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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에는 끝이 없었다. 그것은 순흑의 절규. 지금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온 세상에 홀로 남겨져 버린 새까만 어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소리 이외에는.

자장가 따위를 알지도 못했으므로, 제 심장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낡은 동화책은 그곳에서의 유일한 전등이었고, 오웬은 아주 오랫동안 그 희미한 빛줄기를 품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육지로 떠난 남자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인어공주처럼.


어떤 과거의 이야기.




오웬이 마법관으로 돌아왔다고?

응. 내 방에 들어와서 앉아서는 한참을 내려다보더니 죽이려고 했어.

그렇다면 마법이 돌아온 겐가?

사실 잘 모르겠어. 마지막에 사라질 때는 마법을 썼지만, 그 전까지는 평범하게 쇼파에 앉아있다가 갑자기 날붙이를 직접 들고 가슴을 내려찍으려고 했어.

그대의 가슴을?

마법도 쓰지 않고?

마법은 쓰지 않고.

그것 참 기묘한 일이구만.

그리고 또 하나…,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 그 녀석이 내가 마법사인 걸 까발려버리고 눈알을 빼앗은 때까지. 

그 말은….

아직도 생생해. 다들 피투성이에 쓰러지고 서툴게 마법을 써봤지만 택도 없었던 게.

나도 조금 바보 같아서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부하들의 안위부터 걱정했지 뭐야. 이미 한참도 더 전의 일인데. 아무튼 꼭 되찾고 말거야.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선 카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두의 앞에서 호기롭게 말은 했지만 되찾을 길은 멀기만 했다. 피투성이로 쓰러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칼을 쥐었다. 오웬은 강했고, 카인의 마법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마구잡이로 엉켜붙은 기억의 실타래를 끊어내고 묶어 되돌려보려고 해도, 더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척이나 중요한 걸 잊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모퉁이를 지날 쯤이었다.


오웬…!


달빛에 가려진 기둥 뒤, 오웬이 있었다. 기척을 눈치채고 곧바로 칼을 꺼내들어 당장이라도 찌를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그는 칼날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손 끝으로 붙잡았다. 잘 갈린 날붙이는 견고한 가죽장갑을 뚫고, 그 안에 있는 흰살결에 천천히 파고 들었다. 새빨간 피가 칼날에 흘러내렸다. 오웬은 자신을 향하는 칼날을 붙잡고 천천히 가슴팍에 가져다대었다. 여기서 카인이 힘을 줘서 찌른다면, 가슴 속으로 칼날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늑골 사이로 들어가 텅 빈 가슴을 찌를 수 있을 거라고. 


칼 따위로는 날 죽일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오웬은 달빛을 머금어 평소보다 더 차갑고 허무하고 쓸쓸해보였다. 잠시의 정적이 머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웬을 수상히 여기던 카인이 몸을 틀었다.


할 말이 없으면 가볼 게.

도망치는 거야?

아니, 너와 할 말이 없을 뿐이야. 


카인의 단호한 태도에 어느샌가 가까이 온 오웬이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렇게 강한 힘도 아닌데 뿌리칠 수 없었다.


있지, 같이 가줘.

어디를?


카인이 뒤돌아 물었다. 강제로 데려가지 않고 의사를 물어본 게 신기해서 물어본 것 뿐이었다. 


…그건 알 필요 없잖아.


한참을 가만히 있던 오웬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카인의 침묵을 승낙이라고 여긴건지, 오웬은 빗자루를 꺼내 위에 앉았다. 뭐해? 빗자루 안 꺼내?  오웬의 페이스에 말려 엉성한 자세로 빗자루 위에 올라타 뒤따라갔다.


오웬은 상당히 천천히 앞장서서 날았다. 마치 뒤에 있는 카인이 쫓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 마냥.

회색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아슬하게 날던 카인은 문득 왜 이대로 따라가고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도 가버려도 상관 없을텐데.

가슴 속의 찝찝함을 곱씹어보다보니 오웬이 빗자루에서 내려 지면 위에 서있었다.


