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요약 NBA 선수 송태섭 x 혹 달린 이혼남 정대만. 인터하이 이후 8년 뒤 재회한 두사람의 짝사랑 해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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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이 캠코더를 들고 다니는 모습에 저까지 바람이 불어 장난감 매대 한켠에 걸려 있던 일회용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계산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아라와 대만이 실갱이 하는 소리에 고개가 먼저 반응했다.


"정아라, 안 돼."


대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거의 바닥에 누울 기세인 아라는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인형을 가리키며 칭얼거리고 있었다.


"아빠, 예뻐요. 네?"


아빠가 예쁘다는 건지, 예쁘니까 갖고 싶다는 건지 다급하게 채근하는 아라의 목소리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계산을 마치고 대만의 곁에 다가서자 곤란함이 덧 씐 눈이 저를 향했다.


"아 이러는 애 아닌데 왜 이러지.."


작게 중얼거리는 말투가 당혹감에 젖어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왠지 저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오직 놀이공원 유니폼을 입은 직원만이 이런 광경이 비일비재 한지 이쪽으론 관심도 주지 않고 주변에 몰려든 아이들을 장난감으로 현혹하고 있었다. 그 무리 옆에 눈에 띄게 잘난 부녀는 아직도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다. 대만은 쭈그려 앉아 기울어진 아이 몸을 바로 서 있도록 하고 눈을 마주치며 조근조근 타이르지만 아라의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없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프로펠러 머리띠를 쓰고 있는 직원이 손에 들린 비눗방울 총을 하늘로 겨누었다. 어스름한 석양을 반사하며 물방울들이 두둥실 떠오른다. 오, 저건 내가 갖고 싶은데. 오로라 빛을 담은 구체는 구름 다리 위를 지나던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아라 오늘 선물 받았잖아. 안 돼."

"싫어!"


사실 태섭은 그동안 지켜본 대만의 씀씀이를 생각하면 그냥 사주고 끝내려나 싶어 지켜 보았다. 어설프게 남의 자식 일에 끼어들었다가 감정만 상할 것 같아 한발 물러나 있기도 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른 단호하게 안 된다고 거듭하는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는 없어."


결국 울음을 터지려는 듯이 입술 툭 튀어나온 아라의 얼굴이 울긋불긋 하다. 분명 떼쓰는 어린애를 설득하는 말인데 왜 제 속을 은근히 아프게 만드는 걸까.

아침엔 그렇게 죽고 못 사는 부녀더니.. 폭발하기 직전의 아라의 얼굴이 제 안의 유년 시절 어딘가를 쿡 건드렸다.

대만이 으레 하듯이 무릎을 굽혀 앉아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해져선 힉끄 히끅 딸꾹질 같은 소리를 폭폭 내뱉고 있었다.


"이건 아저씨가 생일 선물 해줄게."

"어?"

"어차피 따로 주려고 했는데 이런 거로 퉁쳐서 미안하네요."


대만이 놀라서 저를 본다. 말없이 마주 보자 무어라 하려고 벌어졌던 입이 꾹 다물린다. 나중에 한 소리 듣더라도 제가 듣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라야. 이거 꼭 갖고 싶어?"


인형을 꺼내서 아라 앞에 보여주자 물기 젖은 속눈썹이 도로록 따라온다. 콩알만한 콧구멍이 찡긋 움직이더니 팩 고개를 돌린다.


"싫어! 이거 싫어!"

"정아라!"


들어 본 적 없는 노성에 깜짝 놀라 고개를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라는 제 아빠를 놓치고 꿍 주저앉았다. 역광으로 어두워진 온기 없는 표정에 주변까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형.."


적막을 찢고 아이 울음소리가 퍼져나간다. 지나가다 발이 멈춘 사람들과 직원에게 죄송하다 허리를 숙이는 대만의 뒤에서 태섭은 아라를 달래 안아 들었다.







한번 제 품에 안긴 아라는 내려 놓지 말라고 투정을 부렸다. 흘러내린 엉덩이를 한번 고쳐 안고 뒤를 흘긋 보았다. 빈 유모차에 배낭을 태워놓고 뒤쫓아오던 뚱한 표정이 입을 열었다.


"야. 태섭이 아저씨 팔 아프다."

