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단에 링크한 글의 암요한 해석을 기반으로 합니다. 안 읽으셔도 본 글을 읽는데는 딱히 영향이 없습니다!

※ 커미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분량이 길어 상, 하로 나누어 업로드합니다. 상편 공백포함 약 9,300자, 하편 공백포함 약 13,600자로 하편은 성인글로 멤버십 및 유료공개하니 참고 부탁드려요.

※ 로드 오브 히어로즈 요한 발켄슈트X여로드

※ 동인설정 및 캐해석 주의

※ 엘리트 스토리 11-16 이후 시점입니다. 빛요한과 암요한이 같은 시간선에 공존하며, 빛요한도 등장합니다. 암요한X여로드X빛요한 CP 같은 느낌도 있으나 강하지는 않습니다

※ ※ ※ ※ ※  엘리트 스포일러 주의. 암요한의 과거에 대한 매우 자세한 스포일러 및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 ※ ※ ※ ※

※ 작업곡 첨부합니다. 재생은 자유!





전례 없이 가문 장마였다. 

주술과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라도 자연까지 조종할 수는 없다. 다양한 특성을 가진 종족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조차, 자연에 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자연의 뜻을 예측하는 것뿐이었다. 로드는 그것을 이 땅 위의 모든 존재는 유한하고, 그들이 구축해낸 그 어떤 세계도 영속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표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멸자가 필멸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스스로 빛나게 한 까닭은, 그가 그러한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해지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그렇기에 이번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발론의 장마는 초여름이 끝나자마자 시작되어 거의 여름 내내 계속되고는 했다. 몇 날 며칠을 쏟아지다 멈추고는 하던 장대비는 종종 침수 피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제는 몇 번의 여름을 거치며 대비 체계를 구축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말이다. 하여 강력한 태풍을 동반한 장마가 아니고야, 아발론의 여름은 덥고 습한 한편 시원한 우기로 기억되고는 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지방 곳곳으로부터 땅이 메말라 농작물이 자라지 못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한 해 농사를 포기해야 할 지경이라는 것이다. 이번 여름 역시 전년도와 비슷한 강수량이 예측되었으나 초여름의 끝, 장마가 시작되고도 얕게만 내리는 비는 농민들의 불안을 부추겼다. 저수지 등에 가둬놓은 물로는 여름내 농작물을 지켜내기가 불가능함을 잔뼈가 굵은 농민들은 알고 있었다.

장마의 초입부터 그러한 우려를 담은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로드를 위시한 왕성에서는 진작부터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고 몇몇 해결안을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장마는 생각보다 더 가물었고, 메말라 갈라진 모든 지역을 구제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최소한의 행정 인력만 남겨둔 채 기사들 대부분이 가뭄 피해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특히 얼음과 냉기를 다루는 이전 문레이크의 지도자는, 그 능력이 가뭄을 해결하는데 얼마나 유효한가와는 별개로 전 지역을 순회해야 했다. 루미에 미라티사는 그대 손끝에서 나오는 냉기가 사람들의 메말라 갈라진 마음만큼은 위로해줄지도 모른다는, 퍽 낭만적인 로드의 말에 냉큼 크롬 레디오스가 모는 마차 위에 올랐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아, 날 못 보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구나! 그렇지만 로드 말대로 이런 일에는 제가 필요하죠. 요즘 날씨가 많이 덥잖아요? 다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말이에요.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올게요. 크롬 경과 함께 가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구요.’

그렇게 그들이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발론의 기사들은 물론, 일전의 지도자 계층이었던 타국 출신의 기사들도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오리라.

여러 기사가 자리를 비운 왕성은 적막하지는 않았지만 고요했다. 아마도 남은 이가 로드의 최측근 기사들과 갈루스의 요한뿐이기 때문일 테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로드는 소수만 남아 그들 한 명 한 명을 가까이 마주할 수 있게 된 이 시기를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특히 갈루스의 요한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니, 이제는 아발론의 기사인 그와.

