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게야마 토비오 12/22 생일 축하해!

- 오이카와 생일축전 <극야>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여러가지가 날조되어 있습니다.

- R15(?)








그 밤은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마주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뜨거워서 심장이 함께 요동쳤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는 카게야마의 동그란 뒤통수를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가슴팍에 닿은 그의 이마가 뜨거웠다. 어쩌면 제 심장이 뜨거워서일지도 몰랐다.

시선을 힐끔, 내리면 카게야마의 정수리가 보였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제 품에 가만히 안겨 있는 연인을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연인,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이 낯간지러웠다.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미세한 웃음이 떨어졌다.

 

‘오이카와 씨. 왜 안 주무세요.’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어 오이카와와 눈을 맞췄다. 겨울을 닮은 청회색 눈동자 속에 오이카와의 수려한 외모가 그대로 담긴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받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아직도 안 자는데.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 알아?’

‘… 그냥, 그냥요.’

 

어쩌면 그 때, 알아차려야 했을지도 몰랐다. 언젠가의 자신이 ‘그냥’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처리해버렸던 마음을 떠올렸어야 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달싹거리다가도 결국에는 굳게 닫혀버리는 것을 좀 더 유심히 봤어야 했다.

오이카와는 모든 것이 제 탓인 것 같았다. 아니, 분명하게 제 탓이었다.

 

 



  백야

w. 비에

 

 

 


[토비오. 내 말 듣고 있어?]

“아, 네. 듣고 있습니다.”

 

시야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던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수업 시간에 턱을 괴고 졸다가 삐끗해서 잠이 깬 학생 같았다. 카게야마의 핸드폰 화면 속 오이카와는 자신과 통화를 하고 있는데 어디에 한 눈을 팔고 있던 거냐며 얼굴 위로 뾰로통한 표정을 꾸몄다.

진심으로 삐친 것은 아니었지만 카게야마는 그런 종류의 장난이 상당히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화가 났을까봐 안절부절 못한 얼굴로 입술만 우물거렸다. 무어라 말은 하고 싶은데 가지고 있는 어휘가 턱없이 부족해 곤란할 때 나오는 얼굴이었다. 오이카와는 웃음 같은 한숨을 뱉고는 뾰로통하게 꾸몄던 표정을 풀었다.

 

[하여간 귀엽긴. 토비오, 화 난 거 아니야.]

“… 네. 근데 저 정말로 잘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럼 나 몇 시에 도착하는지 들었어?]

 

자신 있게 결백을 주장하던 카게야마의 입술이 또 문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입술이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동안 눈동자는 빠르게 오이카와의 얼굴에서 초점을 옮겼다. 몇 시에 도착한다고 했더라. 카게야마가 머리를 굴리며 ‘으음.’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눈은 여전히 오이카와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연인의 얼굴을 벗어난 시선은 차례로, 베이지색 커튼, 잘 정돈된 침대, 리시브 자세를 취하고 있는 선수의 그림이 그려진 책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기억 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았을 때, 시선은 연인의 얼굴 위로 귀환했다.

 

“12시 30분. 17일 12시 30분 맞죠?”

 

카게야마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이카와의 핸드폰 속 카게야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정답을 확신하는 목소리가 앳되어 보였다. 여름에 재회했을 때는 어른인 티가 훅 나더니 왜 도로 아이가 되어버렸는지. 오이카와는 그마저도 귀엽다 생각하며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왼손으로 옮겼다.

통화 시간이 벌써 30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시선을 비스듬히 위로 올렸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10시 정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와 일본의 시차가 열두 시간이니 지금쯤 일본은 밤일 터였다. 카게야마가 잠에 들 시간이었다.

 

[맞아. 공항까지 마중 나와야 해. 알지?]

“네. 여기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전부 알아놨습니다.”

[응. 그래도 모르겠으면 혼자서 막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역무원한테 물어봐.]

“잘 찾아갈 수 있습니다.”

 

청회색 겨울을 담은 눈이 삐죽,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입술도 비죽이며 튀어나왔다. 애 취급 하지 말라는 일종의 요구이자 불만이었다.

오이카와는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또 어디서 사왔는지 이상한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료의 조카들도 그런 옷은 유치하다며 입지 않을 터였다. 오이카와는 ‘알았어. 잘 찾아올 거라고 믿어.’ 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연인을 달랬다.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이라 조금 더 길게 통화를 붙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훈련에 나가야 했고 카게야마는 내일을 위해 잠들어야 했다. 그는 카게야마가 눈을 비비는 것을 보며 이제 그만 잘 것을 제안했다. 카게야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흘 뒤에 봐, 토비오.]

“네. 조심히 오세요.”

 

통화는 그대로 끊어졌고, 카게야마의 화면 위로는 하트 모양이 하나 떠올랐다. 카게야마는 그 낯간지러운 모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침대 위에서 통화하고 있던 덕분에 쓰러졌다고는 해도 통증이 있지는 않았다. 푹신한 솜이불 속에 얼굴을 묻은 채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그 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깜짝 놀란 카게야마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오이카와의 품이었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제 체중으로 카게야마를 뒤로, 뒤로 밀었다. 카게야마의 발이 침대에 걸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번에는 콧잔등에 입을 맞춘 오이카와가 푸스스 웃었다.

 

‘겁먹지 마. 사귀는 첫날부터 이상한 짓 안 해.’

 

입꼬리를 올리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은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카게야마와의 거리를 떨어뜨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카게야마가 조금이라도 고개를 올리면 오이카와의 입술에 제 입술이 부딪칠 것 같은 거리였다. 살며시 그의 어깨를 밀어내 보기도 했지만 오이카와는 조금만 안고 있자며 밀려주지 않았다.

사귄다. 연애를 한다. 그 말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자신과 오이카와가 사랑을 해서, 연애를 한다. 이상한 일이었다.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가 꾸역꾸역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게야마는 그 말에 묻은 애절함을 끌어안았다.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인 양 굴기로 했다. 이상한 행복감에 젖어 오이카와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카게야마는 그 얼굴에서 애절함을, 애달픔을 감지했다. 오이카와의 탓이 아니었다. 제 눈이 이상한 탓이었다.

이렇게나 강한 힘으로 끌어안으면 셔츠에 주름이 생길 텐데. 순간 그런 어쩔 수도 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놓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김없이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있어도 그랬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래. 결국엔 제 문제였던 것이다.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는, 자신만의 문제. 하지만 어째서인지 예전만큼은 비참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카게야마는 이 불안한 평온이 오이카와가 곁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차차 나아질 터였다. 근거 한 줌 없는 추측이 새벽을 떠돌았다.

 

“… 오이카와 씨.”

 

카게야마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핸드폰의 화면은 암전되어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액정 위를 배회하던 엄지손가락이 돌연 멈추었다.

오이카와의 생일 날, 카게야마는 그의 손에 이끌려 핸드폰 대리점의 문을 두드려야만 했다. 낯설어하는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는 익숙한 걸음으로 진열대 앞에 섰다. 기척을 느끼고 다가온 직원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오이카와와 뒤에 서 있는 카게야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가 그 시선을 받고도 눈만 끔뻑끔뻑 뜨고 있자 직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오이카와에게로 고정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카게야마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같은 회사에서 제작된 스마트폰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직원은 눈치껏 그들을 옆 진열대로 안내했다.

낡은 피처폰에 있던 연락처를 비롯한 사진, 동영상 등의 파일을 전부 이전시킨 핸드폰은 새 것의 티나 났다. 카게야마는 이제 제 것이 된 핸드폰을 손 안에 쥐고는 오이카와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왜. 이게 있어야 나랑 얼굴 보고 통화도 할 수 있어.’

‘…… 압니다.’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다갈색의 눈동자 속에서는 어떤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도로 고개를 숙였다.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액정 위를 쓸었다. 그 움직임이 퍽 어색했다.

상의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멋대로 바꾼 것이 화가 났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카게야마가 낡은 피처폰을 몇 년 동안이나 써온 것은 순전히 오이카와 때문이었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던 여름 날,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신이 났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정상까지 도달한 기분은 곧 낙하하다 못해 고장을 일으켰고, 레일을 벗어난 놀이기구는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쳤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분을 심장 한 구석에 담아두었어도, 카게야마는 좋았다.

저장된 번호로 연락을 할 수도 없는데 그것이 오이카와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가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그것만이 오이카와와의 연결점인 줄 알고, 행여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손에 꽉 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앞에 있었다. 언제든지 그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이유가 없어도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한 스마트폰이니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행동에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저 다만,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울렁거림이 가라앉지 않을 뿐이었다. 마치 파도 위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살면서 멀미를 해본 적은 없었는데. 카게야마가 중얼거림을 목구멍 깊숙이 삼켰다. 안으로 파고드는 말들이 카게야마의 목구멍을 사정없이 긁었다. 갈증이 났는데 물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이 역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거, 어떻게 하는 겁니까?’

‘뭐. 영상 통화?’

‘네.’

 

그래서 결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다. 잠들지 못한 어젯밤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곁에 있다. 그 사실 하나가 마치 절대적인 주문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 같았다. 여전히 근거는 없었다. 그래서 주문이고 마법이었다. 오이카와가 제 곁에 있다는 사실은 카게야마가 현실이라고 느끼기엔 너무 무거웠다.

