돕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해. 다만 한 가지 문제였던 건 이 말을 한 게 토니였고, 그의 입담은 선천적인 건지 후천적인 건지 몰라도 굉장히 독선적이라는 사실.
알고 있었겠지만 나 네가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이랑 원색 코스튬 입고 설치는 거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위험해진 건 짜증나지만... 됐어, 차라리 기회야. 이번에 그 이웃 일 관둬. 토니는 지금 피터가 많은 실수를 해서 변명할 입도 없겠다, 몰아붙이면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약간은 기대한 거지. 자신은 어찌 되었건 본인 외에 유일하게 피터의 정체를 알고서 함께한 일종의 같은 편이고, 그간 친해졌으니 본인 마음을 외면하지 못할 거라 여긴 거야.
토니의 오산이었어. 독선과 걱정과 분노가 낳은, 최악의 실수.

입술을 짓씹던 피터는 딱히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서 복잡한 표정으로 토니를 보다가 마치 언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침묵하지. 그리고 딱 이렇게만 말해. 스타크, 네가 내 비밀을 무기로 이러는 거 나한텐 그 협박과 딱히 다르게 안 느껴져. 돌아가. 여기 내 집이야.
아니 너무 길어지네 아직 알파 알파 두 번째 케이스인데^ㅁㅠ 이대로 가다가 타래 300개쯤 달리는 거 아니야?(진짜 그럴 거 같아서 제일 무섭다) 아무튼 그렇게 한 번 싸우고 소원해진 관계에 토니가 답답해하는데 결국 본인 말 안 들은 건지 피터 잔상처가 또 여기저기 보여. 안 되겠다며 절교까지 각오하고서 피터를 쫓아가는 토니. 아니나 다를까 골목으로 들어가 또 그 지긋지긋한 스파이더맨 슈트를 가방에서 꺼내길래 딱 토니가 다가가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악당도 등장해. 그리고 비무장 상태에 딱히 이런 일을 접해본 적도 없고 일반인일 뿐인 토니를 보호하기 위해 무리한 움직임을 보이다 피터가 치명상을 입게 됨. 토니는 너무 급박하게 흘러가서 순간 상황 판단이 안 되다가 두 눈을 크게 떠. 그러면서 혹여라도 피터 정체가 더 퍼질까 싶어 일부러 스파이더맨이라 칭하며 왜 막았냐고, 너라도 도망쳤어야지 왜 범죄자 잡으려 하다가 이렇게까지 다치냐고 소리쳤더니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와. 이게 내 힘이고, 책임이야. 당연히 했어야 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날 막지 말아줘. 워낙 작게 속삭여서 겨우 잡은 악당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음성. 그리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피터를 바라보고 있는 토니에게서 등을 돌려 사라져.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잡아야 했어.

사건이 벌어지고 3일이 넘도록 피터는 학교에 결석해. 최근 영 수업에 집중 못 한다는 지적을 많이 받은 피터였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 반 아이들이 수군대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토니는 입술을 짓씹어. 왜 오지 않는 걸까. 자신은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속으로 반복해 던지며.
상처가 덜 아물었나? 제 기억으로 피터는 지금까지 중 가장 크게 다쳤었어. 힐링 팩터가 있다곤 하지만 그걸로도 3일간 전부 회복이 안 됐을지도 모르지.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거면 어쩌지? 물론 큰 힘은 못 되겠지만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야 곁에 있어라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일순 피터가 자신을 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그 가정은 무시했어. 걔도 그땐 상황이 워낙 급박했고, 감정이 격해져서 내가 심하게 표현한 걸 이해했겠지. 괜찮겠지. 최근엔 많이... 친해졌잖아. 합리화는 만약 지나가던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애처로워 할 정도였어.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피터 집에 가보자 마음 먹은 토니가 하교하자마자 익숙한 거리를 돌고 돌아 파커네 앞에 도착해. 누워있을까? 병원 가서 소독 받았으려나? 여러 생각을 하며 벨을 눌렀는데 한참이 지나도 답이 없어. 이상하다, 찜찜한 기분을 애써 가라앉히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시간동안 기다렸더니 나타난 건 익숙한 제 또래 소년이 아니라, 아마 피터의 보호자로 보이는 한 여성. 방금까진 잠들어있었던 건지 편한 차림에 머리나 얼굴은 굉장히 고생한 사람처럼 엉망이었어. 무언가 일이 있구나,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토니가 침을 삼키는 사이 그녀가 불청객과 다름없을 토니를 멍하니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미안, 내가 경황이 없어서. 안에 들어와서 잠시만 기다려주겠니? 하며 그를 집으로 들여. 피터의 집은 분명 처음은 아니지만 언제나 피터 혼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는 게 처음이었어. 이분이 피터 숙모시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토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했어.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피터 친구인 토니에요. 학교를 3일이나 빠지길래, 원래 그럴 애가 아닌데 싶어서 걱정되어 여기까지 왔네요. 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피터. 조카의 이름에 숙모의 어깨가 들썩 떨려. 그 작은 반응은 토니를 흔들기에 충분했어. 뭔가, 있구나.
스스로를 메이라 소개한 그녀는 예상한대로 피터의 숙모였어. 그리고 오래 기다린 끝에 토니는 상황을 듣게 되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일이었어.

