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사 X 헌터 / 연상연하 상호병찬입니다.
    • 상뱅 + 제조시설 냥쫑 빵준입니다. 안 나와도 그런 뉘앙스를 내포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 텀을 두고 쓰인 세 편을 묶어서 한 번에 올립니다. 이야기는 여전히 더 이어집니다.
  • 헌터물+능력자물을 잘 아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본 설정이 여기저기 섞여 있을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 드립니다...
  • 1에서 이어집니다.






3. 몰이해의 영역

병찬이 구해낸, 혹은 살려둔 사람은 병찬이 기억하는 상호의 모습보다 조금 어렸다. 제 손을 꽉 맞잡은 상호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이 날카로워졌다. 머리로는 끊임없이 이레귤러와 상호의 다른 점을 찾고 있으면서도 심장은 똑같은 부분을 보며 뛰었다. 일단은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게이트가 닫힌 수면은 고요하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깨어져 수면 아래로 녹아내리는 준수의 결계가 보였다. 병찬도 공기를 흐트러트리며 결계를 해제했다.


몇걸음 뒤에서 말없이 피어오르는 냉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준수겠지. 병찬은 힘을 주어 이레귤러를 끌어올렸다. 바람이 병찬의 의지를 따라 둥실, 그의 무게를 받쳤다.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이레귤러에게서는 게이트 안에서 나온 몬스터 특유의 적대감이 없었다.


"우, 우와?!"

"움직이지 마, 떨어지면 익사야."


머리 위로 끌어올린 팔을 살짝 놓는 것에 맞추어 다시 둥실, 허리께를 떠올린 바람을 이용해 어깨 위로 짊어진 병찬이 방긋 웃으며 준수 쪽으로 몸을 돌렸다. 불안한 얼굴을 한 준수가 칼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경계하고 있었다.


"형, 그거 인간 맞아요?"

"아마도?"

"저 인간인데요..."

"인간형 몬스터도 있잖아요."

"그럼 돌아가서 검사해보면 되겠네. 아님 가서 재유 데려올래?"

"재유 데려올게요."


확실히, 항구까지 데려갔는데 재유가 몬스터라고 판별하면 큰일이긴 했다. 재유를 보호하며 싸우겠다는 판단을 내린 준수가 성큼 바다 위를 미끄러지며 사라졌다. 병찬은 저를 받치고 선 공기막을 툭툭 발끝으로 쳤다. 재유를 데리고 오는데 5분, 재유가 살펴보기 위해서는 다시 10분. 딱히 공기 중에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병찬은 조급함을 내려놨다.

솔직히 병찬도 긴가민가했다. 제가 둘러매고 있는 것이 인간일지 아닐지. 게이트 안을 들여다봤을 때 느낀 감각은 S급으로 각성할 때 느꼈던 부름과 비슷했다. S급 게이트 속에서 쏟아지는 수없이 많은 부름과 그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는 끌어올려 지는 감각은 S급 헌터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각성의 순간이었다.

혹자들은 그것을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소망이 모여서 S급을 만들어낸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공적으로 S급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발상이 없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민간인과 함께 S급 게이트 안에 가두어진 A급 헌터는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 게이트를 해결하는 건 인생 최악의 경험이었다. 병찬은 그 뒤로 열흘은 식사를 굶었다. 초원이 그놈들을 다 죽여버리니 마니 하면서 짜증을 내는 동안 링거를 맞으며 누워있던 일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요, 햄..."

"응?"

"병찬 햄 맞죠?"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불러오는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웅웅거렸다.


"맞아. S급 헌터 박병찬."

"헌터가 뭐예요?"


사투리가 매우 옅어진 말투가 어색했다. 헌터를 모른다라, 게이트가 이세계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으니 확실히 게이트 안쪽에서 온 이레귤러는 헌터를 모를 수도 있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를 처리하는 이능력자."

"그럼 저는 몬스터에요?"

"아닌 거 같은데?"

"왜요?"

"몬스터는 인간을 싫어해. 특히 이능력자라면 더."