조슈아 레비턴스 총독은 갈루스의 패배 이후 알드 룬에 신병이 양도되었고, 여전히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의 관할 내에 있었다. 제국의 검 요한 발켄슈트는 갈루스 북부로 도피 후, 요한 테일드의 추격 끝에 아발론으로 압송되었다. 요한 테일드의 보고에 따르면 발켄슈트는 그와의 격전 이후 아발론행에 동의했다고 한다. 그가 이곳 아발론 왕성에서 지낸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있었다.

그러나 요한 발켄슈트는, 격전 이후 순순히 따라온 모습에서 기대한 것과는 달리 서임을 받고 나서도 로드를 무척 껄끄럽게 여기는 듯했다. 아발론 왕성의 일과 제게 주어진 책무, 다른 기사들에게는 적응할지언정 로드와는 거리를 두었다. 정확히는 로드와 단둘이 있기를 꺼렸다. 하여 그를 마주 대해야 할 때는 불가피하게 요한 테일드가 동석하고는 했는데, 로드는 종종 발켄슈트를 앞에 두고 테일드와 이야기를 나눌 때 묘한 시선을 느끼고는 했다. 그리하여 고개를 돌리면 발켄슈트의 시선은 또다시 저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그러므로 대면할 인원이 적어진 이때, 로드는 발켄슈트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교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기에 왕성이 기사들로 북적댈 때는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는데, 훈련장은 물론 복도부터가 한산한 지금은 종종 방을 나왔기 때문이다. 요 며칠간 로드는 그의 동선을 파악했고 그 결과로 바로 지금, 그녀는 공용 내실에서 그와 마주칠 수 있었다. 내실에 들어서는 군주를 본 기사가 막 열려던 찻잎통을 그대로 내려두는 게 보였다.

 “발켄슈트 경.”

이 왕성에는 요한이 둘이었기에, 로드는 구분을 위해 갈루스의 요한을 성으로 부르고는 했다. 그러나 인사를 대신한 이러한 부름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첫 대면에서 자신이 먼저 밝혔던 이름인데도 불구하고.

 “아발론에는 적응이 좀 됐나?”

 “…….”

로드는 말없이 저를 쳐다보는 발켄슈트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왕의 말에 답하지 않다니 아발론의 방식에 적응한 모양이군.”

 “…….”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다. 발켄슈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워, 로드는 이쯤에서 그가 무슨 말이든 해주길 바랐다. 그 마음을 눈치챈 건지 움직임도 없이 저를 빤히 보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자는 어디 있습니까.”

 “그자?”

 “늘 당신을 따라다니는…”

또 다른 시간선에서 온 ‘요한’을 목격한 후, 요한 발켄슈트는 그를 지칭할 때 늘 정확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로드는 그 이유는 묻지 않고, 그에게 있어서 ‘또 다른 자신’의 존재,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요한 테일드의 존재가 거북할 수도 있겠다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테일드 역시 발켄슈트에게서 그런 묘한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구태여 그런 부분을 건드리지 않았다.

 “요한이라면 지금 훈련 중이다. 크롬 경이 담당하던 훈련까지 맡느라 훈련 시간이 늘었거든.”

 “…….”

 “음…”

 “…….”

 “뭔가 할 이야기가 있나? 발켄슈트 경.”

그가 미미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가 로드에게 가진 인상은 첫 대면 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패기도, 위세도, 강함도 없는 자. 제게 칼을 겨눴던 적국 출신 기사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을 넘어 무방비하기까지 한 군주의 모습은 발켄슈트에게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불만족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저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자는 요한이고, 나는 발켄슈트군.

같은 이름을 가진 자가 있고, 자신은 그자와 다르다고 단언하던 때가 있었으니 구분을 위해서라도 왕이 저를 그리 부르는 데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불쾌함에 대해 구태여 이유를 붙여보자면 ‘요한’이라는 이름은 그자와 자신 둘 다 최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라는 점을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온전한 것은 요한, 이라는 그 이름뿐일지도 모르니까.

