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부제목이 필요 없을 때가 왔군요.

바꿔 말하면 제가 여기서 드디어 연재를 시작한다는 의미가 되겠네요.

슬슬 시간이 여러 모로 불안합니다만 어떻게 되려나요.







스티브는 남자와 당장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남자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 자기소개 같지도 않은 인사를 건넨 뒤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스티브를 위아래로 훑었다. 제법 무례한 동작이 아닐 수 없다. 스티브는 마주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손짓으로 그를 돌려 세우며 딱 한 마디만 던졌다.

“가서 씻어.”

“...뭐?”

“나는 지저분한 사람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아. 가서 씻어.”

한순간은 씻고 오면 남자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남자가 원하지 않았다면 스티브는 그를 만날 수도 없었을 터였다. 게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무척 더러웠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워싱턴의 건물에서 눈을 뜬 이래 단 한 번도 제대로 씻지 못 했다. 가끔 비를 맞거나 물을 헤엄쳐 건넌 적은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을 ‘씻었다’고 표현하기엔 굉장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결국 스티브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돌아서서 앞장섰다. 그들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 층 아래로 내려갔다. 두 층 아래에는 커다란 욕실이 있었다. 정확히는 욕조가 있는 것을 보아 욕실 같기는 한데 도무지 욕실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공간이었다. 스티브가 눈앞의 광경에 압도되어 있는 동안 남자는 척척 안으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곧장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와 욕실 안이 수증기로 가득 찼다. 다행히 아직 물이 나와서. 남자는 남 이야기를 하듯 그렇게 말했다. 갈아입을 옷은 앞에 두지. 그렇게도 말했다. 스티브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씻으면 올라와. 이번에는 대답할 새도 없었다. 남자는 어느 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스티브는 일단 스스로를 뜨거운 물로 살짝 데쳐 껍질을 벗긴 후 – 물론 과장이지만 실제로 그런 느낌이었다 – 비누로 꼼꼼히 씻었다. 뜨거운 물로 목욕이라니, 차마 꿈도 꿀 수 없었던 호사다. 다 씻은 후 그는 욕조를 돌아보았다. 사실 모양새가 욕조와 가장 비슷하니 욕조라고 부를 뿐 그것은 스티브만한 사람이 세 명쯤 더 있어도 넉넉할 것 같은 크기였다. 써도 되려나? 그가 망설이는 사이 물이 저절로 쏟아져 나와 욕조를 반쯤 채웠다. 이왕 나온 물을 버리기도 아까우니 들어가자. 스티브는 빠르게 마음을 정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 몸이 녹는 것 같았다. 절로 입에서 기분 좋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럭저럭 욕실에서 두 시간쯤은 보낸 듯했다. 스티브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앞에 옷 몇 벌이 놓여 있었다. 썩 특별한 옷은 아니었다. 평범한 회색 티셔츠와 바지, 그리고 속옷 한 벌이었다. 남자는 약속대로 다녀간 모양이었다. 치수가 맞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당장 팔을 꿰자마자 터질 것 같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잠깐 보았던 남자의 몸을 머릿속으로 어림해 보았다. 남자의 여벌옷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럼 어디서 난 걸까?

옷은 막연히 짐작했던 그 느낌이었다. 정확하게 맞지는 않았지만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스티브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 층을 올라갔다. 남자는 창가에 서 있었다. 바깥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타워 안쪽은 밝아서 뭐가 보일 것 같지도 않건만 스티브가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헛기침을 하거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려서 자신이 온 것을 알릴 것인지 고민했다. 그가 망설이는 동안 남자는 한참을 더 그러고 있다가 서서히 돌아섰다. 도무지 어떤 생각도 표정도 읽어낼 수 없는 백지 같은 얼굴이었다.

“시장할 텐데 뭐라도 들면서 듣지 그래? 그쪽에 식탁 있어.”

남자가 한쪽을 가리켰다. 스티브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멋들어진 식탁과 의자가 있었다. 그 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대충 손에 집히는 대로 꺼내놓은 것 같은 음식들이 널려 있었다. 이제까지 스티브가 지겹도록 먹어왔던 통조림이 대부분이었지만 과일도 조금 보였다. 스티브가 돌아보자 남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좀 더 나은 걸 대접하고 싶지만, 나는 지독하게 요리를 못 하거든. 필요하다면 저쪽 냉장고 안에 다른 재료들도 있어. 요리해서 먹고 싶다면 그래도 돼.”