알 수 없는 일이지. 아니면 본능에 따라 자신을 죽이려는 존재를 눈치채고 있는지도 몰랐다. 멀리 재유를 안은 준수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익숙하게 준수에게 들려오는 재유가 손을 흔들었다. 움찔, 어깨 위의 이레귤러가 몸을 들썩였다. 아는 건가? 기상호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준수와 재유도 알 법했다.

병찬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무관심함을 가장했다. 일단은 제가 기상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바람에 아주 작은 소리를 실어 보낸 병찬이 준수를 봤다. -기상호를 아는 척 하지마.- 멀리서 고개를 까딱인 준수가 멈춰서 재유와 이야기를 나눴다.

다시 뒤척이는 움직임이 났다.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건가? 방금 그걸 알아차리려면 같은 기상 능력자인 최종수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 개싸가지. 병찬은 혀를 찼다. 설마 내용까지 알아차리진 않았겠지. 별말이 없는 걸 보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지도 몰랐다.


"햄, 저 왔어요."

"어, 재유. 수고가 많아."

"글마는... 그래 들고 계실 거에요?"

"내려놓을까?"

"으음... 아니요. 거서도 확인할 수는 있으니까."


재유가 손을 뻗으면 겨우 이레귤러가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멈춰선 채로 눈을 반짝였다. 상호는 재유가 감식안을 보일 때마다 혈계*선 같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눈이 반짝거리는 게 닮았다나 뭐라나. 병찬이 보기에는 꺼림칙할 뿐이었다. S급 헌터들끼리도 가끔 서로의 능력을 끔찍해하고는 했으니. 머리를 짚은 재유가 준수의 팔을 두드렸다.


"다됐다, 준수. 좀만 떨어져라."

"알겠어. 저거 인간 맞아?"

"어응... 인간이네. 해석하는데 좀 걸리긴 했는데, 아마 게이트에서 나와가꼬 마력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갑다."

"그럼 이제 항구로 돌아가도 돼?"

"넵. 가입시다. 그짝도, 자세한 얘기는 땅에 내려가꼬 하자."


이레귤러는 그동안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을 볼 수 없는 병찬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궁금했다. 준수와 재유가 자신을 아는 척하지 않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나? 아니면 아까 제가 바람에 날려보낸 속삭임을 엿들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나?

이럴 거면 앞으로 공주님 안기를 할 걸 그랬다 싶었다. 어깨로 짊어지는 게 편하기도 하고, 제 얼굴을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한 선택이었는데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걸 깜빡했다. 병찬은 어깨를 한번 추켜올려 자세를 가다듬었다. 또 움찔. 제가 뭔가 무섭게 하고 있기라도 한가?


"형이 좀 빠르거든, 놀래지 마?"

"알겠어요."


마음의 준비를 하는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병찬이 걸음을 옮겼다. 발끝을 쏘아내는 바람이 익숙했다. 저 속도는 언제봐도 적응이 안 된다며 중얼거리는 준수도 마찬가지로 뛰기 시작했다. 공기의 반탄력을 이용하는 병찬과 달리 빙판과의 마찰을 최소화해 미끄러져 달리는 준수가 금방 병찬을 따라잡았다.


금새 항구에 도착한 병찬이 몸을 숙여, 이레귤러를 내려줬다. 어지러운지 고개를 털던 그가 제대로 중심을 잡고 섰다. 땅 위에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레귤러는 병찬이 처음 소개받았던, 스물하나의 상호를 대칭처럼 닮아있었다. 상호를 조각조각 잘라내어 다시 조립한 것처럼 어색한 모습이었다.

모래바람에 오랫동안 스친 것처럼 이곳저곳이 닳아있는 푸른끼가 도는 검은 테크웨어를 입은 이레귤러는 허리춤에 낡은 단검 하나를 제외하면 별다른 무장이 없었다. 저를 살펴보는 상황이 낯선지 머리를 긁적이는 모양새가 더욱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게 했다.

곧이어 도착한 재유도 제대로 이레귤러를 본 모양이었다. 입을 가리고 놀라는 얼굴이 남 일 같지 않았다. 병찬은 빙글, 뒤돌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래 봤자 이레귤러는 병찬의 상호가 아니었으므로.