도착한 곳은 바닷가. 근처에 인가도 없고, 고요했다. 오로지 카인과 오웬, 둘 뿐인 것 같았다.


됐으니 이제 가겠다며 카인이 말하려는데, 그것보다 먼저 오웬이 장갑을 벗어던지고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뭘 달라는 건가? 아니면 뭔가를 할 생각인가? 카인이 생각에 빠져들자 오웬이 빨리 달라며 성질을 냈다. 얼떨결에 카인이 손을 내밀자, 오웬은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깍지를 끼고 천천히 해변을 걸었다.

…오웬?

쉿.


이끄는 대로 천천히 움직이자 거친 바닷바람에 회색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시야에는 오웬과 그 너머로 반짝거리는 바닷물이 넘실거렸고, 바로 앞까지 밀려왔다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며 흰 거품을 뿜어냈다. 기분 좋은 지 살짝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오웬을 보며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만큼은 저 붉은 눈동자가 증오스럽지도, 원망스럽지도 않다고. 

단지 가슴 안쪽이 뻐근해질 뿐이었다.


카인은 별 대꾸없이 오웬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우선 이렇게 있자고. 그렇게 하지않으면 이 기묘한 위화감이 뭔지 영영 알지 못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모래사장의 끝에 다가왔을 무렵, 파도소리가 부서지듯 흩어지는 침묵 속에서 오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있지, 어떤 바닷속에 사람의 심장을 잡아먹는,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여자가 살고 있었대. 그러다가 여자는 어떤 형편없는 남자를 보았어. 누가봐도 좋은 먹잇감이었지.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잡아먹지 않았어. 그저 물 위로 되돌려보낼 뿐이었어. 뭍으로 나온 그는 물을 토해냈고, 숨을 쉬었고, 흐릿하게 눈을 떴어. 그렇게 이별. 하지만 여자는 다시 한 번 더 그 남자를 만나고 싶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두 다리를 얻었어. 하지만 그는 이미 누군가와 결혼을 약속했었고, 이미 여자와의 일은 모두 잊어버렸지. 혼자가 되어버린 여자에게 누군가 남자를 죽이라고 했어. 남자를 죽이면 되돌아갈 수 있다고.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고.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죽이지 못하고 자신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어. 허무하지않아?

응? 그야… 그러려나?

하지만, …역시 그 여자는 아니었을 거 같아. 그 마음은 본인 밖에 모르는 거니까 확신할 순 없지만.

왜?

그야… 사랑…했을 테니까?


그 대답을 들은 오웬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한걸음 더 내딛은 카인이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힘껏 붙잡고 있었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오웬은 외로워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있지, 카인.

응?


옅게 부는 바람, 파도가 달빛에 비춰져 반짝거리며 부서지고, 짭잘한 바다내음이 가득했다. 이 풍경을 어디선가 본 적 있던가. 조각나버린 기억 속에서 잘게 부스러진 파편이 빛났다.


사랑해.


《쿠아레 모리토》 


대답도 하기 전에 사라져버린 오웬. 그렇게 바닷가에는 어떤 기사님과 흰 거품만 남아버렸다.






마법관으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이미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카인! 오웬이 돌아왔어요.


쪼르르 달려온 현자가 카인의 앞으로 가서 조잘거리며 얘기했다.

오웬이 제 발로 마법관을 다시 돌아왔다고, 여태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주지는 않지만 우선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지금 그래서 다들 모여있다면서.


마치 집고양이가 산책 나갔다가 돌아온 것 같네요.

한도의 한숨을 팍 내쉰 현자는 뒤늦게 카인의 눈치를 살폈다. 

아…, 미안해요. 아직까지는 오웬이 불편하겠죠?

아무래도. …뭐, 괜찮아. 현자님의 탓이 아니니까 그렇게 안절부절할 필요 없어.

그래도 얼른 들어가서 푹 쉬세요…!