"저 괜찮아요."

"아 쫌 가만히 있어봐."


태섭은 대만의 말에 아라를 내려다 보았다. 눈물이 대롱 거리는 가는 속눈썹이 아랑곳 않고 앞에만 보고 있다. 누구 닮았는지 이제 그만 알려줘도 되는데.. 앙 다문 입매까지도 붕어빵 같다.


"정아라. 아빠 친구 팔 아프다고."


대답하지 않는 아이는 그냥 태섭 품에만 파고들었다. 저를 봤으면 얼마나 봤다고.. 어쩐지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정아..!"


대만의 외침을 휙 고개를 돌려 저지했다. 아니, 그거 아니야.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을 동그랗게 말았다.


[형,]


수신호 마냥 아라 머리쪽을 가리키며 한 번 더 뻐끔.


[운다.]


소리도 없이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느낌에 태섭은 저절로 눈썹에서 힘이 빠졌다. 제 몸짓을 알아본 대만은 입을 벌린 채 잠시 머뭇 거리더니 에휴. 한숨만 한번 내쉬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한풀 꺾인 기색이 느껴졌다.

제 동생이 만약 이랬으면 쥐어박고 싶지 않았을까. 태섭은 저를 무슨 동아줄 처럼 쥐고 있는 밤톨만한 주먹이 안쓰러워서 투닥 투닥 두들겨 줄 뿐이었다.







"아라 얌전하고 순한 애인 줄 알았어요."


바깥은 해가 사라져서 다시 실내 파크로 돌아왔다. 잠투정이 왔던 건지 아이는 울다 지쳐 지금은 유모차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 사이에 저와 대만은 조금 이르지만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제 말이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던 건지 대만은 한쪽 볼을 볼록하게 만들었다가 푸 내뱉기만 했다.


"말도 너무 잘 듣고.. 이쁜 짓만 하잖아요."

"이쁜 짓?"

"애교가 많잖아요."

"이거 완전 넘어갔는데. 우리 애 못 준다?"


아 쫌! 어디 잡혀 갈 소리를 태연하게 해와서 기겁하는데 상대는 한입 먹고 말았던 햄버거를 다시 들어 베어 물기나 한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입모양을 보니 어지간히도 맛없나 보다. 다 녹아서 흐물흐물해진 양상추에 싸구려 고기는 케첩과 마요네즈만 뚝뚝 떨어져 내려서 느끼하기만 했다.

이런 건 만국 공통인가. 디즈니랜드 가서 먹었던 돈 아까운 음식들을 떠올리며 태섭은 벌써 밍밍해진 콜라만 한번 쭉 마셨다.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아라 맘에 안 들면 주먹으로 해결하는 앤데."


그럴리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반발하며 -왜 부모가 그렇다는데 내가- 고사리손에 잡혀있던 가슴께만 매만졌다.


"어린이집 처음에 보내놓고 한동안 맨날 사과하러 나랑 와이프랑 번갈아 갔었어. 

한번은 남자애 코를 깨 놔 가지고..."


그때 일이 제법 진저리가 났었는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모양이 귀여웠다. 그치만 안 맞고 다니면 된 거지. 태평한 낯으로 솔직한 감상을 들려줬다.


"나쁜 유전자에 대한 책임이 크시겠어요."

"뭐 인마?"


어쩔 거냐는 듯이 눈썹을 한쪽만 찍 들어 보여주자 상대는 위협하듯 노려보다 금세 포기하고는 큭큭 몸을 떨고 웃기 시작한다. 


"야 아까 산 거 좀 잠깐 줘볼래?"


눈물까지 닦아내던 대만은 제게 손을 내밀었다. 일회용 카메라를 들려주자 가지고 가서 태엽을 찍찍 돌리더니 이쪽을 향해 들어보인다.


"여기 봐라."


셔터 소리가 짧게 울렸다. 아라와 같이 나오도록 찍어준 것 같은 대만은 싱겁게 카메라를 다시 돌려줬다.


"으휴 못난이가 둘이나 있네."

"이 아저씨가 오늘 내일 하시나 헛것을 보시네."