"아, 그... 자기소개부터 하까요?"

"아, 어. 이쪽부터 소개하께. 내는 진재유고, 지상 클랜 소속이디."

"성준수. 지상 클랜 소속 검사. 이 형은 박병찬이고 우리 클랜원은 아냐."

"아, 저는 기상호고... 따로 소속은 없는데..."

"게이트 안에서 나왔으니까 당연하겠지."

"실종자인지 먼저 확인해봐야 긋네."


병찬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재유에게 전부 떠넘기고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의도치 않게 길어진 체류에 병찬이 핸드폰을 꺼내 초원에게 연락을 보냈다.

[미안, 나 하루 이상 늦을 듯]






4. 쉽게 무너져

병찬은 자길 기상호라고 소개한 녀석 앞에서 제대로 표정 관리를 해냈는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닥 걱정할 것도 없었던 것이, 기상호는 주변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치 오랫만에 온 고향을 보는 것처럼 멍하니 고개를 들고 풍경을 보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병찬이 눈치채기도 전에 마음을 먼저 읽어낸 바람이 손을 뻗어 볼을 스치고 지나가 그 눈물은 금새 사라졌다. 병찬은 항상 상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잊혀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울고 있을까봐 불안했다. 보기보다 마음이 여리고 다정한 그 애가 어디선가 상처받고 있을까봐 여전히 밤잠을 설쳤다. 그건 지금 상호의 모습을 한 이레귤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서글퍼보이는 얼굴, 무슨 사연이 있을까. 저 애도 내 상호처럼 어쩌면 주변 사람들을 모두 잃고...


“형?”

“어, 준수야. 왜.”

“일단 지상으로 데려가서 보호하려고 하는데 괜찮냐고 말씀드렸어요.”

“아... 음, 알겠어.”

“구체적으로 따지면 형이 게이트에서 낚은 거니까, 형 소유긴 한데요.”

“준수, 말이 심하다.”

“뭐.”

“아무래도 햄이 델꼬 가시는거 보다는 저희측에서 이것저것 처리하는게 햄도 편하시지 않을까 해서요.”


아무래도 그렇지, 라고 말을 뱉은 병찬이 슬쩍 상호를 다시 바라봤다. 대화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하염없이 주변을 둘러보기에 바쁜 얼굴은 제 볼에 눈물이 흐르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렁그렁하게 차오르는 눈물이 덜어내질 때마다 바람이 아프지 않게 그 습기를 가져가고 있었다. 

상호의 신분은 적당히 실종자의 것을 빌려 처리할 요량인 듯 했다. 행정이 어느정도 수습되었다고는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아 적당히 틈을 찔러 들어가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재유는 그런 일에 적당한 보중인이었으므로 깔끔하게 끝날 터였다. 

그럼에도 병찬은 I시로 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는 얼굴이 신경쓰여서일까, 아니면 저 애가 기상호라서 그럴까.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너는 무슨 관계가 있냐고, 내가 잃어버린 기상호를 너는 아느냐고. 어쩌면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냥 불운하게도 여기에 떨어진 기상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몇 번이고 상호를 찾아헤맸던 제 앞에 하필 떨어진 게 저 기상호라면... 어쩌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병찬은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다 한숨 쉬었다. 이렇게 생각해봤자 의미 없었다. 직접 묻는 게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물어보는 건 기상호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다음에 해도 되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병찬이 바람으로 기상호의 등을 툭 밀었다.


“에?”

“네 책임을 맡을 지상 클랜이야. 자세한 건 데려가면 재유가 설명해줄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 알겠어요.”


마치 병찬과 지상 클랜의 둘이 같은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기상호가 한발짝 옮겨서 준수의 곁에 섰다. 준수보다 재유가 성격이 유하니까 그 쪽에 가까이 가서 설 줄 알았는데, 의외의 선택이었다. 준수도 의아한 지 기상호를 한번 돌아봤다.