현자의 등살에 못 밀려 침대에 누워 카인은 생각했다. 오웬의 마지막 말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감춰진 그 녀석의 빨간눈을 떠올리며 복잡한 머릿 속을 정리했다. 어차피, 또 이상한 술수일 게 뻔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녀석이니까. 가까이 해서 좋을 게 없는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왜인지 모를 불쾌함에 몸을 몇 번쯤 뒤척이다가 밖으로 나왔다. 영 잠이 오지 않았다. 굉장히 어려워 보이는 책이라도 조금 읽으면 금방 잠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섰지만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다. 뭔가 어려운 책을 갖고 있는데다가 깨어있을 것 같은 사람….

오즈라면 갖고 있지 않을까? 발뒷꿈치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마주쳤다. 잠옷 차림의 오웬과.

어색하게 웃으며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이쪽은 신경도 안 쓰고 오웬이 휙 지나쳐버렸다.


"저기…, 너도 잠이 안오는 거야?"

"그럴리가."


카인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다가 쫓아가 흘러내려온 오웬의 숄을 단단히 여며주었다. 빤히 쳐다보는 오웬의 표정에 뒤늦게 왜 그랬나 싶어졌다.


"다정하네.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는 거야?"

"음…, 그런 편이려나? 그리고 너는 배에 아이도 있으니까 좀 더 조심해야지."

"헤에…."


또 다시 표정이 바뀌어버린 오웬이 주문을 외웠다. 


쿠레 · 메미니》 


그리고 서서히 카인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카인…, 미안해요. 아직 기억이 다 돌아오지 않아서 혼란스러울텐데 임무에 불러서.

아니, 괜찮아. 다른 마법사들은 또 다른 임무 때문에 전부 바쁘잖아. 현자님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뻐.


깨어났을 때는 아침에다가 자신의 방이었다. 어디 하나 다친 곳도 없이 멀쩡했다. 아침을 먹으러 가서 오웬을 보았지만, 상대방은 내색도 없이 새침하게 스콘에 크림을 발라먹고 있었다. 설마… 재워서 방에 데려다 준건가?


그러고보니까 새벽에 카인이 복도에 잠들어 있었어요.


아니었구나. 오물거리며 아침을 먹던 리케의 말에 깜짝 놀랐다. 

거기에서 자면 감기 걸릴 거예요.

아, 응…!


리케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자 현자님이 곤란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임무를 나갈 인원이 너무 적어서 괜찮으면 같이 가달라는 부탁이었다. 흥쾌히 승낙하고 현자님과 함께 내려오자 거기에는 뚱한 표정의 오웬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평소보다 인원이 정말 적네요. 미스라랑 브래들리도 같이 갔어야했는데… 브래들리는 출발 직전에 재채기 때문에 어디론가 가버렸고 미스라는 아침에 오즈에게 덤볐다가 기절해서 깨어나질 않아서…. 둘 다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숲에 있는 빈 저택이 무사한지만 확인하면 되니까요.


오웬은 어색한 기류 따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카인의 뒤에 붙어 따라왔다. 오히려 카인이 괜히 긴장해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숲을 가로질러 나온 저택은 꽤나 고풍스럽고 성만큼 컸다. 금속으로 된 울타리가 쳐저 있었지만 문이 잠겨져 있지는 않았다. 울타리를 넘고 옅은 나무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슨 장치라도 되어있는 것처럼 어둡던 실내가 환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느낀 오웬이 카인과 현자님의 앞을 막아섰다.


헤에…, 이거 꽤 나쁜 취미네.

무슨 소리야?

저택 전체가 마법에 걸려있어. 그것도 꽤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지 않게 꽁꽁 감춰놔서 나도 들어오기 전까지는 몰랐어. 약하면 이정도는 느껴지지도 않을 거야.

우선 돌아가자. 현자님을 보호하고 인원을 더 보충해서 와야 해.

잠깐…!


카인이 문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거기에도 마법이 걸려있어. 억지로 나가려고 한다면 움직이지 못하게 하나보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저 멀리에서 해골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쿠아레 모리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현자님이 아주 작게 변해버렸다.


