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니오이의 연성 세 문장 : 갈증이 났다. 전부 진심이었어. 다가갈 수가 없었다.



*



 “첫사랑이 있어요.”


 부실 안의 목소리는 기이한 울림을 남겼다. 원체 조근조근한 음색의 목소리는 가끔 어딘가 비어있는 듯해서, 두들기면 빈 소리가 날 것 같다는 생각도 종종 했었지만 오늘은 더욱 그랬다. 평소라면 왁자지껄하니 시끄러울 부실이 텅 비어 있어서 더욱 그리 들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습경기에도 왜 최선을 다하지 않냐며 코치에게 호되게 소리를 들은 쿠니미와, 감독님과 추후의 훈련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남은 오이카와를 제외하고는.


 “으응, 정말?”


 손에 든 계획표를 내려다보던 오이카와는 대답과 동시에 종이 위에 가로로 긴 줄을 덧그었다. 무계획적인 선이 글자 위를 제멋대로 밟고 지나갔다. 덤덤한 대답과 달리 당황한 속이 미처 움직이던 손까지는 제어하지 못한 탓이었다. 일부러 고개를 길게 빼지 않는 이상 보일 리 없는 위치임에도 그는 확연한 당황의 증거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펜 자체가 얇은 터라 내용을 알아보는 데에 문제는 없었지만 난데없이 나타난 검은 줄은 시야 안에서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다시 감독님께 제출해야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처음은 잉크가 조금 번져 두껍게, 끝으로 갈수록 얇게 꼬리를 빼는 선. 연필이라면 지우기라도 했을 텐데 하필이면 또 볼펜이다. 별 문제도 되지 않는 요소이건만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렸다. 그는 이런 쓸데없는 자잘한 요소에 종종 구애받고는 했다. 중간에 엷게 그어진 줄, 길이가 묘하게 다른 운동화 끈, 한 가지 색만 닳아버린 다색 볼펜 같은 종류의.

 어쨌거나 오이카와는 그 반문 후로 침묵을 지켰다. 나에게 이런 말을 할 만큼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은 쉬이 흩어졌다. 쿠니미는 이를 계속 말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실제로 그랬다. 그는 듣기 싫은 이야기가 있다면 침묵을 고수하기보다는 부드럽게 말을 돌리는 방식을 더 선호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년간의 공백이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쿠니미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 좋은 사람이에요. 웃는 게 예쁘고.”


 느른한 목소리가 한껏 늘어졌다. 오후의 게으른 햇살 같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활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로 얼굴을 향한 채 눈만 굴려 목소리의 주인을 좇았다. 이미 한 달 뒤의 훈련 계획 같은 것에 집중이 되지 않은 지는 오래였다. 분명 처음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흥미가 이는 주제가 아닌가. 쿠니미 쨩의 첫사랑이라니, 작년의 것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활자의 나열에 대기도 미안할 정도였다. 원체 이런 쪽으로 말을 꺼낸 적이 없는 아이라 더더욱.


 “상냥한 성격이고.”


 그리고 또, 조금 신기하다고도 할까요. 첫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절제된 말투에 오이카와는 결국 고개를 들었다. 그럼에도 조곤조곤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뱉어내는 것이 도리어 신기했다.

 알기 어려워요. 덧붙이는 말은 숫제 속삭임에 가까웠다. 아예 몸을 편히 틀자 로커 문을 붙잡은 채 말을 잇는 쿠니미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남자아이 치고는 조금 긴 머리칼에 살짝 가려진 눈매가 변함없이 나긋했다. 아래로 느른하게 늘어진 탓에 가끔은 졸려 보이기도 하지만 꽤나 선이 고운 눈이 살풋 깜빡였다. 전체적으로 느리고 조용한 아이. 쿠니미에 대한 대체적인 감상은 그랬다. 가끔은 어딘가에 통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곤 했다. 또래 남 고생들에게 쓰기에는 너무 철학적이고, 어딘가 좀 나이 들어 보이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통달, 오이카와는 맨 처음 이 단어를 꺼낸 이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며 어색한 단어를 입안에서 굴렸다. 통달.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이나 입에 담았을 법한 말이 아닌가.


 “좋아해요, 그래서.”


 그런 이미지 탓인지, 쿠니미가 또래와 조금 다른 취급을 받는 일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어른스럽게 보인다고 해야 하나. 가끔 재미있는 일에는 웃기도 하고, 팀 메이트들이 장난을 걸어오면 받아주는 일도 꽤나 있었지만 어딘가 붕 떠 보인다는 인상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쿠니미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담백하게 고백할 것 같지 않냐. 맛키였는지 맛층이었는지 모를 이가 툭 던진 말을 떠올리며 오이카와는 고개를 기울였다. 당시에는 자신도 그럴 것 같다며 웃고 떠들었지만 지금 누군가 저런 말을 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라 고개를 젓겠지. 담백하기는 했지만 반은 틀린 추측이었으니.

