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요?”



“돌아오면 함께 가기로 했잖아”




리프탄의 진중한 눈빛이 그녀의 잿빛 눈동자에 한참 머물렀다. 그녀는 잠이 덜 깬 눈을 끔뻑이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날을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리프탄이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 그렇게 웃고 있을 거야? 나는 그쪽도 환영이야”






그의 집요한 시선이 그녀의 알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제야 맥시는 황급히 이불로 몸을 둘둘 감으며 몸을 일으켰다. 맥시밀리언이 자의로 한건 몸을 일으키는 것까지가 전부였다. 그녀가 아나톨로 돌아온 후 리프탄은 이전보다 더 심하게 그녀에게 집착했다. 



그녀를 손수 씻기는 것은 물론,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 까지 자신이 함께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예민하게 굴었다. 아직 돌아온지 얼마 안됐으니까. 그녀 역시 진절머리를 내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다가도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가 유난스럽게 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그가 그러지 않았다면 도리어 자신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때론 안도하기도 했다.






“준비 다 끝났,어요!”






그녀는 지난 축제 때 아그네스가 선물한 색색의 천을 꼬아 만든 장신구를 허리춤에 매달며 씩씩하게 외쳤다. 검은 튜닉에 짙은 남색 서코트를 걸친 그가 묘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리프탄?”





맥시의 반문에 그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아 당겨안았다. 드러난 쇄골에 그의 깊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아직도 꿈같아. 당신이 내 앞에 있다는게”



“리프탄”



“그래서 겁이나. 또 당신이”



“리프탄”





그가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맥시는 팔을 올려 그의 넓은 등을 천천히 쓸었다.






“우리가 함께 있는 이곳이...현실이예요”






리프탄이 답변이라도 하듯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곳에 색색의 천장식이 흔들렸다. 아그네스가 선물했던 장신구보다 조금 더, 아니 과하다싶을 만큼 화려한 색과 진주가 박힌 색색의 천들이 뽐내듯 어우러지며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드라이어드(나무의 정령) 따위한테는 이런거 사줄 남편이 없으니 겨우 천조각이나 매달고 신나서 춤을 췄겠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듯 한 그의 얼굴에 묘한 승리감이 내비쳤다. 그녀는 자꾸만 씰룩이는 그의 입꼬리를 애써 모른척하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예뻐요. 고마워요 정말”













“왜 또 제가...”




엘리엇의 건조한 목소리는 축제의 활기에 묻혀 그들에게 닿지 못했다. 몇 년 사이에 마치 다른 세계가 된 듯 번영한 아나톨 보다 그들의 혼을 쏙 빼놓은건 몇 배로 늘어난 영지민들의 칭송이었다. 





“로셈 위그루 드 칼립스!!!”



“로셈 위그루 드 칼립스!!!”






그들이 지나가는 곳 마다 영지민들은 손수건을 흔들며 그들의 이름을 외쳤다. 





“아아, 해가 빛을 잃고 암흑이 세상을 뒤덮을지라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명이 밝아 오면 붉은 머리의 천사가 승리의 깃발을 가져다 줄 것을!!”






즐비하게 늘어진 주점에는 ‘붉은머리 귀부인’이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이전보다 더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의 축제였음에는 틀림없었지만 맥시밀리언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리는 노랫소리에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했다.






“칼립스에게 축복을”



“칼립스 부부에게 영광을!!”



“행복하세요 귀부인!!!!”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과 녹색 드레스를 따라한 듯한 소녀들의 외침에 맥시밀리언은 멋쩍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는 당신이 더 유명인사군”






엘리엇의 분신술과 같은 혼신의 호위에도 몰려드는 인파가 늘어나자, 리프탄은 혀를 한번 차더니 그녀를 가뿐히 안아들고 뛰다시피 시장을 빠져나왔다. 단숨에 인적 드문 언덕을 올라 아름드리나무 아래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리프탄이 그녀의 옆에 털썩 앉았다.







“허억...어떻게, 저를 두고 가실 수 가 ..있습니까”



“호위실격 주제에 무슨 원망이야”






인파에 치여 잔뜩 헝크러진 머리에 초췌한 몰골로 뒤따라온 엘리엇이 원망 가득한 눈으로 리프탄을 쳐다봤다. 






“축제를 즐기긴 힘들 것 같군”






리프탄이 언덕 아래에 그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영지민들을 내려다보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맥시도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도저히 다시 저곳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곳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경쾌한 탬버린 소리가 마치 그날을 상기 시키듯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그녀의 시선이 화관을 쓰고 색색의 띠를 맨 처녀들이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멈췄다. 몇 해 전 아그네스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자연스레 입가가 벌어졌다. 





“얼마나 눈부셨는지 당신은 모를꺼야”






리프탄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렸다.