“왜 내 쪽으로 와?”

“네?”

“재유 아니고 내 쪽으로 온 이유가 뭐냐고.”

“그라믄 안돼요...?”

“안되는 건 아니제. 준수, 병찬 햄. 슬슬 가지요. 이짝 분들도 와가꼬 일해야죠.”

“응. 나 하루 더 있다 갈 건데 클랜 숙소 좀 빌려도 돼?”

“햄 계실데야 항상 비아놓죠. 그 방 어차피 쓸 사람도 없어요. 아들 다 햄 방인줄 알고 있고.”

“가자.”


병찬과 재유가 앞장서자, 준수가 자연스럽게 남은 상호를 챙겼다. 재유가 말하는 방은 5년 전 사라진 상호가 쓰던 방에 대한 이야기였다. 뜬금없이 다은과 희찬의 방 사이에 있는 병찬의 방에 대해 다들 의아해하긴 했다. 누가 봐도 마도공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쓰는 것 같은 뒤죽박죽으로 섞인 설계도와 책들, 벽을 뒤덮은 마력공식과 설계도를 꽂은 코르크판들. 전부 병찬과는 백만년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손님방도 아니고, 다은과 희찬 사이에 있는 방이라니. 클랜원이 아니고서야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병찬이 드나드는 일이 적어서 그나마 말이 안나오는 편이지, 태성 같은 경우는 가끔 그 방을 가만히 노려보곤 했다. 재유와 준수가 묵인하고 있어서 내버려두는 거겠지. 병찬은 그 점이 고마웠다. 사람은 사라져도 기록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불행스럽게도 그랬다.

그래서 지상 클랜에는 누군지 모를 마도 공학자가 실종상태인 클랜원으로 등록되어있었고, 그 빈 방에 남은 설계도와 책, 공책 등에는 누가 적었는 지 알 수 없는 메모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눈물이 떨어지기도 전에 바람이 닦아버려 한치도 변하지 않은 것들은 여전히 그 방의 주인이 돌아올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준수와 재유가 타고 온 차는 언제나 그렇듯 마물에 대비하기 위해 개량된 4인승 SUV였다. 오래된 기종에 마물의 부산물을 덧대어 개조한 차의 운전자는 재유였다. 은근히 취향이 고루한 면이 있다니까. 뒷 좌석의 문을 연 병찬은 기상호를 찾았다. 준수의 뒤를 따라 걸어오는 기상호는 걸으면서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공기는 여전히 기상호의 곁을 맴돌며 걱정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넘어져 다칠까 걱정하는 것처럼, 그 말은 아마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뜻이겠지. 병찬은 한숨을 쉬었다. 떨어져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저 애가 지상 클랜에 들어가고 나면 당분간은 P시 근방에도 가지 말아야지. 따로 재유에게 부탁을 해둬야할 듯 싶었다.

병찬은 완전히 분리하고 싶었다. 기상호와 상호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어렵겠지만, 아마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서 같은 점을 찾고 있겠지만. 하다못해 흩날리는 머릿결 하나, 그림자 한 톨에서 그 애를 찾고 있겠지만. 오히려 이걸로 완전히 작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이 상호를 완전히 대체할 다른 기상호를 데려왔으니 병찬도 남겨두었던 이별을 할 차례였다. 기나긴 장송의 마지막이 시작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병찬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병찬은 기상호를 볼 때마다 스스로의 속을 긁어내리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더 잘해줄 걸, 더 사랑할 걸.

같이 있어줄 걸 그랬다. 이렇게 후회하지 않도록.






5. 벽을 세우고

가끔 보수가 되지 않아 갈라진 아스팔트로 인해 크게 덜컹이는 일을 제외하면 잘 닦인 구시대의 도로는 쾌적한 드라이브 환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난폭운전으로 유명했던 말이 무색하게 도로는 고요했다. 덜컹이는 차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병찬의 마음이 반영된 건지, 아님 재유가 속도를 냈는지 예상했던 시간보다 빠르게 P시에 진입했다. 