으. 으응. 유모차 안에서 뒤척거리는 소리에 손잡이를 잡고 슬슬 끌어주는 남자는 부쩍 어른처럼 보였다. 지난 세월이 짧지는 않았지만 그래봐야 겨우 이십대 후반에, 고작 한 살 차이. 그럼에도 저보다 훌쩍 자란 분위기는 그가 고른 인생의 선택지가 저와는 궤를 달리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까 왜 장난감 안 사준 거예요."


저의 질문이 꽤나 의외로웠는지 대만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더니 음.. 대답 전에 턱 위를 살살 긁었다. 상처가 난 위치였다.


"옛날에.. 음.. 버릇 나빠진다고. 그거로 싸운 적이 한 번 있거든."


누구와의 싸움이었는지 단번에 알아 듣고 긴장했다. 이런 식으로 한 번씩 존재감을 느끼게 되는 상대는 어쩐지 저에게 유령처럼 와닿기도 했다. 실체는 없지만 존재는 하는 어떤 인영.


"와이프가 배운 사람이라. 학벌도 좋고 나보다 훨씬 똑똑하거든? 그 집안 장난 아니다? 아 너 기사 본 적 있나. 흠.. 아무튼.."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는 사내는 겸연쩍은 얼굴로 눈동자를 가만가만 굴렸다.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듯한 기척에 바로 후회가 들어찼다.


"나야 뭐 평생 공이나 튀기던 놈이고, 똑똑한 사람이 애 잘되라고 하는 말이 맞겠지 않냐."


옆자리의 텅 빈 의자에 앉아있는 것 마냥 눈길로 그려보는 움직임에 꾸욱 종이컵을 일그러트렸다.


"—누가 그렇게 말해요?"

"어?"

"누가.. 선배가 더 못났다고 그러기라도.. 했어요?"

"아니이. 뭔 소리야. 내가.. 음.."


설명을 잘 못하겠네.. 중얼거리는 소리는 숨결과 함께 사라졌다.

팔짱을 낀 채 한 쪽 손으로 미간을 쓸던 대만은 곧 피식 웃었다. 가늘어진 눈이 아래쪽을 향할 때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일견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또."

"네?"

"또 물어 봐봐. 네가 궁금해하니까 좋다 야."


이렇게 훅 들어오지 말았으면.. 한 쪽 턱을 괴고서 저를 올려다보는 상대에게 딱밤이라도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진짜 다 대답할 거예요?"

"그러기로 약속 했잖냐."

"...아라는 왜 보내는 거예요."

"그것도 뭐..."


대만은 흐름상 예상하고 있던 질문 중에 하나였는지 방금 전처럼 놀란 낯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입술을 죽 당겼다 쓸었다 하며 말을 아꼈다.


"그냥 보고 싶을 때 만나러 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캐나다가 무슨 별나라도 아니고, 심지어 대만은 미국으로 이민 신청 절차도 밟고 있었다. 그의 스펙이나 운동선수 커리어를 보면 탈락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저도 통과했는데.


"이혼 조건이래."


사고의 흐름이 끊겼다. 순식간에 시끄러운 주변 소음들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신 보지 말래."


대만은 침울한 낯으로 웃었다. 웃고 있는 게 맞을까. 태섭은 무심코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았다. 모든 이야기를 혹시라도 들었을까봐 덜컥 두려워졌다. 병원에서 보았던 것 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잠들어 있는 무구한 얼굴에 착잡함이 밀려왔다.


"어떻게, 그런.."


한참을 망설이다 나오는 소리라는 게 겨우 이런 거다. 감자 튀김을 하나 들어 앙 입에 넣는 대만은 손가락에 묻은 것을 쭉쭉 핥아 냈다.


"그러기로 했어. 위자료에 소송 비용까지 내가 감당하기 좀 힘들어서."


'다 가질 순 없어.' 그 말이 마치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웅크린 자세가 망막에 새겨졌다. 어릴 적에 보았던 패기는 온데간데 없어진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책임을 끌어 안기로 정했다. 



여자는 사랑하는 것 같았다. 



지독하게 



이 남자를. 




"그리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게 애 한테 안 좋다던대?"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속에서 열이 끓는 저와는 다르게 어느새 감자 튀김으로 케첩을 푹푹 찌르기만 하고 먹지는 않는 대만이 제법 심드렁하게 말했다. 