“피터가... 나흘째 집에 오지 않아.”

—덜컹. 이 소리는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일까, 커다란 벽에 부딪쳐 시야가 까맣게 물드는 소리일까.
순간 정말로 눈앞이 점멸하는 것 같았어. 피터 파커가 여기 없다고? 그럼 어디 있는데? 그리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토니의 머리는 비상하게 그의 흔적을 쫓았지. 방과 집, 언뜻 보면 특별한 게 없어 보이지만 토니의 무의식이 저장해뒀던 예전 모습에서 몇몇 물건의 위치가 달라진 것을 단서로 해서.
다시 말하지만 토니는 피터네 집에 자주 들르는 편은 아니었어. 저번에도 참지 못해 그를 추궁하기 위해 쫓아간 거였을 뿐이고 친해진 후에도 대부분 밖이나 학교에서 만나는 데에 그쳤지. 그 전엔 안 친했으니 당연히 올 이유가 없었고. 그래도 최근, 며칠 전에 이 집에 찾아온 걸 토니는 다행으로 생각했어. 덕분에 어긋나 있는 옷장 구석에서 피터 파커가 숨겨두었던 피 묻은 붕대를 찾았거든. 그녀는 아마 바쁜데다 하나뿐인 조카가 한참 예민할 나이이니 이 방은 자주 안 들러봤겠지. 덧붙여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 또한 모르니만큼 이런 게 있을 거라 예상치도 못했을 테고.
피는 말라붙긴 했지만 상태로 보아 하니 오래되진 않았어. 게다가 한 두 개가 아닌데 각각의 색이 달라. 숙모가 부재중일 때로 골라 들렀던 건가? 아무튼 이것만으론 정보가 부족했어. 아직 피터의 상태가 매우 안 좋다는 사실만 재확인한 데에 그친 셈이야. 다른 게 필요했어.
곧 토니는 다른 걸 찾았어. 피터의 화학 실험 노트. 사실 피터 방에 피터 물건이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었지만 적어도 토니는 알고 있었지. 저건 원래라면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왜냐하면, 피터의 가방은 없는데 저건 원래 그 안에 들어있던 거거든. 그가 사라진 날, 정확히는 다친 그 날,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화학 실험 수업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모범생인 피터는, 스파이더맨이 된 후 불가피하게 가방을 잃어버리면서 내용물까지 모두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놓고 오게 된 몇 번을 제하곤 지금까지 준비물을 빼먹은 적이 없었고.
의심되는 이상 살펴봐야겠지. 토니가 조심스레 피터의 노트를 펼쳤어. 주인의 허락 없이 물건을 만지다니, 평소의 토니라면 그럴 이유도 의향도 없어 그러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 제쳐뒀어. 서둘러 내용이 적힌 부분까지 넘겼더니 다음 장이 찢어져 있는 게 보였어. 토니의 눈이 반짝였어. 이거다.
연필 자국으로 알아낸 찢어진 페이지의 내용은 어느 장소였어. 이게 무슨 곳일까. 토니의 고민은 짧았지. 그가 지금 이 상황에서 주의를 기울여 찾아낼 장소라면 둘 중 하나잖아. 은신처, 혹은 적의 주둔처. 어느 쪽이든 피터가 있을 거고 그래서 자신이 가야 하는.
그렇게 토니가 도착한 곳은 어느 공원이었어. 저녁이라 조금 스산했고, 몇몇 노숙자가 눈에 보였지. 이런 척 보기에도 위험한 곳이라니. 침을 꿀꺽 삼키며 토니가 몇 발짝 걸었어. 피터를 찾기 위해서.
그러다 저 멀리 풀숲에 시선이 닿고 걸음을 딱 멈췄지. 사방은 어둡고 색은커녕 실루엣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왠지 알 것 같아. 그가 어떤 식으로 나무에 기대서, 가쁜 숨을 옅게 뱉어내며, 결코 적지 않을 고통을 홀로 참고 있는지.
목소리가 가득 잠겼어. 이게 하루 종일 고생한 탓만은 아닐 거라 생각하며 토니가 입을 열어 그를 불렀어.

“...피터 파커.”

잠시 환청을 들었다 생각했어. 그도 그럴 게, 그가 지금 여기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피터는 들려온 목소리에 헛웃음을 지었어. 보고 싶다 생각했더니 별 일을 다 겪는구나.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그를, —토니를, 이토록 좋아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피터.”

그런데 이상했어. 한 번이면 모를까 또 들리다니. 내 생각보다도 많이 보고 싶어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그가 이곳에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

“피터, 나야. 토니.”

—그가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며 어둠에 익은 제 눈이 볼 수 있는 지점으로 가까이 오기 전까진.

“스타크...?”

왜? 어떻게? 혼란 속에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채웠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른 건 하나였어.
내 모습을 보이면 안 돼.

“...다가오지 마.”