‘발켄슈트’는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황제를 위시한 붉은 현자가 제게 붙여준 성이었다. 그것 역시 저를 이룬 정체성 중 하나이므로, 그는 아발론으로 왔을 때도 그 이름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이름으로만 저를 부르는 로드를 보며 그는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알 수 없어서 더 못마땅했다. 어쩌면 발켄슈트인 자신, 로드라는 존재를 모르고도 지금껏 삶을 꾸려온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불쾌했다. 자신은 그녀의 기사는 될 수 있지만, 그녀의 요한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내가 발켄슈트임을 인정한다면, 나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습관처럼 치민 질문에 그는 여전히 로드를 앞에 두고도 침묵을 지켰다.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을 밖으로 내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질문했다. 북부까지 나와 같은 자를 보낸 저의는, 내가 대제 폐하가 아니라 당신을 먼저 만났으면 이리 빛나는 사람이었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나? 당신이라는 변수를 만나지 못한 나마저도 당신의 그늘아래 두고 싶었다면, 당신은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닌가? 아발론에 와서도 요한이 아니라 발켄슈트라면 당신은 나를 왜 데려온 거지? 그자와 같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 역시 이제는 당신의 요한이어야 하지 않나?

 “…….”

그가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차가운 한숨으로 내리누르고는 여태 저를 외면하지 않는 여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불쾌함을 넘어 살기까지 배인듯한 그 눈빛을 보며 로드는 그가 아직도 저를 인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 짧은 대면을 통해 그녀는 다시 한번 그와 대화할 필요를 느꼈다. 발켄슈트를 아발론의 기사로 영입은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할 기회를 원했다. 그리하여 로드는 그의 매서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진심을 숨기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

 “…….”

 “파견 인원이 많아 당분간 왕성이 한산할 예정이니까. 다들 없는 사람 업무를 대리하느라 바쁘겠지만….”

 “…….”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남은 기사들과 평소에 못 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싶어. 물론 그대도 마찬가지야, 발켄슈트 경.”

 “…….”

 “그대도 내 기사니까.”

로드는 대답도 없이 뒤돌아 가버리는 그를 잡지 않았다.

 “…역시 아직 멀었나.”

아발론으로 오겠다는 결심과 나를 주군으로 받아들이는 건 별개일까. 그녀는 그가 그대로 두고 간 잔과 찻잎을 보았다. 나 때문에 그냥 간 모양인데, 함께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까. 로드가 잔을 하나 더 꺼냈다. 사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발켄슈트는 갈루스 북부에서 요한 테일드와 마주했을 때, 격전을 치른 후에야 그를 따라가겠다고 답했다. 로드가 아는 경위는 이게 전부였다. 그러므로 그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발켄슈트를 데려오려고 한 건 조슈아 레비턴스와 마찬가지로 그가 제국의 부역자로서 마땅한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발켄슈트의 존재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시간선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자신이 아는 요한이 아님을 체념하듯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지만 온기라고는 없는 금빛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다른 시간선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너도 나를 만났을까. 카르티스의 말대로 네가 진정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원래 나였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래서 네가 발켄슈트의 이름으로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 뒤틀린 운명에 따른, 바로 잡아야 마땅한 것이라면…… 이제라도 네가 내 곁에 있기를 청하는 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겠지. 제국이 패배하고 주군을 잃은 지금의 너 역시 내가 마땅히 치러야 할 업보다.

그리하여 그를 데려왔다. 자신을 아는 요한을 보내어 자신을 모르는 요한을 데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정말로 제 곁에 있기를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고, 당연히 확신하지도 못했다. 저를 보는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왕성에 몸을 담고서도 제게만은 거리를 두고, 방금도 자리를 피하지 않았나.

그렇기에 알아야 했다. 그가 갈루스 북부에서 요한과 대면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어째서 아발론으로 순순히 압송되었는지와, 앞으로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지를. 그가 여전히 나를 부정하고 싶어 한다면, 이번 삶에까지 나라는 주박을 씌워서는 안 될 것이다.

 “로드.”