변명은 덧붙여도 결국 변명일 뿐이다. 순전히 아이는 이용당할 뿐이지 않은가.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다 얼어붙었다.

결혼 반지도 그렇고 아직 뉴스에 대서특필 되지 않은 걸 본다면 대만의 이혼은 아직 진행 중 일 거였다.

저와의 관계가 들통이 난다면 어떤 불이익이 상대의 목을 또 조여올지 모를 일이다. 


순식간에 스스로가 상간남이 된 것만 같았다.


그랬다. 심지어 자신은 남자다.

좋다고 몸을 섞어댔을 때는 어쩌고 이제 와서 부끄러웠다. 막을 수 없는 감정의 둑이 무너진다.


냉정하게 저를 응시하는 현실이 등 뒤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사방에 달린 스피커를 타고 꿈과 모험을 노래하는 테마송이 흘러나온다. 웃음소리로 가득한 공간에 저만 튀어나온 모난 돌처럼 느껴졌다. 


심호흡과 함께 주먹을 폈다 쥐었다.


화내지마.

동요하지마.



"..그래요?"


겨우 만들어낸 싱거운 한마디가 스스로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한잠 푹 자고 일어난 아라는 기분도 체력도 리셋 되었다. 저에게 허리를 접어 '잘못했어요 태서비 아저씨' 하는 모습에 대만이 귀여워 죽으려고 하는 걸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화해 하자고 악수를 나누고, 선물로 리본 머리띠와 등에 날개 장식이 달린 코스튬을 사주었다. 아라가 갖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던 인형이 입었던 옷과 비슷했다. 

그 뒤로 기분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한시도 걷지 않고 대만을 쭉쭉 당기며 뛰어다녔다. 날랜 몸짓을 따라 나비 날개가 파닥 파닥 움직인다.


"태섭아, 이제 게임 시작이다. 긴장해라."


그런 말을 제법 비장하게 내뱉는다. 아직 전력으로 뛰진 않았으니까 후반전 몸이나 풀어볼까... 시계탑을 올려다본 태섭은 대답 대신에 비눗방울 총을 대만과 아라 위로 쏘아주었다. 두 부녀는 강아지 새끼마냥 팔짝 팔짝 뛰었다.


1층 안 쪽에 키즈 어트랙션 구역이 있다는 지도 표시를 보고 찾아갔다. 멀리서부터 어린애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게 보였다.


"아라가 탈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어린이 범퍼카 있대. 나 그거 타려고 왔어."


어째 애 보다 더 신나 보이는 애아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범퍼카 대기줄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서 있는 다른 집 아빠들도 많이 보였다.

사람들 머리 위로 불쑥 솟아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오. 오늘 정대만 씨 컨디션 최고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뻔드르한 얼굴이 아주 잘생겼다.

괜히 뿌듯한 마음에 허리를 툭툭 두드려 줬다.


"왜? 목말라? 음료수 사줘?"

"됐네요."


그러나 변수는 대기줄이 다 끝나고 맨 앞 차례가 되었을 때 발생했다.


"못탄다고요?!"

"네에. 아버님.  신장 체크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 제가 꼭 안고 안전 운전 할게요.."


기다란 막대자를 들고 서 있는 안내 직원이 난처한 낯을 했지만, 솔직히 웃음을 참고 있는게 그대로 보였다.


"범퍼카에서 안전 운전을 한다고?"

"야. 넌 안 도와줄거면 가만히나 있어."

"아빠 차 없어?"


아라는 옆을 지나쳐 들어가는 아이들을 빤히 보면서 중얼거렸다.


"나도 아빠 차 타고 왔는데.."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이 손가락 끝을 당기며 올려다 본다. 음, 그냥 차 한 대 사주고 싶긴하다. 자기만 들어가지 못한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해 하면 어쩌나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놀이기구에 큰 미련이 없어보였다. 그저 내내 서서 기다렸던게 지루해졌는지 제 팔뚝을 철봉 삼아 놀기 시작했다. 덤벨 들 듯이 매달려 있는 아라를 올려주자 새 털 처럼 가벼운 웃음 소리가 난다.


"형, 그만 하고 가자."