오이카와에게서 영상 통화를 하는 방법을 터득한 카게야마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오이카와는 그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카게야마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깜짝 놀란 카게야마가 핸드폰 화면에 있던 시선을 황급히 옮겼다.

 

‘잠깐 줘 봐.’

 

카게야마는 멍하니 있다가 오이카와에게 핸드폰을 내어주었다. 나무에 들러붙은 매미가 올해도 장렬하게 울음을 냈다. 모든 것을 불사질러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박으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애처롭게도 들려, 카게야마는 주차장 옆에 멀거니 서 있는 나무에 시선을 던졌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 끝에 매달렸다. 카게야마는 손등으로 턱 끝에 아슬아슬하게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 때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화면에는 익숙한 번호와, 낯선 모양이 동시에 떠올랐다.

카게야마는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카게야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에게서는 어떤 다른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말 좀 해보지?’

‘이게 답니까.’

‘이게 다냐니. 한 열 개는 붙이고 싶은 거 한 개로 참아준 거야.’

 

카게야마는 액정 위에 뜬 하트 모양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이카와의 이름이 있어야 할 곳에 글자는 없고 웬 하트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하트에 닿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입술을 조금 비죽거렸더니 오이카와가 대놓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했다.

 

‘뭐가 불만인데?’

‘…… 이름이 안 뜨면 누군지 모르잖아요.’

‘뭐?’

 

오이카와가 매미보다 큰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행인 한 명이 그 소리에 놀라 오이카와와 카게야마 쪽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가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귀여운 꼬맹이가 뭐라는 거야. 오이카와는 하트 모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카게야마의 볼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

 

‘보면 바로 나인 걸 알아야지! 너는 이 하트를 보고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떠올라?’

 

중대 사항이었다. 애인 있는 남자가 큼지막한 하트를 보고도 바로 애인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다니. 사귄 지 이틀째, 오이카와는 전날 밤 신사처럼 굴었던 것을 후회했다. 입술 도장 정도는 찍었어야 했던 것이다. 기왕 찍는 거 아주 진하게 찍었어야 했다.

하지만 곧 오이카와는 자신이 중대 사항이라고 여긴 카게야마의 말이, 일종의 부끄러움임을 깨달았다. 오이카와의 손을 치우고 휙 고개를 돌린 카게야마의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당황해서 시선을 위로 올리니 귀도 빨개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덩달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잡고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너… 너, 진짜….’

 

못 말리겠다. 발음이 뭉개져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렇게 말했을 터다. 그 날 밤 오이카와는 자신을 밀어내는 카게야마의 목덜미에 기어이 이를 박아 넣고야 말았다. 오이카와가 아무리 애 취급을 하며 귀엽다, 귀엽다 말해줘도 카게야마도 알 거 다 아는 성인 남자였다. 올해로 스물 셋이 되는 남자가 목덜미에 피어오른 자국을 만지작거리며 ‘이게 뭡니까?’ 하고 묻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그 이후로 반년이 지나 자국도 뭣도 없어져버린 제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나흘 뒤면 오이카와가 일본에 온다. 카게야마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라며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것을 기억했다.

 

“… 오이카와 씨, 오이카와 씨…. 오이카와, 토오루.”

 

허공에 뻗친 이름이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흩어진다. 카게야마는 몸을 옹송그렸다. 포근한 솜이불 위에서, 그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않고 몸을 웅크리기만 했다. 또 잠이 쏟아졌다. 이미 오늘 한 차례 낮잠을 잤는데도 졸음이 밀려와 어쩔 도리가 없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사실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무거운 것이 눈꺼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카게야마는 제 몸을 끌어안았다. 손 안에서 티셔츠가 찢어질 듯 쥐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잠에 들 때까지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 부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착 없이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린 오이카와는 곧장 출구부터 찾았다. 동서남북도 모르는 연인이 괜히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가 서로 고생하기는 싫어 이틀 전 카게야마에게 공항 밖 택시 승강장에서 기다리라고 말해두었다. 그러니 밖으로 나가면 카게야마의 얼굴이 보일 터였다.

오이카와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아 다행히도 바로 카게야마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동그란 뒤통수를 발견하자마자 달렸다. 중간에 캐리어는 길바닥에 버려두고 카게야마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시계를 보고 있던 카게야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반년 만에 만나는 연인이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화사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오이카와 씨. 여기 일본입니다.”

“알아. 근데 네가 그런 것도 신경 써?”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어 동성끼리의 스킨십을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는 아르헨티나와 달리 이곳은 일본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공항에서 성인 남자가 진하게 끌어안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를 주먹으로 꾹, 꾹, 밀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이카와는 쉽게 밀려나주지 않았다.

얼굴 본 거 반년 만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오이카와의 얼굴에 화사함이 내려앉았다. 그가 이런 얼굴을 하면 카게야마는 어쩔 도리도 없이 둥글게 말린 주먹에서 천천히 힘을 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가슴팍에 무게를 실어 기대는 것도 정해진 순서였다. 오이카와는 한 손을 카게야마의 허리에 휘감고 이마에 키스했다.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끌어안느라 내팽겨 쳐둔 캐리어를 도로 끌고 왔다. 다시 승강장까지 왔더니 카게야마가 택시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운전수가 고개를 숙이며 오이카와의 캐리어로 손을 뻗었다.

손님의 캐리어를 무사히 트렁크로 실은 운전수가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뒷좌석에 오이카와와 나란히 앉은 카게야마가 그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운행을 부탁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앞으로 빼 카게야마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제법 스마트폰을 잘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는 퉁명스러운 말에,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키득키득 웃었다. 카게야마가 다시 입술을 비죽거렸다.

점심은 카게야마의 집 근처에 있는 정식집에서 해결했다. 배고프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오이카와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메뉴판부터 펼쳐들었다. 카게야마는 늘 먹던 메뉴가 있었으므로 오이카와의 선택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앞에 앉아 기다렸다. 그리고 곧 오이카와가 손가락으로 철판구이 정식을 가리키자 카게야마가 바로 종업원을 불렀다.

 

“철판구이 정식 하나랑, 야채 카레 하나요. 둘 다 쌀밥으로 해주시고… 음. 양은 보통으로요.”

 

오이카와가 한 팔로 턱을 괴고 카게야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주문을 하는 폼이 퍽 익숙해보였다. 가끔 같은 팀의 동료들과 식사를 하는 가게가 있다더니 그게 이곳인 모양이었다. 시선을 느낀 카게야마가 어색하게 오이카와를 마주보았다. 왜 그러느냐 묻자 오이카와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주문한 메뉴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둘은 동시에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주로 밀가루로 된 음식만 먹었으므로 쌀밥을 먹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오이카와가 그렇게 말하자 카게야마는 갑자기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오이카와의 아르헨티나 생활에 대해 물었다.

 

“별 거 없어. 통화했을 때 말한 게 전부야.”

“커튼은 바꾸셨어요?”

“무슨 커튼…. 아. 그 하얀색? 응. 바꿨어. 베이지색으로.”

 

이번에는 오이카와가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깐을 생각에 잠기더니 곧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한 달 전 작은 서랍장을 옮기려다가 찢어먹은 커튼 얘기였다. 그냥 지나가 듯 얘기한 거였는데도 카게야마는 용케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오이카와 씨, 그 색깔 엄청 좋아하시네요. 옛날에도 베이지였잖아요.”

“그런가. 그냥 무난하잖아. 따뜻하고.”

“따뜻합니까?”

“어? 좀 그런 느낌 들지 않아?”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카게야마와 토론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싸움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오이카와도 더는 말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야기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주로 오이카와의 아르헨티나 생활과 카게야마의 일상이 번갈아 화제에 올랐다.

오이카와는 빵빵해진 배를 위아래로 쓸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계산을 마친 카게야마가 영수증을 지갑 안에 넣으며 오이카와의 뒤를 따라 나왔다. 이곳에서 카게야마의 집까지는 2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소화도 시킬 겸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남는 한 손으로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카게야마는 깜짝 놀라 오이카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오이카와 씨 얼굴에 구멍 난다. 오이카와가 키득키득 웃으며 카게야마와 눈을 마주쳤다. 카게야마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손으로 만지면 데이려나. 오이카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웃었다.

 

“집에 짐만 놓고 다시 나올 거죠? 저녁은 어떻게 하실래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말했다. 아무래도 오이카와가 온다고 여기저기 조사해본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연인이 기특해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방심하고 있던 카게야마가 다시 힘없이 오이카와 쪽으로 끌렸다. 이젠 포기한 모양인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 때 오이카와의 눈에, 본 적 없는 케이스가 들어왔다. 핸드폰을 처음 구매했을 때 대리점에서 준 투명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얼굴을 쑥, 앞으로 빼 핸드폰 케이스를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카게야마가 왜 그러냐며 오이카와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못 보던 케이스인 것 같아서.”

“아. 이거….”

“팬이 선물해줬어?”

 

오이카와가 앞으로 뺐던 고개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그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던 카게야마의 표정에 놀람이 한가득 담겼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걷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우뚝 선 카게야마를 따라 손을 잡고 있던 오이카와도 길가에 멈춰 섰다.