“햇살 아래에서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추던 네 모습 말이야. 심각했지”







대번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를 따라 그날을 상상하던 그녀도, 춤을 추던 도중 그의 손에 이끌려 자신이 한 행동이 연달아 떠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작스런 정적에 엘리엇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두 분의 아름다운 추억에 저도 강제 소환되어 참 즐거웠습니다. 더 이상 축제를 즐기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전 이만 성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이 짐들은 마차에 실어놓겠습니다”






엘리엇이 손끝으로 자신이 아등바등 들고 왔던 영지민들의 선물을 가리켰다. 자칫 무덤처럼 보이는 더미에는 넘쳐나는 화환과 선물로 보이는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맥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선물더미로 향했다. 선물 사이사이 꽃혀있는 돌돌 말린 양피지들에는 한자 한자 힘주어 눌러쓴 그와 그녀에 대한 애정 어린 말이 가득했다. 그녀는 양피지 곱게 접어 가슴에 묻었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부디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짧게 바람을 읊조리고 눈을 뜬 그녀는 선물들 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류트를 집어들었다.







“이것도, 선물일까요?”






어느새 그녀의 곁에 다가온 리프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선물 더미에서 술병들을 찾아 꺼내들었다. 






“자 두 분께서 챙기실건 그것 뿐이신거죠? 저는 이제 다 들고 내려갑니다. 성에서 뵙겠습니다”






엘리엇이 쓸어 담듯 선물더미를 챙겨들고는 투덜거리며 언덕을 내려갔다.







“당신도 한잔해”






맥시가 고집스레 씌워놓은 화환을 쓴 리프탄이 포도주가 담긴 술병을 건네고는 자신의 손에 든 술병을 들이켰다. 그의 모습을 촘촘히 지켜보던 그녀도 조심스레 술병을 입에 가져다댔다. 달콤한 포도향이 입안을 돌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선선했으며, 귓가에는 노랫소리가 가득했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즐겁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더 없이 평화로웠다. 마치 원래 이런 곳에서 태어나 살아온 것처럼 리프탄과 맥시밀리언은 말없이 서로에게 기댄 채 그들의 흥겨움을 안주 삼아 술병을 비워냈다. 




어느새 늘어난 술병이 발치에 굴러다녔다. 향만큼이나 강한 술기운이 빠르게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는 까닥까닥 넘어가는 고개를 붙잡기 위해 무릎을 굽혀 그 위에 턱을 올려놨다. 







“설마 취한거야?”





살짝 풀린 듯한 리프탄의 목소리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취했나보다. 내가 취했나? 아무렴 어때.







“리프탄은 취했나요?”



“그럴리가, 이깟 포도주에”



“아아, 아니구나아”






그녀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리프탄은 잠시 멍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 보다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술에 취한 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취한 것은 분명했다. 그녀에게 취하지 않은적이 있었던가. 리프탄은 그녀를 자신의 무릎위에 올리며 감싸안았다.







“당신은 여전히 너무 가벼워”



“리프탄이, 너어무 힘이 쎈거죠”



“그래그래. 내 잘못이야”



“리프탄”



“응”






눈을 끔벅이던 그녀가 대뜸 옆에 있던 류트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나를 사랑하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거랑 이딴 나무덩어리가 무슨 관계야 대체”



“나를, 나를 사랑한다며언.. 노래를. 불러주세요”






리프탄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지만, 흐릿한 그녀의 시야에 보일리 없었다. 술기운이었을까. 맥시는 치솟는 용기를 앞세워 그의 손에 류트를 직접 쥐여줬다. 그가 진저리를 치며 류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바둥 거리며 리프탄의 품에서 빠져나온 맥시가 비틀거리며 떨어진 류트를 집어 들었다. 







“그 노래요, 지난 축제 때..그리고..리프탄이랑.. 배에서 들었던...그 노래요..그게 너무 듣고 싶어요”





그녀의 눈에 안개가 서렸다. 리프탄이 반사적으로 맥시의 손에 들려있던 류트를 빼앗듯 가져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눈에 안개가 걷혔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쉬던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며 자세를 잡았다. 맥시는 그의 심각한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즐거운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참을 주저하던 입이 힘겹게 열렸다.






그 기사는 나무에 입을 맞추고 먼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오크 나무는 언덕 위에 홀로 남아

바람 속에 가녀린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대여 부디, 가신 길로 돌아오시길

바람결에 바람 실어 보내오니

빗방울에 눈물 담아 흘리오니


아아..






“내 목소리 닿을 이 곳으로 돌아와주세요”





또 다른 가사다. 이건 어느 지역의 노래일까. 잔잔한 류트의 선율과 리프탄의 낮은 목소리에 그녀는 꿈을 꾸듯 고개를 흔들었다. 꿈결에 그녀는 커다란 손으로 저 작은 류트를 어떻게 자유자재로 다루는지 신기했다. 늘 화만 내던 그가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그녀는 꿈꾸듯 그를 바라봤다. 





“리, 리프탄”





리프탄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퉁명스레 류트를 내던지며 대꾸했다.







“내,내가... 진짜, 많이 사랑하는거... 알고있어요?”



“알고있어”






단호한 그의 대답에 그녀는 다시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아, 아는구나. 아는구나..알고 있었구나”





모르면 말해주려고 했거든요. 내가 진짜 많이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서. 혹시나 모를까봐. 말해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는구나.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그녀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갔다. 






“맥시”



“응”




“사랑해”






응. 나도. 나도 엄청 사랑해요. 진짜로. 진짜로 세상에서 제일.






<돌아온 아나톨 봄축제 _ fin>





* 본 연성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배경 및 소재의 저작권은 '상수리나무아래' 김수지 작가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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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아래_연성을 쓰고 있습니다. 죽기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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