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드 오브 히어로즈 요한 테일드x여로드

※ 모든 재앙을 해결한 후, 평화로운 어느 시간선의 이야기

※ 하드 8-16까지 읽고 쓰는 글입니다. 미미한 스포일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 동인설정 및 캐해석 주의

※ 하단의 음악에서 제목을 따왔습니다. 매 회차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쓰고 있어요. 재생은 독자님들의 취향에 맡깁니다.

+) 지난 회차 조회수와 마음 갯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요한을 부른 그날, 로드는 불면 진단을 받은 후 처음으로 푹 잘 수 있었다. 그녀는 루인이 깨우러 오기 전 눈을 떴고 요한은 이미 가고 없었다. 정말로 재워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가. 숙면을 취한 건 다행이었지만 다른 방법은 없나 싶어 고민도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불면증이 해결된 건지도 모르니, 오늘밤에는 평소처럼 혼자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간밤 제 침실에 머물렀던 남자를 떠올렸다. 피로로 판단력이 흐려진 것도 있었겠지만, 분명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한 것도 같았다. 군신의 도리든 뭐든 다 떠나서 침실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 맞으니까. 자신의 말대로 잠든 뒤 흔적도 없이 가버린 요한은 참으로 훌륭한 기사다. 문득 그녀의 손끝이 그가 누웠던 자리를 더듬어 쓸었다. 이불이 찼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게 당연한 것인데 왜 그리운 이라도 보내버린 양……

로드는 캐노피를 걷고 일어났다.

 

[요한로드] Take Me to Church (2)

 

오랜만에 기사단과 점심을 같이 했다. 잘 잔 덕분에 컨디션이 좋아 입맛이 돌았다. 마음 같아서는 루미에의 이야기를 모두 받아줄 수 있을 만큼. 그렇지만 오늘은 후식보다는 산책이 끌려 쿠키 하나만 맛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고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요한을 보자니 그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와 어떤 이야기든 해야 할 것 같았다.

 “괜찮으면 잠깐 걷지, 요한.”

 “예, 로드.”

제 부름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항상 무조건반사 같다. 그렇다고 진심이 아닌 건 아니라, 로드는 이 단정한 기사가 제게 고개를 숙여주는 것이 좋았다. 이를 당연하게 여기면 안되겠지만, 종종 터무니없는 부탁조차 성심껏 들어드리리라 약속하는 요한의 목소리와 눈빛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어제도 그런 부탁을 해버린 것이겠지. 하지만 선은 지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다정한 기사는 별이라도 따서 바치려 들 테고, 그것이 기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로드는 언제나 사랑하는 기사들이 그들의 주군보다 그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기를 바랐다. 존재의 서열이란 마땅히 그래야 했다.

아발론 왕성 내라도 건물 안이 아니고서는 항상 호위 겸 기사 한 명이 로드 곁에 따라붙었다. 긴 재앙을 겪고 난 뒤 생겨난 암묵적인 규율이었다. 그렇게 요한과 로드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프람이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외쳤지만, 샬롯이 쿠키를 양보하는 바람에 도로 자리에 앉고 말았다. 정원에 차려진 오찬 테이블에는 여전히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두 사람, 로드와 요한만이 그곳을 벗어났다.

왕성의 정원은 로드 몇 대 위의 군주가 조경을 한 번 갈아엎은 탓에 고대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진 넓은 정원에는 높은 관목으로 둘러싸인 미로도, 사계절을 옮겨놓은 유리온실도, 예전에는 새들이 노닐었던 인공호수도 있었다. 그중에서 로드가 주로 거니는 곳은 분수가 여럿 설치된 인공호숫가였다. 관리도 어렵고 상당히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어서 메꿔버릴까 고민도 했지만, 선왕은 물론 좋아하는 이들이 많아서 이전처럼 낮마다 새를 풀어놓는 것만 그만둔 곳이었다. 이 정원을 만든 군주는 고대 어느 나라의 문화라며 낮에는 오리는 물론이고 공작새 같은 관상조를 풀어놓고는 했는데, 로드는 이것이 동물학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새들을 모두 풀어주고 분수 가동 횟수도 줄여 버렸다. 그렇게 분수가 멈춰 조용한 호숫가를 로드와 요한이 걷고 있었다.