숫자가 많아. 나야 죽어도 다시 살아나지만 여럿은 못 지켜. 그러니까 기사님이 현자님을 지켜. 카인의 자켓 속으로 작은 현자님을 집어넣은 오웬은 드렁크를 쥐고 바쁘게 주문을 외웠다. 


카인 나이트레이의 검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긍지이자, 사명이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지킬 수 없다니, 카인은 이를 악 물었다.

흰코트를 입은 등을 보며 생각했다. 지키고 싶다고.

지키다니. 누구를? 오웬을? 머릿속이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것 같았다. 왜 오웬을 지키고 싶은 걸까.


몰려오는 해골들을 정리한 오웬이 손에 쥐고 있던 드렁크를 집어넣고 한숨을 팍 내쉬었다.


더이상은 마법을 쓸 힘도 없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오웬은 당장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아까부터 가슴 안쪽이 쿵쾅대면서, 간지럽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이상한 열병에 걸린 것 같았다. 이것도 마법의 영향일까?


기사님…, 미쳤어? 아까부터 웃다가 인상쓰다가 왜 그래?


오웬은 괴상한 걸 본 것처럼 인상을 쓰다가, 갑자기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따뜻한 피가 카인의 뺨에 튀었다.


오웬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인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인어 아가씨는 전혀 허무하지 않았을 거야. 사랑했으니까.'


이제 마법과도 같이 물거품이 될 시간이었다.






오웬이 잠들어버린지 벌써 삼일째, 카인은 모두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쪽잠을 자며 하루종일 옆을 지켰다. 오웬이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스라와 브래들리가 도착하고, 저택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저택에 걸린 마법이 풀리고 움직일 수 있게 된 카인은 피투성이가 된 오웬에게 다가가 품에 끌어안았다. 왜 하필 그 상황에서 모든 기억이 돌아왔을까. 몇 번이고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했지만, 오웬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며칠 째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피가로는 살짝 인상을 쓰며 심각하게 말했다. 뱃속의 아이는 더이상 느껴지지 않아. 그리고 오웬 본인도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고. 어쩌면 영원히 안 깨어날 수도 있어. 그 말에 카인의 가슴이 쿵하고 떨어지는 듯 했다. 그 이후부터 줄곧 오웬의 옆에 있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피곤한 기색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에는 걱정과 애정이 가득했다. 날이 좋아 볕이 스며드는 것을 힐끔 흘겨보며 카인은 대답 없는 오웬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며 손 끝을 붙잡았다.


오늘은 날이 맑고 바람이 적당히 불어서 빗자루를 타기 좋았대. 어제는 바람이 너무 강해서 빗자루가 휘청거릴 정도였는데 말이야. 아까 네가 좋아하는 케이크가 디저트로 나왔어. 서쪽나라의 마법사들이 임무를 나가서 생각보다 꽤 많이 남는다면서 네로가 곤란한 표정을 짓더라. 만약 네가 있었다면 전부 먹으려고 했겠지. 있잖아, 네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계속 생각해봤어. 네가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고. 내 대답은 이거야. 오웬… 네가 보고 싶어.


담담하게 시작한 말은 어느새 물기를 잔뜩 머금어 묵직해졌다. 너도 이런 시간을 보냈던 거야? 아무리 불러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인은 오웬의 피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차가운 뺨. 북쪽은 눈이 많고 추운 계절이라서 그럴까. 곧 사라질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의 연심을 아슬하게 부여잡았다. 


돌아와줘.


외로움을 삼키는 그 작은 외침이 똑똑거리는 노크 소리에 묻히고, 누군가 방으로 들어왔다.


현자님?

카인,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오웬을 구할 방법을 하나 찾았어요. 오웬의 무의식 속에 들어가서 직접 데리고 나오면 된대요. 다만…


현자님이 말을 하다가 멈춰서 고민하다가 숨을 한 번 크게 고르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천천히 내뱉었다.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그것도 한 번 뿐. 거기다 최악의 경우, 구하려고 한 사람이 죽을 수 있어요.

내가 갈게.


카인은 단호하고 간결하게 말했다. 