매몰차게까지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는 정상이 아닌 걸 증명이나 하듯 잔뜩 쉰 상태였어. 그리고 토니도 그걸 눈치챈 듯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자신에게 다가왔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역시 아직 상처가 안 나은 거지? 내가 몇 개 가져왔어. 토니는 화가 난 것 같지 않았어. 아무리 토니가 먼저 잘못했다지만,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자신 역시 그에게 차갑게 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거 아니야. 괜찮으니까, ...오지 마. 여긴 왜 온 거야? 어떻게 알았어? 아무튼 돌아가. 이건 내 일이야.”
“피터, 아무리 너라도,!”
“할 수 있어! 해야 해!”

신경질적이다 싶을 만큼 강한 반발에 토니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어. 피터는 본인이 실수했다곤 생각했지만 말을 멈추진 못했어.
지금까지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어서였던 건지. 괜찮다 생각했는데 사실 조금 버거웠던 건지 한 번 터지기 시작하니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될 정도였어. 걱정해준 건 고마워. 정말로. 근데 내가 해결해야 해. 내겐 메이가 있고, 힘도 가지게 됐고, 축복받았다는 우성 알파이기도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갖고 싶어 했던 걸 내가 받게 되었으니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해. 삼촌이 그러셨는 걸. 그리고 지금껏 잘해왔어. 숙모는 오히려 날 챙겨주시긴 했지만 사고 안 치려고 노력했고, 부담 드리기 싫어서 장학금도 받았어.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나를 메이가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데.
학교에서도 잘 버텼어. 알파가 많아서 조금, 아주 조금 힘겹긴 했지만 혼자인 게 힘들지도 않았고 네드가 있었는 걸. 미쉘과도 잘 지내는 편이고. 너와도, 친해졌고.

“...괜찮단 말이야.”
“......하지만 너,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이야. 그리고 아프잖아. 그 모든 걸 네가 감당하려 하지 마.”
“아니, 이 정돈 정말 스친 거고...,”

그 순간이었어. 토니가 갑자기 언성을 높여 말한 건.

“—내가 괜찮지 않아!”

그 순간 피터는 토니의 표정을 봐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어떨지조차 잘 모르지만 그냥 왠지. 뭔가, 봤다간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았어.
하지만 호기심인지 책임감인지 모를 마음이 기어이 그를 보게 만들었고, 피터는 숨을 멈췄어. 그 토니 스타크가, 분명 살면서 한 번도 지어본 적 없었을 얼굴을 한 채 괴롭게 피터를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우습지.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반발심이 일었어. 네가 왜 내 걱정을 해? 어째서 이런 식으로 날 기대하게 만들어? 자꾸 그러면 내가, 네 걱정을 왜곡해 해석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이상하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어. 실수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도 멋대로 말이 나왔어.

“...왜 그래? 너랑 상관 없잖아.”
“뭐? ...젠장, 피터 파커! 어떻게 상관이 없어? 내가 널 좋아하는데!”

그리고 토니가 소리쳤어.

지극히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고백이었어. 아직 본인 스스로도 전부 자각하고 인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그야말로 예기치 못한 사고. 그리고 거의 비명과 같은 토니의 고백을 들은 피터의 첫 반응은 바람 빠진 실소였어. 아, 역시 환영이었구나 싶어서. 그런데도 뭐라 대답할 수가 없어 입을 꾹 닫았어. 좋아한다니. 아무리 상상이라지만 너무 행복한데, 상상이기 때문에 깨어나야 할 꿈이거든. 여기서 좋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간 현실에서 분명 토니에게 실수할 거야. 물론 토니는 그런 피터의 어지러운 속을 투시할 수 없으니 몰랐지만.

"......."
"제길, ...최악이네.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될 줄이야."

잊어. 어차피 넌 날 좋아하지 않으니. 친해진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 생각해. 솔직히 나도 원래는 너 안 좋아했고. 갑작스럽겠지. 대답하지 못해도 이해해. 어느새 토니는 이성을 되찾은 후였어. 펄펄 끓던 이성과 분노가 겨우 한 마디로 허탈하게 식어버린 탓이었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맑은 목소리를 한 줌도 내주지 않는 피터 파커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그보다 언제 자신의 마음이 여기까지 커진 거지 의문이 들었을 뿐. 왠지 도망가버릴 것 같은 피터 파커를 보는 순간, 자해하는 그를 보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어. 다친 게 쉬이 낫는다 해서 아프지 않은 게 아닌데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는 그가 안쓰러웠고, 그 전에 마음이 아팠어. 언제부터였을까. 예전엔 그저 재수없는 알파였을 뿐인데. 자신은 평범한 알파야. 사실 알파가 알파를 좋아하게 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어. 일단 성향상 그랬고, 특히 토니는 만난 알파의 대부분이 경쟁자나 부하, 혹은 적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지. 그런데 오메가와 몸 섞는 걸 즐겼건만 언젠가부터 피터를 더 많이 생각했어. 특별한 친구로 끝나지 못할 감정이 축적되고 있었던 거군. 속으로 자조하며 토니가 이를 갈았어. 지금껏 내게 호소하듯 사랑한다 말하던 상대들도 이런 기분이었나. 어딘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차가운 폭포가 제 머리 위로 쏟아진 것 같았어. 텁텁한 모래가 자신을 전부 덮어 매장해버린 것 같기도 했고.

"...아무튼...... 일단 돌아와. 메이가 걱정하니까."
"메이...?"
"아까 만났거든."