 쿠니미 쨩이 좋아하는 사람이라. 좋아하는 사람. 오이카와는 아예 손에 든 펜과 종이를 내려놓고는 빈손으로 턱을 감쌌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입 안에 담으니 더욱 신기한 말이 되었다. 쿠니미 쨩도, 좋아하는 사람도 전혀 어려울 것 없는 말이었지만 둘이 합쳐지는 순간 어딘가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기 어려운 말이 되었다. 쿠니미 쨩이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저기, 쿠니미 쨩.”


 오이카와는 자잘한 요소에도 곧잘 구애받고는 했다. 쿠니미 쨩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어색하다는 종류의 것들에도.


 “첫사랑, 아직도 좋아해?”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제 로커로 다가가며 굳이 필요 없는 물음을 던졌다. 대화의 포문은 첫사랑이 있었어요, 가 아니라 첫사랑이 있어요, 로 시작한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네.”


 대답 후에는 잠시 침묵이 돌았다. 완전한 현재진행형. 그 사이 쿠니미는 로커 문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 상의를 갈아입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그제 서야 로커 문을 열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어때?”


 아오바죠사이 배구부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로커는 문을 열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기름칠이 제대로 되지 않는 쇠 경첩이 서로 스치는 소리. 오이카와는 서로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시선 한 번 제대로 맞추지 않는 그들 역시 이와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갈증이 나요.”


 땀에 절은 흰색 티셔츠를 한 번에 벗어내며 한 말 치고는 건조했다. 내용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증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동시에 마른 입술이 혀를 급하게 축이고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갈증이 날 만큼 좋아하는 사람. 오이카와는 로커 안에서 교복 셔츠를 꺼냈다. 물기 없는 천과 천이 스치며 바싹 마른 소리가 났다.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짓말이었다. 마른 옷감이 손 안에서 바스락 거리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쿠니미 쨩이 많이 좋아한다는 건 알 것 같아.”

 “그런가요.”

 “응.”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깨달았다. 운동복을 벗지도 않고 셔츠부터 꺼내다니. 이와, 당연하리 만큼 입 밖으로 나간 이름은 끝을 맺지 못하고 끊기었다. 돌아오는 대답도 없었고. 지금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이와이즈미가 아닌 쿠니미였다. 이와이즈미였다면 어디가 정신을 빼놓고 다니니 어쩌니 하면서 등을 맵게 후려쳤겠지. 낚아채 듯 셔츠를 건네받고 얼른 갈아입으라고 호통도 치고. 오이카와는 들어줄 이 없는 셔츠를 내려다보다 반쯤 열린 로커 문에 대강 걸쳐놓았다.

 이미 땀이 다 말랐음에도 어딘가 꿉꿉하다는 느낌이 드는 민트 색 티셔츠를 벗어내자 규칙적인 탁음이 들렸다. 톡, 톡, 톡. 비 오는 것과 흡사한, 규칙적이어서 듣기에 편한 소리.


 “제가 성격이 이래서요.”


 단추 소리가 끝나고 나서야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다시 열린 대화의 포문은 불완전했지만 오이카와는 알 수 있었다. 성격이 이래서요. 그래서, 그저 이렇게만. 끝마무리 짓지 못한 말의 모든 것.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도 괜찮아?”


 허리에 고무줄이 들어간 트레이닝복을 쭉 내리고 교복바지를 낚아채듯 꺼내며 말했다. 천과 천이 스치는 소리는 끊임이 없었다. 네, 하는 대답이 들리고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조그마한 금속들이 빠르게 맞물리는 소리와, 이내 철컥, 무언가 끝맺음 같은 소리가 뒤를 이었다.


 “착한 사람은 아니에요.”

 “첫사랑이라며?”


 마른 천이 스치는 것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적당히 대답을 돌렸다. 천이 스치는 소리,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 건조한 목소리. 소리와, 소리와, 소리의 이어짐.


 “지금도 좋아하고.”


 덧붙이는 말에 옆얼굴로 시선이 와 닿았다. 부실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시선이 닿았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순간 착한 사람은 아니죠.”


 상처 입혀졌다 말하는 목소리치고는 지나치게 덤덤하여, 오이카와는 잠시 속에 숨겨진 의미가 있는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통달이라는 단어가 다시 수면 위로 잠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상처 받았었어?”

 “늘 그래요.”


 과거의 질문에 현재의 대답. 그가 크게 잘못 말한 것도 아니건만 오이카와는 잠시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늘. 다시 한 번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원치 않은 듯 했지만 안타깝게도 확연히 와 닿았다. 괜히 옆얼굴이 따끔거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단지 그의 미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번 닿은 시선은 끈질기게도 달라붙어있었다. 경기 스타일이랑 비슷한가, 하는 생각이 한 번 들고, 다음에 이어진 것은 아, 이거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진지한 거 아닌가, 하는 심심한 감상.