 

“그 사람이지? 원래 너한테 케이스 선물하려다가 너 피처폰인 거 알고 실망했던 사람.”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 다~ 사랑하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거지.”

 

불투명한 검은색 케이스는 슈바이덴 애들러스의 로고와 함께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 네 글자, 그리고 그의 현재 등번호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시중에서 파는 게 아닌 누군가가 직접 디자인해서 만든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거기까지 추리를 마치자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하나, 선 하나가 지나갔다. 카게야마의 인터뷰 영상에서 봤던 어떤 팬의 사연이었다.

설마 싶어 한 마디 던져봤더니 정답이었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얼굴이 그대로 놀람을 방출하고 있었다. 이렇게 얼굴에 다 드러나서야 나중에 사기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 귀엽다.

오이카와는 멈춰 선 김에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카게야마의 턱을 들어올렸다.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카게야마의 눈은 아직도 놀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이카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도 완전히 모르는 모양이었다.

무방비한 것도 귀엽네. 그렇게 생각한 오이카와의 입술이 카게야마의 콧잔등에 떨어졌다. 쪽,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나자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카게야마가 몸을 퍼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카게야마의 얼굴부터 목이 전부 빨갰다.

 

“오이카와 씨, 당신 대체… 원, 원래 안 그랬잖아요!”

“응. 근데 너도 대낮부터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커플들을 5년 넘게 봐봐. 거긴 키스가 인사야. 그리고 나 방금한 거 키스 아니야. 뽀뽀지.”

 

카게야마의 눈동자에서 청회색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오이카와에게 전해졌다.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이며 ‘뭐, 어때.’ 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양 옆으로 주택만 늘어져 있는 거리였다. 어쩌면 그 집에 있는 누군가는 오이카와가 대낮부터 벌인 애정행각을 우연찮게 목격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오이카와는 상관없었다. 반면, 카게야마는 상당히 상관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나온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오이카와의 애정행각 자체에 대한 부끄러움일 가능성이 컸다.

아직 제대로 된 키스도 안 했는데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니 솔직히 오이카와는 조금 당황했다. 돌이켜 보면 카게야마는 여태까지 스캔들 한 번 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오이카와가 알고 있는 한 학생 때도 카게야마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새빨개진 얼굴을 한 카게야마를 달랬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올해 안에 키스는 할 수 있으려나.

 

“잠깐…. 오이카와 씨, 말 돌리지 말구요. 정말 어떻게 아신 겁니까?”

“널 너무 사랑해서 신이 날 기특하게 생각했나봐.”

“네?”

“하늘에 있는 신이 말해줬어.”

 

아무리 카게야마라도 지금 오이카와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짓말인 것은 알 수 있었다. 카게야마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앞서나가는 오이카와의 뒤를 따랐다. 이번에는 손을 잡지 않은 채였다.

 

“헉! 토비오는 그런 경험 없어?”

“… 없는데요.”

“토비오, 나 별로 안 사랑하는구나!”

 

앞서가던 오이카와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말했다. 그리고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고, 입 가까이로 가져다 댄 손은 쓸데없이 길고 예뻤다. 뮤지컬을 하는 배우처럼 과장된 목소리가 카게야마는 어이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오이카와를 사랑하지 않는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 마냥 입만 뻐끔거렸다.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아, 아닙… 니다. 저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당신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뭐든 다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카게야마는 입 안에 사랑한다는 말을 넣을 수가 없었다.

 

“알아, 알아. 나 사랑하는 거. 그냥 장난 좀 쳐봤어.”

 

오이카와가 억지스러웠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카게야마는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자신의 소꿉친구였다면 오이카와가 과장된 액션을 취하려는 순간에 이미 오이카와의 목덜미를 내려치거나 해서 쓸데없는 만담이 시작하는 것을 막았을 터였다.

 

“… 토비오?”

 

오이카와가 장난을 친 이후로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게야마가 돌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 캐리어에서 손을 떼고 두 손으로 카게야마의 팔을 잡아 그를 지탱했다. 고개를 숙여 카게야마의 얼굴이 보이는 아래에서 그를 살펴보았다. 카게야마의 눈이 그대로 감겼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오이카와는 갑자기 쓰러진 카게야마를 안고 빠르게 핸드폰을 들었다. 병원이 근처에 있는 덕분에 구급차가 도착하기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구급 대원들은 들것에 카게야마를 올렸고 오이카와는 보호자를 자처하며 함께 올라탔다.

 

 



 



응급실에서 눈을 뜬 카게야마는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흐릿한 시야 속 저 멀리, 오이카와의 옆얼굴이 있었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흰 가운의 남자 뒤로 비슷한 복장의 남자 두 명이 더 서 있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깜빡이며 눈의 초점이 맞춰지고 나서야 그들이 의사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있는 곳은 병원일 터다. 카게야마는 이불 속에 있던 팔을 빼내 눈 위로 올렸다. 형광등에서 나오는 빛이 눈부셨다.

 

“환자 분, 괜찮으세요? 정신이 들어요?”

 

간호사로 보이는 여자가 카게야마의 시야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간호사가 그 등을 받쳐주었다. 머리가 복잡해진 것 말고는 다 괜찮았다. 고개를 드니 오이카와가 의사와 함께 뛰어오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얼굴 위로 쏟아진 감정을 마주하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오이카와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의 마음을 엿보기라도 했는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끊어내듯 의사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검사 결과 몸에 별 다른 이상이 없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오이카와는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을 수가 있느냐며 의사를 다그쳤다. 하지만 그도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므로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 때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코트자락을 잡았다. 그리고는 손에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부르자 그는 카게야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요즘 잠을 잘 못 잤는데,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 같아요. 전에도 병원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질 위험이 있다며 조심하라고 일러줬는데 제가 더 조심했어야 했나봅니다.”

“… 뭐? 영양실조?”

“음…. 그런 것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사실 여기서는 간단한 검사 밖에 못합니다. 좀 더 정밀한,”

“아뇨. 괜찮습니다.”

 

거짓을 묻힌 입술이 수려하게 열렸다가 닫혔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입을 뗀 순간부터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게야마가 영양실조일 리가 없었다. 몸이 자산인 현직 운동선수였다. 그리고 그런 운동선수 가운데에서도 자기관리라면 전문 트레이너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그런 그가 영양실조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카게야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의사와 간호사는 카게야마의 완고함에 져 순순히 물러났다. 침대 주위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떠나가자 카게야마가 아래에서 꼬물꼬물,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검지를 그러쥐었다. 아기가 무언가를 손에 쥐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너… 뭐가 있는 거지? 너는 네가 왜 그러는지 알지?”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이렇게나 태연하고 차분할 수가 없다. 오이카와는 이제 어떤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고 또 숨겨야 할지를 몰라 아예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한 손은 여전히 카게야마에게 잡힌 채였다.

 

“일단 집으로 가요.”

 

오이카와의 어깨 너머로 보인 시계에서 시간을 읽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에게 매달렸다. 점심을 먹고 가게를 나왔을 때가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카게야마의 눈에 들어온 시간은 9시 20분. 즉, 카게야마는 적어도 여덟 시간은 꼬박 잠들었다는 얘기가 되었다.

병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턱을 괴고 창밖만 바라보는 시선은 차에서 내릴 때까지 단 한 번도 카게야마를 향하지 않았다. 아니, 내려서도 마찬가지였다. 오이카와는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오는 카게야마의 발만을 따라갔다.

그가 카게야마에게 다시 시선을 내어준 것은 끌고 다녔던 캐리어를 현관에 세워두고 소파에 앉았을 때였다. 카게야마는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명함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이카와가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고 카게야마는 순순히 그의 손바닥 위로 명함을 올렸다.

 

“수면 클리닉? 이게 뭐야.”

 

낯선 명칭을 입에 담은 오이카와가 그대로 시선을 올려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벌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마냥 서 있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하면 좋을까. 택시를 탔을 때부터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진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짚이는 구석은 있었다. 그리고 만약 카게야마의 추측이 맞는다면 지금 오이카와에게 설명해야 할 것은 과거의 불면不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은 너무나도 비겁했다.

그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탓도 아니었다. 그 밤, 카게야마는 깨달았다. 오이카와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들 수 없었던 밤에 이미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온전히 자신의 문제임을. 그러니, 오이카와의 탓이 아니고 그를 탓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일주일 전쯤부터 갑자기 잠들게 됐습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잠이 들어?”

“네. 그냥, 정말 갑자기요. 처음에는 휴식 시간에 잠깐 졸다가 그대로 네 시간을 잤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훈련 도중 잠들어버렸습니다.”

 

감독은 카게야마를 따로 불러냈다. 그 때도 카게야마는 과거의 불면은 숨긴 채 여태까지의 일을 털어놓았다. 코치와 두 시간을 상의한 끝에 카게야마에게는 한 달 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휴가는 표면적인 이유였다. 의사의 진단에 따라 휴가라 명명한 기간은 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었다.

카게야마는 반년 전 우시지마에게서 받은 명함을 떠올렸다. 선택지 중 하나로 고려하라던 명함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고르고 있는 감독과 코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 우시지마에게 추천 받은 병원이 있으니 그곳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자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은…, 오늘은 오이카와 씨가 오시니까 내일 가려고 했습니다.”