메이. 숙모의 이름에 피터에게 반응이 왔어. 자신의 고백 이후 거의 10분, 불편했던 침묵이 드디어 깨진 것에 안도하면서도 역시 답은 거절인가보다 싶어 토니의 입안에선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어. 그래도 일단, 상황이 어찌 되었건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잊진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눌렀지. 당장 제일 중요한 건 피터를 데리고 돌아가는 일이었지 피터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어. 애당초 밝힐 마음이 없었는 걸. 원래라면.

"잠, 잠깐만. 그- 저, ...지, 진짜... 스타크 너야......?"

그런데 피터가 이상한 소리를 했어. 그럼 내가 아님 누군데. 속으로 물음표를 띄우며 토니가 고개를 끄덕였어. 맞다는 의미로. 그에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두 눈이 더 커졌어.

"정, ...말로?"
"...나 맞아. 왜 그러는데?"
"토니... 메이, -...."

말은 이게 끝이었어. 충격 때문인지 피터가 쓰러져버렸기 때문에. 사실 언제 정신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태라 버틴 게 용할 정도였지. 그 사이 언제 만든 건지 모를 상처에서 샌 핏물을 짓눌러 지혈한 토니가 피터를 안아 올렸어. 어디로 갈까. 고민은 짧았지. 핸드폰을 켠 토니가 두 곳에 연락을 취했어. 하나는 자신을 데리러 와야 할 해피. 그리고 하나는 자신의 주치의.

"해피, 여기 좌표 보내줄게 데리러 와줘."

순간이었지만 토니는 여러 가지를 계산했어. 일단 다친 상처를 돌봐야 하니 치료가 필요해. 하지만 그가 지금껏 숨겨온 정체를 비밀로 부치기 위해선 당연히 병원에는 갈 수가 없지. 자주 집에 오는 스타크 가 전속 주치의가 있긴 했지만 그건 분명 아버지인 하워드에게도 연락이 닿을 거야.
최선은 뭘까. 결국 좀 번거롭긴 하지만 그는 병원에서 자신의 정기검진을 담당해주던 의사를 특정 장소로 불러들이기로 했어.
집에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 이런 몰골의 친구를 업고 갔다간 엄마가 우선 충격을 받을 게 뻔한 데다 하워드 역시 반기지 않을 테니까. 추궁도 뒤따를 거고. 반대로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토니가 평소 외박을 자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의심은 받겠지만, 하워드는 제대로 위치를 보고할 경우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은 아니니 넘어가긴 차라리 쉬웠어. 역시 차라리 호텔 하나를 잡아 하룻밤 묵는 게 나을 것 같았어. 의사도 돈 많이 쥐여주며 거기로 부르면 그만이고.
사실 해피를 부르기 전엔 일순 망설였어. 그가 아버지께 보고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어. 그리고 하워드와 오래 지낸 만큼이나 저와도 세월이 쌓인 해피야. 잘못된 일이 아니니만큼 괜한 걱정을 덜어주고 싶다며 말로 꾀어내면 넘어가줄 것 같았어. 예상대로 처음엔 놀라던 해피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급해 보이는 토니의 표정에 금방 정신을 차렸어. 운전은 난폭하진 않았지만 굉장히 빨랐지. 이윽고 호텔에서 제일 좋은 방을 잡은 다음 의사에게 위치를 보낸 후에야 토니가 깊은 한숨을 뱉었어. 땀으로 흥건한 상태였어.
몰골이 장난이 아니었어. 머리는 아무렇게나 헤집어졌고 옷도 핏자국이 한가득 묻어있었지. 방 열쇠를 미리 받아 뒤로 들어간 게 천만다행이었어. 정문을 당당히 뚫었다면 다음 날 기사 1면은 피터와 토니 자신이 차지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으니까. 천하의 토니 스타크가 피투성이인 채로 어느 호텔에 돌연 등장하다! 이야기를 꾸미기 좋아하는 기자들은 온갖 자극적인 억측을 들이밀며 문제를 키웠을 거야. 골치아픈 상황은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이해관계가 피차 호텔 측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토니는 짧은 설명만으로 이례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어—물론 이에 상응하는 값은 치루기로 했어—. 특5성 호텔답게 행동에는 평정을 잃지 않으면서도 직원들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어. 병원에는 가셨습니까? 연락해 조치해드릴까요? 토니는 고개만 내젓고선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대신 그의 운전기사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며 질문을 일축했어.
방에 들어와 피터를 내려놓자마자 토니는 풀썩 주저앉았어. 힘이 풀린 탓이었지. 당연했어. 해피가 들어주겠다는 피터를 굳이 우겨가며 자신이 안고 침대에 눕힌 게 토니였으니까. 문을 열고 나서야 자신이 누군가를 안은 채 다닌 게 처음이라는 자각이 설 만큼 없던 정신 속에서, 그 절박함이 여기까지 도달하도록 도왔을 뿐. 자신이 누군가를 안고 달리다니.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었고 그건 명백히 제 의지였어. 언제나 곁에 있는 사람을 시켜왔었는데 피터는 그럴 수 없었던 것만은 부산한 와중에도 확실히 기억이 나거든. 방금 전까지 괜찮던 애가 갑자기 제 품으로 안겨오는가 싶더니 정신을 잃었고, 시간이 갈수록 몸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는 걸.
침착한 척했을 뿐 전혀 침착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걱정할 수밖에 없었어. 괜찮은 건지. 혹시 떠나버리는 건 아닌지. 계속 자신이 잡고 있어야 했어. 다른 사람이라면 좀 달랐을지도 몰라. 그저 옆에서 확인만 했을지도. 하지만 피터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피터 벤자민 파커니까.