아라는 딱 5cm가 모자라서 최저 신장을 통과 못했다. 이제 보니 키 재기를 할 수 있도록 눈금자가 그려진 동물 캐릭터 등신대가 입구 쪽에 놓여 있었다.


"나는 내가 데리고 타면 다 되는 줄 알았어.."

"저도 몰랐는데요 뭐."

"미안하다. 괜히 시간만 날렸네."

"재밌으니 오케."


뭐가 재밌냐는 듯이 내려다보는 상대에게 어깨만 한번 으쓱 했다. 알려 줄 수야 없지.

그러나 이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키즈 구역 어트랙션은 최소 네 다섯살 정도는 되어야 이용 가능했다. 입구컷의 연속에 시무룩해진 아버지의 뒷모습.. 어딘가 애수에 차 있다.


"아우 아직 많이 어리구나.. 탈 수 있는게 없네."

"그래도 아라가 큰 편인 것 같은데요?"


직원들은 아라가 옆에 가서 살랑거릴 때마다 키를 재 주며 몇살이냐고 물어왔다. 이제 세 살이 되었다고 알려주면 하나 같이 놀란 얼굴들을 했다.


"엉.. 선생님도 키 큰 편이라고 하시더라. 올 초부터 네 살 반이랑 같이 있어도 구분 안 된다 했어."


그래서 더 자신만만하게 놀이공원을 데리고 왔나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대만이 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떠냐. 좋은 유전자."

"뿌듯하시겠어요 아버님."

"못이겨 먹겠네..."


겨우 이정도 가지고 무슨. 대만에게 평생 한번도 이겼다는 기분을 느껴보지 못한 저만 샐쭉하게 웃을 뿐이었다.





직원들은 친절하게 -특히 여직원들이- 아라와 같이 탈 수 있거나 아라 혼자서도 탈 수 있는 어트랙션 위치들을 알려주었다.

가이드 맵에 빨간 색연필로 표시된 곳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슬슬 폐장 시간에 가까워져 갔다. 인파도 많이 줄어들어 대기 없이 몇 종류 타 볼 수 있었다.


  • 회전 컵 : 대만이 듣기만 해도 멀미가 난다며 패스.
  • 신밧드의 모험 : 제일 호기롭게 들어간 대만만 뭐 나올 때마다 고함지르다 나옴. 겁먹고 울면 어쩌나 했던 아라가 내내 웃어서 신기했음. (아빠가 웃겼나?) 용 대가리가 입 벌릴 때 저에게 찰싹 붙어 숨던게 귀여웠음.
  • 회전 목마 : 두 부녀 찍사 열심히 함. 돌아 올 때마다 팔도 흔들어줌. 일당 받아야할 것 같음. (사실 같이 타자고 대만이 졸랐는데 정색했더니 금방 포기하더라. 포모남 많이 죽었네.)
  • 열기구 : 서서 타야 하는 건 줄 모르고 탔음. 모노레일이랑 다른게 없어서 모두 지루해함. 아라가 다리 아프다고 한번 칭얼거림.


본격적으로 투어를 돌았더니 확실히 슬슬 피곤이 느껴지긴 했다. 아라 혼자 갈 수 있는 난쟁이 열차가 있어서 저와 대만은 근처 벤치에서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와. 아라 쟤는 잘 시간 한참 지났는데 쌩쌩하네."

"형 생각보다 겁이 많더라."

"야, 막 해골이 칼 들고 어 막 배도 갑자기 가라 앉을 것 같잖아."

"응? 처음 타봤어요?"


아라가 먹었던 것과 같은 맛의 구슬 아이스크림을 퍼 먹던 손이 뚝 멈추었다. 한입 달라고 입을 벌리자 크게 푹 떠서 넣어준다.


"어.. 사실 나 여기 처음 와봤어…"

"음?"

"놀랄 일이냐."


시원하게 녹아드는 것을 꿀꺽 삼켰다. 풍선껌 비슷한 맛이 혀에 감돌았다.


"그쵸. 저도 와봤는데."

"몰라, 어쩌다보니. 안 오게 되던데."


어딘가 떨떠름해진 상대를 어쩐지 품에 안고 마구마구 입을 맞춰주고 싶은 마음을 내리 눌렀다. 종류 불문하고 대만의 삶에 첫 추억을 기록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아처럼 느껴졌다. 끌어 안는 대신 벤치에 올려둔 손을 들어 대만의 손을 잡았다.