“… 나랑 가.”

“…… 네.”

 

괜찮을 줄 알았다. 여태까지 그랬으므로. 그런데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사랑을 입에 담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입천장에 달라붙은 감정이 너무 썼다. 쓰고, 아파서, 울고 싶은데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바깥으로 내보내지 못한 말과 눈물은 그대로 카게야마의 속에 쌓여만 갔다.

왜 괜찮으리라 여겼는지.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감았다. 또, 눈을 감아버렸다.

 

 



 



어제와 같은 자세로 택시 뒷좌석에 앉은 오이카와는 눈으로 낚시를 하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밖에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라고는 해도 아직 기온이 완전히 영하로 떨어질 시기는 아닌 탓에, 흩날리는 눈은 유리창에 닿자마자 물이 되어 사라졌다.

자꾸만 떠오르는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옆에 앉은 연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건만, 보지 않으니 더 불안하기만 하다. 오이카와는 뭐라도 좋으니 예민해진 신경을 누그러뜨려줄 것이 걸리기를 바라며 낚시하듯 던졌던 시선을 반쯤 돌렸다. 여전히 카게야마에게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의 새끼손가락만이 카게야마의 새끼손가락에 닿아, 마치 덮는 것처럼 엮을 뿐이었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오이카와의 옆얼굴을 배회하다가 거두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꼭 죄인 같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엮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연인의 동그란 머리통을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카게야마의 머리가 오이카와의 어깨 위로 안착한다.

마침 빨간불에 걸려 멈춘 차의 룸미러 너머로 택시 기사가 뒷좌석의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어제처럼 여기는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일본이라며 오이카와를 밀어냈을 카게야마의 손이 이번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카게야마가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자장가 같았다. 자면 안 되는데. 의사가 분명 수면 패턴을…. 카게야마는 속으로 의사의 처방 내용을 읊조렸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회상하기도 전에 잠들어버렸다.

오이카와가 꾸벅꾸벅 조는 카게야마의 눈 위로 손을 올렸다가, 떼어냈다. 그리고는 잠깐 사이에 잠들어버린 카게야마의 머리통을 더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그가 몇 개의 검사를 끝마친 카게야마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로부터 들은 첫 마디는 ‘기면증 초기 증상과 비슷하군요.’였다.

 

‘네? 기면증이요?’

‘아뇨. 현재 상황에서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오이카와가 몸을 앞으로 빼며 묻자 의사는 안경을 치켜세우고 그의 의문을 정정해주었다. 그는 가운 왼쪽 주머니에서 볼펜을 하나 빼들고 책상 위에 가지런히 꽂힌 메모지 한 장을 뽑았다. 노란 색 종이 위로 볼펜심이 바쁘게 움직였다.

일반인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 업무의 3할은 차지해버리는 탓에 의사는 비교적 빠르고 익숙하게 인간의 신체 모양을 그려냈다. 그리고는 볼펜의 색을 바꾸어 방금 카게야마가 검사한 신체 분위를 콕콕 골라 동그라미를 쳤다. 뇌로 추정되는 곳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몇 번이나 덧그려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면증은 아닙니다. 보호자 분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든 것뿐이지, 현재 상황으로서는 특정할 수 없는… 음, 일종의 수면장애로 보셔야 합니다.’

 

의사가 진단할 수 없는 병이라니. 오이카와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카게야마의 어깨를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눈치가 빠른 의사는 그것이 오이카와가 불만과 혼란을 표현하는 행동임을 알아차리곤 다시 안경을 치켜세웠다.

환자와 보호자는 의사가 확답을 주지 않으면 으레 불안해하며 곧 분노로까지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책상 위 차트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종이에 기록된 환자의 비고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운동선수라. 의사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의사가 차트에 두었던 시선을 오이카와에게로 옮겼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불안으로 경직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제법 차분했지만 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애매한 형태로 수면장애를 진단 받은 당사자인 카게야마의 표정은 고요했다.

인간은 너무 충격을 받으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의사는 카게야마의 태도가 그런 보편성에서 기인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방황을 멈춘 두 눈동자는 곧 다시 오이카와에게 닿았다.

 

‘큰 테두리부터 말씀드리면 수면 패턴을 규칙적으로 만드는 겁니다. 인위적으로, 약물을 사용해서 말이죠.’

 

하지만…. 말끝을 흐린 의사는 볼펜심을 집어넣은 채 차트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를 따라 오이카와의 시선이 차트 위를 머무른다. 운동선수.

 

‘아시겠지만 수면제는 선수들에게 안 좋습니다. 부정적인 영향이 많이 가죠. 가령, 반응 속도가 느려진다거나 인지장애가 생긴다거나 하는….’

‘약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고칠 수 없나요?’

‘약물은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방법 중 하나고, 환자 분 같은 경우는 최후의 방법으로 미뤄둬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중요한 건 수면 패턴을 일정하게 조절하는 겁니다.’

 

의사가 차트를 톡톡 두드리던 볼펜을 펜꽂이에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이 마주 쥐어진다. 책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몸은 완전히 카게야마를 향해 돌아갔다.

 

‘카게야마 씨. 이런 경우는 신체의 어딘가가 고장 나서일 수도 있지만, 사실 심리적인 이유가 큽니다.’

 

제 일인데도 마치 남 일처럼 오이카와와 의사의 대화를 방관하고 있던 카게야마가 제 이름이 호명되자, 그제야 의사와 눈을 마주했다. 오이카와의 시선 또한 카게야마의 옆얼굴로 향했다.

 

‘최근 몇 달 동안 뭔가 충격을 받으신 적 있으십니까? 여기서 충격이라고 함은… 음. 부정적인 것도 물론 포함이겠지만, 긍정적인 것도 포함됩니다.’

 

의사의 말을 따라 이것저것 생각하는 듯 보이던 카게야마는 결국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연스럽게 카게야마의 옆얼굴에 닿았던 오이카와의 시선도 반대 방향으로 틀어졌다. 어떤 문제든 원인을 알지 못하면 해결하기가 어렵다. 카게야마를 향해 돌아있던 의사가 의자를 뒤로 밀어 거리를 벌렸다.

그는 의사로서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처방은 모두 내주었다. 카게야마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의사는 표면적인 진단밖에는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먼저 진료실을 빠져나간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확인하곤 오이카와에게 소곤거렸다.

 

‘수면 패턴을 조절하라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신경 쓰면 더 악화될 수 있어요.’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곤 카게야마를 따라 진료실에서 멀어졌다. 데스크에서는 처방전 대신 수면 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들을 위한 치료 팸플릿을 받았다. 가지고 나온 것이라곤 지갑과 핸드폰 밖에 없는 카게야마 대신, 오이카와는 뭉텅이로 받아버린 팸플릿을 가방 속에 구겨 넣었다.

클리닉을 먼저 나온 카게야마는 햇살이 눈이 부신지 손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오이카와가 가방 속에서 팸플릿 하나를 꺼내 카게야마의 이마 근처에 가져다주었다. 그러라고 준 것이 아닐 텐데. 카게야마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가방 밖으로 팸플릿 끄트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것이 어쩐지 오이카와 답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헨젤마냥 웃음을 흘렸다. 과자 대신 흘린 웃음에서는 단 맛이 아니라 짠 맛이 났다.

 

‘겨울이라 그럽니다. 밤이 길어져서…, 그래서….’

 

오이카와는 뒤돌아 카게야마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뒷말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음을 알았다. 밤이 길어져 잠이 많아졌다고 할 참이었을 터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돼 뒷말을 삼켜버린 것이겠지. 오이카와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택시 왔다. 타자.’

 

속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가 오이카와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화가 났음을 알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다음부터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오이카와가 내보이는 표정의 의미는 제법 알기 쉬웠지만 카게야마는 딱, 거기까지밖에 알지 못했다.

그 표정이 무엇에서 기인했고 또,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는 카게야마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므로 제게는 오이카와의 기분을 풀어 줄 방도가 없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른 타라는 의미였다. 여전히 오이카와의 가방 밖으로 팸플릿 끄트머리가 어지럽게 삐져나와 있었다. 이번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룸미러 너머로 뒷좌석의 손님들을 보던 택시 기사가 조심스럽게 오이카와를 불렀다. 카게야마를 끌어안고 눈을 감고 있던 오이카와는 옅게 웃으며 지갑에서 천 엔짜리 지폐 세 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거스름돈을 준비하는 기사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카게야마를 양 손으로 안아들었다.

차 안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절부절 못하던 폼이 꼭 죄인 같더니, 죄인 중에서도 사형수였던 모양이다. 오이카와는 품 안에서 자고 있는 카게야마가 꼭 죽은 것 같아, 심장이 덜컹이는 기분을 1초마다 거듭해야 했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자꾸만 심장소리를 확인하고 싶어서, 카게야마를 제 품으로 더욱 끌어당기고 섬약한 고동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도망치는 것 같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하고, 또 무심결에 끌어안아 버린 탓이었다. 그 날 오이카와의 등을 끌어안은 것이 잘못이었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젓는다. 어떤 형태로든 벌 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오이카와의 소중함에 기대기로 했다.