의사가 도착해 그의 상태를 살폈어. 그는 토니에게, 간단한 조치는 취하겠지만 깊은 외상은 자신이 직접 건드리기가 어렵다며 아는 정형외과 전문의를 불러도 되겠느냐 물었어. 마다할 이유가 없지. 토니는 고맙다 대답했어.
상태가 심각한 건 아니라 했어. 그런데 이렇게 자잘한 상처를 많이 얻다니, 이 환자는 대체 뭘 한 건가요? 순수한 의문에 토니가 쓰게 웃었어. 밤마다 범죄자를 잡는 친절한 이웃 활동이라고 순순히 대답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그저 이렇게 마음을 삭히곤 말을 줄였어.
다행히 피터는 금방 일어났어. 의사가 떠나고 30분쯤 지나서였나.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꿈뻑꿈뻑,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더니 토니를 보고선 휙 고개를 돌렸어.

"피터, 괜찮아?"
"......응."

작은 목소리가 갈라져 들렸지만 딱히 이상한 낌새는 안 느껴졌어. 의사도 당장 못 일어났던 게 겹겹이 쌓인 스트레스와 과로 때문인 것 같다 했으니까. 다행이네.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토니의 혼잣말을 들은 피터가 한층 더 이불을 꽉 끌어당겼어. 심상치 않은 태도에 토니가 살풋 미간을 구겼어. 겨우 옮겨와 살렸더니만 보여주는 게 등뿐이라니, 보상이 너무 하찮잖아. 왜 그러는 거야? 물론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어.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전 토니와 피터는 크게 싸운데다 그걸 풀지도 못했지. 어디 그것 뿐인가. 자칫 친구로도 돌아갈 수 없을 대형 폭탄까지 터뜨렸어. 보기 껄끄러울 수 있지.
하지만 사실 그는 이런 와중에도 자신이 벌인 고백의 답이 듣고 싶었어. 그래도 거절당하고 싶지 않고, 강요하고 싶지 않아 참고 있을 뿐. 홧김에 충동적으로 저질러버린 일이긴 했어도, 최소한 토니는 그가 사랑한다는 말을 곱씹어보고 망설일 정도의 친분은 쌓았다 생각했거든.

"피터."
"으, 응?"
"그런데 왜 나 안 봐."

이제 이판사판이다 싶은 마음으로 토니가 꿍하게 물어봤어. 꼴도 보기 싫다든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간 난도질 당한 것처럼 너덜너덜해지겠지만, 원래 심성 착한 피터이니 적어도 그러진 않을 거라 기대하고서. 기절하기 직전 자신을 보고 안심한 표정이 진심이라 믿으며. 그리고 드디어 보게 된 피터의 반응은, 정말 의외이고, 또 기대 이상이었어.
정말 잠깐인데다 금방 가려버렸지만...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그의 두 귀가 빨갛게 익어 있었거든. 토니는 피터가 보인 그 신호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고.

“피터, 말 좀 해봐. 왜 날 피해? 내가 싫어?”

상황이 반전되는 건 순식간이었어. 바로 전까지 은근 위축되어 있던 토니가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차마 숨기지 못한 채 그를 건드렸어. 꼴도 보기 싫은 거면 나 갈게. 미안.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 거야.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뱉었지.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님 뭔데?”
“내가 싫지 않은 거지? 고백한 후여도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거지?”

다행이다. 일부러 혼자 북 치고 장구 쳐서 결론까지 다 내버렸어. 혹시라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까봐. 그에 완전히 사과처럼 익은 뺨에 바람을 한 가득 넣은 피터가 잠시 후 못 당하겠다는 듯 중얼거렸어.

“......아무튼 약았어.”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젊토니피터 지옥의 밀고당기기 맞관 삽질^ㅁ^ 피터가 은근히 강경하고 알파끼리 어떻게 사귀냐면서 자꾸 아닌 척하는데 토니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 마음 가출하게 만드는 미모를 십분 이용해 누구든 두근거릴 플러팅을 한 트럭씩 해대고(피터: 환장(그러나 싫진 않음)) 알파알파 젊토니피터의 제일가는 매력은 누가 뭐라 해도 다른 환경이지만 페로몬이나 우성 힘 차이는 거의 없는 두 사람이 죽어라 눈싸움하다가 몸싸움(^ㅁ^)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거 아닐까 하고 살포시 손을 들어봅니다 그리고 반드시 둘이 처음 침대 올라갔을 때 다퉈야 함 누가 위인지로 하하하 뿐만 아니라 둘 다 어느 한쪽이 무시당하는 상황(대개 피터가 파커로서든 스파이더맨으로서든 해당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토니 역시 적이 적지 않기 때문에 낙하산부터 시작해서 부끄럽지도 않냐는 둥 뒤에서 각종 모욕을 한 번씩은 받을 거 같고)이 왔을 때 으르렁거리며 싸워 이기고선(찍어누름) 애인한테 혼나는ㅋㅋ 흑흑 어쩌다 보니 아직 알파알파도 안 끝낸 채로 벌써 타래가 꽤 생겨버리긴 했지만 요지는 그겁니다. 알파알파 젊토니피터를 쌈에 싸서 먹어보세요 이 세상 별미 그 자체입니다