물이 끓는 소리 위로 방금 사라진 이와 비슷한 듯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철갑을 두른 손이 익숙하게 레버를 돌리고 가스불을 끈다. 옅은 비누향에 고개를 돌리자 화사한 금빛 머리칼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오른팔을 가슴 앞으로 내밀어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온수가 끓고 있는 주전자를 든다. 로드 앞에 동그마니 놓인 찻잔 두 개에 적당히 물을 따르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묻는다.

 “두 잔 다 로드께서 드시는 겁니까?”

 “아, 아니. 가져다줄 사람이 있어서.”

 “로드께서 직접 말입니까? 제가 가져다드릴까요?”

 “괜찮아. 나도 그 정도 힘은 있다, 요한.”

 “하하. 알겠습니다.”

요한이 자기 몫의 차를 탈 요량인지 찻잔을 하나 더 꺼냈다. 철갑을 낀 채로도 능숙하게 티스푼을 들고 찻잎을 떠낸 뒤 물을 따른다. 차가 우려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이 그림 같다. 그사이 로드는 그가 타준 차 두 잔을 쟁반에 놓았다.

 “…음.”

 “……?”

 “큼. 로드께서 직접 차를 가져다주실 만큼 중요한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서요.”

 “아… 발켄슈트 경이야.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그렇습니까.”

통합된 시간선에서 혼돈과 싸우고, 또 다른 ‘요한’과 맞닥뜨린 이후 요한 테일드는 묘하게 달라졌다. 이전에도 자기 스스로보다 로드를 우선시하기는 했지만, 원래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을 시간선에까지 차원의 경계를 넘어 도달한 이후로는 제게 더욱 각별하게 굴었다. 몹시 소중한, 유일한 존재를 보는 것처럼. 유니버스가 통합되고 모든 것이 하나가 된 시간선에서, 갈루스 북부로 또 다른 요한을 만나러 가는 그에게 별다른 사과조차 전하지 못했는데도.

다시는 너를 잃지 않겠다고, 세상을 구하겠다고 그대를 비롯한 모든 소중한 이들의 손을 놓아버려 미안하다고, 다시 만나자마자 너를 이렇게 보내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겨우, 꼭 무사히 돌아오라며 옷깃을 여며주었을 뿐인데도 그랬다.

…로드의 명을 받듭니다. 조심스레 들어 올린 손등에 입을 맞추며 요한 테일드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 눈빛이 어떤 뜻이었는지도 물어봐야 하는데. 요한 테일드와 요한 발켄슈트, 두 사람 모두와 풀어야 할 실타래가 있었기에 그녀는 이번 파견에 둘 모두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었다. 누구와 먼저 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발켄슈트 경은… 아직도 로드를 피합니까?”

요한이 찻잔을 입에 댔다. 로드가 막 들어 올린 쟁반을 도로 내려놓았다.

 “일로 마주할 때는 괜찮아. 하지만 사적인 대화는 피하더군.”

 “그렇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드께서는, 발켄슈트 경과 가까워지고 싶으십니까?”

 “가까워지고 싶다기보다는… 어째서 아발론에 오기로 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묻고 싶어. 전자는 짐작은 해보겠는데 후자는 사실 정말 모르겠거든.”

 “…….”

 “경은 아는 바가 있나?”

 “저는……”

 “아. 물론 발켄슈트를 데려온 직후에 물었을 때도 대답해주지 않았지. 경이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네.”

 “…….”

 “발켄슈트와 직접 이야기해보는 게 좋겠다고 했었지?”

 “예. 저는 그와 닮았으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은 하겠습니다만…”

요한이 빙그레 웃었다.

 “그와 같지는 않으니까요. 저는 발켄슈트 경과는, 다릅니다.”

로드가 다시 쟁반을 들었다. 다르다고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는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로드께서도 그걸 알고 계시니 그와 대화를 해보시려는 것이겠지요. 늘 기사 개개인의 마음과 의사를 존중해주시는 분이니까요.”

 “그렇게 봐주니 고맙군.”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러니 차가 식기 전에 이만 가봐야겠어. 발켄슈트 경이 또 도망가버리기 전에 말이야.”