 

‘최근 몇 달 동안 뭔가 충격을 받으신 적 있으십니까? 여기서 충격이라고 함은… 음. 부정적인 것도 물론 포함이겠지만, 긍정적인 것도 포함됩니다.’

 

의사는 카게야마에게서 가능한 한 쓸모 있는 대답을 끌어내기 위해 이것저것 예시를 들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말은 많았지만 카게야마에게는 어느 것 하나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의사의 얼굴에 고정시켰던 시선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아래로,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놓은 두 손이 동그랗게 말렸다. 하지만 곧 카게야마는 움켜쥐었던 두 손을 풀었다. 카게야마 스스로 불안을 느끼고 있다면 손바닥에 땀이 차고, 목은 뻣뻣해야 했으며 근육은 잔뜩 긴장해야 했다. 하지만 카게야마의 몸은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오히려 너무 가벼워서, 무게를 잃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불안하지 않단 말인가. 카게야마는 스스로 던진 물음 앞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이 기면嗜眠의 원인은 불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불안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이유가 틀리기 때문이었다. 카게야마는 제 몸 상태에 대해서는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몸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카게야마는 잠에 빠져들 때마다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는 듯 숨이 가빠왔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끌어안은 탓인지도 몰랐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영원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름다웠고, 카게야마는 이 사랑이 결코 아름답지 않음을 안다. 언젠가 오이카와의 마음은 제게서 멀어질 것이고, 어쩌면 자신이 먼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이 연애에, 또 사랑에 어김없이 끝은 찾아올 터다.

그러므로 이 추락에도 끝은 있었다. 카게야마는 등 뒤로 무언가가 닿았음을 느꼈다. 추락의 끝을 알리는 단단한 벽이었다.

카게야마는 무심코, 끌어안고 있던 감정을 놓아버렸다. 덩어리진 감정이 서서히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갔다. 깜짝 놀란 카게야마가 손을 뻗어보았지만 한 번 놓쳐버린 것은 다시 쥐어지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려, 추락의 끝까지 도달한 몸이 붕 뜨기 시작한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깨달았다. 깨달아 버렸다. 오이카와가 준 소중함이 제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깨달아 버렸다. 눈이 부시도록 선명하게.

불안, 기면, 수마, 그리고 소중함. 무게를 잃은 카게야마가 허공으로 도망친 감정에 손을 뻗었다. 한 번 놓쳐버린 것은 다시 쥐어지지 않음을, 알고 있어도 그는 그것이 잡힐 때까지 발버둥 쳤다.

평생 이 수마睡魔가 자신을 덮친다 해도 상관없다. 소중함의 무게가 몸을 짓누르고 다시 추락한다 할지라도, 상관없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제게 준 소중함을 포기할 수가 없다.

 

 





 

“뭔데요. 그 표정.”

“츳키… 그러지 마….”

 

츠키시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오므렸다. 반 발자국 뒤에 선 야마구치가 그런 친구의 옷을 당기며 그러지 말라 이른다. 선물로 가져 온 쇼핑백을 모두 츠키시마에게 맡긴 것이 정답이었다. 그는 친구의 양 손이 자유로웠다면 바로 팔짱을 끼고 이죽거렸을 것이라 확신했다.

원래부터 성격이 썩 유한 편은 아니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을 터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츠키시마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욕을 눌러 담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그들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한 것은 두 달 전부터였다. 츠키시마는 배구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깡그리 잊고도 남을 카게야마에게 확인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수화기 너머에서는 웬 낯선 남자가 ‘카게야마 토비오 핸드폰입니다.’ 하고 전화를 받았다.

 

‘… 저기. 카게야마 토비오 핸드폰 아닙니까?’

 

카게야마가 올해 여름 낡은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번호까지 바뀌진 않았을 터다. 그러므로 잘못 걸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음성은 분명 카게야마가 아니었다.

 

‘[음. 맞는데. 토비오는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어서. 무슨 일이야, 안경 군?]’

‘뭡니까, 당신 누군데….’

 

낯선 음성이었지만 분명 들은 기억이 있었다. 츠키시마는 순간 제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인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앉아있던 야마구치도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이 왜? 지금 아르헨티나에 있지 않나?

 

‘오이카와 토오루 씨입니까?’

‘[응. 그런데.]’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고 있다던 사람이 카게야마의 핸드폰을 대신 받은 것도, 그의 말 중 ‘토비오는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어서.’라는 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츠키시마는 뒤이어진 말에 하마터면 들고 있던 핸드폰을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관계, 그리고 현재 카게야마의 상태. 츠키시마는 오이카와와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테이블에 얼굴을 묻듯 엎어졌다. 아직 상황을 모르는 야마구치가 친구가 보이는 드문 행동에 당황하여 손발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그리고 곧, 그도 츠키시마의 옆에서 친구를 따라 테이블에 엎어졌다.

 

“뭐긴 뭐야. 환영한다는 얼굴이지.”

“집주인도 아니면서.”

“츳키…. 그러지 말라니까….”

“쯧.”

 

츠키시마가 혀를 차며 가지고 온 쇼핑백을 소파 위와 아래에 두었다. 오이카와를 쌩, 하고 지나가는 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낸다. 야마구치가 대신 고개를 까딱이며 사과했다.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하며 숨을 내뱉듯 웃었다.

 

“저녁 다 차려놨으니까 먹자.”

 

오이카와가 윤기 흐르는 안색으로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번에도 츠키시마는 혀를 차려고 했지만 야마구치에 의해 저지되었다. 저 인간은 애인이 기면증이라는데 왜 이렇게 안색이 좋아? 츠키시마는 혀를 차는 것 대신 오이카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몇 초 동안 오이카와의 얼굴에 머무른 시선은 곧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 카게야마를 향했다. 냄비를 식탁으로 옮기기 위해 주방으로 간 오이카와의 뒷모습에 카게야마의 시선이 꽂혀 있었다. 츠키시마의 눈썹이 씰룩거린다.

옆에서 야마구치가 옷을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츠키시마는 소꿉친구가 약하게 고개를 젓자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알고 있어.’라고 말했다.

식탁 가운데에 먹기 좋게 끓인 전골이 올려졌다. 밖에서 먹기로 한 약속이 카게야마의 집으로 바뀌면서 갑자기 만들게 된 것치고는 제법 냄새가 향긋하다. 가장 먼저 맛에 대한 평가를 내린 것은 야마구치였다. 그냥 하는 인사 치례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맛있네요.’에 오이카와가 미소 지었다.

 

“츠키시마 군은 어때? 입에 맞아?”

“네. 맛있네요.”

“오이카와 씨가 만들었어.”

“알아. 제왕님 이런 거 만들 줄 모르잖아.”

 

츠키시마의 이죽거림에 카게야마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 또 시작이다. 야마구치가 익숙한 듯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원래는 밖에서 먹을 예정이었는데. 괜히 수고스럽게 했네요.”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오이카와 씨가 계셔서 다행이에요..”

“꼭 애인 자랑을 해야겠어?”

“뭐? 내가 언제.”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제왕님은 언제부터 팔불출이 되셨나.”

 

둘씩 짝지어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하는 탓에 식탁 위가 금방 어수선해졌다. 말이 형태를 갖고 있었다면 분명 음식 위를 덮어 보이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 말이 없는 편에 속하던 카게야마도 츠키시마가 시비를 걸어오면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옛날에는 한 순간 입을 꾹 다물기도 하더니 이제는 제법 요령이라도 생겼는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다른 것에도 요령이 생기면 좋으련만. 오이카와와의 대화를 비집고 들어오는 사운드에 야마구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멱살을 잡고 주먹질만 않을 뿐이지, 영락없는 유치원생들의 싸움이었다. 무려 1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이 영양가 없는 싸움의 중재를 맡아온 야마구치는 이제 슬슬 두 사람을 말려야겠다 생각해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옛날부터 대왕님은 대단하다는 둥, 히나타랑 떠들더니. 그 때부터 대왕님 좋아한 거야? 와. 질기다, 질겨.”

“그 때는…!”

 

카게야마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현기증이라도 난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모양새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츠키시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게야마에게로 향했다. 오이카와는 다가오는 츠키시마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의미였다. 분하게도 츠키시마는 저들보다 익숙하게 카게야마를 대하는 오이카와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휘청거리는 카게야마의 이마와 뒷목을 잡았다. 카게야마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그 속도는 점점 느려져 오이카와의 손이 두 눈을 덮었을 때, 카게야마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츠키시마는 그가 동화 속에 나오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왕자는 오이카와란 말인가.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공주를 잠들게 하는 왕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키시마는 오이카와 이외의 왕자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다리를 받쳐 들었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등을 받쳐 들어 안아 올린다. 그 모습이 퍽 익숙해서 츠키시마는 걸음을 돌려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자신은 물론, 야마구치도. 만약 이 자리에 히나타나 스가와라, 혹은 다른 이가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들은 지금의 카게야마를 감당할 수가 없다.

 

‘야. 너는 감당할 수 없는 게 들이닥치면 어떻게 할 거냐?’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츠키시마의 집을 찾은 카게야마는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대뜸 그렇게 물었다. 부스스한 머리로 현관문을 연 츠키시마는 황당해하며 손으로 얼굴 전체를 쓸었다. 알람이 울리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7시도 되지 않은 시각일 터였다.