 “병사들의 훈련 상태는 양호합니다. 그런데 전년보다 겨울이 추워 갑옷에 덧댈 천을 좀 더 두꺼운 양질의 상품으로 구매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구입처를 몇 개 알아뒀는데, 루인 경이 알려드릴 겁니다.”

 “그렇군. 늘 세심하게 신경 써줘서 고마워. 확실히 날이 조금 추워졌지.”

요한이 습관처럼 병사들의 훈련 상태에 대해 보고했다. 그는 훈련을 분담할 지휘관급 기사가 제법 영입된 뒤에도 변함없이 아침훈련 교관을 자처했다. 아마 오늘도 아침훈련을 다녀왔겠지. 로드가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로드께서도 더 두꺼운 망토를 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난 생각보다 추위를 안 타는 편이라. 그리고 경의 옷도 그다지 따뜻해 보이지는 않는데.”

 “저도 추위에는 익숙한 편입니다. 아무래도 옷이 가벼운 게 전투에도 편하고요.”

마치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말투였다. 불면증이란 말에 그런 표정을 지었으니 어젯밤은 괜찮으셨나 걱정할 법도 한데, 자신을 배려하는 것인지. 요한은 별일 없이 저를 대할 때는 늘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딘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였다. 무슨 말이든, 어떤 부탁이든 해도 될 것 같은. 그렇기에 로드는 주저 없이 그에게 어제의 일에 대한 감사와 사과를 전하기로 했다. 이미 수십 번 거닐었던 호숫가를 또 한 바퀴 돌기 시작하며.

 “어젯밤엔 간만에 푹 잘 수 있었어. 경이 도와준 덕이 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가고 없던데, 혹시 밤새 곁에 있었던 건가?”

 “아닙니다. 로드께서 잠드신 걸 확인하고 바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밤새 그러고 있었다면 너무 미안하니까.”

로드의 반걸음 뒤에서 걷고 있던 요한이 멈칫했다. 우연인지 그 순간 로드도 뒤돌아서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볼을 살짝 긁적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친구로서라고 해도 경에게 조금 과한 부탁을 한 건 아닌가 싶었어. 피곤해서 판단력이 흐려진 걸 핑계 삼았던 것 같기도 해.”

 “…….”

 “군신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했지만 결국 그 관계를 빌미로 거절하지 못할 부탁을 한 셈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미안해, 요한.”

눈꼬리를 낮추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듯한 그 표정이 요한의 마음 한 곳을 쿡 찔렀다. 이렇게 다시금 거리를 확인할 때마다, 분명 그 거리가 ‘옳은’ 것인데도 마음이 조여들었다. …어찌 이리도 다정하셔서. 지난밤 명에 따라 로드를 끌어안았던 제 심중에 사심 같은 건 없었노라 말할 수 없는데도, 제 사려 깊은 주군은 그런 기사의 충성심이 한없이 정결할 것이라 믿어주고 있었다.

 ‘로드께서 말씀하셨기에 그렇게 했던 겁니다. 로드라서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전하지 못할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마주 선 로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성실한 기사는 예의 온건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로드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반은 진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그 말을 들은 로드가 요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에 새겨지도록 들은 말을 부드럽게 되풀이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경 자신보다 나를 우선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건 어쩌면 로드가 요한에게 원하는 것 중에 유일하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 스스로의 존재보다 소중한 건 없다는 말을 많은 책이, 여러 사람이, 무엇보다 자신의 로드가 수십 번 되풀이 했지만 요한에게는 그 자명한 진리를 따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어려웠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존재는 그녀와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녀의 존재를 기반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로드를 빼면 제 삶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새가 어미를 따르는 그 불가항력의 끌림에 또 다른 감정이 얹어졌을 때, 요한은 그녀를 제 존재보다 우선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기사가 된 이후부터는 그녀 앞에 한 치의 거짓도 없으리라 맹세했는데, 그녀의 기사가 아닌 한 남자로서의 요한 테일드가 생겨난 이후부터는 로드에게 건네는 말들이 얼마나 사소한 거짓들로 점철되어 있었을까. 자신보다 그녀를 우선시할 필요는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지금과 같은 순간들이.