언제 어디서 마물이 나타날 지 몰랐던 던전 불안정기에 대부분의 차량이 버려지거나 파손된 탓에 일반 시민들의 활동범위는 극도로 축소되었다. 자연스럽게 좁은 범위를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자전거가 보편적인 이동수단이 되었다. 대부분의 시민이 적어도 F급 능력자의 이능을 가졌다는 것이 판명난 뒤로는 간단한 신체 강화 같은 건 이능축에도 들지 않았다. 자전거 회사의 상품 판매율이 올라간 건 덤이었다. 


지상 클랜은 P시를 좌우로 나누면 그 중앙 쯤에 위치했다. 상하로는 바다 쪽에 좀 더 가까웠고. 오래 전에 산을 타고 생겼다는 대도시의 건물 대부분은 경사에 위치했고 지상 클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범한 사무실처럼 생긴 건물은 1층의 반은 주차장, 나머지 반은 로비였다.

몇 대 놓여져 있는 차 옆에 주차를 한 재유가 기지개를 폈다. 병찬은 저도 모르게 기상호를 돌아봤다. 금방이라도 익숙하게 제게 자고 가면 안되냐고 조르는 상호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하지만 병찬에게 보인 것은 밖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는 기상호의 뒷통수였다.


"내리지?"

"아..."


준수의 까칠한 말에 금방 정신을 차린 기상호가 문을 열고 내렸다. 저런 모습을 보면 크게 이 곳과 다르지 않은 문명이 있는 곳에서 지낸 것 같기도 한데, 신기해 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꼭 오랫만에 만져보는 것처럼 유심히 문을 살펴본 뒤에 손잡이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마치 방금 각성한 신체 강화계 능력자 같았다.

똑똑, 병찬이 상호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팔려있자 재유가 창문을 두드렸다. 너무 티 내면 곤란하긴 하지. 병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저도 차에서 내렸다. 앞장 선 준수가 결국 상호의 팔을 다시 잡았다. 항구에서보다 이 곳을 더 신기하게 여기는 듯, 건물의 간판을 올려다보느라 정신 없는 모습이 우스웠다.

병찬은 두어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만 좀 둘러보라며 잔소리를 하는 준수의 모습이 익숙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추억이 레이어를 덧씌우듯 겹쳐졌다. '그만 좀 혼내세요, 제가 얼라도 아니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와야할 타이밍은 여전히 고요했다. 시무룩하게 쳐진 어깨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준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햄?"

"재유야, 나 못 들어가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


병찬의 말에 준수와 상호를 쳐다본 재유가 입을 막았다. 준수는 모르니까 그럴 수 있지. 기억이 있는 둘 만이 망부석처럼 차 옆에서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하염없이 바라봤다. 5년 동안 병찬이 미친 사람처럼 찾아 헤메던 광경이 거기 있었다. 같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더욱 겹쳐질 게 당연했다. 병찬은 상호가 처음 클랜에 들어갈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지상 클랜의 구석구석마다 상호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을 터였다.


"겁쟁이 같지?"

"그럴 수 있죠, 저도 지금은 좀... 놀랍긴 해요."

"무서워, 재유야. 저 애는 상호가 아니잖아."

"... 햄도 그렇게 생각하시네요."

"누구라도 알 걸. 그래서 겁나."

"지금 가실랍니까.

""응, 그래야겠다."

"준수한테는 적당히 둘러대놓을게요."

"종수가 불렀다고 해."

"퍽이나 믿겠네요."


맞춘 것처럼 동시에 깊은 숨이 내뱉어졌다. 둘이 오지 않아 의아한 얼굴로 준수가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멈춰선 준수 탓에 기상호도 함께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으로 몰아친 바람이 주변의 나무를 훑고 새파란 나뭇잎을 한껏 떨어트려 휘날리게 했다. 병찬과 기상호의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이 서로의 얼굴을 가렸다. 저 애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걸까, 아니면 저 애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은걸까. 병찬은 제 의지보다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헛웃음을 지었다. 바람이 가라앉기 전에 몸을 먼저 돌린 병찬이 재유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부탁할게."

"그럼요."