03) 소년이 그에게 (열다섯과 마흔 일곱)


* 썰을 그대로 재업했습니다. 오타, 비문 및 어미는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추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알파알파 연령반전 토니피터(3)의 경우 젊토니가 일방적으로 으르렁대고 막 짖는 반면 피터는 마치 지나가는 개 보듯 슬쩍 눈만 흘기고 무시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젊토니와 피터는 모두 우성. 둘이 비교해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수준.

우성 알파에 얼굴 되지, 머리 되지, 심지어 돈도 되고 명예와 권력도 있는 상위층으로서 누리고 떠받들어지는 것에 익숙한 십대의 토니 스타크는 천성이 나쁘진 않다한들 주변 환경 때문에 굉장히 오만한 성정의 소유자일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나가게 되긴 했지만, 사교계 데뷔 역시 계획했던 대로 성공적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겠지. 만났던 사람 또 만나는 자리일 뿐이고, 여느 때처럼 지루할 테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아. 사실 소소한 시비에 가까웠지만 토니가 느끼기엔 굉장히 큰 문제였어.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지도 않고, 심지어 깔보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게.

피터 벤자민 파커는 어렸을 적 부모님을 잃고 삼촌과 숙모의 집에 의탁된 적이 있었어. 그래도 벤과 메이는 피터를 사랑으로 보살펴줬고, 때문에 피터는 올바르게 클 수 있었지. 하지만 이 행복조차 오래 가질 못했어. 삼촌 벤이 불의의 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메이와 피터 곁을 떠나버렸거든.

그리고 슬퍼하던 피터에게 두 번째 사건이 터져. 바로, 어떤 거미에 물려 초인이 되면서 알파로 후천적 형질 변환이 이루어지고 만 것. 이전까지 평범한 베타였던 피터는 자신이 맡게 될 거라 상상도 못했던, 갑자기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페로몬에 아찔한 감각을 느껴.

숨막히는 단내가 코를 찌르는데 제정신인 쪽이 오히려 이상하겠지. 결국 위태롭게 며칠 버티던 그는 행여나 베타인 메이가 걱정할까봐 숨기려 했던 애초의 계획과 다르게 입력되는 정보를 다 받아들이지 못해 쓰러지고, 응급실에서 정식으로 알파 판정을 받아. 그나마 다행인 건, 생채기도 없는데다 알파가 된지 얼마 안 돼서 충격을 받은 거라 여긴 의사는 피터의 몸을 제대로 검사하진 않았다는 것. 덕분에 알파라는 사실은 밝혀졌어도 초인의 능력 자체는 숨길 수 있었어. 피터는 안도했어. 사실 자신이 정신을 잃게 된 데에 큰 역할을 한 건 알파로서 갑작스레 노출된 페로몬의 영향도 있었지만 조절되지 않는 초인의 힘 탓이 컸었는데, 그걸 알았다면 메이는 많이 염려했을 테니까. 아무튼 혼란도 잠시, 벤이 언제나 해주던 조언에 따라 자신에게 운명처럼 닿은 힘을 책임으로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피터는 그때부터 아등바등 노력하며 학교생활에도 열중하고 퀸즈의, 나아가 뉴욕의 친절한 이웃인 스파이더맨이 돼. 환경이 어려웠을 뿐 재능은 여러모로 뛰어났기 때문에 작정한 후 피터는 마치 날개를 편 매처럼 엄청난 기세로 비상했고, 인재를 원하는 여서 회사의 CEO가 그를 탐내기 시작했어.

인성 좋지, 성실하지, 독똑하지, 충성심도 넘치지, 심지어 희귀한 우성 알파이기까지 하니 그들에겐 피터 벤자민 파커가 굉장한 원석으로 느껴질 수밖에. 그들은 미드타운 고등학교의 설명회가 있을 때 알게 모르게 피터 파커에게 자기네 회사의 장점과 그에게 해줄 수 있는 특혜에 대해 어필했어.

이 일은 피터에게도 좋은 소식이었지. 왜냐하면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몇 배로 힘들게 일하고 있는 메이의 짐을 덜어줄 수 있게 된 셈이니까. 고등학교 3년을 거쳐 선제시한 조건 중 일단 전망이 가장 좋은, 가능성과 자신의 노력을 지지해주는 회사로 취직하기로 결정해.

사원이 되지만 대학도 다니도록 배려, 지원해주는 조건은 한 곳 빼고는 없었거든. 내심 자신이 진학하기를 바라는 숙모의 바람을 모른 척할 몰인정한 조카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터는 결정된 후 이 기쁜 사실을 메이에게 알려. 그녀는 조용히 울면서 고맙다고, 대견하다는 말과 함께 피터를 포옹해줬어.