언젠가 염치불고하고 그런 일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아니었다. 먹을 것보다는 이야기가 더 급했다. 스티브는 식탁으로 다가가 익숙하게 통조림을 땄다.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창가는 아니었지만 식탁 근처도 아니고, 그 사이 중간 어디쯤 같은 느낌이었다. 까마득한 높이 때문에 실감하기 어려웠지만 타워는 정말로 넓었기 때문에 그 미묘한 거리감이 더 신경 쓰였다. 적어도 스티브의 기준으로는 이것이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거리는 아니었다.

“같이 들지 않겠나?”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도무지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식이었다. 스티브도 마주 눈을 깜빡여 보였다. 남자는 한 발 뒤늦게, 그리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스티브는 새삼스럽게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그를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남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30대 후반 정도로 느껴졌다. 하지만 표정이나 분위기에서는 훨씬 더 나이든 사람의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연륜?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 상처 같았다. 나이를 먹는 것이 반드시 상처 입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오래 살수록 상처를 입을 확률이 늘어나긴 할 것이다. 남자는 무수히 구르고 넘어지고 다쳐 가며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실 나는, 별로 먹을 필요가 없어서...”

남자의 목소리는 그의 표정만큼이나 어색했다. 그가 딱 그만큼 어색한 걸음으로 다가와 스티브의 맞은편에 앉았다. 바로 정면은 아니었고 왼쪽으로 두 번 건너뛴 의자였다. 그는 제 몫으로 잔에 물을 반도 채 못 되게 따랐을 뿐 아무것도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스티브는 영 불편한 마음으로 통조림의 내용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남자는 물이 든 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쓸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화성인에 대해 상상해 본 적 있어?”

적어도 남자의 첫마디는 스티브가 상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스티브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딴소리 하려는 거 아니야. 만약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토록 완벽하게 실패하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스티브는 의심을 약간 거두고는 별로 없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화성에는 생물이 없었어. 적어도 아직까지 발견된 건 없지. 하지만 우주엔 있었어.”

남자의 목소리는 너무 깊게 가라앉아 이제 거의 뒤틀린 것처럼 들렸다. 스티브는 음식을 먹고 있던 것도 잊은 채 남자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드넓은 우주, 쏟아질 듯 무수한 별들. 남자는 동화 같고 환상적인 단어들을 한없이 무미건조하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한 번 그 광경을 보고 난 뒤엔, 파란 하늘이 얼마나 멋진 건지 깨닫게 될 거야. 서릿발이 뚝뚝 듣을 것처럼 싸느란 목소리였다. 스티브는 그 문장을 머릿속 한구석에 유보해 두었다. 적어도 지금의 그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문장이다.

남자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 날 하늘을 까맣게 메우며 나타난 무수한 우주선과, 그 안에서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던 외계인들 – 하지만 상세한 설명이 나온 것은 거기까지였다. 남자는 어딘지 망설이듯 그 외계인들 선두에 서 있던 보라색 피부의 거한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세상이 멸망했다는 문장이었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스티브의 모든 의문에 대답하기에는 너무도 짧고 허술했다. 스티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로 끝인가?”

“...아니, 당연히 아니지. 그저... 나는, 그저...”

남자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거의 쥐어짜듯 목소리를 끌어냈다. 그 개자식은 – 정말로 쥐어짜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뒤집히며 쇳소리가 났다. 스티브는 당황하며 남자에게 물을 권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목소리는 여전히 뒤집힌 채였다. 스티브가 다시 그에게 물이 든 잔을 들이밀자 그는 마지못해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실은 한 모금이라 말하기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남자는 고맙다고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썩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적어도 오늘 밤에는 이 목소리를 좀 참아줘야겠는데.”

“......”

“다행이지 뭐야, 지금이라서. 내가 처음에 이런 목소리로, 말을 걸었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걸.”