그래도 손님인지라 츠키시마는 차라도 대접하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이 황당함을 어떻게든 처리해 볼 작정이었다. 카게야마가 사람을 황당하게 만드는 일이야 드문 일이 아니었으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만 있다면 어떻게든 침착해질 수 있었다.

문제는 카게야마가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한 것이 불과 1분 전이었다. 카게야마가 주전자 앞에 선 츠키시마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감당할 수 없는 게 들이닥치면 어떻게 할 거냐니까.’

 

오늘 아침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은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어떻게든 츠키시마에게서 그 질문의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식으로 굴고 있는 것이다. 츠키시마가 이번에는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몰라. 보통 사람들은 지레 겁먹고 도망치겠지.’

‘보통 사람은 그래?’

‘… 아, 진짜. 아침부터 찾아와서 뭐하자는 건데.’

‘대답이나 해.’

‘모른다니까. 도망치는 게 싫으면 뭐,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를 하겠지.’

 

결국 신경질을 내고 만 츠키시마가 길게 숨을 뱉었다. 여유를 찾고자 시간이 필요할 때는 기다리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다가와서 같은 질문을 퍼붓더니, 어디 한 번 공격해 와라 하고 가드를 세우면 얌전해진다. 츠키시마는 자신의 분노 게이지가 한계치까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알았다.’

‘뭐? 뭐가 알았다는 거야. 잠깐, 제왕…. 카게야마!’

 

카게야마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얌전하게 있더니 돌연 ‘알겠다.’며 츠키시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찾아왔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러운 퇴장이었다. 뱉은 숨 대신 또 한 번의 황당함을 들이마신 츠키시마가 카게야마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물론 카게야마는 잡히지 않았고, 남은 것은 펄펄 끓고 있는 물뿐이었다.

 

 



 



카게야마를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 간 오이카와가 다시 거실로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분이 조금 더 지나서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멋쩍게 웃으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마저 먹자. 그렇게 말하는 오이카와의 입술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츠키시마는 위화감을 느꼈다. 야마구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눈꼬리가 가늘어져 있다.

마지못해 오이카와를 따라 젓가락을 이리저리 옮기기는 했지만 츠키시마와 야마구치는 입에 어떤 음식이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오늘 아침, 그들이 테이블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야마구치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려고 했지만 흔들리는 동공이 불안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인터넷에 ‘수면 장애’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시도해봤지만 이렇다 할 정보는 없었다. 너무 애매하고 광범위해서 오히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카게야마가 몇 번 휘청거리더니 오이카와의 부축을 받자마자 눈을 감아버리는 장면을 보기 전까지, 그들은 카게야마의 상태보다 그가 오이카와와 교제 중이라는 사실에 더 무게를 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서 그런 꼴을 봐버렸다. 봐버린 것이다. 츠키시마는 명치 아래가 더부룩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아침처럼, 신경질이 났다.

 

“굉장히 익숙해 보이던데. 자주 이럽니까?”

 

오이카와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인다. 그의 시선은 젓가락을 향하려고 하는 음식에 머물렀고, 그것은 식사 중 지극히 당연한 처리였지만 츠키시마는 그가 제 눈을 피하고 있음을 알았다.

 

“진단을 받은 건 어제 아침이야. 오는 길에 한 번 잠들었고, 저녁에 깨서 밥 먹고 또 바로 잠들었어.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먹기 전까지 두 번을 깼다가 잠들었고, 낮에 한 번, 그리고 지금 또 한 번.”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은 것은 야마구치였다. 그는 멍한 시선으로 오이카와의 입술 끝을 응시했다가 곧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츠키시마는 양 손으로 두 눈을 꾹꾹 짓눌렀다. 오이카와가 쓰게 웃었다. 살갗이 따끔거렸다.

 

“오이카와 씨는 괜찮으세요?”

 

그렇게 물은 것은 야마구치였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부자연스럽게 허공을 떠돌던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완전히 내려놓았다. 괜찮으냐 물으면 당연히 괜찮을 리 없다 대답할 수밖에 없다. 연인이 원인도 모르는 병을 진단 받았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않나. 아니, 애초에 저것이 병이라고 할 수는 있나.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데 그 가운데에서 카게야마만이 태연했다.

아니. 카게야마도 태연하지는 않았다. 입술을 오므리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는지에 온 집중을 쏟는 사람처럼 굴었다. 카게야마는 지금 제 몸 상태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 같았다. 그는 분명 오이카와에게 매달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오이카와는 그렇다고 느낄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제게서 도망치려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안 괜찮은데, 안 괜찮으면 안 되니까 그냥 버티는 거야.”

 

본래 귀국한 날 카게야마 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본가로 가기로 했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위해 예정을 변경했다. 그를 혼자 둘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알겠노라 대답했지만,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곁에 머물러야 했다.

카게야마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질투가 조금 나기는 해도 어찌 되었든 제 연인은 여러 군데에서 사랑 받고 있었으므로 꼭 자신이 아니어도 된다. 그런 생각은 1초도 안 되어 부서졌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오만에서 기인한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죄책감을 닮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수마에 좀먹히고 있는 지금이 꼭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오기를 부리고, 허세를 드러내서라도 카게야마의 앞에서, 옆에서, 또 뒤에 머무르고 싶었다.

각자 밥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누구도 다시 젓가락을 드는 일은 없었다. 먼저 일어난 사람은 야마구치였다. 그를 따라 츠키시마가 일어나고, 또 오이카와가 일어나 손님들을 배웅했다. 맛있게 잘 먹었다, 다음에는 밖에서 만나자, 잘 가라는 형식적인 인사말이 교차했다. 오이카와는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그 순간까지 웃었다.

 

“야마구치.”

 

복도 끝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츠키시마가 입을 열었다. 전등이 사람의 접근을 감지해 오렌지빛 불을 내뿜었다. 먼저 계단에 발을 내린 야마구치가 뒤돌아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전등의 불빛 때문인지 츠키시마의 낯빛이 조금 화난 것처럼도 보였다.

 

“너는 감당할 수 없는 게 들이닥치면 어떻게 할 거냐.”

“… 카게야마 얘기야?”

 

제 오랜 소꿉친구는 농담도 영양가 있는 것으로만 골라 했으므로, 야마구치는 그의 말이 카게야마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잠에 들었다. 그것도 어떤 징후도 없이 갑자기, 바로, 푹. 그게 불과 30분 전의 일이었다.

츠키시마는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자신을 괴롭혔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그 때는 아침부터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통 영문 모를 것이라 화부터 난 탓에 더 캐물을 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때 억지로라도 붙잡고 캐물었어야 했을지 모른다. 한 번 놓쳤다면 다시 쫓아가서 팔이든 어깨든 잡고, 물어봤어야 했다. 감당할 수 없는 게 무엇이냐고. 너 무슨 일 있느냐고.

 

“아니. 보통 사람들 얘기.”

“글쎄. 도망가려고 하거나….”

 

야마구치가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받아들이지 않을까. 어쩔 수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다. 어쩔 도리가 없다. 츠키시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전등이 오렌지빛 불을 꺼뜨렸다. 계단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깜깜한데다가 말소리까지 들리지 않자 정말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츠키시마는 계단에 발을 내려 멈춰 선 야마구치를 앞질러 내려갔다. 그 날 자신은 카게야마에게 도망칠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신은 분명 그랬을 터이므로. 웃기는 일이었다. 조언을 구하러 왔으면 조언대로 굴 노력이라도 하던가. 츠키시마가 입술에 이를 박았다.

도와주고 싶어도 거기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다면 자신들은 어떤 영역에도 감히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옛날부터 그랬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 사이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이 존재했다.

야마구치가 츠키시마의 뒤를 따랐다. 이젠 정말로 아무도 없는 계단이 칠흑으로 물들었다.

 

 



 



어릴 적 카게야마가 누나와 함께 봤던 영화는 대체로 로맨스 장르였다. 카게야마도 그의 누나도 로맨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TV를 틀면 대체로 그런 영화만 나왔기 때문에 남매는 어쩔 수 없이 관심도 없는 영화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하루는 누나가 하품 끝에 달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운명 같은 사랑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현실에 없기 때문에 저렇게나 아름답게 비춰지는 것이라고. 카게야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씰룩이자 그녀는 아직 너에겐 이르다며 뒷말을 얼버무렸다.

카게야마는 그 때의 누나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도 운명 같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운명도 몰랐고 사랑은 더욱 몰랐으므로 두 단어의 결합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늘 시선 끝에 머무르던 사람을 자각했을 때도 운명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지극히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언제 어디서든, 나는 저 사람을 눈앞에 두면 반했겠구나. 그런 생각만이 카게야마의 사랑 한 구석을 차지했다.

오이카와에게 미움 받은 세월을 말해보라고 하면, 카게야마는 할 말이 많았지만 동시에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데도 사랑했다. 잠들 수 없는 밤에도 그를 사랑했고, 깨어 있을 수 없는 낮에도 그를 사랑했다. 지극히 당연하게. 그가 오이카와 토오루였으므로.

 

‘[할 말은 없고. 갑자기, 보고 싶어서. 그냥. 그래서.]’