 “어쨌든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오늘 밤에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군.”

 “오늘은 평소처럼 주무시는 겁니까?”

 “그렇지. 경 덕분에 불면의 연쇄를 끊었으니 이제 괜찮지 않을까 싶어.”

요한은 혹시 로드께서 다른 이를 들이시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 스스로를 꾸짖었다. 당치도 않은 염려였다. 다른 이를 들이신다고 해도 제게 무슨 권리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이제 돌아갈까? 참, 내일 미하일과 파견을 간다고 했나?”

 “예, 엘펜하임으로 갑니다. 일주일 뒤에 뵙겠군요.”

 “아발론보다 더 춥겠군.”

로드가 턱을 매만졌다.

 “아무리 봐도 그 차림으로는 안 되겠어. 루인에게 일러둘 테니 망토라도 하나 받아 가도록 해.”

 “괜찮습니다, 로드. 그렇게 신경 써주실 필요까지는… 미하일 경과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나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 남자에게 이 정도를 못 해줄까?”

 “…예?”

 “또 농담을 잘못 했나보군.”

 “…….”

 “망토는 가져가도록 하고, 이만 돌아가지.”

원래는 그녀의 농담에 곧잘 웃어주는 요한이었는데, 요 며칠간은 농담이 너무 별로였던 모양이다. 티테이블로 돌아가는 로드의 얼굴이 산뜻했다. 그녀를 뒤따르는 요한의 귓가는 빨갰다.

*

 


요한은 결국 망토를 가져갔다. 컨디션이 좋아 늦게까지 서류를 검토하려던 로드에게 이만 주무시라 간언하던 루인이 덧붙여 일러준 사실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낡은 외투만 입으실 거냐는 시녀장의 성화로 올해 새로 맞춘 망토였다. 화려함을 원하지 않는 로드의 말에 따라 검은 벨벳 천에, 목 부분에 아발론을 상징하는 용문양만 금박으로 조그맣게 수 놓인 망토였다. 제 키에 맞춰진 것이라 요한에게는 조금 짧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따뜻하긴 할 거다. 미하일에게도 하나 줄까, 생각했지만 이미 가진 것으로 충분하다며 번번이 거절했으니….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밤에도, 평안하셨으면 좋겠군요.”

 “그래. 수고했어, 루인.”

로드는 루인이 오늘 밤, 에 강세를 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영민한 행정관은 항상 제 군주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방자하게 구는 것보다는 이렇게 여지만 남기는 것이 성미에 맞았다. 물론 그의 주군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더 많았지만.

루인이 나가는 것을 본 로드가 침실로 향했다. 눈꺼풀도 무겁고 머리도 징징 울리는 게 씻고 바로 쓰러져 잠들면 될 느낌이었다. 군주가 잠들기 전까지 불을 밝혀둔 왕성의 복도는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이 없어 조용했다. 종종 잠귀가 밝은 미하일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아마 내일 파견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이른 시간에 떠난다고 했으니 인사도 못하고 가겠군. 미하일이야 워낙 파견이 잦고 인사 같은 것에도 무덤덤해서 귀환할 때 포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지만, 먼 길을 떠날 때는 종종 배웅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오늘 도 푹 자야 할 텐데.

 “……?”