오웬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어. 말 뿐만 아니라 내 눈을 빼앗아 간 것도, 내가 자신을 잊은 이후로 포기해버린 것도. 그런데도 나는 이녀석이, 오웬이 좋아. 그러니까 오웬을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알겠어요. 의식을 치를 준비가 되면 데리러 올게요.


문이 닫히고 카인은 축 늘어진 오웬의 손을 끌어당기고 제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생각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반드시 만나고 말거야. 기다려줘.




카인은 눈을 깜빡거렸다. 몸에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먹먹했던 귀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초점이 맞지않아 뿌옇게만 보이던 시야도 이제는 멀쩡해졌다.


여기가 오웬의 무의식 속?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설탕의 냄새에 주변을 살피자 사방이 과자였다. 천장도, 바닥도, 테이블도, 의자도 전부 과자인 공간. 마치 오웬이 만들었던 과자의 집 같은 모양새였다. 문을 열어도 안은 텅 비었고, 버터에서 나온 기름기와 설탕의 근적함이 가득한 곳. 카인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없었다. 타인의 무의식에 오래있어서는 안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오웬을 구출해야 했기에.


과자의 집을 지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방향따위는 몰랐지만 이쪽이라는 직감이 있었다. 앞으로 갈수록, 점점 스며드는 암흑에 카인이 조금 인상을 썼다. 이래서는 갈 수 없잖아. 이제는 바로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아 카인이 잠시 멈춰섰다. 


그라디아스・프로세라》 


주문을 외쳐보아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역시 마법은 쓸 수 없는 건가. 카인은 차고 있던 칼집을 들어 앞으로 향해 쥐었다. 벽이나 사물이 있다면 몸보다 먼저 칼에 부딪히겠지. 몸을 쓰는 게 익숙한 만큼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한참동안 걸은 것 같은데, 나오는 건 없고 계속 껌껌하기만 했다. 빛 한 점 없어 바로 발 밑도 보이지 않았다. 카인이 긴장을 놓지 않고 한걸음 더 내딛는데, 발끝에 닫는 부분이 없었다. 여기 아래에 구멍이 있는 걸까. 얼마나 깊은지, 어떤 상태인지 몰라 들고 있던 칼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칼이 바닥으로 떨어져 울리는 소리로 깊이를 추정해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카인은 숨을 한 번 고르고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바닥에 널브러진 카인은 곧바로 몸을 추스렸다. 아래는 이상하게도 밝았다. 어디서 스며드는지도 모르는 빛. 바닥에는 칼집이 사라진 칼만 덩그러니 있었다. 꽤 깊게 떨어진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몸이 멀쩡했다. 마법도 없는 상황에서 그정도로 떨어졌다면 뼈가 몇개쯤 부러져야 정상일텐데. 무의식이라서 안아픈 건가? 시험 삼아 바닥에 나뒹구는 칼을 주워 손끝을 살짝 찔러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정도의 고통에 카인이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떨어진 건 괜찮으나 찔리면 그 통증이 전부 그곳으로 몰려오는 건가? 최대한 찔리지 않아야겠네.


넓고 전부 뚫려있던 위와 달리 아래는 좁은 길 하나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 앞에 오웬이 있을 거라고. 

카인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길의 끝에는 짙은 녹색빛의 가시덩쿨이 마구잡이로 엉켜 앞을 막고 있었다. 칼을 단단히 쥐고 덩쿨을 잘라내었지만, 곧바로 수복되어 다시 자라났다. 

재빨리 베어내고 들어가면 될 것 같아 잘라낸 뒤 바로 안쪽을 자르며 뛰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단단한 줄기에 칼이 박혀 뽑히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에는 가시덩쿨 사이에 갇혀버리고 말지도 몰랐다. 카인은 숨을 들이키고 조금 남은 덩쿨을 손으로 뜯어 틈을 만들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중심을 잡히 못해 바닥에 구르며 고통에 신음했다. 욱신거리는 왼손을 감싸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다른 길, 여기에 오웬이 있어야 했다. 


...기사님?