그 뒤론 사정이 조금 나아졌어. 비록 숨도 채 돌리기 힘들 만큼 바빠졌지만 무사히 좋은 회사에 입사하고 약속대로 대학도 갔지. 그리고 숙모가 괜찮다며, 피터 너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거뜬하다며 한사코 고개를 저으셨지만 피터는 메이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알바도 시작했어.

자신을 돌봐주시면서 생긴 빚이 적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대신 강의나 업무가 없는 시간으로 골라 할 수 있는 과외를 선택했어. 물론 갈수록 시간이 없어져 스파이더맨 활동까지 하려니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피터는 행복했어.

쭉 이 정도로만 행복하면 좋을 텐데라고 무심코 중얼거릴 만큼.

하지만 신은, 친절한 이웃의 작은 소원마저 들어주실 마음이 없었던 걸까. 그의 희망이 무색하게도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어. 사실 정확히는... 처음부터 오래 갈 수 없는 평화였다는 표현이 맞겠지.

피터가 결국 과로로 쓰러졌거든.


제아무리 초인인 스파이더맨의 몸이라도 과로엔 장사가 없었어. 그나마 지금까지 버틴 것도 다 그가 비정상적일 만큼 튼튼한 몸을 가진 덕이었으니. 새벽부터 일어나 오늘까지 마감인 과제를 마치고, 아침엔 헐레벌떡 챙겨서 등교하며 스파이더맨으로서 뉴욕을 순찰하고, 수업 중간중간에 회사 연락이 오면 대답하거나 가야 하고, 아주 조금 비어 있던 밥시간마저 과외에 할애해버리곤 밤 늦게 귀가하니 어떻게 무사하겠어. 심지어 스파이더맨은 아침보단 밤에 다녀야 치안 면에서 효과가 좋다는 이유로 지친 몸을 다시 끌고서 밖으로 나가왔으니. 이대로 괜찮을 거라는 건, 말 그대로 욕심일 뿐이었지.

여파는 곧바로 찾아왔어. 먼저 메이에게 이 살인적인 스케쥴의 대부분을 들켰고(메이는 아직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모름) 뒤이어 회사가 피터의 과외 소식을 알게 됐지. 사측은 당연히 화를 냈어. 기껏 상황도 배려해줬는데 이랬다는 건 그들에겐 배신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으니까.

피터도 면목이 없었어. 그들이 무슨 조치를 내리든 따라야만 한다는 걸 알았지. 설령 그들이 퇴사 권고 조치를 내리더라도 불응할 수 없을 실례. 물론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지금 이대로도 아슬아슬했던 생활이 정말 부서지기 직전까지 위태로워지겠지만.

이사실로의 호출이 떨어지고 피터는 아찔한 기분에 두 눈을 감았어. 후회조차 사치인, 그저 선고를 기다릴 뿐인 시간. 매초마다 입이 바짝 타들었어. 여기서 해고되면 이제 어떡하지? 정 안 될 경우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지만 그걸론 구멍을 메울 수가 없을 텐데. 게다가 잃어버린 메이와의 신뢰도,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은데.

그런데, 늘 불행만 안겨주던 신이 이번만은 그를 보살펴주기로 한 걸까? 놀랍게도 피터를 찾아온 건 절망과 냉혹한 현실이 아니었어. 오히려 따뜻한, 피터가 느끼기엔 너무나 과분한 친절과 또 한 번의 기회였지.


“자네가 어떤 심정으로 무리를 했는지 모르지 않아. 나도 비슷한 삶을 살았으니.”


온화하게 입을 연 이사는, 위치를 생각하면 다른 이들보다 굉장히 젊은 축에 속했어. 정확힌 모르겠지만 대략... 벤이 계속 살아계셨다면 그와 비슷했겠다 싶을 정도. 마치 정말로 삼촌이 돌아오신 것처럼. 그래서였을까. 잔뜩 긴장했던 피터의어깨가 툭 떨어졌어. 안심의 눈물과 함께.

이사는 제일 먼저 피터를 이해하고 공감해줬어. 어려웠겠다고. 동시에 꾸짖는 것도 잊지 않았지. 하지만 이런 방법은 옳지 않다고.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 역시 힘든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타입이라 설명했어. 그는 자신이 피터를 보살펴줄 수 있다면서 이번엔 경고만 줄 테니 다음부턴 절대 회사를 속여 이쪽에 지장이 있을 일을 하지 말라 조언했어. 두 번째는 자신 또한 용서할 수 없을 지 모른다면서. 대신 피터가 충분히 열심히 하면, 성과를 낸다면 그만한 대우는 해주겠다 자신했어. 피터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어. 이거면 충분히, 이미 과분한 배려를 받은 거니까.


그로부터 몇 년 후, 피터를 돌봐준 그 이사는 정년이 되어 명예 이사로 물러나고 그 사이 피터는 부던히 노력해 세운 자신만의 회사를 엄청난 크기로 확장시키는 데에 성공했어. 너무 바빠 연애라든가 다른 취미, 여가 활동을 즐길 여유는 없었지만 피터는 자신이 메이의 빚을 청산할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넉넉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워했지. 그런 한편 처음부터 모든 걸 누려온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꺼려했어. 몇 번 겪으면서 그 부류의 대부분이 거만하고 사람을 깔본다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 예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연락하고 있는 그 이사가 해준 말도.