재유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낼 거였다.


"방은, 그 방 그냥 그대로 줘."

"뭐하러 그래요, 그냥 손님 방..."

"아냐. 안에 있는 것도 전부 보여줘."


그래야 그 애가 진짜 상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 병찬은 작게 말을 덧붙였다. 들어도 상관없고, 듣지 못했어도 상관없었다. 정말 중요한 건 어차피 병찬이 이미 옮겨둔 뒤였다. 예를 들자면 일기장 같은 것들.

병찬은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빠른 바람이 병찬의 뒤를 떠밀다 못해 넘어트릴 것 같이 불안했다. 어쩌면 넘어트려서 여기에 머무르게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병찬은 지금 제 능력을 제대로 컨트롤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기상호를 만난 뒤로 줄곧 제멋대로였다.


올 때처럼 바람에 몸을 내맡긴 병찬이 바로 S시로 직행했다. 많은 길드가 본부를 두고 있는 S시에서 가장 큰 길드의 메인 헌터, 최종수의 입간판이 병찬을 맞이했다. 저게 처음 걸렸을 땐 엄청 민망해했지. 놀려대느라 정신 없이 웃었던 게 엊그제 같았다. 계절마다 바뀌는 사진은 실은 종수의 선택이 아니라 참모인 이규와 찬양의 짝짜꿍이었다.

고층 빌딩의 창문을 똑똑, 두드린 병찬이 얌전히 외벽에 기대 제 무릎을 끌어 안았다. 여기도 조형과 마찬가지로 언제든 뛰어나갈 수 있도록 전체가 열리는 창이었다. 기상 능력자를 둔 길드의 건물은 대체로 그랬다.


"뭐야."

"안녕, 종수."

"안녕, 박병찬."

"어허. 형이야?"

"그런 얼굴로 말해봤자 그닥."


눈물이 번진 얼굴을 제 소매로 슥슥 문질러 닦은 병찬이 웃었다. 꼴사납긴 해. 창에 기대 턱을 괸 종수가 병찬을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난 병찬이 종수의 옆에 걸터 앉았다. 종수는 제가 생각이 많은 만큼 남들에게 굳이 캐묻지 않았다. 물론 대체로 질문을 받는 쪽이라서 대화 스킬이 능숙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뭐하러 왔는데, 너 P시 간 거 아니었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미친 놈처럼 뛰쳐 나가는 거 SNS에 다 올라왔거든."

"종수야, SNS는 인생의 낭비란다."

"지랄."

"찬양이한테 이른다."

"주찬양 니 번호 차단했거든."

"네가 차단시킨거지.

""니랑 걔랑 연락할 일이 뭐 있는데."

"오늘 같은 상황?"

"헛소리 하지마."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 받은 둘이 하늘을 바라봤다. 마물의 영향으로 화학연료 채취가 불가능해지며 하늘은 맑게 개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의 연구로는 오존층의 95%가 파괴되기 전으로 돌아갔다던가. 중국의 공장지대가 해양마물에게 대부분 파괴된 탓에 자급자족 시대가 돌아온 것도 아마 한몫 했을 터였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둘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감각이 공유되고 있었다. 같은 능력을 가진 이능력자라서 그런지, 둘 다 S급까지 도달한 탓인지 종수와 병찬은 말하기도 전에 서로를 감싸고 도는 바람에게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병찬은 종수를 만나러 오는 게 껄끄러웠다. 일부러 농담과 웃는 얼굴로 무장하고 있어도 불안하게 휘도는 바람이 종수에게 모든 걸 알려주고는 했으니까. 물론 종수도 마찬가지였다.


"형 오늘 하루만 재워주라."

"너 이러고 서 있는 거 다 찍혔을 텐데."

"여기 고층이고 니가 맨날 고소해서 파파라치 안 따라오거든."

"젠장."

"오늘 들어가면 일찍 왔다고 초원이가 캐물을 거 같단 말야. 말하기 싫어."

"주찬양이 허락하면."

"아싸, 빨리 물어봐."


종수가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구름에 뒤덮인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길었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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