그런 목소리로 찾으러 와 달라고 구원을 요청했다면 더없이 절박하게 느껴져서 더 걸음을 재촉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어지는 이 목소리를 계속 듣는 건 여러 의미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스티브는 망설이다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아귀에 잡히는 어깨가 섬뜩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불현듯 환자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며 죄책감이 일었다. 오늘은 쉬고 나중에 이야기하지 않겠나? 정신을 차려 보니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한 다음이었다. 남자는 시선을 올려 스티브를 빤히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가 심연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보였다.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갈라지고, 뒤집히고, 망가진 것처럼. 생각하면 남자는 스티브와는 달랐다. 그는 멸망을 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가 미치지 않고, 자살하지 않은 채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

“...그래서 날 살렸나?”

아무 맥락도 없이 흘러나간 질문이었다. 남자가 반응하지 못 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놀란 기색도 없이 쓸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는 적절하지 않아, 캡틴. 나는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어.”

“...왜?”

“왜냐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으니까.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그리고 나는 불사신이 아니고, 당신은 분명히 나보다 오래 살 거야. 그러고 나면... 정말로, 아무것도, 없지. 그래, 맞아. 나는 당신을 내버려둘 수도 있었어. 이 지독히도 거지같은 우연에 혀를 차며, 원래 생각했던 대로 그냥 눈을 감아버릴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 뒤엔? 나는 과학자고, 당연히 진화론을 신봉하는 입장이지만... 중요한 게 있지. 진화에는 시간이 필요해. 그만큼의 시간이, 그 수만 년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당신이 우연히 깨어나 버리면 어떻게 해? 아니면 당신이 운 좋게 진화가 끝나고 깨어났는데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전혀 다른 생물들이 지구 위를 뒤덮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 한 번 떠올리고는 걷잡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냥, 그렇게 한 거야.”

“...왜 우리 둘만 살아남은 거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어. 기억이 잘 안 나. 특히 마지막 부분은... 아마도, 그저, 그런 거겠지. 죽음은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거거든. 우리는 죽을 만큼 충분히 살아있지 않았던 거겠지.”

“그게 무슨 말인가? 충분히 살아있다니... 내가 얼어 있었던 걸 말하는 건가?

“말하자면. 얼음 속에 있을 때의 당신은 가사 상태였으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지.”

“좋아, 나는 그렇다고 치지. 하지만 당신은?”

“나? 나는 뭐 한... 90% 정도는 생물이 아니거든. 뇌와 가죽 정도를 제외하면 전부 다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

스티브는 당황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남자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 같았다. 뇌와 가죽이 인체의 10%밖에 차지하지 않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그 외의 나머지를 전부 기계(나 그 비슷한 다른 뭔가)로 대체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가 거짓말을 했을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갔다. 70년이 지난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스티브는 모른다. 남자가 마음먹고 속이려 한다면 속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남자가 무엇을 얻는가? 스티브에게서 얻어내야 할 것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그들은 이미 이 이상 잃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잃지 않았던가?

어쨌든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스티브는 차마 그 이상 이야기를 지속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쉬는 게 좋겠다고 조심스레 제의했다. 남자는 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은 저쪽이야. 스티브는 남자를 부축해서 일으키려 했다. 내 방은 따로 있어. 남자는 그렇게 덧붙였다. 완곡한 거절로 느껴졌다. 아마 크게 틀리지도 않을 터였다. 마저 먹고 쉬라며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티브는 그를 잡지 않았다.

문득 세계가 멸망했음을 알게 되었던 첫날 본 신문이 떠올랐다. ‘무적의 아이언맨’. 남자는 스스로를 아이언맨이라고 소개했다. 한때 이 세계의 진정한 영웅이었다고도 했다. 신문의 논조를 보아도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아서는 도무지 느낌이 오지 않는다. 남자가 거짓말을 했다거나, 그가 사실은 악당일 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저런 남자를 두고 누군가가 ‘무적’이라는 칭호를 썼다는 걸 상상할 수 없을 뿐이다. 물론 남자는 극히 최근에야 저토록 쇠약해진 것이고, 그 전에는 나름대로 건강했을지도 모른다. 몸을 기계로 바꾸었기 때문에? 몸을 기계로 바꾸었음에도? 생각은 하나로 모일 듯 모이지 않고, 스티브는 맛도 모른 채 통조림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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