 “예. 잔이 꽤 무거우니 조심하십시오.”

 “요한은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요한 테일드가 웃었다. 그가 한 모금 마신 차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한쪽 팔로 쟁반 밑을 받치듯 안고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답은 하면서 열리지 않는 문에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법 무거운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두고 발켄슈트를 빤히 바라보자, 의자에 앉으라 눈짓한다. 쫓겨나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하며 참으로 격의 없는 권유에 응하자 그는 침대에 앉는다. 로드가 타온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조금 전 내실에서 이미 한번 본만큼, 그녀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고 했지.”

 “…….”

 “내가 경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

 “…뭡니까.”

마지못해 대답하는 남자의 얼굴이 무심했다.

 “갈루스 북부에서 요한과 만났을 때,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궁금하군.”

발켄슈트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로드는 물러나지 않았다.

 “말해줄 수 있겠나?”

할 말이 있으면 오라고 하더니,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들으러 직접 행차하셨군. 발켄슈트가 생각했다.

 “…하문하시니 대답하겠습니다.”

불온한 경어에 로드는 위화감을 느꼈다.

 “죽여버리겠다고 했습니다.”

 “…….”

 “물론 그자 말입니다.”

살벌한 말을 무감각하게 내뱉는 얼굴을 보며 로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는 주군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한 치도 덜어내지 않고 그때의 일을 전했다. 그날을 곱씹을 때마다 올라오는 본능적인 불쾌감을 짓밟으면서.

 

 ‘…내 운명이 뒤틀리지 않았다면 네 놈과 같았을까.’

그가 요한을 향해 칼을 겨눴다.

 ‘뒤틀린 운명조차 내 것이다. 나는 이를 끝까지 지킬 테니,’

 ‘…….’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되는 게 아닌가?’

 ‘…….’

 ‘네 주인에게 돌아가라.’

 ‘…….’

 ‘가서 내게 그 여자의 존재는 무용하다고 전해.’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이를 보고서도 한 치도 동요하지 않는 그 얼굴이 가증스러웠다. 검을 들고서 씹어뱉듯 이어간 말에 그자는, 요한 테일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투로 그녀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로드께서는 당신이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

 ‘그분은 지금까지 당신의 삶과 선택이 뒤틀린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정하지도 않아요.’

 ‘…….’

 ‘하지만 주인을 잃은 당신에게, 또 다른 선택지이자 가능성이 될 수 있었던 아발론과 그분의 곁을 보여주고 내어주길 원하시는 겁니다.’

그가 칼 대신 손을 내밀었다.

 ‘같이 돌아갑시다. 발켄슈트 경.’

요한 테일드가 웃었다.

 ‘그곳이 마땅한 자리인지 아닌지는 가봐야 아는 것이 아닙니까.’

 

 “…일리는 있더군요. 하지만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

 “거기서 그자가 내 칼에 죽는다면, 아발론의 군주를 선택한 그와 대제 폐하를 택한 나의 운명 중 무엇이 더 옳은지 바로 판가름이 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에 있군요.”

로드는 중상을 입은 채로 호송되었던 발켄슈트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 역시도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 표정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야기해줘서 고맙군.”

 “궁금증이 풀렸다면 이제 나가주십시오.”

 “아니, 묻고 싶은 게 더 있어.”

그가 입술을 달싹이려다 말았다. 당장 꺼지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았다.

 “…뭡니까.”

 “내가 경의… 충성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는 것 같나?”

그녀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두 부정적이긴 했지만 제법 다양한 감정이 스쳤던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건 당신이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응?”

발켄슈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요.”

 “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다 했습니다. 이만 쉬고 싶으니 나가십시오.”

로드는 그렇게 문밖으로 밀려났다. 들어올 때처럼 순식간이었다.



(下편에서 이어짐)


장래희망: 로드의 만년필, 요한의 안경닦이, 크롬의 장갑, 아이메리크의 고양이, 정대만의 왼쪽 무릎... etc. (계속 늘어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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