 “조금 놀랍네.”

 “뭐가요?”


 머리 위로 니트를 둘러쓰며 중얼거리자 잠시 시야가 차단되었다. 그래도 바라보고 있겠지. 어딘가 당연하게까지 느껴지는 생각을 하며 니트 구멍으로 머리를 빼내자 정전기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가늘게 뜬 것이 느껴졌다. 공기 중을 둥둥 떠다니는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지켜보는 시선과


 “생각보다...”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목소리.


 “진지해서.”


 본디 제 목소리가 이리 나오던 것이었나. 오이카와는 혀를 가볍게 빼물었다 놓았다. 아닐 건 또 뭔가 싶었지만 어째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뱉는 것 마냥 입 안이 까끌까끌했다. 오이카와는 제 말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목소리에 의미를 담아 이상해, 하는 말을 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혀를 한 번 더 내었다 말았다. 축축한 혀끝에 건조한 공기가 닿았다. 살짝 빼 물리는 혀를 따라 시선이 움직였고, 돌아온 것은


 “저는 언제나 진심이니까요.”


 하는 대답. 그거 농담이지, 하고 묻고 싶은.



*



 이번의 침묵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실제로 지나간 시간이 얼마나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체감하기에는 상당했다. 사람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동작으로 인한 소음도 소거된 상태의 침묵은 실제 흐른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을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 모두 그리 생각했을 테다. 그리고 이런 침묵이 불편하다 느낀 사람은, 한 명.


 “꽤 좋아하는구나.”


 결국 침묵을 깨는 것은 이를 견디기 힘든 사람이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오이카와는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는 대답을 중얼거리며 넥타이를 손에 쥐었다.


 “네.”

 “정말, 많이.”

 “그렇죠.”


 꽤나 매끈한 재질의 천이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갈 듯이 움직였다. 셔츠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목에 두르자 얇은 천위로 미끌미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평소에도 이리 미끈거렸던가 싶었지만 이때까지 별 다를 것 없이 넘기던 행위는 기억 속에 깊게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솔직히 어떠한들 무슨 상관일까. 평소에도 이랬으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지. 오이카와는 유난히 미끈거리는 넥타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위태롭게 움직이는 것을 다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간에 오늘따라 잘 되지 않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도와드릴게요.”

 “응?”


 짜증이 사근사근 올라오는 위로 손이 겹치었다. 아, 응. 오이카와는 넥타이를 잡은 손에 천천히 힘을 풀었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스치며 마른 소리가 났다. 쿠니미 쨩 손이 꽤 차갑네. 짧은 감상이 스치고, 신장 차이가 거의 없는 만큼 손의 크기도 거의 비슷한 후배는 그럼에도 섬세한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매었다.

 어찌 보면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신혼부부에게서나 연출될 것 같은 상황이 아닌가.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럴 정도로 막역한 사이라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을지 몰라도 굳이 거절할 만큼 어색하지도 않은 사이인지라.


 “오이카와 씨.”

 “응?”


 그가 그리 헛손질을 한 것에 비해 빠르게 매인 넥타이는 평소 그가 하던 것 보다 매듭이 깔끔했다. 가끔 어머니나 누나가 기분을 내보고 싶다며 매어준 것과 비슷한 모양새에 오이카와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모양의 차이는 사소했지만 늘상 느슨하게 묶여있던 넥타이가 단단히 매듭지어져 가슴 위로 내려온 느낌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답답하지는 않았고. 넥타이 모양새를 바로 잡아주던 쿠니미는 이내 세워진 옷깃을 다시 아래로 내려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정말 좋아해요.”


 깃을 내려주던 손이 떠나가며 말을 남겼다. 어째서인지 그 손끝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그도 입을 열었다.


 “그래.”


 어째 성의 없는 대답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저 애매한 의미 이상으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오이카와는 더 이상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가갈 수가 없어요.”


 누구에게, 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어차피 답은 정해져있지 않나. 첫사랑이라는 그 사람에게 일 테지. 그렇지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양 손을 펴 보이는 모습과, 속삭이듯 흩어지는 목소리는 당신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왜?”


 간신히 꺼낸 말은 또 이것이 전부여서.


 “무서워서요.”


 매번 느긋하다 못해 졸려보인다고 생각하던 눈매가 더욱 느른하게 늘어졌다. 무섭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치고는 퍽이나 예쁘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 어딘가에 자리한 위화감. 미소와 위화감 사이에 숨겨진 두려움은 차마 이유를 물을 수 없어, 오이카와는 그저 그가 매어준 넥타이의 매듭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입이 말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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