"재밌었어요?"


이제야 놀이공원에 들어서자 마자 대만이 저에게 질문 해왔던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어떤 배덕한 기분에 심장이 저릿해졌다. 악동 같이 미소 짓는 얼굴에 장소도 잊고 키스하고 싶었다.


"아빠아."


동시에 펄쩍 놀라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던져버렸다. 익숙한 상황에 대만은 신속하게 아라를, 저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어? 아라야. 누구야 이 친구는?"


대만의 물음표에 저도 얼굴에 물음표를 띄워놓고 바라보았다. 천사 옆에 웬 놈팽이가 하나 딸려 있다.


"친구 만났어요."

"친구?"

"얘도 세 살 됐어요."

"아~.."


안녕하세요오. 제 눈에만 그런 건지 저와 대만에게 인사 해오는 꼬맹이의 껄렁한 목소리가 영 거슬린다. 벌써 일어나 있는 대만과 다르게 저는 내키지 않는 기분 그대로 팔짱을 끼고 앉아 구경 중이었다. 저와 눈이 잠깐 마주친 남자애는 아라 뒤로 숨듯이 움직였다. 음, 배짱도 불합격.


"우리 아빠랑. 태섭이 아저씨야."

"아저씨? 형이잖아...요."


내 눈치를 보며 두런거리는 밤톨이들이 하는 소리에 심술보가 녹아내렸다. 진짜 아저씨는 내가 아니라 저기 있긴 하지..


"형아?"

"너는 여자니까 오빠지."

"태서비 오빠야?"


어어 아니 안돼. 아저씨야. 아무한테나 오빠라고 하면 안 된다고 교육을 시켜야겠다. 바쁜 속내와 다르게 말 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아이들 사이에 서 있던 대만이 저를 보며 소리없이 웃다 들키고는 손등으로 가린다. 뭐야.


"친구는 이름이 뭐야?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엄마 저기 있어요."


남자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에는 가족 단위 팀에게 어트랙션 마감을 안내하는 직원 외에는 없었다. 불안한 기운이 기습하는데,


「모험과 신비의 나라에 오신 손님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육성음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장내에서 남자 아이를 찾고 있습니다. 

파란색 상의, 검정 반바지와 운동화를 착용한 세 살...」


대만과 저는 각자 아이를 하나씩 들쳐 메고 내달렸다.







1층 미아보호소에서 남자애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과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대만과 함께 허리를 접고 폴더 사과부터 박았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혼자 있는 애한테 부모님 어디 계신지부터 물었어야 했는데.."

"아유, 찾았으니 됐죠."


다행히 부모 양쪽 모두 괜찮다며 손사레 쳤다. 심지어 여자분은 자기애에게 자초지종을 마저 듣더니 한숨만 쉬었다. 남자애가 무작정 아라 뒤만 졸졸 따라 왔다는 이야기였다.


"저희도 잠깐 쉰다고 한눈 팔다가 나오는 걸 못봤어요. 진짜 하루도 그냥 안 지나가네요."

"애들이 다 그렇죠. 어디로 튈지 몰라 애먹이고."

"그렇다니까요~"


여자분이 피곤한 낯으로 고충을 토로하자 대만은 꽤나 성실하게 맞장구치며 고개도 끄덕인다.

둘째로 보이는 애기가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매고 있는 배낭같이 생긴 아기띠에 안겨 잠들어있었다. 손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닦아내는 붉은 얼굴의 사내는 어쩐지 대만을 계속 흘긋 거렸다.


"재영아 이제 친구한테 안녕하고 집에 가야지."

"아라야 너는 어디 살아?"

"어머 얘 좀 봐."


엄마를 여러번 당황하게 만드는 재영이란 놈은 미련 섞인 목소리로 눈물 겨운 이별 씬을 찍고 있었다. 


"저.. 저 혹시."


그 와중에 아까부터 뭐 마려운 사람처럼 굴던 포대기씨는 부인 옆에 서 있던 대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고 여자고 대만에게 모여드는 갑작스런 반상회 분위기에 태섭은 좁혀져오는 미간을 의식적으로 펴냈다.