집무실에서 자신의 방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하지만 로드는 어느샌가 전혀 다른 이의 방 앞에 도착한 자신을 깨달았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길을 잃는 건 아직 버리지 못한 나쁜 습관이었다. 한숨을 쉬며 되돌아가려던 찰나, 로드는 자신이 멈춘 곳이 요한의 방문 앞임을 알고는 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간만에 컨디션이 좋다고 무리를 한 모양이지. 아니면 집무실을 나서며 요한을 생각해서, 혹은 그와 함께 파견을 떠날 미하일을 생각해서 무의식적으로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까지 온 김에 요한에게 들러볼까 싶었다. 파견 때문에 일주일간 보지 못할 테고, 내일 새벽녘에 떠날 테니 그전에 인사라도 해두면 좋지 않을까 해서. 요한 테일드는 로드의 최측근 기사 중 하나로서 전 대륙이 재앙을 이겨낸 이후로도 항상 로드의 곁을 지켰고 파견도 짧게만 다녀왔기에, 이번처럼 오래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내일의 엘펜하임 파견은 켈타인 산맥이 아닌 사이런딜의 제1마탑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로드의 대리인으로서 요한을 미하일과 함께 보내는 것이었다.

로드는 발소리를 죽인 채 요한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면 요한의 방에 직접 찾아가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요한은 기사 서임을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 쭉 똑같은 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로드가 직접 골라준 방이자 몇 번 이사를 제안했음에도 거기 살길 고집했던 방이었다. 여기 와 본지도 오래되었군. 그녀는 열쇠 구멍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고 문을 두드렸다.

 “요한.”

 “……로드?”

곧바로 방문이 열렸다. 전투복장에서 건틀렛과 아머만 뺀 차림새에 조금 놀란 표정의 요한이 로드를 맞이했다. 잘 준비라고는 전혀 하지 않은 모습이 의아했다. 그녀는 무언가 하고 있었는지 촛불을 여러 개 밝힌 방 안을 쓱 흝었다.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놀란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파견을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해두고 싶어서 말이야.”

 “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드.”

 “그럼 잠깐 들어가도 될까?”

 “예?”

어제 몇 번 보았던 표정이었다. 하지만 요한이 전혀 비켜설 생각을 하지 않자, 로드는 조금 민망해졌다.

 “들어가면… 안 되는 건가?”

 “예? 아, 아니, 그럴 리가요. 들어오십시오.”

왠지 얼굴을 붉히며 비켜서는 요한을 보며 로드가 웃었다. 정갈하게 꾸며진 요한의 방에는 창가에 화분 몇 개가 놓여있고, 책상에는 책갈피가 잔뜩 꽂힌 책 몇 권, 금칠이 벗겨져 반들반들해진 서진에 눌린 흰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펜, 그리고 언젠가 선물한 기사단의 초상화가 작은 액자 안에 들어있었다. 협탁에는 찻주전자와 찻잔 하나가 놓여있고 그 외에는 특징적인 게 없었다. 옷장 문은 꼭 닫혀있고 잡동사니라고는 하나도 나와 있는 게 없어서, 그게 평소 군더더기 없이 말하는 요한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 같아 또 웃음이 나왔다. 

한편 요한은 갑자기 제 방을 찾아온 로드에게 무엇을 권해야 할지 몰라 마음속으로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방에 손님을 들이는 편이 아니라 테이블이라고는 책상이랑 협탁이 전부고 의자도 책상에 딸린 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면 로드를 저 의자에 앉히고 자기는 침대에, 아니 말도 안 되지, 그렇다고 로드를 침대에 앉히는 건 더 이상하고… 그러는 사이 로드가 먼저 의자를 끌어다 앉아버렸다.

 “경의 방은 정말 오랜만이군.”

 “그…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곧 갈 거니까 괜찮아. 그보다 경도 앉는 게 어때? 아, 의자가 이것뿐이구나.” 

의자를 하나 더 들여야겠다. 요한이 생각했다. 

 “온 김에 구경 좀 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모두 로드께서 주신 것이니까요.”

 “이 제라늄 화분은 내가 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방 말입니다. 제가 기사 서임을 받은 후 직접 골라주셨지요.”

 “그래, 생각나. 벌써 몇 년이나 지났군.”