앳된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어린아이가 쭈그려앉아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회색의 머리칼은 목까지 내려와 조금 덥수룩했고, 흙투성이의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붉게 빛나는 두 눈동자.


오웬?

나, 착한 아이로 있어서 도와주러 온거야?

응?

동화책에서 봤어. 기사님은 약하고 착한 사람들을 도와준대. 나, 착한 아이로 있어서 와준거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옷 속에 숨겨두었던 것을 꺼내었다. 다 헤져버린 낡은 동화책. 얼마나 본 건지 종이는 이미 너덜너덜해서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그림도 다 바래서 뭐가 적혔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여기에 있어. 자, 기사님이잖아. 나쁜 사람들을 무찔러주고 나를 구해주러 온댔어.


카인은 가볍게 오웬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내 소개를 할게. 오웬, 너를 데리러 온 카인 나이트레이야. 


나를 데려가?


조금 겁을 먹은 듯한 얼굴로 오웬이 말끝을 흐렸다. 


...밖으로는 나갈 수 없어. 저기에 가시덤불이 있어.

괜찮아. 나를 믿어줘. 나갈 수 있어. 

안돼! 무서워! 찔리면 피가 날거야...


카인은 한쪽 무릎을 꿇고 눈을 마주보았다. 살며시 미소 지으며 오웬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약속할게. 나는 너와 같은 마법사야. 

마법사?

응,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마력을 전부 잃어버려. 나를 믿어줘. 너를 꼭 여기서 나가게 해줄게.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카인의 다정한 말에 오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웬의 손을 붙잡고,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씌워주고는 품에 끌어안았다. 칼도 없는 상황에서 저 덩쿨을 뚫고 나가는 건 단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망설임 없이 줄기를 잡고 거칠게 뜯었다. 피부를 뚫고 손 곳곳에 가시가 박혔지만 어떻게든 참아냈다. 머릿 속이 아득해지는 통증에 신음이 새어나왔지만, 앞으로 나아갔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수록 카인의 머릿속은 아득해졌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고통에 신음하며 품 안에 있는 오웬을 끌어안았다. 


기사님... 죽지마!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카인은 슬며시 웃으며 지켜준다고 다시 한 번 맹세했다. 

꼭 너와 함께 밖으로 나갈거야. 오웬. 반드시.


덩쿨 밖으로 나오자마자 카인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생각할 수도 없는 고통이 전신을 훑고 있었다. 


카인?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는 어째서인지 아까전까지 있던 어린아이는 없고 단정한 모습의 오웬의 모습이 보였다.


왜 여기 온거야?

...너를 데리러 왔어. 


카인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를 왜?

그야… 너를 사랑하니까, 오웬.


언젠가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웃던 오웬이, 기뻐보이던 붉은 눈동자가, 손을 뻗어 옆으로 넘겨주었던 옆머리가.

그리고 맞닿은 입술의 감촉이.


《쿠레 · 메미니》 


아득하게 의식이 사라졌다.






밝은 빛이 창을 너머 침대까지 스며들었다. 눈을 뜬 카인은 주변을 살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돌아온 걸까?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급하게 윗층으로 올라갔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 뿐이었다. 


늦었어. 


익숙한 목소리가 카인을 반겼다. 오웬은 침대에 걸터앉아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줘서 고마워.


살아줘서 고맙다니, 생애 처음으로 듣는 기묘한 말이었다. 죽이려고 하던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살리려던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오웬은 자신을 끌어안는 카인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등 뒤로 팔을 감쌌다. 텅 빈 가슴 속이 따끔따끔하고 간지러운 느낌. 기분이 이상했지만 지금은 이러고 싶었다.





나락의 끝에서 어떤 이가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무음의 세계.


자장가 따위를 알지도 못했으므로, 제 심장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낡은 동화책은 그곳에서의 유일한 전등이었고, 오웬은 아주 오랫동안 그 희미한 빛줄기를 품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무음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들린 소리. 자신을 부르는 그 울림이 비로소 사랑이라고, 물거품 속에서 오웬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올해 안에 19금 에필로그가 올라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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