"정대만 선수?"

"어? 아, 네."


바로 단답하는 대만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아.. 들으라는 듯이 숨을 내쉬었지만, 그 누구도 태섭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와, 대박.. 저 경기 다 챙겨봐요."


저만 그러나 나도 그렇다. 한국 농구 보는 사람치고 정대만 뛰는 경기 안 보는 사람 있겠냐고 심지어 나는 위성 전파로 본다고.


"실물이 진짜 훨씬 잘생기셨다."


그건 나만 알아도 되는데.


"왜? 누군데 이래."


적절하게 끊어주시는 여성분께 속으로 엄지를 세웠다.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으셨던 마음을 숨기지 않고 남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왠지 미아보호소 직원들도 이쪽을 흘금 보다 말다 하는 것을 보면 슬슬 퇴근 시간임에 틀림없었다.


"아이, 왜 몰라! 전에 같이 아침 방송에서도 봤었잖아. 정.대.만. 선수! 불새 신화! 삼점슛의 귀재!"


남자는 콧김을 뿜어내며 슛 던지는 흉내를 냈다. 아주 품 안에 애기라도 없었으면 얼싸 안고 춤이라도 춰 보일 판이었다.

대만의 팬 보이로 돌변한 남의 집 애아빠 때문에 동태눈만 뜨고 있던 직원들도 연예인이라도 왔나보다 속닥 거리기 시작했다.


"와이씨 몸 진짜 좋으시다.."


급기야는 대만의 팔뚝을 찔러 보는 사내에게 반사적으로 주먹이 올라가려던 찰나 저보다 먼저 아내분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우!! 이 양반까지 주책이야 진짜!"








"네, 찍을게요. 하나 둘-"


저의 영혼없는 목소리에 이어 플래시가 터지고 지잉.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아보호소 밖에 모여 대만과의 기념 사진을 찍은 일가족에게 카메라를 돌려줬다.

남녀 한쌍의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메들리를 배웅하며 급속도로 피곤해진 얼굴을 주물거렸다.


"아. 정대만. 짜증나."

"왜 나한테 뭐라해."

"형한테 안 하면 누구한테 해."


사실 공연한 짜증이 맞는데도 상대는 뒷머리만 긁적이고 별 말 없었다. 돌발 상황이 마무리 되고나니 이미 퍼레이드 음악이 한창이었다. 알록달록한 회전 조명들 아래에서 대만은 졸음이 가득해 눈을 부비는 아라를 안아 올려 유모차에 태워주고 있었다. 


"아라 졸리면 집에 갈까?"

"으응. 공주님 볼래."


군악대를 필두로 커다란 마차와 인형탈을 쓴 배우들이 중앙 광장을 지나가며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사람들로 줄이 겹겹이 만들어져있어 장소 선점은 글러보였다.

그래도 저 정도면 저 혼자 뚫고 들어가 볼만 한데. 애는 잠깐 목마 태워주고...


"송 오빠."


삐그덕 거리며 돌아보자 유모차를 밀며 저를 따라오던 남자가 씩 웃었다. 일루미네이션 장식들로 사방이 반짝거린다. 


"바빠요? 전 시간 많은데."


영문은 모르겠지만 고장난 양철 로봇처럼 일단 대만 옆으로 삐걱삐걱 걸어가 섰다. 드라이아이스가 깔린 바닥이 푸르스름한 조명 빛을 받아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 했다. 

유모차 손잡이를 잡고 있는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둥둥 진동하는 가슴께의 울림이 앞에서 펼쳐지는 북소리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불안도 아쉬움도 이 사람만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마치 결혼식 선서를 닮은 생각에 태섭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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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에서 이어집니다.

오랜만에 이혼남 시리즈(?) 작업했는데 정말 재밌네요 (ㅠㅠ)

태섭이가 스며드는 부분 쓰는게 너무 즐거워요.


이번에도 사심가득 유사육아뇌절쇼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7월 14일 태대절을 기념해서 소소하게 계속 업데이트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073114* 소장본 한정 외전도 기간 한정 유료 공개 할 예정이니 관심 가져주심 기쁘겠습니다.


더운 여름 조심하세용! 하뚜하뚜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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