로드가 창가로 다가갔다. 예쁘게 핀 제라늄 화분은 꽃줄기 부분이 얇고 흰 천으로 감싸져 있었다. 겨울의 한기를 버티게 하기 위함인 것 같은데, 방주인의 세심함이 엿보였다. 나머지 화분 하나는 꽃봉오리만 맺혀 있는데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었다. 창가에서 책상으로 시선을 옮긴 로드는 그 위의 책 한 권을 펼쳐보았다.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가 너덜너덜했다. 거북이 모양 서진은 등딱지 부분의 금칠이 벗겨져 있었다. 하나 선물해야겠군. 책상 외에는 더 볼 게 없어 로드는 방을 한번 쭉 둘러보기만 했다.

 “언제 한 번 물어봤던 것 같은데, 방이 좁지는 않나? 그때는 경이 키가 이렇게 크지 않았었지.”

 “저는 괜찮습니다.”

 “원한다면 더 넓은 방으로 옮겨줄 수도 있어.”

 “아닙니다. 로드를 맞이할 정도는 되니 충분합니다.” 

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요한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가 당황한 듯 말을 이었다. 

 “아, 그게… 저는 로드께서 직접 골라주신 이 방이 정말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작위와 더불어 제게 처음으로 주신 것이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영원히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영원히? 마음은 기쁘지만 그 정도로 좋은 방은 아닌데…”

 “큼,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옮겨줘야겠지. 문득 요한의 침대 위에 익숙한 것이 보였다. 내일 파견에 입으라고 빌려준 망토였다. 로드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흐트러진 걸 보니 막 내려놓기라도 한 모양인데… 그녀가 그것을 들고 요한 앞에 섰다.

 “안 그래도 망토를 입은 모습이 궁금했는데 마침 잘 됐군. 한 번 걸쳐보겠어, 요한?”

 “예?”

 “내 키에 맞춘 거라 조금 짧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경이 걸친 모습도 한번 보고 싶더군.”

 “아, 알겠습니다.”

요한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그러나 그는 로드가 건넨 망토를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어깨에 걸쳤다. 옷 태를 잡고 목 부분에 끈을 묶어서 브로치로 고정하면 됐는데, 그 순간 로드가 한 걸음 다가와 목 부분의 끈을 잡았다. 요한은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 바짝 긴장했다. 끈을 묶는 로드의 손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움찔거리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끈을 몇 번 묶었다 풀었다 하던 로드는 리본으로 매듭을 짓고 브로치는 떼어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제야 물러선 그녀가 망토를 입은 제 기사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조금 짧긴 하지만 괜찮군. 경이 입어서 그런 거겠지.”

 “제게는 과분한 옷입니다만… 로드께서 보시기에 흡족하다니 다행입니다.”

 “수선해서 경에게 줄까?”

 “아닙니다! 이렇게 빌려주신 것으로도 이미 넘치게 기쁜걸요.”

할로윈에 짧은 망토를 걸쳤던 것과는 달랐다. 어깨선을 따라 무릎까지 떨어지는 벨벳 망토를 입은 금발의 기사는, 그 검은 천 안에 왕가의 문양을 숨긴 왕자님처럼 보이기도 했다. 로드가 슬쩍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냥 이대로 요한에게 줘도 될 것 같다. 파견을 잘 마치고 돌아오면 상으로 줘야겠군.

 “무겁지는 않나?”

 “괜찮습니다. 무게감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무척 따뜻합니다……” 

요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망토가 따뜻해서인지, 다른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다행이야. 이제 난 가봐야겠군.”

 “예, 로드.”

 “잘 다녀오도록, 요한. 감기라도 걸렸다간 망토를 준 보람이 없어지니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해.”

 “로드의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요한이 문을 열어주었다. 방을 나서려던 로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잘 자, 요한.”

 “로드께서도… 푹 주무십시오.” 

요한은 그녀가 복도 끝을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야 그는 여태 걸치고 있던 망토 자락을 가볍게 잡았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쥐는 것처럼.








 



 

다음날 새벽, 요한 테일드는 미하일 블레이크와 함께 엘펜하임으로 떠났다.

장래희망: 로드의 만년필, 요한의 안경닦이, 크롬의 장갑, 아이메리크의 고양이, 정대만의 왼쪽 무릎... etc. (계속 늘어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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