 

어느 날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그 때 카게야마는 정해진 양의 훈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주머니에서 연속적으로 진동이 울려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음을 알았다. 작은 화면 위로 나타날 리 없는 이름이 떠올랐다.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정직하게 이름 세 글자만으로 저장된 그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보고 싶다’ 였다. 카게야마는 어릴 적 누나와 함께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보고 싶다는 대사를 뱉은 여자의 눈은 애틋했고 사랑스러웠다. 다른 영화에서도 보고 싶다는 말은, 그 말은 항상 애틋했다. 그래서 어린 카게야마는 보고 싶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당신, 지금 어떤 눈을 하고 있나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오이카와가 먼저 연결을 끊지 않았더라면 카게야마는 분명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혹시, 로 시작하는 기대가 카게야마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만약에혹시는 카게야마를 잠 못 들게 했다.

 

 



 



눈이 부시다. 카게야마는 정신이 든 순간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눈알을 굴리자 오이카와가 자신을 안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몽롱한 기분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오이카와의 이마를 콕, 찔렀다. 그리고는 붓으로 선을 그리듯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조각상을 탐하는 것 같았다.

과감한 접촉에 잠이 깼는지 오이카와가 웅얼거리며 카게야마의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막 일어난 듯한 낮은 목소리가 카게야마의 위로 한 글자 한 글자 떨어졌다.

 

“깼어?”

“네.”

 

카게야마가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침대에 손을 짚었다. 몸이 뻐근했지만 아침이니 일어나야 했다. 의사가 말하기를 수면 패턴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었으므로. 카게야마는 아침이 되면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자는 패턴을 고정시켜야 했다. 언제까지 오이카와에게 불안을 흘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곧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실눈을 뜨고 카게야마가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오이카와가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끌어당긴 탓도 있었지만 카게야마가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 것이 더 먼저였다. 그는 처음 그 자세로 카게야마를 안았다.

 

“밤이야. 자도 돼. 억지로 일어나려고 하지 마.”

 

오이카와가 한 손으로 카게야마의 동그란 뒤통수를 강하게 눌렀다. 뒤통수를 감싼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뒷목에 닿았고, 이번에는 제법 다정하게 어루만져주었다.

창문 너머로 새소리가 났다. 짹짹거리는 울림은 분명 아침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오이카와는 다른 소리를 했다. 오이카와를 담은 청회색 눈동자에 혼란이 깃들었다.

 

“아직 깜깜하잖아. 날 밝으면 깨워줄게.”

 

정말이었다. 분명히 새소리는 들리는데 방 안은 깜깜했다. 평소보다 더 깜깜한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이카와 얼굴 너머로 눈동자를 굴리던 카게야마는 그제야 제 방에 못 보던 것이 생겼음을 알았다.

 

“… 커튼.”

“아, 저거. 멋대로 바꿨어. 미안.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너 하루 종일 잤잖아. 잠깐 일어나서는 물 먹고 다시 잤고. 기억 안 나지? 아무튼 그래서 말 못했어.”

 

츠키시마와 야마구치가 저녁을 먹고 간 다음 날 카게야마는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잤다. 그가 저녁쯤에 일어나 목이 마르다며 물을 찾지 않았더라면 오이카와는 구급차를 불렀을 것이다.

오이카와에게는 요 며칠 사이에 이상한 습관 하나가 생겼다. 카게야마가 7시간 이상을 내리 잠만 자면 5분에 한 번씩 그의 왼쪽 가슴에 귀를 갖다 대는 것이다. 심장이 잘 뛰고 있는지, 죽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도 불안해지면 그는 신장 188cm의 건장한 남자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아이처럼 끌어안았다. 어제는 그 상태에서 책도 읽고 스마트폰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원하기만 한다면, 낮도 밤도 전부 되어줄 작정이었다.

인터넷에서 주문한 암막커튼이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쯤이었다. 시리얼로 늦은 점심 식사를 끝마친 오이카와는 상자를 뜯어 제 손으로 직접 커튼을 교체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제법 시끄러울 법도 한데 침대 위에 누워있는 카게야마의 자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고요했다.

밖은 이렇게나 눈이 부신데, 카게야마의 위에만 영원하고도 무수한 밤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침대 곁에 쭈그려 앉아 침대에 턱을 괴었다.

 

‘토비오. 너,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빠져드는 것이 꼭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져 쓰라렸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상처를 입은 것처럼 아프고 쓰라려서 눈물이 나왔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은 어느새 동그랗게 말려 주먹을 쥐고 있었다. 무언가를 참아내려는 것처럼.

그는 혹시라도 카게야마가 무서워하는 것이 자신일까, 그것만이 두려워 울었다. 자신이 무서워서 꿈속으로 도망치는 것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미안해. 그래도 난 너랑 헤어질 생각 없어.’

 

그렇다 할지라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이제 네 청회색 눈동자 속 동경도, 그 안의 겨울도 사랑한다.

 

“정말이야. 그 날 이후로 내가 말했던 것 중에 거짓말이었던 건 한 개도 없어.”

 

오이카와는 어느새 품안에서 잠든 카게야마의 뒷목을 매만졌다. 몇 달 사이 자란 앞머리가 옆으로 흘려 내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줄곧 졸린 척을 했지만 잠은 진즉에 깨어있었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카게야마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카게야마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밤 11시쯤이었다. 커튼이 열린 창밖은 벌써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데, 화면 위로 선명하게 PM이라는 글자가 자리 잡고 있다. 잠에서 깼을 때 곁에 오이카와가 없는 것은 요 며칠 사이에 꽤 오랜만이었다.

 

“…… 하.”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오이카와가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푹 숙인 상태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뜨거운 열기가 얼굴과 손바닥 사이를 배회했다. 그 열이 얼굴에서 나온 것인지, 손바닥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곧 카게야마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오이카와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 때 어제 오이카와가 교체했다는 암막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 커튼은 너무 새까매서 그 이름에 걸맞게 정말로 어떤 빛도 막아줄 것만 같았다.

왜…. 카게야마의 안에서 물음이 피어났다. 오이카와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였을 리는 없다. 반 년 전 카게야마의 손을 붙잡고 핸드폰을 바꾸러 갔던 것과는 달랐다. 카게야마가 입술을 짓씹었다. 울고 싶었다. 오이카와의 품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었다.

문득, 오이카와의 이름을 부르며 잠든 날이 떠올랐다. 그 때가 아니면 다시는 못 부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몇 번이나 같은 이름을 되뇌면서 잠들었다. 부르면서도 애가 타 몸을 한껏 옹송그렸다.

오이카와가 보고 싶어서였다. 오이카와를 사랑해서였다. 그저 오이카와 토오루의 이름만 불렀을 뿐이었지만 카게야마는 그의 이름이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보고 싶어 했던 밤처럼, 카게야마도 어느 날 밤에 오이카와가 지독하게도 보고 싶었다.

그 마음 그대로를 오이카와에게 전할 수 있다면 좋았을 터다. 당신을 사랑해서 잠들 수 없는 밤에도, 깰 수 없는 낮에도 당신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고.

이불을 그러쥔 카게야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 안에 꼼짝없이 갇힌 이불 주위가 사정없이 주름졌다. 붉어진 손등 위로는 눈물이 떨어졌다. 행여나 밖에 있을 오이카와에게 소리가 새어나갈까 카게야마는 입술을 짓씹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의 가장 밑바닥에도 분명 오이카와가 말하는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를 사랑한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그에게 사랑한다, 또 보고 싶다 말할 수 없었다. 이유는 복잡했고, 하지만 단순했다.

당신은 내게 무엇도 주고 싶지 않아했고, 또 무엇도 받고 싶지 않아했으므로.

 

“… 그래도 나는 당신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평생 수마에 짓눌린다 할지라도, 평생을 사랑하기로 했다. 오이카와가 준 소중함을, 그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기꺼이 들이마시기로 했다.

당신이 내게 주었기 때문에.

카게야마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손등으로 쓸었다. 오이카와가 봤다면 뭐하는 짓이냐며 당장 그만두게 하고 티슈를 가져와 두 눈가를 두드려줬을 터다. 오이카와는 다정하므로. 그 다정함이 카게야마에게 사랑을 가르쳤고, 카게야마를 불안하게 한다.

그는 침대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 오이카와를 붙잡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이나, 늘 보고 싶었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무언가라도,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발이 바닥을 내딛을 때마다 무거웠다. 그럼에도 카게야마는 방 문 앞에 도달했고 문고리를 잡았다. 거실이나 주방, 이 집 어딘가에 있을 오이카와를 찾아 붙잡아야 했다. 그것이 추하게 매달리는 꼴이 될지라도.

 

“…── 응, 이와쨩.”

 

그 때 얇은 문 너머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와이즈미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다정했지만 평소보다 기운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것이 모두 제 탓임을 알았다. 역시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내 사랑이 너무 무겁다, 이와쨩. 토비오가 도망가면 어쩌지.”

 

문고리를 돌리려던 카게야마의 손이 멈추었다. 겨우 막은 눈물샘이 다시 차올랐다. 이번에는 아무리 입술을 짓씹어도 소리가 새어나갈 것 같았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가 오이카와에게 과거의 불면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오이카와를 탓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비겁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잠들 수 없는 밤에는 늘 오이카와가 있었지만, 오이카와 때문에 잠들 수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그저 그뿐이었는데. 그저 그뿐이었는데.