‘이름난 명문 가의 자제, 특히 스타크 쪽과는 되도록 얽히지 말게나 파커 군.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돈놀이를 하는 파렴치한 장사꾼이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그것 또한 위선이지. 미국 정치가들이 추켜세워주지 않나. 그것만 봐도 얼마나 더러운 집안인지는 확실하지.’


아직도 이사님의 조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절대 그쪽 족속과는 얽히지 말아야지. 어차피 파커 인더스트리가 SI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만한 분야의 회사도 아니고 하니 괜찮을 거야. 피터는 안일하게 생각했어. 이제 회사는 안정됐고 때마침 파티 초대장도 날아왔으니 무사할 거라고.

당연히 피터의 이 소박하고도 어려운 희망은 오래 가지 못했지.


“자네 들었나? 오늘 그 유명한 스타크 가문의 도련님이 온다는군!”

“아아, 천재라던?”

“그래! CEO인 하워드를 능가하는 머리라며 칭찬이 자자하던데?”

“그거 기대되는 걸, 미리 줄을 대놓아야 하나?”


—잘못, 들은 거겠지?


반신반의하며 돌아본 그곳에는 한 무리의 사람과 그 중심에 선 소년이 있었어. 누가 봐도 평생을 누리며 살아왔을, 그렇기에 밑바닥의 처절함일랑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도련님. 자연스럽게 남을 부리는 태도와 몰려드는 시선에도 익숙한 모습. 하지만 경험이 많아 보이지는 않고.

후계자다. 그것도 굉장히 힘 있는 회사의.


그렇게 범위를 좁혀보니 그럴 듯한 인물은 한 사람밖에 없었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아까 전 대화의 주인공. 심지어 주변에 붙어있는 사람 또한 비슷한 계열의 회사 관계자라 피터의 가설에 힘을 더했어.


"...토니 스타크, 인가."


때마침 저를 찾아온 협력사 전무에게로 몸을 튼 그가 싱긋 웃었어.

파티에 참여한 이상 태풍의 눈과도 같은 저 도련님을 한 번쯤은 봐야 했어. 하지만 제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는 선에서, 지나가듯 인사만 나누고 빠질 생각이었어. 그리고 이 다음에도 가급적 부딪치지 않게,


"파커 씨?"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피터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어. 저도 전도유망한 회사의 책임자인 만큼 파티 한 자리 쯤 제공되곤 했지만, 이만한 관심의 주인공이 된 적은 없었지.

잔뜩 벼려진, 무수한 시선의 칼날.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바짝 가까워진 한 청년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휘었어.


"반갑습니다. 아까 제 이야기를 하셨다죠?"


그가 언급하는 이야기를 피터는 금방 눈치챘어. 아까 잠깐 흘렸던 대화를 누가 들은 모양이었어. 토니 스타크라니, 피곤하게 됐군. 오늘 파티는 어차피 그가 주인공일 테니 나는 좀 있다 빠져야겠어. 제 혼잣말을 상기한 피터가 곤란한 웃음을 지었지.

옳다구나 싶어 일러바쳤나. 누군지 몰라도 이가 갈려.

그 사이 잘난 얼굴이 더없이 환한 웃음으로, 그래서 더 불안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피터에게 인사했어.


"-토니 스타크입니다. 처음이니 너그러이 잘 부탁드립니다."


이거 여기까지 쓰고 끊었었구나... 아무튼 이렇게 오만한 도련님 / 분수 모르는 노인네(물론 피터는 하워드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데다 동안이지만 빈정 상한 토니 스타크에게 1n 연상의 타 계열 사업가 따위를 연장자 대우해주고 싶지 않았음)로 굳어진 첫인상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마다 부딪히던 둘이 언제부턴가 관계가 좀 변하게 됨. 이유는 터무니 없게도 스타크 부자의 다툼이었음. 아닌 척해도 감정이 풍부한 편인 토니는 어느날 하워드의 무심함과 정면으로 싸우고 가출함. 남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름이고 집이건만 최소 오늘은 가기가 싫어. 그래서 고민하다가 다충 호텔 잡아야지 하는데, 마침 그 건물 컨퍼런스 홀에서 협상 중이던 피터 파커와 만난 것. 피차 인사할 사이도 인상도 아니니 모른척 넘어가려는데, 피터 파커 대신 스파이더맨이 토니의 나쁜 안색을 눈치챔. 뉴욕의 친절한 이웃은 힘들어보이는 사람을 알고도 외면할 수 없지.

그렇게 애 하나 챙긴다 생각하고 벌인 작은 간섭에 피터 파커 발목 잡히는 그런 알파알파 토니피터 보고 싶다^ㅁ^ 여기선 무조건 토니가 먼저 좋아해야 하고 감정 깊은 쪽도 토니여야 함 피터도 토니 엄청 좋아하는데 토니에겐 피터가 없으면 안 되는 수준 나 당신 있어야 살아요 하는 토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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