카게야마는 하염없이 뒷걸음질만 치다가 침대 다리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무게가 가해진 침대가 두어 번 출렁인다.

오이카와를 탓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도리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카게야마는 지금 이 순간, 오이카와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주제넘게도 그랬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뒷목을 어루만져주며, 이마에 입을 맞춰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 토비오? 일어났어?”

 

통화를 마친 오이카와가 핸드폰을 카디건 주머니 속에 넣으며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재빨리 얼굴을 가려 오이카와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다행히 방 안은 어두웠고 오이카와도 불을 켜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침대 옆 스탠드의 불빛을 켰다. 오렌지빛 불빛이 카게야마의 옆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네.”

“왜 그래, 어디 아파? 손 좀 치워 봐.”

“…… 아니에요. 그냥 좀… 자고 일어났더니 눈이 부셔서….”

“그래?”

 

오이카와는 제 얼굴을 가린 카게야마의 손을 치우려고 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그나저나 너 배 안 고파? 몇 시간을 잔 거야. 뭐라도 만들어 줄까?”

“오이카와 씨.”

“응.”

 

카게야마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힘없는 동작이었지만 거기에는 결의가 묻어있었다. 이제 이대로 고개를 들면 오이카와에게 빨개진 눈가와 아직도 차오르는 눈물을 전부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눈물의 이유도 말해야 할 것이다.

 

“잠깐만. 잠깐만, 토비오.”

 

그 때 오이카와가 고개 숙인 카게야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카게야마가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오이카와의 표정이 보일 리 없었는데도 카게야마는 그가 눈꼬리를 접어 웃고 있는 것을 알았다.

카게야마의 생각대로 소리 없이 미소 지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두 손을 뻗어, 그대로 그를 안았다.

 

“생일 축하해.”

 

다정함에 젖은 목소리가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내렸다.

 

“사랑해.”

 

비처럼, 천둥처럼 내리쳤다.

아아. 아아. 카게야마는 팔을 올려 오이카와의 허리를 잡았다. 허리 끝만을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던 손은 곧 더 넓게 퍼져 그의 허리를 전부 끌어안았다.

아래에서 카게야마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 재빨리 몸을 낮췄다. 한쪽 무릎을 꿇어 침대에 앉아 있는 카게야마와 눈높이를 맞춘다. 고개 숙인 얼굴이, 눈물로 얼룩지다 못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오이카와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시선이 분주해졌다.

 

“…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무엇도 주고 싶지 않았고, 또 무엇도 받고 싶지 않았던 당신이 한 말 때문에. 나는 어느 날이 되면 어김없이 불면을 겪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를, 카게야마는 눈물 속에 담아 흘려보냈다. 눈물이 방울방울, 그의 손등 위로 떨어지면 목소리도 함께 떨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두 손을 감쌌다. 그래서 카게야마의 눈물은 그의 손등이 아닌 오이카와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눈물을 쏟아낸 몸이 차가워졌을 것 같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끌어안기로 했다. 팔을 뻗고 이불을 펄럭였더니 카게야마가 조금 웃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오이카와도 그를 따라 조금, 아주 조금 웃었다.

오이카와의 손이 카게야마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뒷머리를 받쳤다. 뒷머리를 받친 그 손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힘이 들어갔다. 카게야마의 머리가 힘없이 오이카와에게로 끌려갔다. 마지막 눈물 끝에 매달린 신음이 오이카와의 가슴에 떨어졌다.

소중하니까 무거운 것인지, 무겁기에 소중해졌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카게야마의 이야기는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로부터 도망쳤던 나날을 상기시켰다. 소중한 줄도 모르고, 무거워 그저 뒤돌아 멀리 멀리 가려고만 했던 과거가 하나씩 하나씩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는 안다. 자신에게 카게야마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소중함이 가진 무거움이 얼마나 애틋한지도.

 

“오이카와 씨가 절 싫어하는 거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알았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만 유별났고, 그 유별남의 성질을 말해보자면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카게야마가 다가올 때면 오이카와는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먼저 나서서 괴롭히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먼저 친절하게 대해주지도 않았다.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늘 카게야마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이 못내 끔찍하던 시절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긴 이야기를 마치며 오이카와의 잘못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행여나 오이카와가 죄책감 따위에 시달릴까 덧붙여진 말에서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모든 것이 제 탓 같았다. 아니, 제 탓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속죄할 시간을 줘.”

“당신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뭘 어떻게 할까.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장난스러운 말이었지만 말투 자체는 진지했다. 카게야마가 하늘에 뜬 별을 따다 달라고 하면 정말로 따 줄 것 같은 기세였다. 간절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카게야마의 등을 끌어안은 오이카와의 팔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카게야마는 조금 숨이 막혔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변명처럼 들릴 거고,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 때 정말로 널 싫어한 건 아니야.”

“이젠 알아요. 당신이 요령 없는 거.”

“… 맞지만…. 맞는 말이지만 너한테 들으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하다.”

 

카게야마의 웃음이 오이카와의 품속에서 부서진다. 오이카와는 부서진 웃음 조각도 흩어지는 것이 아쉬워 더,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오이카와의 냄새가 나서, 카게야마는 그가 바로 곁에 있음을 새삼 자각했다.

아주 살짝, 그리고 아주 잠깐 닿는 것만이라도 허락되기를 바랐지만 오이카와는 그것조차 허락해주지 않았다. 카게야마를 앞에 두고 말하는 것조차 꺼려하던 사람이었다. 오이카와 스스로도 몰랐던 진심과는 상관없이, 그 시절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불면이자 상처였고, 눈부신 한낮의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품속에서 팔을 쏙 뺐다. 그가 벗어나려고 하는 걸까봐,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그리는 시선을 따라가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목에 두른 팔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듯 보였던 오이카와도 곧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카게야마가 이끄는 대로 끌려와주었다. 나중에는 카게야마가 끌어당기지 않아도 오이카와 스스로 얼굴을 바짝 갖다 대었다. 덕분에 그의 목에 두른 팔과 뒷목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카게야마가 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닿기만 할 뿐인 키스였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키스가 아닌 뽀뽀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입술이 꼭 토라진 어린아이 같아서 카게야마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졌다.

 

“그럼 할까요, 키스.”

 

도발이었다. 그것도 아주 명백한 도발이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무서워 할 이유도, 거절할 변명도 없어 사랑스러운 연인의 도발에 올라타기로 했다. 도발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듯 카게야마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잡았다. 카게야마의 뒷목을 더 끌어당겨 숨결조차 먹어치울 것처럼 굴었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위로 입술이 부딪치는 소리가 쌓아 올려졌다. 밀착된 가슴에서는 두근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실없는 걱정이 혀끝에 매달렸지만 오이카와가 그마저도 먹어치워 버리는 탓에 카게야마는 다시 키스에 집중했다.

 

“… 읏, 이제 그, 만….”

 

도발해놓고 먼저 백기를 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속 입술을 부딪치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슬쩍 밀어냈다. 오이카와가 살짝 턱을 숙였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다물고 내려뜨린 시선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 이제 그만하고 자자. 더 했다가는 나도 못 버틸 것 같아.”

 

오이카와가 혀로 입술을 쓸며 말했다. 아직도 다갈색 눈동자는 아쉬움을 품고 있었지만, 말했던 것처럼 본능만 밀어붙였다가는 카게야마에게 몹쓸 짓이라도 해버릴 것 같았다.

 

“이제 겨우 눈물 멈추게 했는데 또 울릴 순 없잖아.”

 

뭐라고 말하려던 카게야마의 입술이 굳게 닫힌다. 오이카와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흘러내렸다. 그 표정이 어쩐지 짜증이 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아프라고 한 행동이었는데 오이카와는 키득거리기만 했다.

 

“알았어, 알았어. 장난 안 칠게. 진짜 자자.”

“… 아침 되면 저 깨워요, 알겠죠?”

“그래.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는 잘 수 있도록 해보자.”

 

이것으로 카게야마의 수면 장애가 나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카게야마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그는 오이카와가 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마법처럼, 그리고 또 주문처럼.

 

“오이카와 씨.”

“응.”

“눈부십니다.”

 

암막커튼은 쳐져 있었고 스탠드도 껐지만 카게야마는 여전히 눈이 부셨다. 오이카와의 품 안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도 여전히, 눈이 부셨다.

하늘로 발돋움하는 다리, 유연하게 꺾인 허리, 총알보다 빠른 팔, 그리고 굉음을 내며 체육관 바닥에 꽂힌 공.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오이카와는 찬란했고, 어떤 형태로라도 곁에 머물렀던 카게야마는 그 찬란함을 집어삼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집어삼켜지는 줄도 모르고, 너무 눈이 부셔 눈이 머는 줄도 모르고.

하지만 결국에는 그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었다. 집어삼켜지든, 눈이 멀어버리든, 수마에 빠지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할 터였다. 포기하기 위해 노력했던 무수한 밤이 스러졌다. 카게야마는 두 눈을 감고 오이카와에게 기대었다.

이 밤, 눈부신 밤에 잠들었다.








쓰고 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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